나랑 심서방은 사상적으로 거의 정반대에 가깝다. 정치성향 테스트 이런것을 해보면 꼭 극과 극의 결과가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투었던 일이 거의 손에 꼽게 적고, 잘 사귀다가 '이 사람이랑 결혼하면 너무 재밌겠다' 해서 결혼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느끼게 된 가장 큰 이유가 '말이 잘 통하고 대화하면 즐거워서'라고 생각한다.
사상적으로는 정반대지만 서로의 의견을 얘기하고 나누는 데 있어 내가 반드시 꼭 이겨야겠다는 생각이 없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오히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상대방의 견해에 대해 몰랐던 것을 배우거나 새로 생각하게 되는 일이 많았다.
사상이 달라도 성향이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지금도 서로의 대척점에 서 있지만 재미있게 잘 지내는 중이다.
<듣는 법, 말하는 법>은 1983년에 처음 나왔지만(원서 기준) 2020년대를 살아가는 모두가 읽었으면 하는 책이다.
'대분열시대'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모두가 악에 받쳐 싸우고 있는 현 시대를 관통하는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가
'서로 말이 안 통한다'는 건데, 애초에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기 힘든 환경인 인터넷이야 그렇다쳐도 현실 속에서까지 사람들끼리
점점 대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서로 할 말만 하며 싸우기 바쁜 시대라 너무나 앞이 캄캄하기만 하다.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어떻게 해야 제대로 된 '대화'인지 모두가 생각해 봐야 할 때다.
유행처럼 경청! 토론! 하지만 정작 무엇이 경청인지, 무엇이 올바른 토론인지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그래서 다들 무조건 자기 생각을 상대방에게 욱여넣고 '이기기' 위해서만 말하는 것 같다.
'그것 봐! 내 말이 맞지? 내가 맞았고 너는 틀렸지?'라는 사람들만 가득하니
바야흐로 듣는 법, 말하는 법에 대해 모두가 생각해 봐야 할 때다.
이렇듯 언어의 네 가지 용법은 두 개의 서로 대응하는 쌍으로 묶인다. 쓰기와 읽기가 한데 묶이고, 말하기와 듣기가 한데 묶인다. 각 쌍을 구성하는 두 활동은 분명히 상호 보완적이다. 글은 읽히지 않으면 쓸모가 없으며, 말을 해도 듣는 이가 없다면 허공에 대고 소리치는 셈이다.
(...) 서로 다른 이 네 가지 활동이 한 사람의 정신이 다른 사람의 정신에 다가가서 접촉하는 과정에 쓰이며, 두 정신의 만남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지려면 각각의 활동을 솜씨 좋게 해내는 기술이 필요하다. 그런데 여러분은 학교에서 몇 가지 기술을 배웠는가?
(...) 말하기 지도는 어떠한가? 초등학교에서 쓰기와 읽기 교육을 받은 시기에 말하기 역시 배웠다고 기억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싶다. 소위 '웅변'을 가르치는 특별 수업과 일부 고등학교 및 대학교에서 언어장애가 있는 학생을 돕고자 여는 수업을 제외하면 일반적인 말하기에 대한 지도는 학습 과정 어디에도 없다.
듣기 지도는 또 어떠한가? 어디서 듣는 법을 배운 사람이 있는가? 놀랍게도 보통 사람들은 듣는 능력이 아무런 교육도 요하지 않는 천부적 재능이라고 가정한다. 교육 과정 전체를 통틀어 보아도 학생이 더 잘 듣도록, 적어도 의사소통의 회로를 완성하고 말이라는 의사소통 수단이 효과를 발휘할 만큼 잘 듣도록 가르치는 노력을 찾을 수 없다는 점이 어찌나 이상한지 모른다.
이 현상이 더욱 놀랍고 기이한 것은 일반적으로 가르치지 않는 말하기와 듣기의 기술이 그에 대응하는 쌍인 쓰기와 읽기의 기술에 비해 습득하기도 가르치기도 훨씬 어렵기 때문이다. (...)
- 프롤로그 '가르치지 않은 기술들', pp 15~18
세계의 반공산주의/반사회주의 포스터.
프로파간다의 기본은 상대를 '우리와는 다른 무언가'로 표현하는 것.
역사와 정치를 보면 수많은 예시에서 상대 진영을 '괴물'로 묘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괴물이란 즉 우리와 대화가 성립하지 않는 존재이며, 말로 어떻게 설득할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존재다.
멀리 갈 것 없이 바로 우리 부모 세대(50년대~60년대생)만 해도 북한 사람들이 정말로 '사람'이 아니라
털이 부숭부숭 난 시뻘건 피부의 돼지 또는 악마 같은 괴물이라고 배워서 정말로 그런 줄만 알았다는 분이 많다.
지금도 인터넷에서 자기와 결이 맞지 않는 집단에게 온갖 '~충' ('충실할 충'을 쓰던 어원과는 달리 한국 인터넷에서는 '벌레 충'으로 굳어짐),
기타 인간 외의 동물 또는 벌레 등에 빗댄 멸칭을 붙이며 타자화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정말로 현실 속에서 만나면 그렇게 극악무도하고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일까?
대부분의 경우 그렇지 않다. 간혹 가다 정말 이상한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 그냥 사람들이다.
뭐든지 호칭을 붙여 타자화하는 순간 대화의 시작 자체가 차단되어 버리는 것이다.
저자 또한 역사 속에서 이러한 경향이 수없이 반복되었으며 그 동안 많은 지식인들이 이를 경고했음을 인용한다.
인간의 역사란 대화 아니면 폭력이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나이에 상관없이 평생 끊임없이 배우고 대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서로 대화를 나누는 것은 사람이 하는 모든 일 가운데 가장 인간다운 행위'이며,
'장기적 관점에서 대화는 궁극적으로 인간과 동물, 인간과 기계를 근본적으로 구분해 주는 유일한 인간 활동일지도 모른'다면서. ('소통은 모든 사회적 동물 사이에서 일어나'지만, 저자는 이를 인간이 언어를 통해 나누는 '대화' 활동과 구분지어야 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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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가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데 국가 간 이익이 심각하게 충돌한다면, 자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싸움밖에 남지 않는다. 기원후 1세기에 키케로가 이 사실을 아주 잘 표현했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논란이 되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토론이요, 다른 하나는 무력이다. 전자는 인간의 것이되 후자는 짐승의 것이니, 전자가 실패할 때에만 후자에 의지해야 한다.
수 세기 뒤, 이탈리아인 마키아벨리와 영국인 존 로크가 같은 근본적 통찰을 조금 다르게 표현했다.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적었다.
(...) 싸움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법을 이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힘을 이용하는 것이다. 첫 번째 방법은 인간의 것이고 두 번째 방법은 짐승의 것이다. 그러나 종종 첫 번째 방법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니 두 번째 방법에 의존해야 한다.
같은 논점에 대해 로크는 이렇게 적었다.
사람 사이의 다툼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법에 의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무력에 의한 것이다. 둘 중 하나가 끝나면 반드시 다른 하나가 시작되는 법이다.
마키아벨리와 로크의 표현을 보건대, 법에 의한 싸움이나 법으로 다툼을 해결하는 것은 무력이 아닌 토론으로 논란을 해결하는 키케로의 첫 번째 방법과 같을 것이다. 어떠한 이익 충돌이나 갈등을 법적으로 해결하려면 언제나 토론이 필요하다. (...) 평화는 어떠한 논란이나 갈등이라도 토론과 법, 그리고 법의 집행으로 해결할 수 있는 장치가 존재하는 모든 곳에 있다. 민간 정부는 논쟁을 해결하는 방법인 대화나 토론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장치를 제공한다. 바람직하게 작동하는 정부 조직이라면, 개인이나 국가가 무력의 사용에, 그러니까 문명사회에서 인간이 쓰는 방법이 아닌 정글에서 짐승이 쓰는 방법에 의존해야 할 지경까지 대화가 쇠퇴하도록 놔두지 않는다.
- 에필로그 '인간의 삶에서 대화의 역할', pp 295~297
나는 개인적으로는 인류 문명이(인간 멸종 x, 문명사회로서의 인류) 앞으로 길어야 5~60년 안에 망할 거라고 생각하는
나름대로 확고한 멸망론자이지만... 그래도 인간이 문명사회 속에서 존엄성을 유지하려면 끝까지 대화해야 한다.
저 사람이 정말 싫더라도 조금이라도 이해해 보려는 노력, 대화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자가 인용한 말마따나 대화가 끊기는 순간 우리에게 남는 선택지는 폭력밖에 없어지기 때문이다.
언젠가 인류 문명은 다같이 멸망하겠지만... 그래도 그 순간이 오기 전까지 우리는 최소한의 존엄성을 지키려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말하기와 듣기, 대화의 기술.
딱히 '교양인을 위한'이 아니더라도 누구에게나 필요하니 누구나 이 책을 읽어 봤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