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사는 것을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예(禮), 법(法), 정(情)으로 사는 거지요.
첫째 여기서 예(禮)는 천리(天理)의 대명사(代名詞)입니다. 세속(世俗)의 예(禮)로 이해해서는 곤란하지요. 이를 불가(佛家)에서는 상근기(上根機)의 삶이라고 합니다. 대인군자(大人君子), 즉 물아양망(物我養望)한 다시 말해 우주와 자신, 객관(客觀)과 주관(主觀)을 다 잊어버린 성인(聖人)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지요.
둘째로 법(法)의 삶이란, 물아양망(物我養望)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자리(自利)보다는 이타(利他)면에 치중하면서 세속 법규에 조금도 어긋나지 않게 사는 삶입니다. 중근기(中根機)의 인간(人間) 이를테면 중등(中等)사람이라고나 할까요.
셋째 정(情)으로 사는 삶이란 예(禮)도 법(法)도 다 모르고 오로지 인정(人情)으로만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천치’같은 사람들이지요. 한 가지 예화(例話)를 들어 보겠습니다.
조선(朝鮮)왕조 선조(宣祖)때의 명현(名賢) 김사계(金沙溪)의 아들로 김집(金集) 신독재(愼獨齋)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도 명현(名賢)이었습니다. 사계(沙溪)의 스승인 율곡(栗谷)의 친구 딸 중에 천치(天癡)가 있었는데, 신독재(愼獨齋)같은 명현군자(名賢君子)가 아니면 데리고 살 사람이 없을 것으로 생각한 율곡(栗谷)이 신독재(愼獨齋)에게 중매하여 결혼을 하게 했습니다.
신독재(愼獨齋)의 장인이 세상을 떠나 사계(沙溪)와 신독재(愼獨齋) 부자가 며느리 친정으로 문상을 간 일이 있었지요. 문상하는 신독재(愼獨齋)에게 천치(天癡) 부인이 느닷없이 술을 권하자 그는 아무런 사양 없이 받아 마셨습니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아버지 사계(沙溪)가 “문상을 왔으면 정중하게 문상이나 할 것이지 술은 왜 받아 마시느냐”고 꾸짖자 “정(情)으로만 사는 천치의 남편을 향한 정(情)마저 말살해 버리면 폐물이 되고 말 것이니 불쌍하여 이를 막기 위해 받아 마신 것뿐입니다”라고 대답했다는 것이예요. 이 말을 들은 사계(沙溪)는 무릎을 치며 “네 공부가 나보다 낫다”라고 감탄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제일 잘사는 것이냐? 상근기(上根機)의 삶이 가장 잘사는 길임은 불문가지(不問可知)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