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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고지 전투는 한국전쟁 사상 가장 치열하게 진지전이 전개되었던 시기인 1952년 10월에 철원북방의 395고지(백마고지)를 확보하고 있던 국군 제9사단(사단장 김중오 소장)이 중공군 제 38군의 공격을 받고 9일동안에 걸쳐 치른 방어전투이다. 백마고지는 역곡천 계곡일대를 한눈에 감지할 수 있는 고지로서 철원으로 이어지는 미 제8군의 주 보급로를 확보하기 위하여도 미 제 9군단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전초고지였다. 당시 국군 제9사단은 백마고지에 제30연대의 2대 대대를 배치하고 그 바로 뒤에 제28연대를 예비로 보유하고 있었다. 백마고지 전투는 10월 6일 밤 7시 15분 중공군 제38군 제114사단 예하 제340연대의 2 개 대대가 백마고지를 공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395고지는 철원평야의 주저항선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고지로서 만일 북한군이 이 고지를 점령한다면 아군의 철수를 강요하고 적에게 철원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기위한 차후공격의 발판을 제공하게 된다.
전반적인 지형은 적이 현 진지에서 방어하는데 유리하고 지대 내에서 광대한 개활지 및 횡격실을 관측할 수 있는 지역을 장악하고 있으며, 북한군의 진지는 적절한 종심과 은폐 및 엄폐를 제공받고 있다. 반면 남한군은 현 진지에서 방어 및 공격이 불리하다. 이와 같이 철의 삼각지로 불리우는 요충지의 일각에 있는 395고지는 피아간 서로 확보,고수하지 않을 수 없는 요충이었다.
평강을 정점으로 하고, 금화 및 철원을 저변으로 하는 철의 삼각지는 한반도 중앙고원지대로서 교통의 요충을 이루고 있으므로, 제해와 제공의 양권을 상실당한 적으로서는 지상 전전선에서 동서의 균형있는 연결을 이루고, 전후방 병참의 중심을 마련하는 동시에 통신망의 주축부위로 삼으려는 것은 능히 헤아릴 수 있다.
북한군은 백마고지를 확보함으로써 철원평야를 감제,철원 및 금화를 제압하고 미 제9군단의 주저항선을 고대산까지 후퇴케 강요하고 서울로 통하는 남한군의 주보급로를 마비시키며 휴전회담의 흥정에 유리한 차기작전의 발판을 구축하는 이점을 얻을 수 있었다. |
전투기간
백마고지전투는 1952년 10월6일부터 10월15일까지 간의 전투에서 이 산(백마고지)을 놓고 공격과 방어를 거듭,무려 주인이 24번 바뀌었다.
1950.6.25~1953.7.27까지 계속된 한국전쟁 기간 중, 하나의 작은 고지를 놓고 가장 치열하게 싸웠던 고지 쟁탈
참전 통계
백마고지 전투의 주역은 김종오 준장이 사단장으로 있는 제9사단으로, 사단방어구역은 장송동-백마고지-학당리간 10킬로로 1952년 9월 22일에 사단내에서 부대교대를 실시하여 임익순 연대장이 지휘하는 제30연대가 좌일선이 되고, 김봉철 대령이 지휘하는 제 29연대가 우일선이 되었으며 이주일 대령이 지휘하는 제28연대는 예비였다. 이래서 백마고지는 제30연대 예하 제1대대가 담당하여 본 전투를 맞게 되었다.
중공군 제38군은 1945년 12월 만주 길림성에서 창설된 고참부대로 한 때 서울을 점령하고 수원까지 내리밀었던 정예부대였다. 강옹휘 군장 예하 제112사단과 제114사단을 백마고지탈취의 주전부대로 내세우고 제113사단은 주전부대의 병력손실을 보충하도록 하였다.
지원부대로는 제53전차중대와 미 제73전차대대 C중대의 도합 22대의 전차 지원과 제1포병단의 화력지원, 미 제5공군의 항공근접지원이 있었다.
전투 결과
이 전투에서 국군 제9사단은 중공군 제38군 소속 3개 사단의 연속적인 공격을 받아 수차례의 백병전을 치루면서 이를 물리치는 동안 수천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나 제1포병단의 화력지원과 유엔 공군의 항공근접지원하에 완강히 대항하여 중공군 만 여명을 물리치고 백마고지를 확보하는 데 성공하였다. 일곱 차례 주인이 바뀌고 바뀌었던 백마고지 전투에서는 쌍방 공히 수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중공군 제38군은 총 9개 연대 중 7개 연대를 투입하여 그 중에서 1만여 명이 전사, 전상 혹은 포로가 되었으며, 국군 제9사단도 총 사상자가 3,500여 명에 달하였다. 이 전투에서 미 제 5공군은 총 745회를 출격하여 2,700개 이상의 각종 폭탄 및 358개 이상의 네이팜탄 등을 고지 위에 퍼부었다. 그리고 9일의 전투기간 동안 중공군도 무려 55,000발 이상의 포탄을 퍼부었으며, 국군은 185,000발 이상의 포탄을 퍼부었다. 이로써 395고지는 마치 벗겨진 하얀 말과 같이 보이게 되어 백마고지라 부르게 되었다. 이 전투로 국군 제9사단은 철의 삼각지의 좌변 일각인 철원 지역을 계속 장악하게 되었으며 중공 제38군은 그들 제23군과 교대한 후 후방으로 물러서게 되었다.
첫댓글 ㅎㅎㅎ 잘 보구 갑니다.
삽입사진 티나요```ㅋㅋㅋ. 그리구``` 사진속의 여학생도 옥이하고 얼추 비슷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
오늘 박선생님 남한산성 오셨는데 바뿐 핑개로 대접이 소홀했습니다 죄송 함니다 그리고 앞에 학생은 다미군요? ㅎㅎㅎㅎㅎㅎㅎ
임선생님 감자탕이 아주 맛있었습니다. 정말입니다. 다음에 또 먹어러 가겠습니다. 그리고 깊은강님은 옥이를 아직 보시지를 못해서 그런 것같습니다만 사진 속 여학생은 옥이를 반정도는 따라오는 것같습니다. 우리 마눌은 십분지일도 못 따라오더군요.
에궁...박병우선생님 괜히 그러셔...미인사모님인거 세상이 다아는뎅...ㅋㅋ...사진과 글 잼 나게 봤습니다...출장갔다 어제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