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달의 특집 ]
나눔생명공동체 신기교회
편집부
나눔생명공동체 신기교회와 박승규 목사의 [희망찾기]
“신기교회에서 가장 행세하는 사람은 봉사하는 사람입니다”
“농촌은 악한 사람이 없어요. 순박하고 선한 마음을 가진 농촌사람들의 공동체야말로 미래 교회와 하나님나라에 가장 근접한 모습입니다. 하지만 수 천년 동안 저들과 이 땅의 농업은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습니다.”
1. 왜 ‘신기교회’를 찾았는가?
박승규 목사(전남노회·신기교회)는 농촌에서 자유함을 느끼는 평범한 농촌목회자이다. 대학시절 서울시청 앞을 찾은 그는 그곳에서 숨이 콱 막히는 경험을 한다. 도시의 분주함과 사람들의 여유 없는 걸음걸이,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들… 도시는 자유가 없고, 계산적이며, 영악하다는 다소 성급해 보이는 단정에도 불구하고 그에게서 도시와 농촌의 공존할 수 없는 대치점을 발견한다. 그는 날로 쇠락해가는 농촌교회를 지키는 많지 않은 농촌 목회자중 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에겐 농촌생활과 농촌목회에서 오는 피로감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사기충천이다. 첫 만남에서부터 왠지 그와의 대화가 술술 풀릴 것 같은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저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앞으로도 후회하지 않을꺼구요. 농촌은 도시와 달리 돈이 없어도 비굴해지지 않는 곳입니다. 이곳이야말로 ‘하나님나라’의 성취가 가능한 최적의 요건을 갖춘 곳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농촌이 죽어가고 있다’ ‘농촌에 희망이 없다’라고 말하는데 그때마다 저는 ‘아니요. 농촌은 희망이 있습니다. 농촌은 살아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많은 교회들이 농촌을 지키고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농촌교회들이 문을 닫고, 합병 또는 폐교회를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도 그는 반대한다. 교회마저 농촌을 떠나면 그곳에 무슨 희망이 남느냐는 것이다. 목회자가 결심만 한다면 단 한 명의 교인이 남아도 교회는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어렵겠지만 목회자가 욕심을 버리고, 성공지향적 가치관을 버리면 된다는 것이다. 농촌목회자였던 아버지(故 박석운 목사)의 영향과 어려서부터 농촌교회에서 성장해 온 배경 때문인지 그의 농촌에 대한 사랑과 농촌교회에 대한 신뢰는 각별하다. 하지만, 모두가 박승규 목사와 같은 마음으로 농촌교회를 섬기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왜 그는 그토록 자신있게 ‘농촌목회’에 희망의 청사진을 그릴 수 있는것일까? 총회 회보가 멀리 해남의 신기교회까지 찾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2. 신기교회가 걸어온 길
신기교회는 일제치하 1940년 3월 설립되었다. 그 후 60여 년 동안 총 8명의 교역자가 거쳐갔다. 1대 교역자는 한국전쟁 중 순교한 신복균 전도사(1948년 4월 28일 장로임직)였고, 김일용 전도사, 김찬원 장로, 전계준 목사, 김영순 전도사(1965년부터 1972년), 조성도 목사(1981년부터 1982년)를 거쳐 7대 오석교 목사(1984년 2월 29일부터 1992년 12월) 그리고 1995년 5월부터 박승규 목사가 부임하여 사역하고 있다. 어려운 교회형편에도 불구하고 목회자와 교인들의 원만한 관계와 협력이 있었던 탓에 신기교회 목회자들은 대부분 오랜기간동안 교회를 섬길 수 있었다. 하지만 신기교회 역시 도시화와 이농현상에서 비롯된 여러 가지 악재들로 인해 날이갈수록 쇠락의 길을 걸어야 했다.
1995년 박승규 목사가 부임했을 때만 해도 신기교회는 조직교회였으나 별다른 선교적 결실이 맺어지지 못한 상황이었다. 부임 초기만해도 여러 가지 사업을 구상하여 시행하고자 했지만, 그때마다 장로님들은 ‘그거 이전에 한번 해봤는데요…’라는 말로 박목사의 계획에 바람을 빼놓기 일쑤였다. 피폐해져 가는 농촌현실과 농촌교회의 쇠락을 바라보며 박목사의 고민은 깊어갔다. 그는 교회가 단지 교인들을 위해 예배드리는 장소만이 아니라, 지역 내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인식하고 지역 주민의 희로애락을 끌어안으며, 지역과 교회가 하나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그리고 그 일은 특별한 사건을 계기로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3. 신기교회의 ‘특별한’ 선교활동 이야기
총 1천여평의 신기교회 부지에는 다양한 시설들이 들어서 있다. 그중 가장 오래된 것은 예배당과 오랫동안 마을 사람들의 피곤한 영혼을 깨웠을 종탑이며, 나머지는 대부분 새로 만들어졌다. 특별히 ‘새터공부방’과 노인주간보호시설 ‘새날을 여는 집’이 아담하게 자리하고 있고, 교회 앞 마당에는 ‘게이트볼장’이 들어서 있다. 도로에서 교회로 진입하는 길가에는 콩과 고구마가 재배되고 있는데, 이 또한 박목사와 교회가 땅 주인에게 임대하여 직접 일구어 놓은 밭이다. 박목사는 도시교회 교인들이 신기교회를 찾아 농촌을 경험하고, 직접 재배하는 기쁨과 생명신앙을 체험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1) 태풍 ‘올가’의 급습과 게이트볼장 운영
1999년 8월 2일 태풍 “올가”가 남해안을 덮쳤다. 신기교회가 위치한 해남지역의 피해 또한 엄청났다. 박목사는 피해를 입은 교인들에게 지원금을 나누어주기로 결심하고 교인들의 의견을 물었다. 그때 집사님 한 분이 독특한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목사님! 이렇게 큰 피해를 입었는데 교인들에게 돈 몇 만원 지원해서 과연 얼마나 도움이 될지 의문입니다. 차라리 마을 사람 모두가 피해를 입어 힘든 만큼, 삽을 한 자루씩 구입해서 나누어주면 어떨까요?” 이웃마을까지 돌며 구입한 삽 114자루를 들고 박목사와 교인들은 지역 내 4개 마을 사람들의 집을 일일이 찾았다.
“신기교회가 지역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였어요. 선교의 출발이었죠. 그 해 겨울 우리는 정책당회를 통해 교회 앞 고구마밭을 운동장으로 만들기로 결정했습니다. 정책당회 다음날인 성탄전야행사 때 우연찮게 군의원이 교회를 방문했어요. 그런데 그분이 제게 교회로 들어오는 길을 포장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묻는 거예요. 이때다 싶어 교회 앞 고구마 밭을 지역 노인들을 위한 ‘게이트볼장’으로 만들겠다는 당회의 결정을 이야기했고 지원을 약속 받았습니다. 농번기였지만 교인들이 지성으로 봉사하고 수고했어요. 대부분 게이트볼장이 면소재지에만 있는데, 민간차원 그것도 교회차원에선 최초의 시도였습니다. 전국에서 면 단위에 5개의 게이트볼장이 있는 곳은 해남뿐일 겁니다”
게이트볼장은 초창기에는 농한기에만 이용하다가 지금은 마을 어르신들이 매일아침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참여하여 건강도 지키고, 삶의 활력도 되찾고 있다. 처음엔 게이트볼에 대한 인식을 넓히기 위해 설명회도 개최했고, 지역대항전도 가졌다. 지금은 실력이 많이 향상되어 2003년 5월에는 마산우체국장이 개최한 ‘마산면 게이트볼대회’에서 우승했다. 마을 사람들은 뭐든지 마을별 대항전을 하면 늘 들러리만 섰는데, 우승을 했다고 기뻐하며 우승기를 들고 트럭 카퍼레이드까지 벌였다고 한다.
2) 지역과 함께 하는 특별한 절기행사
태풍 ‘올가’ 이후 지역 주민들 곁에 더욱 가까이 다가선 교회는 이를 바탕으로 절기행사를 통해 다양한 선교활동을 진행하였다. 특별히 ‘성탄절 떡 나누기’ ‘추수감사절 축제’ ‘정월대보름 행사’등을 통해 지역 주민들과 다채로운 공동체 활동을 진행하며 교회와 지역의 벽을 허물었다. 특별히 2002년에는 교회 ‘새터공부방’ 풍물교실에서 배운 어린이들의 풍물과 함께 약 30여명이 참여하여 정월대보름 행사를 가졌는데, 7살배기 어린이부터 80대 노인까지 마을 주민들이 모두 함께 어우러져 세대를 뛰어넘는 문화공동체를 이루는 소중한 기회를 경험했다.
3) ‘새터공부방’에서 피어나는 꿈
한편 박목사는 1999년 ‘사립문고 책 나누기 행사’에 참석했다가 전국사립문고협의회에 가입하게 되었고 1,300여 권의 책을 모아 ‘해남군 제7호 사립문고’로 등록하였다. 이렇게 공간이 마련되자 박목사와 교인들의 관심이 어린이들을 향하게 되었고, 바쁜 농사일로 인해 무관심속에 방치되어있던 어린이들이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공부방활동이 시작되었다. 처음 방과후 학습지도와 사립문고로 시작된 공부방은 사단법인 ‘사랑의 친구들’에 공모하여 2002년 풍물교실과 전통놀이 프로그램 지원 대상으로 선정되었고, 그 후 컴퓨터, 서예, 풍물교실 등을 운영하는 교육의 장으로 성장하였다. 공부방은 올해로 5년째이고, 약 30여명의 아이들이 매일 찾고 있다.
4) ‘새날을 여는 집’을 통한 노인복지선교
2002년 보건복지부에서 공모한 종교시설 활용 노인복지시설 소요조사에 참여하여 선정된 실비노인주간보호시설 ‘새날을 여는 집’이 2003년 4월 개원하여 운영되고 있다. 새날을 여는 집은 가족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심신허약, 독거, 장애 노인을 낮 동안 보호하며 심신기능회복 훈련 서비스’와 ‘급식’, ‘목욕서비스’, ‘여가생활 서비스’ 등을 제공하는 곳으로 지역사회와 연계하여 ‘한방진료’, ‘침술봉사’, ‘이미용 봉사’를 실시하며 지역 주민 모두에게 개방되어 있다. 총 정원 15명에 현재 13명의 지역 어르신들이 교회와 지역민의 섬김과 사랑으로 날마다 새로운 날을 열어가고 있다. 박목사는 ‘새날’이란 단어에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 그에게 있어 농촌목회는 매일 새로워지는 ‘새날’에 대한 기대와 설레임이며, 교회의 선교활동 또한 하나님나라의 새날을 여는 무한한 선교의 비전이기 때문이다. 그는 훗날 교인들과 지역민들이 생산한 유기농산물을 상품화하여 직거래장터를 통해 판매할 계획을 가지고 있는데 그 상호도 ‘새날’이라 지을 것이라고 귀뜸했다.
“새날을 여는 집에 오시는 어르신들은 집에 계셔도 그저 누워있어야만 하는 분들입니다. 그분들이야말로 사람이 그립고, 만남이 필요한 분들이죠. 사실 새날을 여는집 운영에 필요한 재정이란 것이 늘 부족하지만, 그분들이 고맙게 생각하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 저절로 보람이 생깁니다. 새날을 여는집은 ‘종교계사회복지협의회’와 ‘기장사회복지협의회’의 도움이 컸구요. 지금은 지역 어르신들이 모두 이용할 수 있는 목욕탕과 황토방 공사가 진행중입니다”
5) 이제는 지역복지공동체를 꿈꾼다
박목사는 교회의 선교활동이 더욱 확대되어 지역 전체가 복지공동체가 되는 것을 소망한다. 말 그대로 돈이 없어도 살 수 있는 농촌을 만들어보겠다는 것이다. 그는 그것이 ‘하나님나라’가 아니겠냐고 반문한다. 또 하나는 이러한 사업이 더욱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 해남지역 200개 교회를 중심으로 관심 있는 목회자들과 연대하기를 고대한다. 이를 통해 새로운 농촌복지선교 모델을 지향하는 작은 협의체라도 만들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실제로 그는 인근 ‘땅끝마을’에서 송암복지관을 운영하고 있는 배충진 교수(동아인재대 사회복지학)등과 함께 ‘해남농촌복지연구회’를 결성하여 새로운 농촌복지모델을 개발하기 위해 논의중이다. 이를 보다 조직적으로 해 나가겠다는 것이다. 이와함께 노인을 대상으로 한 복지선교활동을 넘어 농사를 짓고 있는 젊은 50-60대 주민들의 관심과 참여를 유도할 수 있는 ‘직거래장터’ ‘농촌체험’ 등을 진행할 계획이다. 신기교회는 현재 마산면 일대 30여 명의 노인들을 대상으로 반찬서비스도 하고 있는데, 이 또한 더욱 확대해 나가겠다는 생각이다.
4. 신기교회와 박승규 목사의 [희망찾기]
“농촌에서 ‘희망찾기’는 시간과의 싸움이예요. 어쩌면 우리가 헌신하여 농촌이 변화되고, 보다 잘 살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는 시간이 농촌이 무너지고 해체되는 시간을 따라잡지 못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농촌을 회복하고, 하나님나라를 만들어 가는 속도가 지루하고, 농촌과 농촌교회의 존립위기가 닥친다 할지라도 저는 교회가 있는한 ‘희망찾기’는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상황이 절망적이지 않다는 목회자의 신념도 필요하고, 교회와 교인들의 신앙적 책임에 대한 결단도 있어야 합니다.”
‘이 자리에서 시작하자!’ 그는 매일 그렇게 결심한다. 되지 않는 이유를 말하기 보다 ‘해보자!’라고 말한다. 그리고 ‘할 수 있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희망을 줄 수 있는 곳은 이제 교회와 목회자뿐이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학교도, 농촌도 바닥을 쳤다. 바닥을 치면 희망이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 지역에 보내주신 것도 이들에게 자신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고백한다.
박목사와 신기교회 그리고 마을은 지금 ‘희망찾기’를 위한 구체적인 연대를 이루어가고 있다. 그것은 바로 마을에 위치한 유일한 공공기관 ‘학교’(용전분교)를 지키는 일이다. 지난해 용전분교는 단 두명의 학생이 남아 폐교직전에 이르렀다. 때마침 박목사의 아들 찬영이가 학교에 입학할 시기가 되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는 폐교위기에 처한 학교살리기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저는 우선 학교부터 살리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내 아들의 문제였고 저의 문제였습니다. 그것이 묵묵히 순응하며 살아온 마을 사람들의 마지막 하나를 지키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먼저 읍으로 떠난 사람들에게 돌아올 것을 권유했습니다. 그리고 학교를 ‘자연과 더불어 공동체 생활을 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들자고 외쳤습니다. 분교들이 폐교되면서 읍(해남)에 있는 학교는 과밀이 되었습니다. 결국 마음사람들의 동참으로 학교는 다시 살아났고, 한명이던 교사가 두명이 되었습니다. 학생들도 당시 4명에서 현재 18명(1학년 6명, 2학년 8명, 4학년 4명)까지 늘어났습니다. 이들은 모두 방과후 ‘새터공부방’에 모여 학습과 취미활동을 가집니다. 학교와 교회가 하나의 교육 인프라를 형성한 것입니다. 이 또한 농촌에서 가능한 일이고, 농촌교회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교회와 학교, 마을이 연대하여 이룬 큰 성과이며, 연대에 대한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는 계기였습니다.
박목사는 이 사건을 통해 농촌문제를 조금 새로운 시각에서 해석하게 되었다. 사실 농촌으로 돌아온 젊은 가정들도 많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농촌을 ‘전원적인 여가공간’정도로 여긴다. 때문에 마을과 접촉하려 하지 않고 유대하지 않는다. 젊은이들이 떠나버린 농촌은 노인들이 지키고 이들은 환경을 바꾸고, 새롭게 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다. 결국 지금 농촌을 지킬 수 있는 힘은 이들 젊은 가정의 참여와 협력으로 가능하다. 교회는 이를 구성하는 매개가 되어야 한다. 오늘날 우리 농촌이 이토록 피폐해진 데에는 도시와 젊은이들의 책임도 있다. 그들에게 있어 고향은 더 이상 삶의 터전이 아닌 향수의 지점이 되어버렸다. 후손들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농촌을 물려주기 위해서는 방향전환이 필요하다. 어쨌든 학교가 활성화됨을 통해 지역민들은 물론, 타지역과 읍, 면 단위에서도 지역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 것이다. 교회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성의 회복, 더불어 살아가는 문화의 정착을 통해 박승규 목사와 신기교회는 “함께 더불어 나누며 살아가는 아름다운 공동체”의 모습을 희미하게나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많은 사업을 진행하는데 교인들은 어떤 반응을 보이며, 어떻게 참여하고 있을까?
박목사는 서슴지 않고 자신의 재산목록 제1호는 ‘신기교회 교인들’이라고 말한다. 흔히 말하는 능력있는 목사도 아닌 양반이 사업이란 사업은 모두 벌려놓고, 매 주일 설교 때마다 ‘봉사’를 외친다면 어느 믿음 좋은 교인이라고 귀에 가시가 돋히지 않겠는가. 최근 4-5년 사이 교회는 많은 사업들을 진행했고, 그만큼 교인들의 땀과 기도를 필요로 하는 일들이 많아졌다. 한편에선 박목사가 교회보다 마을, 선교보다 복지를 위해 더 많이 신경을 쓴다며 불평하는 이도 있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그들도 봉사의 현장에 참여한다. 어느새 교인들의 일, 교회의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올해 은퇴를 앞둔 장로(문영범 장로)님이 본을 보이셨다. 그는 몇해 전 박목사의 부탁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자청하여 동아인재대 사회복지학과 최고령 학생이 되었고 지금은 졸업하여 사회복지사 자격을 취득한 후 무임으로 ‘새날을 여는 집’원장직과 함께 차량 봉사를 담당하고 있다. 교인들은 박목사가 꿈을 잃지 않고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에 대해 그들 나름대로 ‘하나님나라’를 발견한 듯 하다. 현재 이 지역은 150여 가구, 250여명이 살고 있다. 시골교회가 부흥하면 또 얼마나 하겠는가마는 모든 복지선교활동에 있어 굳이 ‘교회 나오세요!’라는 말을 첨언하지 않는 박목사의 신념 탓에 교인은 많이 늘지 않았다. 그러나 지역에서 교회를 보는 시각은 완전히 달라졌다. 언젠가는 “박승규 목사와 교회가 왜 이렇게 열심히 이 일을 추진하는가?” “아! 저것이 바로 신앙이구나!”라고 느끼게 될지 모른다. 박 목사는 그 일이 바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말한다. 조급하게 신앙을 강요하지 않는다. 신앙은 강요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교회와 신앙은 열려있어야 한다. 신앙고백은 그들 각자가 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마음을 감동시킴으로 가능한 것이다.
5. ‘나눔생명공동체’를 향하여 - ‘길이 끝나는 곳에 길이 있다’
하나님나라는 구호가 아니다. 하나님나라를 먼저 느낀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에 의해 성취되는 이 땅에서의 구원이다. 그는 바로 그 체험이 가능한 곳이 농촌이요, 농촌교회라고 주장한다. 농촌마을 사람들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동안 누구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기에 이미 그러한 관심과 배려를 포기하고 체념했다. 때로 농촌목회자들도 이들의 ‘느린 걸음’과 ‘변화 없음’에 지치고 체념한다. 하지만 아직도 그들은 아주 작은 관심과 배려에도 고마워하며 교회를 통해 ‘가족같은 공동체’를 느끼고 싶어한다.
‘강도만난 이들’
지금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도움’이다. 어떻게든 죽음의 문턱에서 도움을 받아야 한다. 호흡이 가능해야 그들을 괴롭힌 강도의 실상 또한 밝힐 수 있다. 자칭 도시교회, 성공한 교회, 능력있는 목회자에 비교하여 50점짜리 교회, 50점짜리 목사지만 신기교회와 박승규 목사는 지금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몸으로 실천하며 살고 있다. 그들에게는 여전히 희망없는 농촌, 쇠락해가는 농촌교회가 현실이지만, 그 갑갑한 현실을 극복하며 ‘하나님나라 운동’의 최전선에서 땀흘리고 있다. 농촌목회자는 결코 한가하지 않다. 특히 박목사와 신기교회 교인들은 너무 바쁘다. 인터뷰를 마치고 서울로 향하던 그 시간, 박목사는 몇일 후 있을 해남군수 선거를 앞두고, 보다 지역주민들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군수 선출을 위해 ‘후보토론회’장을 향하고 있었다. 그가 활동중인 해남지역 공부방협의회, 해남지역 기독교교회협의회가 주축이 되어 진행한 것이라 한다. 날마다 희망을 안고 뛰는 사람, 박승규 목사와 신기교회의 크고 원대한 꿈이 하나님의 크신 계획안에 반드시 성취 되기를 기도해 본다. 아울러 이 지면을 통해 전국 각처에서 농촌을 지키며 헌신하고 있는 농촌목회자들과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평안이 함께 하시길 기원한다. 신기교회 이야기는 그 수많은 희생과 헌신의 한 가지 사례일 뿐이다. 바라기는 농촌교회의 희망을 찾는 불씨가 횃불처럼 타올라 생명을 살리고, 농촌을 살리는 ‘부흥’의 찬양이 온 땅에 울려퍼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글·사진┃손성호 목사
박승규 목사는 현재 기장 전국농민선교목회자연합회 서기, 전남농목회 총무, 전남노회 농어민위원회서기로 활동하고 있으며, 부인 김정희 사모도 지역 유일의 수화통역사로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며,신기교회 농촌복지선교활동의 실무자로 맹활약중이다.
- 신기교회에서 수련회나 농촌현장체험 등을 진행하실 교회와 단체는 아래 전화로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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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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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귀한 가르침 배우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