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환 李珉煥(1899 ~ 1973)】
「1921년 국내에서 군자금 모집, 블라디보스톡에서 적기단 부단장으로 활동」
1899년 3월 4일 함경남도 홍원군(洪原郡) 조래촌 빈농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형 이규환의 집에서 농사를 짓고 한문을 공부하였다. 이명으로 이승(李承)·홍파(洪坡)·칠성동(七星童)을 사용하였다.
1917년 ‘청결 검사’를 한다고 마을을 돌아다니며 행패를 부리는 한국인 순사를 처단하고 북간도로 건너가 이승(李承)으로 변성명하였다. 동명중학 교사인 형 친구 박두하의 소개로 2년간 명동중학에서 공부하였다.
1919년 중국 룽징(龍井)에서 3·13 만세시위에 참여한 뒤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노인단(老人團) 단원 채성하(蔡聖河)의 소개로 김운학(金運鶴)·박춘근(朴春根)·김봉기(金鳳基)·김형식(金衡植) 등 18명의 청년들과 무장투쟁을 목적으로 하는 소년모험단(少年冒險團)을 조직하고 총무를 맡았다. 단장은 김운학, 위원은 박춘근·김봉기 등이었다. 간부회의에서는 중국과 러시아 지역의 한인 거주지에 소년모험단 지단을 조직하고, 폭탄·권총 등을 구입하기 위해 각처로 인원을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1919년 겨울 김정하(金鼎夏)와 상하이로 가서 의열단 단장 김원봉(金元鳳)을 만나 두 단체가 연계를 갖고 활동하기로 약속하였다.
1920년 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무기를 구매하러 창바이현(長白縣)에서 온 군비단(軍備團) 간부 김찬(金燦)을 만나 가담하였고, 군비단의 무기 구매와 운반에 참여하였다. 1921년 여름 군비단의 지단을 조직하고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국내에 잠입하여, 함흥에서 김형식과 함께 영생중학교를 중심으로 군비단 지단을 조직하였다. 12월 함흥의 부호 고형선(高衡璿)에게 군자금을 요구하다가 신고를 받고 출동한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이 일로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을 받고 청진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1922년 8월 25일 탈옥하여 연해주로 가서, 이름을 홍파(洪坡)로 바꾸었다. 얼다오두거우(二道溝)에서 임병극 부대에 가담해 ‘원동 해방 전쟁’의 마지막 전투에 참가하였다.
1923년 1월 10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백산학교 2층에서 적기단(赤旗團)이 결성되었다. 회의에는 46명의 한인 청년이 참가했으며, 코민테른 원동비서부 위원 이델손(Б. И. Идельсон)도 참석하였다. 이때 이젤손·최계립(崔溪立)·김아파나시·최동욱(崔東旭)·전창순(全昌順) 등과 함께 임시집행부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단장은 ‘간도 15만 원 사건’의 주도자인 최계립으로 동만사령부장을 겸임해 영고탑(寧古塔)을 중심으로 만주 일대 한인 농촌에 지부를 설립하고, 국내에도 지회를 조직하고 기관지로 『벼락』을 발행했으며, 주필은 박우(朴牛)였다.
적기단 부단장과 북만사령부장을 맡고 중동철도 연선 소추풍(小秋風)이라는 한인 농촌에 가서, 1927년까지 반일 운동과 공산주의운동에 종사하였다. 그러던 중 일제 정탐 김군삼(金君三)이 살해당하는 사건으로 일제의 추적이 심해지자 연해주로 돌아왔다.
1927년 블라디보스토크 당학교에서 수학하였고, 1928년 『선봉(先捧)』 신문사에서 근무하였다. 1931년 러시아 공산당에 입당하고 하바롭스크에 거주하였다. 고등공산주의농업학교(ВКСХШ)에 재학 중 1936년 1월 11일 원동변강내무인민위원부에 체포되어 하바롭스크 감옥에서 복역하였다. 1936년 11월 1일 소련 내무인민위원부특별협의회에 의해 ‘반혁명 활동을 한 혐의’로 4년의 유형을 받고 시베리아 케메로보주 수용소를 거쳐 코미자치공화국의 우흐타수용소에서 형을 마치고 1941년에 풀려났다. 1955년 10월 24일 극동군관구 군사재판소에 의해 복권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 자원병으로 참가하기도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적기단(赤旗團)은 일제강점기인 1923년 1월 10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직된 항일 독립운동 단체이자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대중적 외곽단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