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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년 만력 18년, 선조 23년(1590년)
봄 2월. 황윤길(黃允吉)을 통신정사(通信正使)로, 김성일(金誠一)을 부사(副使)로, 허성(許筬)ㆍ차천로(車天輅) 등
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아 일본에 들여보내기로 하다. 황윤길 등이 대궐에 들어가서 하직하자,
임금이 술자리를 마련하여 술을 내리고 그들에게 명하기를, “조심하고 힘써서 잘 갔다가 돌아오라.
그곳에 들어가서는 행동하는 데 반드시 예(禮)로써 하되 조금이라도 업신여기는 생각이 있어서는 안 된다.
나라의 체통을 존중하고 왕의 위령(威靈)을 멀리 펴게 함이 이 한 번의 길에 달렸으니, 경들은 어김이 없도록
하라.” 하다. 황윤길 등이 어명을 받들고 출발하여 수행자 2백여 인을 거느리고 동래(東萊)로 가서 바람이
그치기를 기다리다.
○ 담양(潭陽) 생원 채지목(蔡之穆)이 광양(光陽)의 훈도(訓導)로 있으면서 본현의 교생(校生)들과 모의하기를,
“전 현감 김국주(金國柱)는 영암(靈嵒) 사람인데, 이길(李洁)과 절친하다. 만약 몰래 무기를 도와주었다고
명목을 내세운다면 김국주를 역적으로 모함할 수 있고, 우리들은 큰 상을 받게 될 것이다.” 하니, 교생들이
그럴듯이 여겨 새 현감 한덕수(韓德修)에게 몰래 고했다. 한덕수 역시 그 모의를 기발하게 여겨, 새로 가짜
장부를 만들어 후일의 증거에 대비해 놓고서는 죄목을 자세히 들어 상소하다. 그때 김국주는 이산(理山)의
원이었는데 도사를 보내어 체포 심문하게 하니 미처 변명할 겨를도 없이 죽고 말았고, 광양의 아전들을 체포
심문하자 허망한 무고임이 드러나서 채지목 등 12명이 반좌(反坐)되어 다 주살되다. 이길은 남평(南平)
사람으로 의정부 사인(舍人)이었는데, 기축년(1589, 선조 22)에 역적 정여립에 연좌되어 그의 형 승지
이발(李潑)과 아우 이급(李汲) 및 90세의 노모와 함께 곤장을 맞다가 두 목숨을 잃다.
○ 유구국(琉球國) 사람 요우(要宇) 등이 표류하여 본국 해변에 닿아서, 관원을 보내어 그들을 요동(遼東)으로
압송하다. 고사(考事)에 나온다.
가을 8월. 통신사 황윤길 등이 바다를 건너 대마도에 도착하여 한 달 동안 머무르다. 김학봉(金鶴峯)김성일(金
誠一)의 호이다. 이 허산전(許山前) 허성(許筬)이다. 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주다.
성일이 산전 족하(足下)에 돈수(頓首)하나이다. 하찮은 사람을 버리지 않고 친절히 가르쳐 주시어, 잘못을 고집
하는 소견을 돌이켜 나라의 체통을 온전하게 하려 하시니 대단히 성대한 뜻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제가
생각하기엔 족하가 나라의 체통을 온전하게 한다는 것은 바로 나라의 체통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귀하는
어찌하여 그토록 생각을 않으십니까. 대체로 이 섬과 우리 조정과의 관계가 어떻습니까. 대대로 나라의 은총을
받아 우리의 동쪽 울타리 노릇을 해 왔으니, 의리적인 면으론 군신의 관계이고, 지리적으로는 속국인 것입니
다. 우리 조정에 의탁하고 살아가는데, 만약 그들의 교역(交易)을 끊고 그들의 조공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어린이의 목을 누르고 젖을 끊어 버리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래서 조종(祖宗) 이래로 이적(夷狄)을
다루는 도리를 깊이 알아서, 한편으론 용사(龍蛇)처럼 생각하고, 한편으론 외신(外臣)으로 여겨 주어 위엄으로
두려워하게 하고 은덕으로 어루만져 주었지, 일찍이 고식(姑息)으로 일관하여 그들의 기만과 모욕을 당한 적은
없었습니다.
이 섬 역시 우리 조정의 은덕과 신의가 중함과 혜택을 입은 것이 두터움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속방(屬邦)의
도리로 받들어 신(臣)을 칭하고 제후(諸侯)의 법도를 정성스러이 지켰으며, 대대로 토산물을 바치고 대궐에
머리를 조아렸으니, 위엄에 떨고 은덕에 보답한 바가 지극하다 하겠습니다. 이제 이번 사신의 행차는 1백 년
만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의지(義智)가 몸소 행차를 호위하고 관사(館舍)의 접대가 전보다 더했으며,
왕명을 전하던 날엔 뜰 복판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절하여 공손히 의례대로 받았고, 회견하는 날에도 앞으로
나와 재배하여 도주(島主)가 지킬 예를 잃지 않았으니 공손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실수는 바로 그의 환심을 사고자 굽히어 예대(禮待)한 것이 너무 지나쳤기 때문에 그가 교만한
기색을 나타내게 되었고, 수일 후엔 벌써 처음과 달라졌음을 깨달을 수도 있었습니다. 전일 동산(東山)의
모임에서만 해도 의지가 말에 올라 탄 채로 막(幕) 앞까지 돌입하고서야 말에서 내려, 나는 이미 마음속으로
좋지 않게 여겼으면서도 주객지간이라 역시 난처한 바가 있어서 감히 말이나 안색에 불쾌함을 나타내지
않았지만, 국분사(國分寺)에서 한 짓에 이르러서는 악연(愕然)함이 더할 수 없습니다.
황윤길 등이 대마도에 도착하여 거기 머무르면서 선위사(宣慰使)를 기다리느라고 각처를 다니며 구경했던
것이다. 큰 나라의 사신이 자기 상관과 대청 복판에 나란히 앉아 있으니 의지란 자는 다른 문으로 해서 들어
왔어도 좋으련만, 매우 가까운 곳까지 뻣뻣하게 감히 가마를 타고 층계를 지나 대청에 올라와서 내리고
사신을 흘겨보는 것이 신하나 하인을 대하는 것 같았습니다.
비록 이적(夷狄)이 무례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군신과 상하의 분별이 있는데 의지가 어찌 감히 그렇게 하는
것입니까. 사신이란 사람이 만약에 그대로 그 자리에 앉아서 그자와 예를 하고 또 그자와 다정하게 술을 주고
받고 하여 즐거워한다면, 그것은 욕을 당하는 것을 달갑게 여기고 신하나 하인의 지위를 자처하는 것입니다.
그자 역시 사신이 태연한 것을 보고, 반드시 그렇게 하는 것이 예법으로 당연한 것이라 여겨 조금도 꺼리는
마음이 없었으니, 종국에 가서의 폐단이야 어느 지경엔들 이르지 않겠습니까. 이 몸은 비록 미미하나 큰 나라
의 사신입니다. 누군들 자신은 가벼이 여겨도 나라는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되고, 자신은 욕될지언정 왕명을
욕되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신과 나라를 실상 둘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자신이 가볍게 되면 나라가 그로 인해
가볍게 되고, 자신이 욕되면 왕명이 그로 인해 욕되게 됩니다. 사신이란 사람이 어찌 감히 자기 몸을 가벼이
하고 욕되게 해서 자기 나라를 가볍게 하고 왕명을 욕되게 만들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내가 정사(正使)에게
간곡히 고하고서 함께 나가 버리자고 청했던 이유인 것입니다. 재삼 말했지만 정사가 듣지 않기에 나만 혼자
나와 버린 것은 미안하게 여겨지기도 하였지만, 이러한 경우에 있어서 정사는 가볍고 나라의 체통은 소중하니,
구차스러이 행동을 같이 해서 왕명을 욕되게 하기보다는 차라리 달리 행동하여 왕명을 높이는 것만 못합니다.
내가 사관에 돌아온 후에 귀하와 차군(車君 즉 차천로)이 뒤따라 또 나와 버렸으니, 이것이 어찌 나라의
체통을 소중히 여기고 자기 몸을 욕되지 않게 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귀하의 견해도 대체로 나와
같다고 속으로 생각했었습니다만, 세 번 생각하신 끝에 도리어 의혹을 내실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귀하의 이른 바 “이적(夷狄)을 대하는 방법은 보통의 법도로 다루어서는 안 되고 조용히 처리해서 나라의
체통을 손상함이 없도록 해야 한다.” 하신 것 역시 무슨 도리가 있습니까. 귀하의 심중은 내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소위, “보통의 법도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 는 것은 “다스리지 않는 방법으로 다스린다.” 하는 것에
불과하고, 소위, “조용히 처리한다.”는 것은 “그와 무릎을 맞대고 서서히 타일러서 그 마음을 부끄럽게 만든다.”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여기엔 그렇지 않은 점이 있으니, 대체로, “다스리지 않는 방법으로 다스린다.”는 것은 왕자(王者)가
이적(夷狄)을 대하는 방법이니, 왕명을 받들고 온 신하가 한 나라의 체모를 지니고 있으면서 자신이 조심하고
자중하지 않아서 보잘것없는 미미한 무리에게 능멸을 받는다면 그가 나라를 욕되게 함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도리어 “다스리지 않는 방법으로 다스린다.”고 말한다면, 이것이 어찌 사신의 도리이겠습니까.
다스리지 않을 뿐 아니라, 또 그와 무릎을 대고 마주앉아 자리를 붙이고 문안을 하고 술잔을 나눈다면 이것은
자기의 욕됨을 편안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 비록 조용히 타이른다 한들 어떻게 그자의 마음을 부끄
럽게 만들 수 있겠습니까. 또 내가 그날 만약 펄펄 성을 내어 맞대놓고 준렬하게 책망하고 때려서 그자의
몸을 욕되게 해 주었다면, 과연 이적을 대하는 방법을 잘못해서 그자를 격발시켜 변을 빚었다 하겠지만,
나는 병을 칭탁하고 나와서 몸을 깨끗이 하여 관사로 돌아왔을 뿐입니다.
이야말로 사실 짐승과 서로 따지지 않고, 다스리지 않는 방법으로 다스린 것인데, 무슨 지나친 행동이 있었단
말입니까. 만약 그자의 뜻을 어기는 것을 난처하게 여겨 그대로 구차하게 굽히고서 순종한다면, 그것은 부녀자
가 하는 짓이지 어찌 대장부의 의리이겠으며, 또 어찌 큰 나라 사신의 체통이겠습니까. 세운(世雲) 역관(譯官)
의 이름이다. 을 곤장친 데 이르러서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우리들이 이곳에 와서 말이 전연 달라
깜깜한 귀머거리와 꼭 같았으니 저들을 타이르는 책임은 오로지 세운한테 달렸는데, 그는 왜의 사신과 한해가
지나도록 한짝이 되어 정분이 두터워져서, 다른 나라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그의 심복이었던 것입니다.
본국에 있을 때에도 번번이 왜의 사신을 위해 기꺼이 우리를 속여 못하는 짓이 없었고, 이 섬에 들어 온 후에
도 여전히 뉘우치지 않고 매일같이 왜인이 한 말로써 우리에게 꿀발림을 했는데 전후에 이야기한 것이 결국은
허사로 돌아가곤 하였으니, 이것은 우리들이 다 아는 일입니다. 더구나 체모의 중요한 데에 이르러서는 비록
그를 시켜 타이르게 하였는데도 멍하니 무슨 일인지를 몰랐으니, 그 죄가 또한 중하지 않습니까. 전일의 변고
는 비록 의외에서 발생했다 하더라도 세운이란 자가 조금이라도 담력이 있어서 의지가 가마를 타고 문을 들어
올 때 즉각으로 타일렀다면 그래도 중지시킬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같이 임기응변해서 잘 처리한다는 것은 세운에게 바랄 일이 못 된다 치고, 더욱 분개되는 것은
의지가 들어온 후에 그가 우리들이 나가버린 것을 이상하게 여겨 물었는데도 세운은 여전히 입을 다물고 말이
없다가 범연히 병이 있다는 정도로 대답했으니, 그 죄가 이 정도에 이르면 또한 심히 크지 않습니까. 또 내
생각하니, 명 나라 서울에 갔을 때, 중국인이 만약에 좋지 않게 굴면 반드시 타이르지 못한 것에 죄를 돌려
우리 역관을 곤장치는 것이 전례로 되어 있습니다. 중국에 들어가서도 역관을 곤장쳤는데, 신복(臣服)하는
나라에 와서 유독 그 죄를 다스리지 못하겠습니까. 세운을 치죄한 후에 도공(都公)이 비로소 사람을 시켜
이 일을 해명해 왔는데, “부관(副官)이 나이가 어려서 예법을 몰라 이러한 과실을 저질렀습니다.
비단 도주(島主)가 듣고 깜짝 놀라 실색(失色)할 일일 뿐 아니라, 만약 국왕(수길(秀吉))이 이 일을 듣는다면
우리들까지 죄책을 받게 될 것입니다. 내가 몸소 나아가 사과하겠으니, 사신께서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우리나라가 신사(信使)를 폐지한 지 지금까지 1 백 년이 되오만, 새 왕이 예로써
나라를 다스리고 여러 해에 걸쳐 자주 통신사의 파견을 청해 와 그 뜻이 심히 간절하기로 우리 전하께서
특별히 사신을 파견해서 두 나라의 우호를 닦게 하셨으니 예가 지극히 중하오. 주객 간에 각각 예를 지키고
서로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데, 이 땅에 들어오자 부관의 능멸함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이것이 어찌
새 왕의 의사겠으며, 또 우리 전하께서 귀국에 바라는 것이겠소. 하물며 이 섬이 신하의 도리로 우리 조정을
섬기니 번신(藩臣)이나 다름없고, 부관은 또 도주의 아들인데 그의 무례함이 과연 이 같을 수 있겠소.
비록 어려서 예를 모른다고 말하지만, 전일에 동평관에 있을 때의 일을 생각지 못하오. 의지는 무진년(1568,
선조 1)에 도주의 아들로 추장(酋長) 귤(橘)을 따라 우리나라에 와서 이 관에 머물렀었다. 본국의 선위사와
객을 접대하는 여러 관원들은 객사(客使)와 회견할 때면 반드시 대문 밖에서 말을 내려 의관을 정제하고,
들어가서는 서로 예를 행하여 종시 태만히 하지 않으니, 이것은 객사(客使)가 친히 본 것이오. 언제 거만하고
무례함이 이 지경에 이른 적이 있었소. 그때 선위사 등 관원이 만약 부관이 들어 있는 관(館)의 문을 열고
말을 타거나 가마를 타고 층계를 지나 대청에 올라갔다면 부관의 마음이 편안하였겠소.” 하니, 왜인 평조련
(平凋連)은 전에 수원(隨員)으로 우리나라에 왔던 자인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일어나 배례하고 경의를
표하면서 말하기를, “부사의 행동이 지당하십니다. 우리 소인들 역시 미안한 일임을 압니다.” 하고,
부관의 사자(使者)도 슬며시 역관에게 고하기를, “부관은 어제 사신께서 나가 버리시는 것을 보자 자기의
실수를 깨달았고, 또 도선주(都船主)가 그를 준렬하게 책망해서 부관은 연야(連夜) 잠도 자지 못하였답니다.
운운.” 하였습니다.
어제 오고간 말이 이런 정도에 불과한데 오늘 도선주가 사죄한 후에 꼭 세운을 곤장치고서야 만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간밤에 왜인이 포구(浦口)에서 사람을 목 베었다는 소문을 듣고 마음이 역시 풀려서 같은
배로 귀화한 왜인에게 탐문하여 보았더니, 국분사에서 가마를 타고 대청에 올라간 것은 부관의 뜻이 아니고
문에 들어갈 때 그 가마를 멈추게 하였는데도 이 왜인이 가마를 메고 곧장 들어가서 실례가 되게 하였다는
것으로 부관이 대노(大怒)하여 그를 베려 했으나, 도망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실행하지 못 하고 오늘 아침
에야 겨우 잡아서 처형했다는 것입니다. 한 왜인은 또 말하기를, “실례한 죄가 가마꾼에게 있었다는 것을 사신
에게 알리려고 귀국인(貴國人)이 보는 곳에서 형을 집행했고 또 사신의 배로 귀화한 왜인을 같이 참여케 하고
죽인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내가 차군(車君)에게 말하기를, “이 살인은 오로지 우리들이 먼저 나와 버렸기
때문이니, 참혹한 일이 아닌가.
그러나 사신이 나라를 욕되게 하고 왕명을 욕되게 하였음이 극도에 이르렀지만, 부관이 이미 자기 허물을
사과하고 또 아랫사람에게 죄를 돌려 죽였으니, 이제부터는 나라의 체통이 좀 존중되고 욕도 약간 씻어졌네.”
하면서, 서로 일면으론 슬퍼하고 일면으론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의외에도 귀하는 단지 살인이 놀라운 것인
줄만 아셨을 뿐, 나라 체통의 중요함은 생각지 않으시고 지나치게 스스로 뉘우치고 자책함이 이렇듯 심하십니
다.
귀하는 또 말씀하기를, “옛사람이 이적을 대함에 있어서, 반드시 ‘은덕과 신의로 회유하라.’고 하였을 뿐이지,
언제 체모(體貌)라는 글자를 말한 적이 있느냐.” 하시지만, 이것은 진정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으로 교주
고슬(膠柱鼓瑟)격이라 하겠습니다. 선왕(先王)이 이적을 대하는 데 있어서, 비록 ‘은덕과 신의로 회유하라.’고
하였지만, 그 가장 엄격히 하고 가장 근신한 것은 체모보다 더한 것이 없었습니다. 《춘추(春秋)》에는, 중국을
안[內]으로 삼고 이적을 밖[外]으로 삼았으며, 제후가 비록 강대해도 반드시 인(人)이라 칭했고, 진(秦)과 초(楚)
가 비록 왕을 참칭(僭稱)했어도 반드시 자(子)라 칭하였으며,의관(衣冠) 회합에는 반드시 열국(列國) 아래에
자리했으니, 이는 중국의 체모를 존중한 것이 아닙니까.
한(漢) 나라의 고조(高祖)와 문제(文帝)가 흉노(凶奴)에게 금과 비단을 바친 적이 있었는데 가의(賈誼)는 머리와
발이 도치(倒置)되었다고 말했고, 한 선제(漢宣帝)가 흉노의 선우(單于)한테 제후보다 위의 자리를 주자 양웅
(揚雄)은 존비(尊卑)의 질서를 문란케 했다고 말하였으니, 이런 것들은 중국의 체모를 생각한 것이 아닙니까.
지금의 형편으로 본다면, 우리 조정은 중국과 같고 섬 왜인은 사실 만이(蠻夷)입니다. 큰 나라의 사신으로
조그마한 왜종에게 굴욕을 당하고 능멸과 무례함을 당하고서도 오히려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지도 않고,
도리어 체모의 중한 것을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기니 《춘추》의 대의(大義)와 다르고 한대(漢代) 선비들의
견해와도 다릅니다. 이것이 내가 말한 바 하나만 알고 둘은 몰라 교주고슬이란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말할
것이 있습니다. 정사(正使 즉 통신정사 황윤길을 말함)가 자리에서 움직이려 들지 않고, 그자와 술을 주고
받으며 즐거워한 것이 어찌 그저 그렇게 한 짓이겠습니까.
그의 생각에는 반드시, “이적(夷狄)과 상대하여 따질 게 못 되고 작은 예절은 다툴 게 못 된다. 만약 그자와
상대하여 번거롭게 다투고 따진다면, 얻는 것은 작고 해를 받음이 크지 않겠는가.” 하였을 것입니다.
그의 생각이 이러해서 종시 저들을 포용하고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으니 그 도량의 넓음이란 실로 얕은 자가
헤아려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겠지만, 그러나 사람이란 각각 자기 의견을 가지고 있는 것인데 어찌 남의
의견에 뇌동하고 따져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나는 송대(宋代)의 일을 가지고 말하겠습니다. 휘종(徽宗)과 흠종(欽宗) 두 황제가 북쪽으로 금군(金軍)한테
잡혀갔고 고종(高宗)은 남쪽으로 양자강을 건너가서 국세가 위태로웠는데, 고종은 금(金) 나라에 신(臣)을
칭하고 공물(貢物)을 바쳤으며, 오랑캐의 막집에 내려서서 배례하고도 스스로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생각인즉, “내 무릎을 한 번 굽히면 휘종의 재궁(梓宮)을 돌려올 수 있고 내 가족들이 돌아올 수 있으며,
나라의 위기를 모면할 수 있다. 내가 굽히는 것은 작고 얻는 것은 크니, 구구한 체모를 이적에게 따져서
위태로워지고 망하는 화를 자진해서 취할 게 무엇인가?”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비단 고종의 생각이 그러했을 뿐 아니라, 조정에 가득한 사특한 무리들의 의논도 다 그러하였습니다. 그러나
호담암(胡澹庵)만이 노중련(魯仲連)의 언변을 떨치면서 의연(毅然)히 상소하여 진회(秦檜)를 목 베어 천하에
사과하라 청하고, 차라리 바다에 빠져 죽는 것을 달갑게 여길망정 작은 조정에서 구차하게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하였던 것입니다. 그때의 정세로 본다면 담암이 대체를 모르고 하찮은 예절에 구구함이 지나쳤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온 천하가 그를 그르다고 하지 않았고 금 나라 사람도 그를 존경하고 사모할 줄 알아서 천금을 써가면
서 그의 상소 초본을 구하기까지 하였으며, 주자(朱子)의 강목(綱目)에 또 이 글을 대서 특서하여 지금에 이르
도록 읽는 이가 늠름하게 생기가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이 일뿐이 아니라, 공도보(孔道輔 그는 공자의 후손이었음)가 요(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요의 광대가 문선왕
(文宣王 즉 공자)으로 분장하고 공도보를 희롱하자, 공도보가 분연히 일어나 나가고 연회(宴會)를 받지 않았습
니다. 대체로 요 나라 사람은 일개 만이(蠻夷)이고 광대는 또 만이의 배우인즉 우연한 희롱을 일소(一笑)에
부칠 수 있는데도, 공 도보는 곧장 나가 버려 돌아보지 않고 이적과 따져야 했음은 또한 무슨 생각에서였겠습
니까.
우리들이 개 돼지의 굴에 들어와 개 돼지와 섞여 있으니, 몸은 외롭고 형세는 고립되어 위험하기 그지없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라에 송 나라 조정 같은 위급함도 없고 섬 오랑캐 역시 요나 금에 견줄 게 못
되건만, 사신된 사람이 어찌 먼저 스스로 두려워하고 겁내어 굴욕을 달갑게 받고 따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의지는 본국의 번신(藩臣)으로서 사신을 능멸했으니 광대가 희롱하는 정도가 아닌데, 사신이 이것을
참고 받아 주어 스스로 나라의 체통을 망가뜨린단 말입니까. 이런 것으로 말한다면, 그날 우리들이 처신한
바는 반드시 잘한 점이 있다 하겠습니다. 그간 죽은 사람(옛날의 호담암ㆍ공도보를 말함)을 되살려 낼 수
있다면, 그가 나를 따르겠습니까. 상사를 따르겠습니까.
귀하는 또, “훌륭한 의복이 비록 아름다우나 그것을 원숭이에게 입혀 놓으면 반드시 날뛰어 찢고야 만다.”
하셨는데, 역시 좋은 비유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의리상 굴욕을 당하지 않으려는 것은 다만 사신의
체모를 보존하고자 하는 것 뿐이지 원숭이에게 훌륭한 의복을 입히고자 하는 것이 아니며, 타이르는 것은
단지 그들의 무례함을 말하는 것뿐이지 저들에게 힐책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들이 비록 무지하지만 역시
자기 잘못을 부끄럽게 여겨 반드시 사람을 처형하고야 말았으니, 저들의 참혹한 짓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으며 우리나라에 무슨 손상이 있다고 이러한 말을 하시는 것입니까.
또, “새 왕이 우뚝 일어나서 나라를 빼앗고는 도주를 싫어하고 깔보아 왔는데도 오히려 인국(隣國)과의 국교로
우호를 통하려 하여 포로를 바치고 통신사의 파견을 청해 왔으니, 이것은 사실 두 나라의 안위(安危)가 결정되
는 계기인데 우리들이 새로 왕명을 받들고 칼을 짚고서 온 것이 어찌 체모를 지키는 일 한 가지만을 위하는
것에 그치겠느냐?” 하고 말씀하셨으니, 귀하는 여기서 실언을 하신 것입니다.
군자가 말 한 마디로 지혜로운 자가 되기도 하고 지혜롭지 못한 자가 되기도 하는데, 귀하와 같이 지혜로운
사람으로서 마침내 지혜롭지 못한 사람으로 돌아가고 말았으니 아까운 일입니다. 새 왕이 스스로 우뚝 일어났
거나, 나라를 빼앗고 도주를 깔본 것이 우리나라에 무슨 상관이 있다고 두 나라의 안위가 결정되는 계기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그가 인국과의 국교로 우호를 통하고자 하여 포로를 바치고 통신사의 파견을 청한 것은,
그 의도가 예의(禮義)의 나라를 사모하여 기회를 빌어 제 나라에 생색을 내려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명을 받들고 국경을 떠나 오늘날 이미 바다를 건넜는 바 마땅히 예의를 삼가 지키고 행동은 매양
규범을 따라야 하니, 굽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의연(毅然)하기가 산과 같아서 국가의 체통을 구정(九鼎)보다
무겁게 받들고 왕의 위령(威靈)을 외국에까지 창달시켜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왜인은 반드시 말하기를, “큰 나라의 예의란 내 이미 들었거니와, 지금 보니 과연 그대로구나.”
하고, 반드시 서로들 눈을 닦고 우러러보며, 그 교만하고 속이려 드는 생각 따위는 슬며시 사라져서 거만하고
깔보는 마음을 감히 가지지 못할 것입니다. 이번 일은 그렇지 않았으니, 겨우 이 땅에 올라서면서부터 스스로
삼가고 무게 있게 행동하지 못하였고 예의를 앞세우지 못한 채 오직 환락과 유람만을 일삼았으며, 또 저들의
마음을 기쁘게 해 주는 일에만 힘쓰고 한결같이 순종하는 것으로 상책을 삼았습니다. 저네가 비록 무식하다고
는 하나 역시 심히 영리한데, 우리들의 품행이 바르지 못하고 절조가 없다는 것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이 점을 가지고 말한다면, 국분사에서의 치욕은 창랑(滄浪)의 경우같이 스스로 초래한 격이 아니겠습니까.
옛날에도 사방에 사신으로 나가서 군명(君命)을 욕되게 하지 않는 데는 두 가지가 있었으니, 하나는 외교
사명(辭命)이 좋아야 했고, 또 하나는 체모가 존엄해야 했습니다. 이제 우리들은 외교 사명에 있어서는 왜인을
범같이 무서워하여 그의 노여움을 건드릴까 어물어물 입만 움직거리고 말이 입까지 올라와도 감히 토하지
못하고 있으며, 체모에 있어서는 자중할 줄 모르고 나고 들고 하는 데 가볍게 굴어 비록 굴욕을 당해도
수치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나같이 고집 세고 편협한 자가 분을 참지 못해 말을 하려고 해도, 반드시 여러 사람이 일어나 공박하여 입
한 번 뻥끗하지도 못하게 합니다. 이것은 어떻게 생겨 먹은 사신의 체모입니까. 이러고서도 감히 큰소리치기
를, “우리들이 왕명을 받들고 여기 와서 행할 사명을 체모에 비한다면, 그 경중과 대소가 어떠한가.” 하니,
귀하의 이른바 경중과 대소는 어긋나는 것이 아닙니까.
《맹자(孟子)》에 이르기를, “나라에 도(道)가 있으면 도를 위해 몸을 바치고, 나라에 도가 없으면 몸을 위해
도를 바치니, 도를 위해 남을 따른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다.” 하였으며, 정부자(程夫子) 역시 말하기를,
“몸을 굽히고서 도가 신장한다 함은 들어 보지 못했다.” 하였으니, 우리들이 의(義)의 소재를 묻지 않고
한결같이 왜인의 마음을 기쁘게 해 주기만을 일삼는다는 것은 도를 가지고 남을 따르는 격이 아닙니까.
굴욕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면서 자기 도를 펴겠다 하는 것은 옛날 선비가 경계한 것을 범하는 게 아닙니까.
아! 이 무릎은 한 번 굽히면 다시 펼 수 없고 군명(君命)은 한 번 욕되면 다시 씻을 수 없으니, 이는 옛사람이
절개를 지켜 굽히지 않고 죽어도 두 마음을 갖지 않았던 이유인 것입니다. 또 우리들이 대궐에서 절하고 하직
하던 날, 간절하던 주상(主上)의 말씀이 귀에 남아 있지 않습니까. 처음의 말씀에는, “언어와 행동에 있어서
반드시 예(禮)로써 임하여 조금도 오만하고 경솔한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하셨고, 끝으로 말씀하시길,
“나라의 체통을 높고 중하게 만들고 왕의 위령(威靈)을 멀리 펴는 일이 이번 한 번의 사행(使行)에 달렸다.”
하셨으니, 위대하도다. 주상의 말씀이시여! 이것이야말로 신하가 마땅히 전전긍긍(戰戰兢兢)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왕명을 받들어 행하여야 할 일이 아닙니까.
조그마한 왜(倭)가 마구 무례한 짓을 가해 와도 태연히 받고 스스로 버티지 못했으니, 만약 왜왕의 궁정에
들어가서 이보다 큰 일이 생기고 이보다 심한 모욕이 있을 경우 겁을 집어먹고 어찌할 줄 몰라 자신을 욕되게
하고 나라를 욕되게 하리라는 것은 뻔한 노릇입니다. 장차 무슨 면목으로 돌아가서 우리 임금께 보고드릴
것이며, 우리 삼한(三韓)의 사대부들을 만나겠습니까. 여기가지 생각이 미칠 제면 미상불 주먹을 불끈 쥐고
마음 아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귀하는 또 말씀하기를, “의관을 바로하고 위의를 존엄하게 하며, 도량을 너그럽게 하고 은덕과 신의를 넓혀서
이역(異域) 땅의 사람들로 하여금 엄연히 우러러 두려워하게 하는 이것이 사실 체모를 존엄하게 하는 일 중에
서도 중대한 일이라 하겠지만, 만약 일마다 의심을 내고 공연히 불화를 일으키며, 얼굴에 노기를 띠고 말은
싸움조로 나오며, 예절마다 책하지 않는 게 없고 말끝마다 따지려 들지 않는 게 없다면 포악(暴惡)에 가까운
게 아니겠소.” 하셨으니, 귀하의 말씀을 자세히 살펴본다면 전반은 자기 찬양이고, 후반은 나를 책한 것입니다.
검은 사모[烏紗帽]에 은띠를 두르고 붉은 웃옷에 옥절(玉節)을 가지고 이역 땅에서 빛을 내었으니 그것은 의관
을 정제하고 얼굴을 존엄하게 하였다고 말해도 좋겠고, 의롭지 않은 음식을 받아 먹으면서 개 돼지들의 마음
에 순종하였으니 도량을 너그러이 하고 은덕과 신의를 넓혔다고 해도 좋겠지요. 그러나 의관과 위의가 이렇게
존엄하고 무게 있었고 도량과 은덕과 신의가 이렇게 너그럽고 넓혀졌으면서도 가는 곳마다 모욕을 당해서,
그들로 하여금 엄연히 우러러 두려워하게 하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대포(大浦)에 도착하던 날, 의지가 만나자고 청해서 정사가 그의 관저에 들어갔더니, 의지가 또 말하기를,
“오늘은 이미 저물었으니 다른 날 만납시다.” 하였고, 다시 관저에 가서 만나려 하였으나, 의지가 지척에 있는
데도 하인이 전하기를, “5리 밖에 멀리 가 있습니다.” 하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만나려 들지 않음이
심했다 하겠고, 급기야 만나자고 하였을 때에도 평상시에 입는 옷으로 들어오려 했으니 그의 경멸하는 태도가
극도에 이르렀다 하겠습니다. 내가 화나지 않을 수 없어 귀하와 다투어 따진 것은 사실 체모를 존엄하게 하고
싶어서였습니다. 그것이 어찌 까닭 없이 의심이나 내고 생트집을 잡는 것이겠습니까.
도선주가 단옷날 와 보겠다고 청해 왔기에 우리들도 그러라고 허락했었습니다. 이미 서로 약속을 했으니 큰
일이 생긴 게 아니라면 어겨서는 안 될 것인데 식후에야 도주는 집에 일이 있다고 칭탁하고 오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도주를 높이고 우리 사신을 경멸하는 것입니다. 그러고는 도리어 예가 아닌 음식을 던져주니 내가
받고 싶은들 받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답례의 연회를 베풀던 날 의지가 먼저 세운에게 말하기를, “소주라면
내가 아주 싫어하니 우리의 맛있는 술로 대신하자.” 하였으니, 그가 객을 공경하지 않음이 심한 것입니다.
그를 허락하고 싶은들 허락할 수 있겠습니까. 주객 간에 편지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것인데, 현소(玄蘇)는
휴지 쪽지에다 마구 써서 재단도 않고 봉하지도 않고 보내왔는데 마치 세속의 이른바 ‘패자(牌字 천민에게
내려주는 패지(牌旨)를 말함)’와도 같았습니다. 내가 말하지 않으려 한들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동산(東山)
의 회합에서는 사신이 장막을 쳤으니 우리가 사실 좌석의 주인인데 끝나고 나갈 때 의지가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서 우리가 먼저 나가기를 원하니, 내가 그 말에 따르고 싶은들 따를 수 있겠습니까.
의지가 사자(使者)를 문안할 제면 매일 아침 반드시 두 창(槍)과 두 검(劍)을 앞세우고 와서 곧장 우리 앞에까
지 오기에 내가 역관을 시켜 타일렀더니 그 후부터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내가 말을 하지 않으려고
한들 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국분사에서의 변에 이르러서는 귀하의 큰 도량으로서도 참지 못했거늘
하물며 나같이 고집 세고 편협한 사람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얼굴에 노기를 띠우거나 말을
싸움조로 한 적이라곤 없었고 반드시 예법에 의거하여 온화한 얼굴로 타이르고 하였을 뿐, 언제 귀하가 말한
바와 같은 그런 적이 있었습니까.
또 선위사(宣慰使)에 관한 일 한 가지만 하더라도 사실 소소한 곡절이 아닙니다. 저들은 이미 선통(先通)하는
문서가 왔다고 우리를 속이고는 또 박다(博多)섬 이름이다. 에 이미 도착했다고 우리를 속였고, 또 풍세(風勢)
가 나빠서 오지 못한다고 우리를 속였습니다. 지금까지 이미 한 달을 머물러 있었으나 여지껏 그림자도 소리
도 없어 끝내 선위사가 와서 우리 일행의 출발을 청하는 일이 없는데도, 우리들은 그들이 조종하는 대로 맡겨
두고 앉아서 속임을 당하면서 감히 말 한 마디 꺼내서 힐난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게 무슨 꼴입니까.
어제 내가 타이르려고 한 까닭도 사실 우연한 일이 아니었건만 큰 소리로 꺾어 버리니 내 답답함이 어떻겠습
니까. 아마도 귀하의 편지에는 많은 □말씀이 종이에 가득하나, 가만히 귀하의 병근(病根) 소재를 찾아본즉
다 포사(怖死) 두 글자에서 나온 것입니다. 옛사람은 의리상 마땅히 말할 것은 죽는다 해도 말했거늘 하물며
이렇듯 친절하게 타이르는 일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또 귀하는 정 문충(鄭文忠 고려 말의 정몽주(鄭夢周)이니, 문충은 그의 시호임)과 신 고령(申高靈 신숙주(申叔
舟)이니, 그는 고령부원군으로 봉했음)의 일을 끌어서 미담(美談)으로 삼고 은연중에 두 선현으로 자처하셨습니
다. 귀하의 자처가 높기는 합니다. 그러나 고령은 당시의 혼란을 만나 욕도 많았으나 그래도 도주로 하여금
위풍에 눌려 말에서 내리게 하였고, 오천(烏川 정몽주) 같은 분으로 말하면 도덕과 문장의 아름다움이 외국에
까지 드러나서 염노(鹽奴)의 미련함으로도 그를 존경하고 사모할 줄 알아 가마를 가지고 와서 초청하기를
매일같이 하였는데, 우리들은 이미 그들로 하여금 위풍에 눌려 말에서 내리게 하지도 못하였고 또 그들로
하여금 가마를 가지고 와서 맞아가게 하지도 못한 채 도리어 의지의 가마꾼에게 능욕을 당했으니, 또한 심히
부끄럽지 않습니까. 내가 말과 안색을 굽히지 않고 곧장 나와 돌아보지 않은 것은 비록 경솔한 것 같지마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원컨대 귀하는 나를 허물하지 마십시오.
《논어(論語)》에 이르기를, “도(道)가 다르면 같이 의론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는데, 그것은 그렇다 치고,
도가 같으면서도 같이 의론할 수 없음이 이처럼 극단에 도달하리라고야 어찌 예측인들 하였겠습니까.
정말 내 도가 외롭고 또 궁한 것이로다. 이만 줄입니다.
○ 통신사 황윤길 등이 대마도에서 대판(大阪) 일본의 관백(關白)이 도읍한 곳의 지명이다. 으로 향발하다.
수길(秀吉)이 있는 곳에 가서 수 개월을 머물렀는데 수길이 왜승(倭僧) 태장로(兌長老)와 철장로(哲長老) 등을
시켜 답계(答啓)를 만들게 하여 황윤길 등에게 보였다. 그 글에 이르기를, “일본국 관백(關白) 수길은 조선
국왕 합하(閤下)께 받들어 회답하오. 전해 온 글은 향 피우고 읽기를 재삼 되풀이하였소. 우리나라 60여 주(州)
가 근년에 나라의 기강을 어지럽히고 세상의 예법을 폐기하며 조정의 정치에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내 격동하
는 감정을 견딜 수 없어 3, 4년간에 걸쳐 반역하는 신하를 정벌하고 도적의 무리를 토멸하곤 하여 이젠 이역
(異域) 먼 섬까지 다 내 손아귀 안에 들어왔다오.
개벽 이래로 조정의 번성함과 낙양(洛陽 도성(都城))의 웅장함이 이때보다 더한 적은 없었소. 어머님께서 나를
낳을 때 해가 품속에 들어오는 것을 꿈꾸었다는데 관상쟁이가 이르기를, ‘햇빛이 미치는 데는 내려 비치지
않는 데가 없습니다. 장년(壯年)이 되어서는 반드시 팔방[八表] 끝까지 당신의 어진 소문이 들리고 사해(四海)
가 위명(威名)을 받들게 될 것을 어찌 의심하리오.’ 하였다오. 그래서 나와 대적이 된 자는 반드시 먼저 두려워
겁내고 나는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공격하면 반드시 빼앗았다오.
귀국이 먼저 달려와 입조(入朝)하니 ‘멀리 생각하여 가까운 근심을 없게 하려는 것’이겠구려. 사람이 한 세상
사는 것이 백 년도 차지 않는데 답답하게 이곳에 오래 있겠소. 국가가 막히고 산과 바다가 먼 것을 불구하고
한 번 뛰어 대명국(大明國)에 바로 들어가고 싶고, 삼국(三國)에 아름다운 이름을 나타내고 싶소. 그때에 귀국
이 교린(交隣)의 의리를 중히 여겨서 우리나라에 편들면 더욱 이웃 나라의 맹약을 닦을 수 있을 것이오.
토산물은 목록대로 받았소. 또 국정을 맡아보던 무리에 이르러서는 전날에 있던 무리들은 다 사람을 바꾸었으
므로 불러서 나눠줄 것이오. 나머지 말은 다른 글에 있소. 몸을 진중히 하고 아끼시오. 이만 줄이오. 천정(天正)
일본의 참호(僭號)이다. 18년(1590, 선조 23) 경인 중동(仲冬)의 날 수길이 받들어 회답함.” 하다. 글의 사연이
극도로 참람되고 오만하다. 부사 김성일(金誠一)이 대노하여 종이를 밀어 제치면서 말하기를, “바다는 안팎으로
끊겨 있고 나라는 화이(華夷)의 구분이 있는데, 모욕과 오만하기가 심함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를 수 있겠소.
우리들은 죽으면 그뿐이지 차마 이것을 가지고 살아서 돌아갈 수는 없소.” 하니, 수길은 그제서야 그 글을
도로 가져다가 ‘합(閤)’ 자를 ‘전(殿)’ 자로 고치고 ‘받들어[奉]’를 ‘절하고[拜]’로 고치다. 말이 성실하고 미더우며,
행실이 돈독하고 조심스러우면 미개 민족의 땅에서라 할지라도 통하게 되는 것이다. 학봉(鶴峯)이 전후로 취한
태도는 다 바른[正] 데서 나왔던 것으로, 임진년(1592, 선조 25) 초기에 이르러 더욱 그의 충절을 알 수 있었다.
겨울 12월. 황윤길ㆍ김성일 등이 대판에서 나와 대마도로 오다.
[주-D001] 반좌(反坐) :
남을 무고(誣告)하다가 사실이 아님이 드러나 도리어 받게 되는 죄이니, 역적으로 무고한 자는 역적의 형을
받는다.
[주-D002] 용사(龍蛇) :
사람이 아닌 위험한 동물로 대우하여 건드리지도 않고 가까이 하지도 않음을 이른다.
[주-D003] 세 번 생각 :
《논어(論語)》에, 계문자(季文子)가 세 번 생각하고 행동에 옮겼는데, 공자가 듣고 평하기를, “두 번 생각하면
가(可)하다.” 하고 말했다 해서, “세 번 생각하면 오히려 잘못될 염려가 있다.”는 뜻으로 쓰인다.
[주-D004] 교주고슬(膠柱鼓瑟) :
비파[瑟]를 타는 데는 줄을 마음대로 놀려야 하는데, 줄을 기둥에다 아교풀로 칠하여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면
소리를 낼 수 없을 것이므로, 융통성 없음을 비유한 말이다.
[주-D005] 초(楚)가 비록 …… ‘자’라 칭하였으며 :
초 나라는 본시 주(周)의 제후로서 자작(子爵)이었는데, 뒤에 강성하여 왕이라 칭하였지만
《춘추》에는 본래대로 ‘자’라 일컬었다.
[주-D006] 내 무릎을 …… 수 있고 :
송 나라 휘종ㆍ흠종이 금 나라에서 죽었는데, 그 관[梓宮]을 송 나라에 돌려오지 못하였다.
[주-D007] 호담암(胡澹庵)만이 …… 원하지 않는다 :
전국 시대에 여러 나라가 진(秦)을 제(帝)로 추대하려 하였으나, 노중련은 반대하였다. 호담암은 호전(胡銓
1102~1180)으로, 남송 고종 때의 추밀원 편수관(樞密院編修官)이다. 금이 남침하여 진회가 항복을 주장하자,
호전이 상소하여 진회와 그 도당의 목을 베라고 청한 바 있는데, 호전이 상소한 글을 금에서는 진귀하게 여겨
천금을 내고 글을 입수하려 했다.
[주-D008] 주자(朱子)의 강목(綱目) :
주자(朱子)가 공자의 《춘추》의 의의를 모방하여 《통감강목(通鑑綱目)》을 지어서 포폄(褒貶)을 하였다.
[주-D009] 구정(九鼎) :
우(禹)가 만든 솥으로 중국에서는 가장 중요한 국보이다.
[주-D010] 창랑(滄浪)의 경우같이 …… 초래한 격 :
중국 옛사람의 노래에,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나의 갓끈을 씻을 것이요,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나의 발을 씻으리.”
하였는데, 맹자는 창랑수(滄浪水)가 스스로 취한 것이라 하였다.
[주-D011] 멀리 생각하여 …… 하려는 것 :
사람은 먼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가까운 근심이 없다 하였다. 《논어》
ⓒ 한국고전번역원 | 차주환 신호열 (공역) |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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