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시 연재 칼럼 19 (2025년 3월)
손님
사랑은 귀한 손님이다. 그러므로 사랑이 찾아오면 잘 접대해서 보내야 한다. 혹시, 보내야 한다는 말에 저항감이 있다면 필자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우리의 생도 잠시 왔다 가는 것처럼 사는 동안 내게 오는 것들은 모두 손님들이다. 손님끼리 모여 잠시 살 나누고 눈빛을 나누다 떠나야 하는 것이다. 필자는 시방 생의 허무함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살아있는 것은 모두 유한자有限者임을 분명히 그리고 구체적으로 인식했을 때만이 삶이 진정성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별로 새로운 이야기도 아니지만, “유붕자원방래有朋自遠訪來 불역락호不亦樂乎.”는 공자님의 말씀이다. "벗이 멀리서 스스로 찾아오니 이 또한 생의 기쁨이 아닌가" 정도로 번역이 가능할 것이다. 다만 이 문장에서 왜 벗을 우友로 쓰지 않고 붕朋으로 썼는가 하는 것이다. 友나 朋이나 다 친구를 뜻하는 말이긴 하지만, 그 의미가 약간 달라 보인다. 朋은 주로 붕당朋黨, 즉 친구의 무리 등으로는 쓰이지만 우정友情처럼 붕정朋情으로 쓰이지 않듯이 友도 우당友黨으로 쓰이진 않기 때문이다. 즉 朋은 어떤 정치적 목적이나 사회적 도모를 위하여 모이는 친구들의 무리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반면에 友는 순수한 情으로 이어진 벗으로 쓰인다. 이런 관점에서 위의 공자님 말씀을 다시 읽어보면, 친구가 멀리서 찾아와 무언가 함께 도모하자고 하니 얼마나 기쁜 일인가! 다시 말해 자신을 알아주고 인정해 주는 친구가 찾아오니 기쁘다는 뜻이 된다. 이는 어떤 주석에 의거한 것이 아닌 필자의 개인적인 해석이다. 그러니 혹시, 필자의 이 자의적 해석이 어떤 기준에서 그르다 하더라도 양해하시기 바란다. 그렇다고 필자가 이런 朋의 관계를 부정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가 내가 필요해서 찾아온다는 것은 기쁘고 고마운 일이다, 그만큼 내 삶의 사회적 존재 가치를 인정해 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정서에는 '필요'라는 말을 인간관계에 쓰면 비교적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필자는 이런 허위를 벗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대부분의 관계는 필요한 만큼 유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은 누구나 자기중심적인 본성을 지녔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타적 본성도 지녔지만 말이다.
영어권에서 사랑Love은 아주 일상용어처럼 쓰이는 말이다. I love it. 혹은 I love that.처럼 사람이 아닌 사물에 대한 느낌에도 Love가 쓰인다. 그러나 이렇게 쓰일 경우 ‘Love’가 지닌 어떤 희생, 혹은 헌신의 의미는 옅어지는 것 같다. 그리고 정말 절절히 한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I love you, 보다 I need you라는 말이 더 설득력 있게 들린다. 물론 이도 천박한 영어 실력을 지닌 필자의 독단적인 생각에 불과하겠지만, 필자는 그렇게 느껴진다.
다시, 모두로 돌아가서 이성 간의 성애性愛를 포함한 모든 사랑의 감정은 귀한 손님이다. 잘 접대해서 보내야 한다. 하지만, 고통스럽고 귀찮은 손님도 귀한 손님처럼 잘 접대해서 보내야 한다는 말도 필자는 하고 싶다. 어떤 일이든 한 번뿐인 인생 속의 일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한동안 암 투병을 할 때 여기저기 눈에 띄는 책 중에서 읽은 민간요법의 하나로 애암정신愛癌精神이라는 말에 상당한 거부감과 두려움을 느낀 적이 있었다. 즉 암조차도 잘 다독거려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 그 말의 요지임에도 불구하고, 생과 분리될 수 있다는 두려움과 철저한 소외감 속에 있던 필자는 그 말을 수용하기가 어려웠다. 암을 사랑해야 한다니! 그저 암을 도려내고 혹시 덜 도려낸 부분은 방사선으로 태우고 항암제로 다스리는 의료 기술에 굳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운이 좋아 필자는 암에서 벗어난 지 이십여 년이 지난 요즘도 종종 이 애암정신의 의미를 되씹게 된다. 암을 사랑하라는 말은 암에 걸려 암과 함께 죽으라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암 혹은 그 외의 어떤 질병도 손님처럼 잘 접대해서 보내야 한다. 물론 좀 서늘한 말이기도 하지만.
그런데, 필자에게 언제부턴가 朋이 자꾸 崩(무너질 붕)으로 읽힌다. 아무래도 사회적인 욕망을 실현할 자신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갈수록 友情이 그립다. 하지만 필자가 별로 우정을 베풀지 못했으니 언감생심 어떻게 순수한 우정을 바라겠는가? 그저 이제부터라도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굳건히 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왜냐하면, 타자를 배려하는 마음이 곧 사랑이고 사는 동안 마땅히 해야만 하는 일은 사람 사랑하는 일뿐이기 때문이다.
비루한 집착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기행문과 사진들이 실린 책들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어서 비슷한 내용의 책 몇 권 가지고 있다. 저자에게 사인까지 받아 선물 받은 것도 있지만 , 서점에서 구입한 책도 있다. 퇴직하던 해, 큰맘 먹고 스페인과 포르투칼 여행을 다녀왔지만 페키지 여행이어서 산티아고 순례길은 엄두도 못 내었다. 아마 끝내 난 가 보진 못할 것이다. 이는 이유 불문하고 열정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아침이면 출근하듯 걷는 동네 산책길, 체력이 좀 남아 있으면 북한산 가장자리 둘레길까지 갔다 돌아온다. 산티아고 순례길이려니 하고 걷기 시작한 것이 벌써 내가 퇴직한 햇수와 같은 꼭 10년이 되었다. 병원에 가거나 특별한 집안 행사거나 꼭 참석해야 하는 애경사, 지방공연이 잡힌 날을 빼고는 하루도 거른 적이 없다. 마음에만 품고 있던 제주도 올레길과 한탄강 근처 둘레길은 사진으로만 접했을 뿐,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 내가 가장 멀리 걸으러 간 곳은 지인이 사는 횡성 근처 횡성호 둘레길과 양수리 두물머리 근처 강변길, 그리고 다산 기념관이 있는 마현리 팔당호길 정도이다. 그리고 강화도 트레킹 코스는 노을 보러 잠시 다녀오곤 한다. 그래도 이게 어딘가? 아직 걸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서울에서 집값이 제일 허름하지만 북한산 국립공원 권에 살고 있다는 것. 생각하면 과분한 축복인데도 왜 필자는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걸까? 아직도 인생에 대한 비루한 집착들이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필자는 요즘 이 비루한 집착을 말끔히 털어버리려 애쓰고 있지만, 아직 내공이 부족하다. 그렇다고 비루한 집착이 대체 무어냐고 묻진 마시길 바란다.
난무亂舞의 시대
말들이 난무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유튜브도 그렇고 공영 방송 신문도 그렇고, 마구 세 치 혀로 춤을 추는 시대 임에는 틀림없다.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기 때문일까? 난무亂舞란 글자 그대로 어지럽게 추는 춤이란 말이다. 가능하면 개인의 이름을 들먹거리는 걸 자제해온 필자로서도 이번 이태원 참사에 대한 00이란 사기꾼과 000이란 잡배 같은 종교 사기꾼의 혀 놀림에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그들의 적지 않은 추종자들이 마치 집단 최면에 걸린 듯 떼 지어 난무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갑자기 박근혜 전 대통령이 취임식 전 생중계된 광화문에서 오방굿(?)같은 이상한 의식을 치루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만 해도 나는 그게 무엇인지 잘 몰랐고 지금도 잘 모른다. 좀 낯설었을 뿐, 우리의 전통 의식인 줄만 알았다.
인간은 누구나 약하다. 그래서 종교도 철학도 명상도 무속도 그 나약한 틈에서 존재하게 마련이겠지. 하지만, 이건 아니지 않은가! 00이란 자와 000이란 이상하고 자의적인 종교적 틀을 쓴 자들이 이번 참사에 놀린 혀의 난무는 반드시 응징되어야 한다. 하지만 법적으로 응징할 별 뾰족한 방법이 없어 보인다. 보편적 상식의 힘에 의지하여 우리가 깨어나는 수밖에 없다. 비록 느리고 답답하다 하더라도 말이다.
이 글을 쓴 지도 벌써 2년이 지났다. 우려했던 대로 21대 마지막 국회에서도 채상병 특검법이 부결되었다. 점점 상식마저 뻔뻔해져 가는 시대를 건너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또 1년이 지나 비상계엄령이 발동되었고 시민들은 다시 거리로 뛰어나왔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이 계엄은 해제되었다. 대통령은 탄핵되었지만 세치 혀를 함부로 놀리던 자들이 유령처럼 부활하였고 정치권은 두 동강이 나 극도의 혼란으로 빠져들었다. 환율은 치솟고 비겁한 인간들이 막바지 무속의 막춤을 추고 있다. 하지만 분명 우린 극복해 낼 것이다. 오천 년 역사가 그걸 입증하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