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27일 200만 연합집회에 대해 더 이상 언급하지 않으려고 했다. 떠든다고 그 집회가 안 열릴 것도 아니고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몇몇 신학교 교수가 그 집회 참여를 독려하는 영상을 봤다. 그들은 종교개혁의 전통을 따르는 신학교에서 가르친 이들이니 교회가 이렇게 혼란할 때 바른 가이드를 제시해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다. 마음이 아프다. 같은 신학자로서 깊은 비애와 자괴감을 느낀다. 어떤 이들은 이 일로 인해 찬반으로 갈려 서로 대립하며 분열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같은 목사와 교인들끼리 서로를 비난하고 정죄하지 말자고 한다. 이 문제는 핵심 진리에 관한 것이 아니고 각자의 신념에 따라 어느 쪽을 선택해도 무방한 사안이라고 한다. 그러니 참여하든 그러지 않든 서로의 생각을 존중하자는 것이다.
나도 누구보다 우리 사이에 균열과 분쟁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리고 나와 생각이 다른 이들을 비난하고 정죄하고 싶지 않다. 이 집회를 주최하는 목사가 반대하는 이를 마귀, 바퀴벌레, 이완용이라 해도, 내 글에 어떤 이가 동성애 변태라고 해도 나는 그런 식으로 맞대응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나도 이 문제가 기독교 신앙과 진리와 무관한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사안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이런 실랑이를 할 필요도 없고 서로 편할 것 같다. 그러나 성경과 종교개혁 신학에 매인 나의 신앙 양심은 이것은 크게 잘못되었고 교회가 망하는 길로 간다고 소리치며 괴로워하기에 이런 글이나마 쓰지 않을 수 없음을 양해해주기 바란다.
어떤 이들은 이 일은 기독교 핵심 진리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 집회의 의도와 지향하는 바는 기독교 신앙의 근본을 흔드는 일이라고 본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예배와 기도를 정치적인 목적으로 위해 도구화하는 것은 합당한 예배와 영광을 받으셔야 하는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며 망령되게 부르는 일, 제3 계명을 어기는 것이다. 이는 장로교단이 표준문서로 채택하여 헌법에 명시된 정치 참여에 대한 지침, “비상시국에 겸허한 청원이나 국가 공직자의 요청을 받아 양심상 행하는 조정 외에는 국가와 관련된 시민적 사안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웨민 31장)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다. 교단이 그 헌법을 어기며 굳게 따른다는 전통적인 가르침을 팽개치는 셈이다.
종교개혁자의 신학은 중세 교회의 승리주의와 영광주의에 대항한 십자가의 신학이라고 한다. 내가 약할 때 강함이라는 바울의 신앙을 따르는 약함의 영성이었다. 약함이 교회가 세상에 존재하는 방식이다. 교회는 아무런 정치적인 힘이 없다. 그러나 이렇게 미약한 교회에 만물을 다스리시는 위대한 왕, 예수님이 좌정하여 세상을 움직이신다. 교회의 약함이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기에 가장 적합한 조건이며 통로이다. 교회는 조직과 수의 힘이 아니라 십자가 복음의 미련하고 약한 것으로 세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보다 인간의 힘과 수를 더 의지할 때 처참하게 패배한 비극으로 점철되어있다.
왜 꼭 200만이 광화문으로 집결해야 하는가. 조금이라고 더 모이게 하려고 각 교회마다 독려하고 불참하는 교회들의 백서를 만든다고 압력을 가하기도 한다. 그것은 교세의 위력을 과시하여 세상을 압박해 우리의 주장을 관철하려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모여놓고 우리는 세를 과시하지 말자고 하는 것보다 더 이율배반적인 일은 없다. 거기 모여 우리 죄를 회개하자는 순수한 마음을 가진 이들도 있다. 그러나 광장의 연합집회는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진정한 회개의 자리가 되기 어렵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스바에 모여 회개했듯이 그렇게 할 수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지금의 교회와 같은 신정국가였다. 그때는 그 회개를 듣는 대상은 하나님뿐이었지만, 지금은 세상 사람들, 매스콤 앞에서 하는 것이니 피상적인 회개의 쇼가 될 수 있다. 혹여라도 진정한 회개집회가 되려면 주최하는 목사들의 숨은 거짓과 비리와 음행을 토해내고 그에 상응하는 처벌과 수치를 감당해야 할텐데 그런 각오가 되어있으면 모를까, 그러나 그럴 리는 만무할 것이다. 그러려면 차라리 각 교회에서 하나님이 은밀히 보시는 가운데 통회자복하는 것이 훨씬 더 낫다. 한국교회는 진정한 회개와 개혁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에 있고 특별히 그 집회의 선봉에 선 이들 중에 그런 자들이 있다.
지금 한국에는 차별금지법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 그 법이 국회에 두 번 발의되었으나 지금은 폐기되었다. 다시 상정하려는 시도도 없다. 그런데 차별급지법 반대 구호를 내세우니 다시 그 법에 관심을 환기시키는 역효과만 불러올 수 있다. 그리고 동성애가 합법화되면 그것이 죄라고 설교만 해도 잡혀간다는 등 아주 극단적인 사례를 부풀려 과도한 두려움을 자극하고 있다. 캐나다 개혁교회 같은 데에서는 동성애가 성경에 반하는 죄라고 설교해도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는다고 한다. 주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우리 힘으로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절박함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사려 깊지 못한 행동에 뛰어들게 하는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이 아니라 악령의 충동이기가 쉽다. 이럴 때일수록 단순 논리와 열심으로 행동할 것이 아니라 성경적으로 교회 역사적으로, 미래지향적으로 깊이 사고하고 신중하게 판단하는 성숙한 신앙의 자세가 절실하다. 악법에 대한 우리의 염려와 두려움도 주께서 해결해주시도록 기도로 맡겨야 한다. 그것이 믿음이다.
한국교회가 그동안 세상의 성장제일주의 가치관을 따라 수적 성장을 추구해왔다. 그래서 거대한 세력을 이루었다. 그런 수적인 성장에 문제가 많지만, 거기에도 주님의 자비와 은혜가 함께 했다고 본다. 그런 수적인 성장이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는 성장으로 이어져야 하는데 거기에는 크게 실패했다. 그래서 세상에서 기독교 신앙의 아름다운 매력을 잃어버리고 이 사회에서 외면당하고 있다. 이번 집회로 기독교의 이미지는 더 처참하게 짓밟히고 한국교회는 패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지 않을까 심히 염려된다.
종교개혁은 세상이 아니라 교회의 부패를 개혁한 운동이었다. 교회가 먼저 회개하고 새로워져야 세상에 선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교회는 세상의 죄와 외부적인 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교회 내부의 부패와 타락으로 인해 망한다. 교회는 세상의 어떤 특정한 죄를 저지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교회의 온갖 거짓과 죄악에도 불구하고 회개치 않는 완고함과 어두움으로 인해 망한다. 종교개혁을 맞아 우리 부패한 목사와 교회지도자들의 죄와 위선을 통렬히 회개하는 것이 가장 긴급한 일이다. 그것이 교회가 사는 길이다.
첫댓글 너무 너무 속상해서 가슴이 답답해요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