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박정희’ 인간과 치적
근대화 자취 18년
세차례 경제개발로 중진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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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화의 불꽃 올린 새마을운동 추진
혼미의 헌정사에 유신으로 안정대처
평화통일-자주국방 기틀마련
박정희 대통령이 영도해온 지난 18년 동안에 수많은 국내-외적 도전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근대화과업은 1-2-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의해 성공적으로 추진돼 왔고 경제는 고도성장의 지속을 이룩하여 중진공업국가 대열에 들어서게 된 게 사실이다. 81년에 달성하려던 1인당 GNP 1천달러, 수출 1백억달러 목표가 수년 앞당겨 달성됐으며, 이른바 NICS(신생공업국군)10개국에 끼게까지 되었다.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전통적인 농업사회의 때를 벗지 못했던 한국이 이처럼 발전하게 된 원동력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박 대통령의 강인한 자립의지가 큰 몫을 했다는 것이 많은 전문가들의 평가이다.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위해 꼭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일부 여론의 반동작용에도 흔들리지 않는 과단성과 인기에 영합하지 않는 정직성으로 영도력을 발휘했다.
한-일 국교정상화, 경제개발 5개년계획, 월남파병, 경부고속도로 건설, 남북대화, 헌법개정, 석유파동 극복, 새마을운동, 중동진출 등 중요정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온 힘은 바로 “올바른 평가는 후일의 역사만이 내려준다”는 박 대통령의 굳은 신념이었던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평가하고 있다.
박 대통령이 집권초기인 60년대에 이룩한 주요업적은 무엇보다도 정치안정의 기반구축, 제1-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의한 경제발전, 한-일 국교정상화, 월남의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한 국군파병 등을 꼽을 수 있다.
70년대에 들어와 박 대통령은 독창적인 농촌개발 및 국가발전 모형으로 불리게 된 새마을운동을 제창했고, 10월 유신으로 정치안정을 도모하는 한편 지속적인 고도성장과 자주국방을 추진함으로써 국력배양을 가속화하고 평화통일의 기반을 형성하려 노력했다.
70년 8월 15일 광복절 제25주년 경축사에서 박 대통령은 통일에의 부단한 의지를 천명하고 북한에 대해 적화통일의 망상을 포기하고 국민의 복리증진을 위한 창조와 경쟁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박 대통령의 이러한 제의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겨져 71년 8월 12일 남북한 이산가족을 찾기 위한 남북적십자회담을 제의, 판문점에서 첫 회담을 가짐으로써 53년 휴전이래 최초로 남북간에 대화의 숨통을 트게 했다.
인도적 차원에서 남북접촉의 계기를 마련한 박 대통령은 72년 7월 4일에 발표된 남북공동성명을 주도, 남북조절위를 조직케하여 통일이 구체적 방안을 모색토록 했다.
72년은 농어촌근대화라는 측면에서도 중요한 한해였다. 70년 초부터 소득증대사업이나 새마을가꾸기운동으로 불붙기 시작한 농어촌근대화의 움직임을 새마을운동이라는 이름 아래 더욱 대대적으로 추진돼 나갔다. 새마을운동은 근면-자조-협동의 기본정신 아래 농민들에게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불러 일으켜 농촌의 정신개발과 근대화의 기폭제가 됐다.
이 운동은 70년대 후반기에 들어 국제적인 주목을 받기까지 이르렀다.
남북대화를 주도한 박 대통령은 한반도의 긴장완화와 평화통일을 위한 중요한 구상과 정책을 계속 내외에 천명했다. 73년 6월 23일 평화통일 외교정책에 관한 특별성명을 발표, 호혜평등 원칙에 입각하여 공산권에 대한 문호개방 정책을 밝히고 남북한의 유엔동시가입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혔다.
74년 1월 18일엔 연두기자회견을 통해 남북한 불가침협정을 제의했고 그해 광복절 경축사에선 남북한자유총선거 실시 등 평화통일 3대 기본원칙을 밝혔다.
74년에 들어 국제경제는 73년에 비롯된 석유파동으로 침체와 불황을 면치 못했으나 박 대통령은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국민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 1.14 긴급조치를 공포했으며, 5월 26일엔 기업근대화 및 기업자본의 건전한 조달을 위해 기업공개를 지시했다.
박 대통령은 이와 함께 공무원의 부정부패 부조리를 척결, 사회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서정쇄신의 본격적인 추진을 지시했다.
75년 하반기엔 민방위대 및 학도호국단의 결성과 방위세신설로 총력안보의 기틀을 마련코자 했고, 이에 따라 방위세와 방위성금은 국군장비현대화와 국산무기개발에 획기적인 기여를 하게 됐다.
제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76년에 성공적으로 마무리되고 80년대의 고도산업사회를 지향하는 제4차 계획을 추진하게 되면서 박 대통령은 경제적 풍요로 인하여 국민들의 정신자세가 해이해질 것을 우려, 77년 1월 12일 연두기자회견을 통해 민족 고유의 정신문화의 가치를 역설했다.
박 대통령은 이 해에 의료보호제도와 의료보험제도를 실시케 해 저소득층에 대한 의료시혜를 복지사회로의 첫걸음을 디뎠다.
박 대통령은 77년 연두기자회견에선 대북한 식량원조를 제외하고 남북한 불가침협정이 체결된다면 주한미군철수를 굳이 반대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해 7월 연례 한-미 안보협의회에서 그동안 논의되던 주한미군철수계획이 확정되자 박 대통령은 “우리의 운명은 우리 힘으로 개척해 나가야 한다”면서 본격적인 방위산업의 육성을 지시했다. 한편 이 해에 사상 최초로 1백억달러의 수출목표를 달성하고 쌀생산 4천만섬을 돌파하기도 했다.
78년에 들어서서 그동안 추진해 온 방위산업육성이 열매를 맺어 4월에는 탱크의 양산체제에 접어들고 이어 9월에는 한국형 지대지 장거리미사일 개발에 성공했다.
전통문화의 창달을 통해 국민의 자주정신을 일깨우고 민족문화를 계속 발전시키기 위해 박 대통령은 6월 30일 정신문화연구원을 창설했으며, 이 연구원은 철학, 사학, 어문학, 예술, 유리학, 사회학, 교육학 등 정신문화분야의 저명한 학자들이 모여 연찬하는 요람이 되고 있다.
78년 12월 27일 제9대 대통령에 취임한 박 대통령은 민족중흥을 위해 계속 헌신할 것을 다짐하고 80년대에는 인정과 의리가 넘치는 풍요한 복지사회를 이룩할 수 있도록 모든 국민들이 함께 노력해줄 것을 촉구했다.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도약시대로서 남북대화를 제의하고 주도해 온 박 대통령은 79년 1월19일 연두회견에서 이제까지 논의된 남북한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준, 장소, 시간을 불문하고 남북한당국이 만날 것을 제의했다.
이 제의에 대한 북한은 세계의 여론을 의식했음인지 일단 민감한 반응을 보여왔으며, 그 결과가 남북간에는 대화 아닌 일련의 접촉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북한은 박 대통령의 제의로 대화의 창구가 재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종전의 비현실적인 주장을 되풀이, 모처럼의 기회를 저버리고 말았다.
이해 6월 29일엔 카터 미대통령이 박 대통령의 초청으로 내한, 두 차례의 정상회담을 통해 한-미간의 새로운 동반자관계를 확인하고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한 남북한-미국의 3당국회의를 공동 제의했다. 그러나 북한은 이 제의마저 외면했다.
박 대통령은 거듭되는 석유파동에 대비, 대중동 자원외교를 적극 전개하여 중동산유국들과 경제협력을 강화하기로 하는 등 고무적인 결과를 낳게 하기도 했다.
박 대통령은 지난 69년 8월 닉슨 미대통령과 샌프란시스코에서 한-미 정상회담을 갖고 닉슨 독트린으로 표현되던 닉슨 행정부의 동아시아정책을 비롯한 상호관심사를 논의한 것을 끝으로 “국민소득이 1천달러를 넘을 때까지는 해외여행을 않겠다”는 이유로 외국나들이를 10년째 하지 않고 지내왔다.
그러나 그동안 세계 각국의 많은 지도자들을 서울로 불러 들여 외교의 폭을 넓히고 국제무대에서의 한국의 지위를 굳혀 나갔다.
특히 금년 4월22일에는 제3세계, 특히 아프리카권의 정신적인 지도자로 인정받고 있는 세네갈의 상고르 대통령 내외가 방한하여 한국과 대아 및 제3세계권 외교력 강화에 중요한 계기를 마련케 했으며, 이어 아세안의 훗세인, 온 말레이시아수상, 리관유 싱가포르수상 내외를 초청, 아세안 제국과의 정치, 외교, 경제협력 강화에 새 이정표를 세웠다.
한마디로 박정희 대통령은 민족중흥을 정치철학으로 하여 조국의 근대화에 전념한 정치인이다.
그는 우리 나라를 근대국가로 탈바꿈시켜야 한다는 민족적 소망을 이루기 위해 전력투구한 지도자다.
민족자존 자주의식을 정신적 바탕으로 하여 세계속의 한국경제와 한국기술의 자표를 설정하려는 것이 그의 근대화이념이었다.
그래서 박 대통령의 근대화이념은 정신적 자주성과 개방적 경제체제 개방적 기술체제의 묘합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나는 민족과 국가를 위해 생명을 바친 사람”
“나의 행동은 후대의 사가가 판정해 줄 것이다”
‘하면 된다’ 강력한 추진력
막걸리 줄기는 서민풍모
가뭄 땐 빗소리 기다리며 뜬눈 지새고
지난 5월 19일 저녁 6시께, 청와대 앞뜰 잔디밭에선 테니스 시합을 마친 출입기자들에게 대통령 큰 영애가 베푸는 간소한 저녁 식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기자들이 큰 영애와 함께 식사 전에 음료수를 들며 잠시 음료수를 들며 잠시 환담하고 있는 사이, 본관으로 이어지는 언덕길 위에 박정희 대통령의 모습이 나타났다. 스웨터차림의 간편복을 한 박 대통령은 기자들과 눈이 마주치자, 오른 팔을 번쩍 들어 반가움을 표시하면서 경쾌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박 대통령은 기자들이 청량음료를 마시는 것을 보고는 준비된 맥주를 권하다가 큰 영애에게 “막걸리는 없느냐”고 물었다. 막걸리 주전자가 날라져 오자, 박 대통령은 “한국사람들이 넥타이를 메고 양주만 마셔서야 되겠느냐”면서 한국사람은 풋고추에 된장을 찍어 막걸리를 마셔야 한국사람의 멋과 체취를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기자들에게 한사발씩 따라 권했다.
기자들이 “입으신 스웨터가 멋있다”고 말하자, 박 대통령은 목 뒤부분을 잡아당겨 뒤집어 상표를 보이면서 “국산인데 이만하면 외제에 손색이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식사가 끝난 뒤 부페식으로 준비된 한식 음식그릇을 열어보고는 큰 영애에게 “음식이 조금씩 남았는데 아깝지 않느냐”고 말했다. 큰 영애가 “남은 것은 청와대 식구들이 나눠 먹도록 했다”고 대답하자, 박 대통령은 미소를 지었다.
남의 것보다 내나라 우리 것을 더 위하고 남은 음식의 처리에까지 자상하게 신경을 쓰는 이날의 박 대통령편모는 바로 그의 인간상을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박 대통령의 인간상은 소탈한 시민성, 비타협적인 정의감, 직선적인 강직성, 군인적인 근엄성과 책임의식, 그리고 불사조와 같은 용기로 집약되고 있다. 한 나라의 최고 통치자인 대통령이 된지 16년이 넘고 장성이 된지 25년이 넘었어도, 그에게는 서민적 체질과 서민의식이 지워질 수 없는 낙인인양 그대로 간직돼 있었다.
박 대통령이 일반시민 앞에 모습을 나타내게 된 것은 60년 부산의 군수기지사령관을 맡고 난 다음부터였다. 그전에는 줄곧 일선 지휘관이나 참모만을 지내 국민들에겐 거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취임 초에 가진 첫 기자회견 때 약속한 시간에 어김없이 회견장소에 나타나 기자들을 놀라게 했다. 깨끗하게 세탁은 됐지만 주름을 세우지 않은 작업복 차림을 한 그는 모자에 달린 별 두개와 손에 든 지휘봉 외에 위엄 있게 보이게 하는 장식이라고는 하나도 단 것이 없어, 또 한번 기자들을 놀라게 했다는 것이다.
당시 부산엔 국군의 주요 보급부대와 보급창이 집결돼 있었는데 부대내의 부정이 심해 전투능력에 심한 영향을 끼치고 있어, 이것을 근절시키기 위해 새 사령부가 설치됐던 것이다.
사령관에 취임한 박 대통령은 정치적으로 유력한 배경을 가진 모대령과 소령 등을 과감하게 내쫓아 당시의 언론계를 놀라게 했었다.
박 대통령을 깊이 모르는 사람들은 그가 너무 근엄해서 쉽게 접근하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보기도 하는 모양이나, 박 대통령의 근엄함은 바로 그 자신이 항상 겸손하고 깊은 생각에 잠겨있으며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려는 동양적 사고방식과 몸가짐에서 나오는 것 같다.
몇 해전 여름 심한 가뭄이 한창 계속되고 있을 무렵, 은퇴한 정계원로 한 분이 박 대통령을 청와대로 예방한 적이 있었다. 이 원로는 박 대통령의 모습이 전보다 무척 수척해 있는 것을 보고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박 대통령은 “비오는 소리를 듣고 자려고 이제나저제나 하다가 새벽까지 기다리게 되지요. 그러다가 잠을 설친 탓인지 끝내 잠을 자지 못하면 술을 좀 마시곤 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고 대답했다. 질문한 원로는 박 대통령의 이 말을 듣고 저절로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공연한 것을 물었다는 깊은 자책감에 빠졌었다고 회상한 일이 있다.
많은 학자들은 우리의 민족사에서 오늘날처럼 민족 자주성이 국가영도자에 의해 고창된 적은 일찍이 없었으며, 국민들의 자주의식도 지금처럼 고양된 적은 없다고 평가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68년 2월 서울대졸업식 치사에서 “민족의 생명은 그 자주성에 있다. 이 민족의 자주성은 민족의 생존권과 이익을 위해 스스로의 결단아래 행동하고 또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라고 민족적 자주성의 의미를 설명했다. 이같은 국가의식을 바탕으로 박 대통령은 불사조와 같은 용기를 국민들에게 불어넣었다.
한일 회담으로 국내정치가 한창 소용돌이 칠 때 박 대통령은 “일본사람과 사귀어 어려운 점도 있으나 우리 조국의 발전을 위해 가까운 일본과 국교를 갖지 않을 수 없다”면서 발전의 의지를 보여주었다.
경-부고속도로만 해도 엄두를 내기 어려운 여건속에서 더구나 야당의 맹렬한 반대속에서 “하면 된다”고 주위사람들을 독려하며 추진한 결과 짧은 시일 안에 역사적인 결실을 매듭지을 수 있었다. 이 모두가 “하면 된다” “실망하지 말고 해보자”는 박 대통령의 성격 특징과 영도방식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겠다.
그는 당면하는 모든 압박 고난 난관에 부닥칠수록 위축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당돌하게 저항하는 인물이었다. 한-미간에 한동안 승강이가 됐던 박동선사건 등 이른바 한-미 현안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그의 의지가 이를 웅변하고 있다. 자신의 안전과 이득이나 영화를 위해서 적당히 양보하고 타협하려고 하지 않는 일면인 것이다.
영문으로 박정희 대통령 전기를 쓴 호주의 중진언론인 마이클 키온씨는 그의 책에서 박 대통령의 참모습을 살펴볼 수 있었던 개인적 체험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66년 이른 여름 한국 남쪽해안에 있는 대덕면에서 이북 피난민들에 의해 개척된 간척지와 분배를 위한 식전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알록달록한 나들이옷을 입고 그 부근 여러 부락에서 모여든 2만명 가량의 시골사람들이 앉아 있는 앞에서 박 대통령은 임시로 가설된 단상에 서서 피난민 대표들에게 토지분양서를 손수 나누어주고 있었는데, 근엄하고 위엄 있는 초연한 그 모습은 옛날 멕시코의 지배자였던 용감한 아즈텍족의 영도자가 피라밋의 준공식을 주재하고 있는 장면을 연상시켰다.
73년 여름 어느 날 오후, 박 대통령이 청와대서재에서 필자를 접견했을 때도 근엄 초연한 그의 모습은 변함이 없었다. 이야기를 하고 나서 질문을 기다리고, 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또 이야기를 시작하곤 하는 박 대통령의 침착한 말소리를 듣고 있으면 그가 얼마나 화제에 대해 자신 있게 얘기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었으며, 마치 상대편의 관심과 사상을 완전히 파악하고 설계도를 펼치는 건축가와 같았다.
청와대 서재에서 가진 박 대통령과의 대화는 그 효과에 있어 이중적인 기능을 했다. 왜냐하면 박 대통령의 이야기는 그 자신의 이미지의 윤곽과 내용을 뚜렷하게 나타내주는 동시에 그에게는 항상 조국과 민족에 대한 뚜렷한 신념이 형성되어 있음을 나타내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키온씨는 이 책의 종장에서 “전체주의에 대한 그 자신의 가장 훌륭한 대안을 직시하고 실천한 인물이 바로 박정희 대통령이며, 그것은 곧 발전과 조국애와 양심에 대한 충성을 토대로 한 것이었다”고 적고 있다.
국내의 한 정치학 교수는 박 대통령의 성격적 특징과 영도력에 관한 토론결과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 일이 있다.
박 대통령의 외양은 매우 근엄하며 그의 사상과 행동에는 어수룩한데가 없다. 무서운 결단력과 강력한 추진력, 그리고 치밀한 계획성, 그러나 한편에는 서민적인 인간미, 자상한 인정미가 근엄한 표정의 이면에 흐르고 있다. 박 대통령은 과거의 한국 양반의식과 그들의 통치를 불신하고 규탄한다. 그래서 그의 서민적 소탈함이 없어지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의 영도 스타일도 귀족출신의 정치인하고는 유형을 달리한다. 귀족의식은 인간의 불평등을 전제한다.…그가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지 않는 것은 결코 그가 한국의 서민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서민들에 대한 충직성 때문일 것이다.
박 대통령은 지난 3월 21일 청와대 출입기자들과 저녁을 함께 하는 자리에서 “술을 마시고 자다가 갈증이 나서 깰 때는 맥주 컵 한잔에 맥주 3분의 2, 사이다 3분의 1을 붓고 섞어 마시면 갈증이 싹 가신다”고 말하면서 “가끔 새벽 3, 4시에 눈이 떠지면 잠이 안와 라디오 다이얼을 돌려보는 때가 있다”고 말했다. 이 얘기의 의도는 갈증해소에 관한 자신의 비방을 기자들에게 알려주려는 것이었지만, 새벽에 잠못 이룰 때가 있다는 부분에서 영부인을 잃은 노대통령의 적적함을 엿볼 수 있었다.
비명에 간 영부인의 죽음 앞에서 그처럼 애통해하던 박정희 대통령이 다시 자신마저 비명에 눈을 감았다는 사실은 박 대통령 일가의 비극이기에 앞서 온 민족의 비극이라 하겠다.
이제 나름대로 조국과 민족을 위해 일생을 바쳐 온 박 대통령의 서거에 제하여 그가 늘 “나는 민족과 국가를 위해서 생명을 그 제단에 바친 사람이다. 나의 행동은 후대의 사가가 판정해 줄 것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역사는 그를 평가하게 될 것이다. ◎
출처 : 조선일보 1979-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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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당당했던 대한민국 대통령 박.정.희(스압)
1961년06월10일 농어촌 고리채 정리법 공포
1961년06월11일 재건국민운동전개(국민의식개혁)
1961년07월03일 반공법 공포
1961년06월30일 능의선 개통
1961년07월14일 원자력개원
1961년08월19일 섬진강 수력발전소 건설
1961년09월21일 춘천수력발전소 기공
1961년12월22일 첫 학사자격 국가고시
1962년01월01일 연호를 서력으로 변경(연호에 관한 법률 제정)
1962년01월13일 제1차경제개발5개년계획 발표
1962년01월20일 상법제정공포
1962년02월01일 국민은행 발족
1962년02월02일 기술진흥 5개년계획 발표
1962년02월03일 울산공업지구설정 및 기공
1962년02월10일 국토건설단 창단
1962년03월01일 공문서의 한글전용실시(70년1월1일 관계법 제정)
1962년04월02일 농촌진흥청 발족
1962년04월30일 해양경비대창설
1962년05월12일 반공센터창설
1962년07월13일 국민 의무교육 실시
1963년02월01일 장충체육관 건립
1963년03월30일 원자로 가동식
1963년04월02일 무제한송전실시
1963년12월22일 서독광부·간호원파견(1963.12.22~1966.1.30)
1964년07월01일 경주석굴암복원준공
1964년12월05일 제1회 수출의 날 제정, 1억불 달성
70년 10억불
77년 100억불
82년 200억불
85년 300억불
88년 500억불 달성1!!!!
1964년12월06일 서독방문(유럽국가 첫 방문), 8일 뤼프케 대통령,
9일 에르하르트 수상과 정상회담
1964년 식량증산 5개년 계획 확정
1965년01월25일 제2한강교 개통
1965년02월24일 한국원양어선단 결단(원양어업추진)
1965년03월19일 방공 포병대대 창설
1965년03월23일 청소년 선도 국민 궐기 대회
1965년04월01일 치산녹화 10개년 계획 확정
1965년06월01일 김해간척공사 기공
1965년06월22일 한일협정 정식조인(동경), 8월14일 국회비준(야당불참),
12월18일 비준서 교환(서울) 즉시 발효, 국교정상화
1965년08월31일 해인사 경판고 보수
1965년09월15일 제2 영월 화력발전소 준공
1965년10월15일 율곡사 및 율곡기념관 낙성
1965년11월13일 경호천 종합개발 준공식-칠곡군 북삼면
1965년11월23일 민방위법 제정(민방위대창설:1975.9.22)
1965년12월03일 서울·춘천간 도로포장공사 준공
1965년12월07일 진삼선 개통(사천~삼천포)
1965년12월16일 국내(텔레스)개통
1966년01월19일 정선선 개통(예미, 증산, 고한 간)
1966년01월27일 경북선 개통(점촌~예천 간)
1966년01월27일 한국과학기술원 설립
1966년02월04일 한국과학기술 연구소(kist)발족
1966년03월03일 국세청 발족
1966년03월03일 수산청 발족
1966년04월09일 인천제철공장 기공
1966년04월29일 경인공업단지 건설
1966년05월03일 울릉도 추산 수력발전소 준공
1966년06월08일 충청남도 부여군 남면 지구 전천후
농업용 수원개발사업 준공
1966년06월09일 팔당수력발전소 기공
1966년06월22일 한군군장비현대화계획발표
1966년08월03일 산림청 신설
1966년11월09일 김삼선 기공
1966년11월09일 충남선 기공
1966년11월28일 서울 분묘 보수
1966년11월30일 밀양 영남루 보수
1966년11월30일 서울 종각 보수
1966년12월06일 부여 정림사지 정비
1966년12월17일 아시아 개발은행 건설
1966년12월18일 법주사 대웅전 보수
1967년01월24일 청평·의암 ·화천 수력발전소 건설
1967년02월10일 대도시 그린벨트설정(서울, 부산 등)
1967년03월04일 영남화력발전소 제2호기 기공
1967년03월30일 원자력청 발족
1967년03월30일 과학기술처 신설
1967년04월01일 구로동 수출 공업단지 준공
1967년04월13일 서해안 철도건설
1967년04월25일 종합민족문화센터 준공
1967년04월26일 안중근의사 동상 이안
1967년04월29일 천체과학관 준공
1967년05월01일 국립광업연구소 설립
1967년09월19일 구미전자공업단지건설
1967년09월23일 제1한강대교, 강변도로건설
1967년10월01일 국립묘지정화, 현충탑건립
1967년10월03일 포항종합제철공업단지기공(1973. 7. 3 완공)
1967년11월23일 한국수자원개발공사발족
1967년12월01일 농어촌개발공사발족
1967년12월20일 성산포 어업전진기지 준공
1968년00월 0일 포항항 건설(~1973)
1968년01월22일 대간첩작전본부발족
1968년02월07일 경전선개통
1968년02월11일 병기공장(M16소총)건설착수
1968년03월22일 석유화학계열공업 기공
1968년04월01일 예비군 창설
1968년04월13일 서울대학교 이전 건설
1968년06월13일 「레이다」기지 준공
1968년07월05일 방위산업육성3개년계획확정
1968년07월22일 중앙선,태백선전철화(~1974.6.20)
1968년07월23일 동해안공업도시개발착수(묵호,북평, 삼척)
1968년07월24일 해양주권선언발표(대륙붕 자원확보 및 개발)
1968년07월29일 축산개발 4개년계획 확정
1968년08월30일 영남화력발전소(울산가스터빈)건설
1968년09월09일 제1회 한국 무역 박람회
1968년02월01일 경부고속도로(대구-부산간)기공식
1968년11월01일 제주도 포도당공장준공
1968년11월08일 동양화학공업주식회사준공
1968년12월02일 소수서원 해체 복원
1968년12월05일 국민교육헌장 선포
1968년12월07일 지리산 등 9개지역국립공원지정
1968년12월11일 광화문복원
1968년12월16일 한국 투자개발공사 설립
1968년12월21일 경인·경수고속도로준공
1969년00월00일 교육제도개혁(중학교무시험,고교평준화, 대학입시예비고사제)
1969년02월05일 농업진흥공사 발족
1969년02월15일 지하수개발공사발족
1969년02월15일 한국도로공사발족
1969년02월22일 농업기계화 8개년계획확정
1969년03월01일 국토통일원 개원
1969년03월01일 가정 의례 준칙 공포
1969년04월28일 현충사 중건 준공식
1969년04월28일 불국사 복원 정화작업(1969~1973)
1969년06월04일 부산 화력발전소 준공(21만Kw)
1969년06월17일 마산수출자유지역공업단지조성
1969년07월03일 울산 알미늄 공장준공
1969년07월29일 서울신도시건설착수(한강이남.여의도.한강개발)
1969년08월19일 범어사 대웅전 보수
1969년10월07일 남강「댐」준공
1969년11월01일 농어촌근대화촉진법발표
1969년11월29일 관악산 기상레이더 건설
1969년12월26일 제3한강대교 건설
1970년02월29일 금산사대적광릉 해체 복원
1970년03월07일 비적성공산권에 문호개방
1970년03월22일 정부장기종합교육계획시안마련- 86년까지 단계적으로 실시
(의무교육9년으로로연장, 교육제신설,교원에게병역
1970년04월15일 남해고속도로기공(~1973.11.14)
1970년04월22일 새마을운동 제창
1970년05월16일 서울대교 건설
1970년05월29일 인천 화력발전소 준공
1970년06월02일 금산 위성통신지구국 개통
1970년07월01일 우편번호제 실시
1970년07월04일 배창 방직 기계 준공식 참석(충북 옥천군 옥천읍 양수리)
1970년07월05일 직기 공장 준공-유사시엔 총포 생산도
1970년07월07일 경부고속도로 전면 개통
1970년07월25일 남산 어린이회관 건립
1970년08월02일 낙동, 영산강 종합개발안 영구수해방지위해 다목적댐 건설 수운 개설
1970년08월15일 8.15기념식에서 북한이 무력포기하면
남북 간의 인위적 장벽 단계적 제거 선언
1970년09월16일 공군 전천후 해상소형공격기 S2A배치
1970년10월22일 수도권(경인,경수,경원)고속전철화(~1974.8.15)
1970년11월10일 행주산성 복원 준공
1970년11월19일 세종대왕기념관 준공
1970년12월08일 도산 서원 보수 정화 공사 준공
1970년12월17일 4대강유역 종합개발계획 확정(한강,낙동강,금강,영산강)
1970년12월25일 화엄사 대웅전 보수
1970년12월31일 남원 광한루 보수
1971년01월31일 제주도 일주 도로 준공
1971년03월19일 원자력발전소 기공
1971년03월23일 금강·평택 지구 다목적 농업 개발 사업 기공
1971년04월08일 거제대교 건설
1971년04월12일 서울 지하철 기공
1971년04월13일 칠백의총 보수 정화 준공
1971년06월12일 비무장지대의 평화적 이용 제의, 북한측 거부
1971년08월12일 한국적십자연맹, 남북가족찾기회담을 북측에 제의
1971년08월30일 속리산 법주사의 사천왕문 복원
1971년09월08일 국토종합개발계획 확정
1971년09월10일 서울 북악 터널 개통
1971년09월25일 태릉 국제사격장 준공
1971년09월29일 여의도 5·16광장 준공
1971년11월14일 각종 무기 생산 개시
1972년01월04일 전국 10대 관광권 개발 확정
1972년01월05일 군산항 개발 착수
1972년00월00일 제주관광개발사업추진(~1977년)
1972년02월09일 녹색혁명추진(통일벼 개발)
1972년03월10일 경주 고도개발 10개년획확정
1972년03월23일 현대 울산 조선소 기공
1972년04월05일 산림보호, 육성, 산지개발(입산,수렵금지)
1970년05월29일 인천 화력발전소 준공
1972년04월21일 새마을 운동 노래 작사, 작곡
1972년06월07일 교육용 한자1,781자 선정 발표
1972년06월26일 전국702개섬 개발계획확정
1972년07월04일 한국 개발연구원 설립
1972년07월04일 7.4 남북공동성명 발표
1972년09월30일 영동화력발전소 건설
1972년10월31일 석유화학공장 합동 준공, 울산 석유화학8개공장 건설
1972년11월04일 육산리 고분군 정화
1972년11월13일 시외전화 자동화
1972년11월24일 부산항 대단위종합개발 추진(~1978.9.29)
1972년11월25일 소양강 다목적댐 담수
1972년12월11일 지리산,설악산,낙동강 하류철새보호지역 지정
1973년00월00일 이리 수출 자유 지역
1973년01월12일 공업진흥청 신설
1973년02월16일 제주도 종합개발 착수
1973년03월03일 한국방송공사 설립
1973년05월04일 8개 공업장려지구지정 공업개발
(춘천,청주,원주,대전, 전주, 이리, 목포, 군산)
1973년05월05일 어린이대공원 개원
1973년05월11일 해운항만청 신설
1973년05월24일 중화학공업건설발표
1973년06월20일 중앙선(청량리-제천)전철 개통
1973년06월22일 남해대교 건설
1973년06월23일 평화통일외교정책 7개항 발표(6.23선언)
1973년06월26일 대덕연구단지 건설(10개연구소)
1973년07월03일 포항 종합 제철 준공
1973년07월05일 한일대륙붕 협상 완전 타결
1973년07월10일 전국91개 공업고등학교 신설, 확충계획발표
1973년07월20일 여천 석유화학 공업단지 건설
1973년08월15일 남북 UN 동시가입촉구
1973년10월11일 옥포 조선소 기공
1973년10월17일 국립극장 개관
1973년07월18일 정수직업훈련원 개관
1973년10월19일 문예중흥5개년계획추진
1973년06월06일 창원 기계 공업단지 조성
1973년11월07일 국민연금복지법 제정
1973년11월10일 죽도조선소 건설
1973년12월15일 이스라엘의 점령지 철수 등 4개항의 친 아랍성명 발표
1974년01월18일 남북한 불가침 협정체결 제의
1974년01월24일 최대임해공업벨트개발(제2제철-조력발전소 건설)
1974년03월28일 영동.동해고속도로기공
1974년05월22일 아산·남양방조제 준공
1974년06월10일 낙성대 정화 사업 준공
1974년01월18일 남북한 불가침 협정 체결 제의
1974년12월10일 금산사 미륵전 해체 복원
1974년12월27일 이경관문 해체 복원
1975년01월10일 구미대교 건설
1975년01월21일 농어촌지역의 상수도 시설5개년계획추진
1975년02월01일 대단위농업개발사업추진(금강,평택,광주, 삽교천,계화도)
1975년03월27일 대청 다목적댐 건설
1975년04월11일 중앙민속박물관 개관
1975년05월20일 학도호국단 창설
1975년09월01일 국회의사당 준공
1975년10월10일 서울 어린이회관 이전 개관
1975년10월28일 전국 성곽 보수 사업 추진
1975년10월30일 정립회관 건립(장애인보호육성)
1975년11월07일 함대함 미사일 개발
1976년01월20일 옥산서원보수
1976년01월20일 강화 지역 유적 개발
1976년01월20일 신안 해저 문화재 발굴
1976년03월17일 모산 저마 공장 준공-충남 아산군 배방면 공순리
1976년04월10일 밀양 포충사 정화사업
1976년04월10일 유관순 유적지 정화사업
1976년04월17일 국어 정화, 순화 운동 전개
1976년05월10일 강릉 오죽헌 정화사업
1976년05월18일 한국 인력 검정공단 법안 확정
(기술인력관리,자격,검정의 일원화)
1976년06월24일 유적지전적지 개발을 위한 특별법제정
1976년06월24일 구마고속도로 착공
1976년07월16일 잠수교 개통식 참석
1976년10월02일 반월공업도시 건설
1976년10월12일 쌀의 완전 자급자족 달성
1976년10월14일 영산강 유역 농업개발 제1단계사업준공
1976년10월30일 한산성 충무공 유적 정화사업 준공식 참석
1977년01월12일 대북식량원조 제의, 남북한 불가침 협정 체결되면
주한미군 철수를 반대하지 않는다고 밝힘
1977년01월28일 국방부 순시에서 핵무기와 전투기를
제외한 모든 무기를 국산화하고 있음을 천명
1977년00월00일 남서울대공원 건설
1977년02월15일 산업체부설학교 및 특별학급설치
1977년02월17일 증권감독원 개원
1977년00월00일 전국 도서관 확충
1977년04월30일 초고압송변전시설 완공
1977년05월25일 미군철수 정책 저지(선보완, 후저지)
1977년06월15일 월성 원자력발전소 건설(1977.6.15 ~1982.3.10)
1977년07월10일 자동차공업 육성책 발표
1977년07월30일 경주통일전조성
1976년11월03일 안동 다목적댐 건설
1977년09월22일 소비자보호기본법제정
1977년10월07일 육림의 날 선포
1977년10월09일 여주 영육 성역화 사업
1977년10월09일 부석사 정화 작업(1977~1979)
1977년10월25일 군산화력발전소
1977년10월25일 부평화력발전소
1977년11월04일 아산화력발전소건설
1977년12월07일 전주권 광역도시개발 및 공업단지 조성
1977년12월22일 1백억불 수출달성 기념
1978년01월01일 동력자원부 신설
1978년01월09일 충주 다목적댐 건설
1978년01월18일 군수산업의 육성(헬기, 대포, 탄약,장갑차, 함정, 레이다, 미사일을 생산하고 있으며,
항공기 산업과 특수전차 개발에 착수)
1978년02월20일 행정전산화 10개년 계획 확정
1978년03월30일 호남선 복선 개통
1978년04월01일 국민체조보급
1978년04월14일 세종문화회관 개관
1978년05월03일 월정사복원
1978년05월10일 김덕령장군 유적지 정화사업(광주)
1978년05월10일 임경업장군 유적지 정화사업(충주)
1978년05월22일 부마고속도로건설(1978.5.22 ~ 1980.10.5)
1978년06월05일 태양에너지 연구소 발족
1978년06월12일 경북 울진 원자력 발전소 기공
1978년06월23일 남북간의 교역, 기술, 자본 협력
위한 민간 경협기구 구성을 북한에 제의
1978년06월30일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개원
1978년08월15일 해남 표충사 보수
1978년09월26일 국산 장거리 지대지 유도탄, 중거리 유도탄,
다연발 로케트, 대전차 로케트 시험발사에 성공, 세계 7번쨰 개발 보유국됨.
1978년10월05일 자연보호헌장 선포
1978년10월20일 서해안 일부지역 국립 해안 공원 지정
1978년10월30일 직지사 정화사업
1978년11월08일 관광산업진흥책 발표
1978년12월22일 곽재우장군유적지 조성 정화사업
1978년12월06일 광주박물관 개관
1978년12월30일 장거리 자동 공중전화 시대 개막
1979년03월27일 토지개발공사 설립
1979년04월06일 경주 보문 관광단지 개장
1979년04월18일 잠실체육관 건립
1979년05월30일 상주 정기룡장군 유적지 정화 사업
1979년06월12일 경북 울진 원자력 발전소 기공
1979년06월13일 수도권 광역수도사업 추진(팔당)
1979년07월05일 천호대로 준공
1979년10월02일 환경청 신설
1979년10월12일 국제 올림픽대회 서울 유치 언명
1979년10월26일 삽교천 방조제 준공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시스템은 박정희 정권 때 만들어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대한민국 근대화는 사실상 박정희의 리더십이 만든 위대한 승리.
정말 대단하고 경이로운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중단하는 자는 성공할 수 없다."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한 세대의 생존은 유한하나 조국과 민족의 생명은 영원한 것.
오늘 우리 세대가 땀 흘려 이룩하는 모든 조국과 민족의 생명은 영원한 것.
오늘 우리 세대가 땀 흘려 이룩하는 모든 것이 결코 오늘을 잘 살고자 함이 아니요.
이를 내일의 세대 앞에 물려주어 길이 겨레의 영원한 생명을 생동케 고자 함이다."
[출처] 언제나 당당했던 대한민국 대통령 박.정.희 (스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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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의 문화정책
국난극복ㆍ문화창조 두 갈래 추진
흔히 한 인물의 공정한 역사적 평가는 한 세대인 30년이 지나면서 시작되는 것이 역사학의 통념으로 돼 있다. 30년이 지나면 그 인물과 관련있는 직접적인 상황이 변동돼 대부분 객관적인 평가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26일 갑작스레 서거한 박 대통령에 대한 역사가들의 평가도 빨라야 한 세대 후의 역사가들에 의해 시작될 것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나는 민족과 국가를 위해 생명을 그 제단에 바친 사람이다. 나의 행동은 후대의 사가(史家)가 평가해 줄 것이다”라는 그의 어록의 한 구절처럼 항상 후세 역사가들의 평가를 염두에 두어 왔다. 이같은 역사에 대한 의식의 결과로 박 대통령은 통치기간 중 각종 역사적 유물과 유적지의 보호와 보수정화(補修淨化)에 각별한 관심을 나타냈다.
이 충무공ㆍ세종 추앙…현충사ㆍ영릉 성역화
역사상의 인물 중 특히 국난극복과 관련해서는 이 충무공을, 국가번영과 관련해서는 세종대왕을 높이 평가하고 추앙했음은 잘 알려진 일이다.
69년 완료된 아산의 현충사나 77년 완공된 여주 영릉의 성역화 사업에서 조선조의 두 인물을 추앙한 모습이 드러난다.
현충사 기념식(69년 4월 28일)에서 박 대통령이 이 충무공을 기린 “일찍이 유례없는 민족수난의 역경을 헤치고 나타나 홀로 극난극복의 위업을 이룩하셨다”라는 기념사에서도 그의 충무공에 대한 높은 평가가 잘 나타난다.
이와 함께 세종대왕에 대해서도 한국사상 최고의 성군으로 평가하는 기념사를 한글날에 자주 발표했었다.
▲1969년 4월 28일 현충사 성역화 사업 준공식에 참석한 박 대통령 내외가 거북선 모형 등이 전시된
유물전시관을 돌아보고 있다. ⓒ 국가기록원
▲1977년 10월 9일 영릉 성역화 사업 준공식에 참석한 박 대통령이 세종대왕기념관 세종전에 전시된
세종대왕 어진(御眞)을 바라보고 있다. ⓒ 자료사진
역사상의 인물에 대한 높은 평가는 이들 두 인물에만 그치지 않고 각종 사당(祠堂)의 중건과 사적지의 보수정화를 통해서도 자주 자신의 뜻을 밝혔다. 70년대에 들어와서만도 완성된 것이 20여건을 헤아린다.
70년에 이퇴계의 안동 도산서원을 중수한 것을 비롯해 76년에는 ▷임란(壬亂) 때 순국한 7백명의 의사(義士)를 기린 금산 칠백의총 완공 ▷한산도 제승당 및 ▷유관순 열사 유적지 ▷이율곡의 사당인 강릉 오죽헌 정화사업 등을 완료했다.
77년에는 ▷추사(秋史) 고택의 복원 ▷경주 통일전 완공 ▷윤봉길 의사 묘역 정화 ▷신미양요ㆍ병인양요와 관련한 강화 국방유적지 정화를 완료하고, 작년에는 ▷삼별초의 뜻을 기린 제주 항몽순의비 ▷임경업 장군의 사당인 충주 충렬사 ▷김덕령 장군의 사당인 광주 무등산 충장사 ▷행주산성의 복원 ▷서산대사의 표충사 ▷곽재우 장군의 충익사 등을 보수하거나 새로 지었다. 금년에는 남원의 만인의총과 수원성곽 등의 복원사업이 11월중 준공 예정이었으나 마무리짓지 못한 채 서거했다.
이들 대부분의 사업은 대통령의 직접적인 지시에 의해 이뤄졌으나 특히 칠백의총ㆍ행주산성ㆍ도산서원 정화사업의 준공식에서의 치사를 통해 자신의 역사에 대한 생각을 피력하기도 했다.
칠백의총 치사에서는 “평소에는 밭갈고 씨뿌리며 풍년가를 즐겨 부르던 순박한 우리 국민이지만 일단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싸움은 군인이나 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남녀노소가 창칼을 들고 전쟁터에 나가 관군과 함께 적과 싸워 국난극복의 선봉이 됐다”고 말하고, 도산서원 보수정화 준공식에서는 “조선조 시대에 중국으로부터 유학을 받아들여 그 본래의 원형보다 더욱 훌륭하고 보다 수준 높은 한국적 유학인 성리학으로 발전시켜 거꾸로 이웃 나라에 전파했던 것은 우리 민족의 탁월한 문화창조의 슬기를 과시해 준 좋은 실례”라고 국난극복과 문화창조에 관한 자신의 신념을 말했다.
따라서 대통령이 직접 지시한 각종 문화유적지 보수정화 사업을 크게 나눠보면 여주 영릉, 강릉 오죽헌, 도산서원, 추사 고택 등은 문화창조와 관련이 있고, 나머지 사업들은 국난극복과 관련있는 것들임을 알 수 있다. 이밖에도 박 대통령은 경주 고도(古都) 개발사업과 백제권 개발사업을 통해 우리나라의 옛문화와 전통적인 정신에 관심을 보였다.
전통문화 존중, 외국 대중문화 물결엔 비판적
옛문화와 정신문화 개발에 대한 신념은 금년 연두기자회견에서 종합적으로 설명됐다.
“역사상 국력이 팽창할 때는 정신문화도 활기가 있었다. 일부에서는 우리가 경제개발을 통해 물질적인 성장은 이룩했지만 정신면은 후퇴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정신적 뒷받침 없이 오늘의 성장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정신문화의 바탕은 창조성과 자주성이다.”
즉 박 대통령은 창조성과 자주성을 정신문화의 기본으로 이해하고 한국사(韓國史)에서 이 두가지 기본정신을 추출해 국가정책의 지표로 삼았다.
이같은 목적을 위해 박 대통령은 계속적인 설명을 통해 “정신문화의 학문적 체계를 바로잡기 위해 78년에 정신문화연구원을 설립했고 앞으로도 문화재 보호, 고전 국역사업 등 전통문화의 보전에 힘쓸 방침이다”라고 밝혔다. 특히 정신문화가 발전됨으로써 박 대통령은 “일부 선진국처럼 물질만능의 사회가 되지 않을 것”으로 낙관했다.
물질만능 사회에 대한 경계는 ‘국민교육헌장’의 선포와 담화문에서 잘 나타나는데 담화문은 “무릇 경제적 번영의 밑바닥에는 강인한 의지와 근면한 노력에 사는 국민이 있는 법이며 민족중흥의 저력은 국민정신의 개혁운동에서 우러나는 것입니다. 과거 우리 선인들의 미덕을 계승하는 한편 보다 나은 밝은 내일을 창조하는데 중점이 두어져야 할 것을 강조합니다”로 돼 있다.
▲1978년 6월 30일 한국정신문화원 개원식에서 박 대통령이 치사를 하고 있다. ⓒ 국가기록원
또 지난해 6월 30일 개원한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개원 치사에서는 “자주정신은 문화창조의 원천이며 전통은 바로 문화의 바탕이자 맥락”이라고 지적하고 따라서 “정신문화연구원은 전통문화를 보다 깊이 연구하고 올바로 이해해 주체적 민족사관을 정립하고 조상의 빛난 얼과 자주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새로운 문화창조와 민족중흥에 적극 기여하자”고 말했다. 이같은 목적을 위해 대통령 자신은 “그동안 국적 있는 교육을 강조하고 호국(護國) 문화유적의 복원, 정화에 힘쓰며 충효사상을 고취하게 됐다”고 밝혔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우리 문화의 전반적인 우수성과 그에 따른 정신문화를 강조한 나머지 외래의 대중문화를 수용하는데 있어서는 퍽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이른바 대마초 연예인에 대한 강경조처나 젊은이의 장발에 자주 제동을 건 것은 박 대통령의 그같은 입장을 단적으로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밖에 대중문화와 관련해 많은 진흥의 노력에도 불구, 국산 영화의 수준향상이 안됐다든지 저속성을 이유로 외국 음반의 국내 반입이 제한된 것 등은 대통령의 정신문화 강조가 시행 과정에서 엉뚱하게 부작용을 빚은 부분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이같은 전체적인 박 대통령의 문화정책에서 미뤄보면 대통령 자신은 후세 사가들의 평가에 앞서 스스로 과거의 한국사를 평가하고 ‘전통이 문화창조를 할 수 있는 터전이며 문화 없이는 국가의 발전도 이룩될 수 없음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 같다고 학자들은 말했다. ◎
출처 : 동아일보 1979-10-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