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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일본여행 [J여동] 원문보기 글쓴이: 바이칼1
에치고유자와에서 기차로 나가오카에 도착해 나가오카성에 올라 옛일을 회상하다!
6월 29일 도쿄역 에서 조에쓰 신칸센 을 바꾸어 타고는 한시간 20분을 달려서 긴 터널 을
빠져 나오니 니가타현 남부 고시히카리 쌀의 고장 미나미 우오마군의 이름난 온천향
이자 스키 도시며, 가와바타 야스나리 가 설국 을 집필했다는 마을 에치고유자와 입니다.
기차역 서구로 나와 설국관 을 보고는 관광 안내소에서 시내 지도를 받아 역 동구로 나가
왼쪽으로 150 미터를 걸어 료칸 형식의 숙소인 몬데 호텔 에 체크인을 하는데
마을은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4년을 머물며 노벨상 수상 작품 "설국" 을 집필한 곳입니다.
여주인공 이름을 딴 고마코노유 목욕탕 과 스와 진자 및 타카한 료칸 등을 둘러보고
하룻밤을 자고는 30일 새벽에 유가타 차림으로 지하에 있는 료칸 공중
목욕탕 으로 내려가서는 탕에 몸을 담근 후에.... 상쾌한 마음으로 다시 올라 옵니다.
식당으로 가서는 아침상 을 받는데 이 집에 고양이 가 상에 오른 연어 를 노리고 맴을 도네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맛있는 쌀은 이천미라 하는데, 일본에서는 단연 니가타산 고시히카리
コシヒカリ ( 越光, "고시국의 빛") 이니 그중에서도 여기 우오누마 魚沼市 산을 최고로 칩니다.
이곳 에치고유자와 마을은 남우오누마군 에 속하니.... 최고의 고시히카리 쌀 생산지인데
눈이 많고 기온이 낮은데다 눈이 공기를 깨끗하게 해서 효모와 누룩균등 미생물
배양이 잘되는 탓에 일본주 청주 도 유명하니 교토, 고베와 더불어 일본 3대 사케 입니다!
쌀의 종류는 인디카 와 자포니카 그리고 자바 로 나뉘는데 한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 동북삼성과
캘리포니아 에서 생산되는 자포니카 Japanica 는 10% 로 "일본종" 이라고 부르는데,
쌀은 야요이 시대에 한반도에서 일본 규슈에 전해졌다지만 "한국종이 아니고 "일본종" 이라?
이는 일본인들이 자포니카 품종 쌀 에 대해 학술적 성과를 이루고 세계학회에 등록한 때문인데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 "김치" 를 공식 메뉴로 올리고 납품계약을 따낸게 일본 이라?
이 소식이 알려지자 한국사회가 뒤집히니... 정부는 대사관을 통해 외교적으로 미국에
읍소해 우여곡절 끝에 농협이 김치를 납품해 국민정서를 달랬는데 납품가는 공짜 였다지요?
하기사.... 2002년에 한일 월드컵 도 일본이 1989년에 유치 선언을 하자, 아벨랑제
FIFA 회장이 이번엔 아시아 차례라고 화답해 기정사실화 되었는데, 월드컵에
관심조차 없었던 한국은 1993년 10월 28일 카타르 도하에서 북한을 이기고
1994년 미국월드컵 본선 에 진출하자 즉흥적으로 2시간후에 바로 유치를 선언합니다.
이후 정몽준 은 엣날 88 올림픽에서 부친 정주영 씨가 했던 것 처럼 그의 장기를 발휘해...
요한슨 유럽연맹 회장의 지지를 획득하면서 결국 한일 공동개최로 결정되었는데,
한국은 "한일월드컵" 이라는 명칭으로 "명분" 을 택한 반면에..... 일본은 "결승전"
을 일본에서 연다는 "실리" 를 챙기고 수도 도쿄 대신에 지방도시 요코하마를 선택합니다!
천안함 폭침후 미국은 한국 해군과 "일본해" 에서 연합훈련했다고 발표했으니 1920년대 국제수로기구가
정한 이래 공식명칭이라.... 정부는 관심조차 없다가 1999년 반크가 만들어져 동해 표기를 주장하자
정부 수립 52년만에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했으며, 1991년 일본 아사히 신문 기자 우에무라 다카시 가
김학순 할머니를 찾아내 종군위안부 를 세상에 알리기 전까지 한국에서는 관심조차 없었던게 아쉽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아침 식사후 체크아웃을 하고는 역 으로 가서는 300엔에 배낭을
코인로까 에 넣는데.... 반대편에 보니 여긴 "스키를 맡기는 코인로까" 도 다 있네요?
그러고는 에치고 유자와역 창구에 가서는 역무원에게 JR 패스를 보이고는 티켓을 받습니다.
조금 기다려 니가타 로 가는 조에쓰 신칸센 上越 新幹線 Max とき 기차를 타는데
우리가 하룻밤을 지낸 여기 에치고유자와 마을 은 도쿄 북쪽 산맥속에
자리한 산속에 분지라..... 다시 긴 터널 을 지나서는 이윽고 평야 지대가 펼쳐집니다.
에치고 유자와 역을 출발한지 40분만에 기차가 멈추는데 보니 나가오카 역長岡駅(장강역)
이라.... 내려서는 걸어서 역사를 빠져 나오는데, 이 도시 나가오카 長岡(장강) 는
에치고 평야를 흐르는 시나노강 중류로 17세기에 영주의 거성 을 중심으로 발전했습니다.
하지만 유서 깊은 도시 나가오카는 제2차 세계대전시 미군의 공습 으로 80% 가 불탔습니다!
일찍이 1868년에 에도 도쿠가와 막부를 타도 하고 일왕(천황)을 옹립하는 메이지 유신
무진전쟁 시에도 신정부군인 조슈번(야마구치현) 야마가타 아리토모군의 공격 을 받습니다.
나가오카번은 7만석으로 일 본 270개 번 중에서도 작은편 이지만..... 중신 가와이 쓰구노스케 는
1천 병사를 개틀링 기관총 2정 에 신식 라이플 소총인 미니에총 으로 무장을 시켰습니다.
당시 개틀링 기관총은 일본 전국에 3정 밖에 없었으며 미니에총은 기존의 총의 10배의 위력이라?
처절한 전투후 중과부적으로 패해서 망해버린 번 을 또 다른 중신 고바야시 도라사부로 가
이웃 번이 제공한 쌀 100석 구휼미로 학교를 세워 인재 를 길렀다고 했던가요?
이 쌀 백가마의 날을 "코메햐구효데이" 라고 하는데, 고이즈미 총리 도 자주 언급했습니다.
해서 역사의 현장인 나가오카 성 을 보려고 들렀는데 기차역 구내에 낯익은 인물의 사진이
보이길래 자세히 살펴보니 이런? 여기 나가오카 출신 해군 제독 야마모토 이소로쿠
라!!! 일본은 유럽 처럼 270개 번으로 갈라져 오랜 세월 자치를 했으니 봉건제도 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서울에서 고향에 내려 가는 것을 “귀향” 이라고 하는데 비해 일본은
중앙인 도쿄에서 후쿠오카나 야마구치 및 니가타에 내려 가면 “귀국”
이라고 부르니 자신의 나라(고향, 번) 에 대한 애착이 엄청 큰지라 마쓰리 가 성대합니다.
오늘 제2차 세계대전인 태평양 전쟁의 일본측 핵심 인물인 해군 제독 야마모토 이소로쿠
山本五十六(산본56) 가 여기 나가오카번 출신 이란걸 알고는 놀라는데....
그는 주미 대사관에 무관 으로 근무했던지라 미국과의 태평양 전쟁을 한사코 반대 합니다.
야마모토 이소로쿠 山本五十六 는 젊어서는 러일전쟁 에 참전했고 재래식 무기인
거함 거포 위주의 순양함 대신에 공격용 항공기 를 개발해 항공모함 전단을
편성하는데 역점을 두고 심혈을 기울였으며 독일, 이탈리아등 삼국동맹에 반대 합니다.
하지만 전쟁은 시작되고...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서전에 미 해군을 격멸하기로 작전계획을
입안해서는 나구모 중장 으로 하여금 6척의 항공모함이 포함된 연합함대 를
지휘하게 해서는 1941년 11월 26일 일본 홋카이도 동북부에서 출발해 하와이로 향합니다.
미국 해군에 들키지 않기 위해 북태평양을 항진해 11일만인 1941년 12월 7일 아침 하와이
진주만을 공습 하는데... 미군은 레이더가 있었음에도 방심한 탓에 기습을 당했으니.
진주만에서 전함 5척을 포함 12척을 침몰 시키고 항공기 188대를 격추했으며 필리핀
수빅만과, 싱가포르의 영국 함대에 괌 및 홍콩을 공격해 연합군 함대를 초토화 시킵니다.
1942년 2월 15일 싱가포르에서 영국군의 항복 을 받고 3월 8일 인도네시아를 점령
하고 4월 9일 필리핀에서 맥아더를 도망치게 했으니 25만명을 포로로 잡고
항공모함 1척을 비롯해 20여척 배를 침몰시킨데 비해 일본 군함은 한척 손상 없이
1만 5천의 희생으로 그쳤으니 6개월간 태평양과 동남아는 일본군 독무대 였습니다.
하지만 이후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 에서 "일본군의 암호가 해독" 된데다가 레이더
와 과감한 정찰기 운용으로 인해 미군이 일본 해군의 움직임 을 손바닥 보듯
들여다 보고 있었는지라.... 항공모함 6척 중에 4척이 침몰 하는등 큰 패배를 당합니다.
일본은 1900년 의화단사태 때 중국 베이징을 점령한 8개국 가운데 유일한 아시아국이었고
러일전쟁 에서 영국과는 동맹국이고 미국과 우방이었으며.... 1차 세계계전에서는
영국, 미국과 같은 연합국으로 승전국이었고 볼세비키 공산혁명을 저지하기 위해
미국, 영국등과 시베리아에 출병하는 등 4차례에 걸쳐 영국 및 미국 과 같은 편이었습니다.
파리 개선문 에 가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면 위층 전망대 전시관에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연합국 군인들이 개선문을 지나 상젤리제 대로를
행진하는 사진 들이 있는데 거기 아시아 인종 들도 행진하니 바로 일본군 입니다.
일본 군부에는 북진파와 남진파 가 격열하게 대립했으니... 북진파는 미국과 연합해 북쪽 소련을 경계
하기 위해 몽골과 연해주 를 점령하자는 파 이고, 남진파는 중국을 손에 넣고 동남아를 점령한
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꿈이었던 인도까지 점령해서 세계의 절반 을 일본이 다스리자는 파 입니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지만 2차대전에서도 야마모토 나 수상을 지낸후 마지막 조선총독으로
온 아베 노부유키 등 북진파의 주장대로.... 일본이 5번째로 계속 연합군에 속해 중국과
동남아에서만 철수했으면 조선과 만주에 몽골을 포함한 큰 영토 를 가진 대국일 것인데,
그럼 조선인들은 모두 만주로 강제이주 당하고 한반도는 거의 일본인 들이 거주할 것입니다?
나가오카역 을 뻐져 나오니 시간이 8시 45분 인데도 등교하는 여학생 들이 기차에서
내리는걸 보니.... 1교시 수업은 9시 가 되어야 시작되는 모양인데, 이후 도시에서
시골에 있는 학교로 등교하는 학생들은 7시부터 기차를 타는걸 숱하게 목격하게 됩니다.
역 광장에서 택시를 타고 "나가오카 성" 을 보러 유큐산코엔 悠久山公園(유구산공원) 으로
가다가 택시 기사가 공원이라고 해서 내렸는데, 언덕을 오르면서 보니 여긴 무슨 신사
인데.... 옛날 번주가 거처하던 성 안에는 이처럼 신사가 자리한 것이야 자주 보는 일입니다.
신사에서 계단으로 언덕길을 오르니 향토자료관 鄕土資料館 이라고 불리는 나가오카성 長岡城跡
이 나타나는데, 도쿠가와씨 가 일본을 260여년 통치한 비결 은 그가 남긴 "유훈" 에서 짐작
하듯이.... 매사에 몸을 낮추며 사치와 오만을 경계하고 수양 을 게을리 하지 않았기 때문 입니다!
“사람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길을 가는 것이니 서두르지 마라.
무슨 일이든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음을 알면 오히려 불만을 가질 이유도 없다.
마음에 욕심이 차오를 때는 빈궁했던 시절을 떠올려라.
인내는 무사장구의 근본이요, 분노는 적이라고 생각해라.
이기는 것만 알고 지는 것을 모르면 반드시 해가 미친다.
오로지 자신만을 탓할 것이며 남을 탓하지 마라.
모자라는 것이 넘치는 것보다 낫다.
자기 분수를 알아라. 풀잎 위의 이슬도 무거우면 떨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1853년 에 미국 페리 제독의 흑선 이 찾아와 개항을 강요 하니 에도막부는 서양의
무력에 굴복해 문을 열자 일본 무사들은 "일본의 존엄이 훼손" 되었다며 반발하니
도쿠가와 막부를 타도하고 일왕(천황) 을 옹립해 서양을 물리치자는 존왕양이 운동이
일어나 조슈번(야마구치현) 과 사쓰마번(가고시마현) 에 도사번 과 히젠번 이 궐기합니다.
도사번 출신 사카모토 료마 (坂本龍馬) 는 원수지간인 조슈번과 사쓰마번 을 화해시켜 삿초
동맹 을 성사시킨후 도쿠가와 막부 15대 쇼군 요시노부 에게 국가 통치권을 일왕(천황)
에게 돌려줄 것을 권고하니, 1867년 10월 14일 대정봉환(大政奉還) 이 이루어지는데,
쇼군 요시노부는 이후에도 자신이 총리대신으로 일본을 계속 통치할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부진한 권력 이양에 불만을 품은 존왕파(尊王派) 는 1867년 12월 9일 교토 왕궁의 출입문을
점령하자 새해들어 막부의 군함은 사쓰마번 기선을 포격하고 지상군 병력을 움직이니
1868년 1월 3일 교토와 오사카 사이 도바(島羽) 와 후시미(伏見) 에서 첫 전투가
벌어졌는데 병력수는 존왕파가 5천명 인데 비해 막부는 1만 5천명 이었으니 열세였습니다.
존왕파 는 나가사키의 영국인으로 부터 신식 후장총 미니에총 과 암스트롱 곡사포 에다가
기관총 개틀링포 를 구입했으니 화력에서 우세했으나 막부군 직할부대도 분당 2발인
일반 소총에 비해 분당 10발을 발사할수 있는 프랑스제 소총 으로 무장한게 장점인데
일진일퇴를 거듭하다 셋째날 교토의 존왕파 신정부군이 승기를 잡아 오사카성을 점령합니다.
병력에서 열세임에도 예상외로 승리를 거둔 요인은 명분이 존왕파 에게 있었으니 둘째날
존왕파는 일왕(천황) 이 내린 어기인 니시키노미하타 를 내걸고 싸우자.... 반란군이
관군 으로 변한지라 막부 연합군은 충격 을 받았으니, 임금에 대한 저항은 자신뿐
아니라 자손 대대로 역적으로 찍히는 불명예 를 의미했기 때문이니 사기가 저하 되었습니다.
이 전투로 일본을 대표하던 막부는 역적으로 몰린 반면에 존왕파는 신정부군 으로 변신
했으니 유신 정권 이 수립된 것이라! 이에 막부 해군사령관 가쓰 가이슈 는
사쓰마번의 사이고 다카모리 와 만나 담판을 짓고는.... 평화적으로
에도성(도쿄) 을 신정부군에 넘겨 주고는 쇼군 요시노부는 미토번 으로 물러납니다.
쇼군 요시노부는 도쿠가와씨의 오랜 근거지 인 에도성(도쿄) 에서 최후의 일전 을 준비
했으나.... "내전이 계속되면 중국 과 인도 처럼 외세(영국, 프랑스, 미국) 의 발굽
아래 들어갈 것" 이라는 설득에 일왕(천황) 에게 정권을 내놓습니다 ( 존왕파는 영국에서
막부는 프랑스와 미국에서 무기 지원을 받았는데 남북전쟁후 미국은 상해에 무기를 싣고옴 )
도바 방면의 막부군과 후시미 방면의 막부군은 1월 5일 요도성에 입성해 저항하려 했으나
요도번이 거부하자 하시모토에 진을 치고 신센구미 가 기습을 하기도 했으나....
쓰 번이 배신해 측면에 포격을 가하자 후퇴하는데, 그외 시부사와 세이이치로등의
창의대 4천명은 우에노에서 결사항전 했으며 동북지방 아이즈번 등도 저항을 계속했읍니다.
동북 오우에쓰 동맹 의 핵심 아이즈번(후쿠시마현 서부) 으로 진격한 신정부군
은 이웃 번들을 하나씩 무느뜨리고 아이즈번을 포위한후 오토리군
방어선을 공격하여 보나리 고개를 확보한후 아이즈성으로 진격 하니
미처 성에 들어가지 못한 여자들 200명은 나라가 망했디고 절망해 자결 합니다.
아이즈번의 예비대인 청소년으로 구성된 백호대 도 아이즈성에 연기가 자욱한 걸 보고는
아이즈성이 함락된 걸로 착각해서 자결 해 나라와 함께 운명을 같이했는 데....
막부 잔여 세력과 해군은 홋카이도 하코다테로 후퇴해 새 나라 를 세우나 결국 항복합니다.
그전에 여기 니가타현의 나가오카성 은 1868년 5월 메이지유신 무진전쟁시 신정부군
인 조슈번(야마구치)의 야마가타 아리토모 군의 공격을 받게 되는데.....
나가오카번 은 7만석으로 일본 260개 번 중에서도 작은편이지만 중신 가와이
쓰구노스케 는 진작 개화한 자로 1천 병사 를 신무기로 무장해 무장 중립 을 선언합니다.
나가오카번 에 중신 가와이 쓰구노스케는 번의 재정을 털어 1천 번병 을 개틀링
기관총 2정에 라이플 소총인 미니에총 으로 신식 무장시켰던 것인데.....
당시 일본 전체를 통털어 개틀링 기관총은 단지 3정 에 불과했었다고 합니다?
야마가타 는 1898년 원수로 승진한후 내각 총리대신으로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같은 조슈번 출신으로 초대 일본 총리와 조선 통감 을 지내며, 야마가타 보다
늘 한발 앞서 나갔던 이토 히로부미 는 국제적인 안목이 있는지라 국제 외교 를
중시하니 저돌적인 야마가타를 견제 했는데.... 1909년 하얼빈에서 저격당해 죽습니다.
이게 왠 횡재냐? 자신을 견제하던 노회한 이토 히로부미가 죽었으니 야마가타
는 물만난 고기 처럼 군부와 관료를 틀어쥐고는 이토 히로부미가 국제여론
때문에 꺼려하던..... 조선을 바로 합병 하고는 군국주의 로 달려갔던 것이지요!
아마 이토 히로부미가 죽지 않았으면 국제여론 을 중시하는 영악한 자라... 사실상 조선
을 지배하고 있는데 굳이 무리한 합병을 해서 열강의 눈총 을 받을 필요가 없으니
프랑스가 1884년 베트남 응우엔 왕조 8대 함 응이 로 부터 1926년에 즉위하는
13대 바오다이 황제 를 유지한 것 처럼 조선 왕조의 왕위 를 계속 유지시켰을 것일러나?
고종은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을 체결하는데.... 제 3국의 침략을 받을시 미국 은
즉시 개입해 거중 조정해서는 "조선의 안보를 보장" 한다고 되어 있었으니
미국은 치외법권 과 운산금광 채굴권 및 경인철도 부설권 등 막대한 이득을 챙깁니다.
하지만 정작 위기에 즈음해서는 필리핀 식민지 통치에 일본의 도움을 얻을 목적으로
“태프트(육군장관) - 가쓰라(총리) 밀약” 을 맺고는 차갑게 거절하며 했다는 말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주먹 한번 내지르지 못하는 그런 나라는 도울 가치가 없다”
메이지유신후 2년간 미국과 유럽을 일주하는 150명 대표단을 이끌었던 이토 히로부미
는 일본이 청일전쟁 승리후 요동반도 를 차지하자 프랑스, 독일 및 러시아가
삼국 간섭하는 바람에 토해 놓은 쓰라린 과거 때문에 신중했지만..... 전형적인
무장으로 직선적이고 저돌적인 성격의 무골인 야마가타 아리토모 는 달랐던 것이네요?
1864년 12월 조슈번이 막부 10만 대군의 침입에 굴복하자 쇼인의 문하생 다카스키 신사쿠
는 80명 을 이끌고 거병해 4천 조슈군과 10만 막부군에 대항하는 모험 을 저지릅니다.
그 전인 1857년 요시다 쇼인 은 조슈번 하기시에서 쇼카손주쿠를 열어 90명 제자를 배출
한후 막부에 출두해 반역을 꾀했다고 자복하고 사형당하니 혁명을 위한 씨앗 이 되었습니다.
1863년 쇼인의 양이퇴치 유지를 이은 제자 구사카 겐즈이 는 시모노세키에서 미국 상선등에
포격하니 이듬해 1864년 4월 영국 9척, 프랑스 3척, 네델란드 4척, 미국 1척등 17척
5천명 연합함대가 시모노세키를 포격하고 상륙할때 쇼인의 제자 다카스키 신사쿠 는 2천
기헤이타이부대를 창설해 응전하고 이후 평화교섭에 히로부미를 통역으로 배짱 을 부립니다.
조슈번 쇼인의 제자 들은 조선침략에도 앞장서니 1894년 청일전쟁시 1착으로 4천을 이끌고
서울 경복궁을 기습해 고종을 포로로 잡고 아산에서 청군을 격파한 오오시마 요시마사 는
전 총리 아베 신조의 외고조부 이며 명성황후 시해를 기획한 조선공사 이노우에 가오루,
후임으로 실행한 미우라 고로, 을사 늑약시 총리 가쓰라 다로,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 2대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 등 조선은 조슈번에 먹힌겁니다.
선각자인 에도(도쿄) 의 쇼잔 은 천하의 정치를 아는자 조슈번의 요시다 쇼인 이고....
내 아이를 맡겨 기를만한 자 나가오카번의 고바야시 도라사부로 라고 했으니!
가와이 쓰구노스케가 패전으로 죽은후 고바야시 는 참담한 번의 살림에서 분가한 이웃번이
제공한 쌀 100석을 무사들 양식이 아닌 구휼미로 학교 를 세워 인재 를 기릅니다.
나라(나가오카번) 가 망했으니 기댈 곳이라고는 장래를 짊어질 소년 들이라고 생각했지요?
그 외에 가장 격렬하게 신정부군에 저항한 곳은 몇년전에 지진 쓰나미로 원자력발전소가
폭발한 후쿠시마현의 서부 지방에 해당하는 아이즈번 会津藩(회진번) 이니....
아이즈번은 후쿠시마현 서부 와카마츠시를 기반으로 28만석의 번이었다고
하는데 번주 마쓰다이라 가문 은 도쿠가와 가문의 혈족 으로 매우 각별한 사이였습니다.
나가오카는 눈 이 많이 오는지 나가오카 성 내부에는 눈속에서 살아가던 옷이며
신발등 여러 장비들도 함께 전시되어 있는 것이 보이고.... 2차 세계대전시
해군 사령관으로 연합 함대를 이끌고 북태평양을 횡단해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했던 해군 제독 야마모토 이소로쿠 를 이곳 출신이라고 전시해 놓은걸 봅니다.
그러고는 성을 나와 언덕을 따라 내려오는데 멀리서 악기 소리 가 들려 쳐다
보니 어떤 청년이 오카리나 를 불며 연습에 열중하고 있나 보네요?
다시 신사 에 도착하니 좀 전의 그 아가씨가 이때 까지도 일하고
있기에 나가오카역 長岡駅(장강역) 으로 가는 버스 정류소 를 물어 봅니다.
손을 들어 가르쳐 주는가 싶더니 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은지 하던일을
접고는 자전거를 끌고 우리더러 따라 오라며 앞장을 섭니다.
우리가 걷는 속도가 느리다 보니 아가씨도 자전거 를 타지 못하고 끌고 가는데....
정류소에 도착해 게시된 종이에서 10분 정도면 버스 가 올거라고 말해주네요?
그러고도 가지 않기에 서툰 일본어로나마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는데 우리 버스를 함께
타려나 했더니.... 타는걸 보고는 손을 흔들어 주고 비로소 자전거에 올라 타네요?
일본 사람들은 친절 하니 20% 는 극히 친절, 30% 는 매우 친절, 30% 는 보통 친절
그리고 20% 는 불친절한데... 세상에서 비교할 나라는 러시아 할머니 들 뿐이지 싶습니다!
15분이 걸려 나가오카역 에 도착해서는 역으로 들어가 동해 바다의 항구도시
나오에쓰 直江津(직강진) 로 가는 기차를 타니 열차는 내륙을 달리더니
이윽고 푸른 동해 바다 가 나타나는데.... 오른쪽으로 바다를 끼고 달려
50분만에 조에쓰시 上越市(상월시) 나오에쓰 直江津(직강진) 역에 도착합니다.
그런데 기차는 일본 스키 의 발상지 조에쓰 묘고 까지 간다니 중간에 다카다 도 가는지라, 나오에쓰
에서 내리지 않고..... 30분을 더 달려서 드디어 니가타현 다카다 高田(고전) 역에 내립니다.
묘고 고원은 1911년에 일본이 오스트리아 스키어를 초청해 육군장교들에게 스키를 가르친 곳입니다.
연꽃이 예쁜 다카다코엔 高田公園(고전공원) 은 에도 막부 번주 마쓰다이라 다다테루 가 쌓은
다카다성 (高田城 고전성) 으로..... 이곳의 밤 벚꽃 축제 는 아오모리현 히로사키성 공원
에다가, 도쿄 우에노온시 공원과 함께 일본 3대 밤 벚꽃 축제에 들 정도로 유명하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