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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질문이 진실해야 대답도 진실하게 됩니다!
언젠가 나름 어깨 힘주는 분들 모인 한 단체에서 저를 강의에 초대하면서 엄청 꼬치꼬치 묻더군요. 신학교 외에 어느 대학, 어떤 분야를 전공했는지? 유학은 어떤 나라를 다녀왔고, 취득한 학위는 어느 정도 수준이고, 어디서 가르쳤는지?
그래서 저는 대답했습니다. “솔직히 저는 어린 시절 가정 형편이 워낙 좋지 않아 겨우겨우 학교를 다녔습니다. 몸도 좋지 않아 성적도 언제나 바닥이었으며, 유학이라고 몇 년 다녀왔지만, 배운 바가 거의 없는, 정말이지 내세울 것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랬더니 즉시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언제든지 초대 계획을 취소하셔도 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취득한 혜성처럼 등장하신 예수님, 그리고 그리로 몰려가는 군중, 당대 유다 세력가들을 너무나도 당연히 경계심을 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을 보내어 예수님의 뒤를 캐기 시작합니다.
예수라는 인물은 도대체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는가? 어떤 가문 출신인가? 어디 율법학교를 졸업했는가? 그에게 가르침을 준 스승은 누구인가? 교수 자격증은 취득했는가?
알아봤더니, 웬걸, 예수란 인물은 깡촌 중의 깡촌 나자렛 출신이었습니다. 그의 부모는 무학력자였습니다. 당연히 예수는 율법 학교 문턱도 밟아보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정보를 파악한 수석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얼마나 다급했던지 직접 나서서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그때 예수님은 기가 막힌 역질문을 하나 던지시는데, 그 질문 하나로 그들의 말문을 닫아버리셨습니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당시 세례자 요한에 대한 명망과 인기와 인지도는 전 국민적인 것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미 백성들 사이에 하늘로부터 온 하느님의 전령이자 구약시대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대예언자라는 인식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세례자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고 부정하면 백성들의 불신과 공분을 사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의 세례가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면 세례자 요한이 준비하고 예언한 예수 그리스도 역시 하늘에게서 온 것이 당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로서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오신 분, 예수님은 하느님으로부터 권한을 받으신 분이라는 것이 분명히 드러난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기를 거절하십니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질문이 진실해야 대답도 진실하게 됩니다. 그들의 질문에는 진정성이 없었으며 다분히 계산적이었습니다. 질문다운 질문이 아니고 한 사람을 사지로 몰아넣기 위한 정치적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무답(無答)은 사실 정답이었습니다. 당시 영적으로 무지하지 않고 정직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자라는 사실 정도는 기본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이 요르단강에서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 때 하느님 아버지와 성령께서 예수님의 위격과 권한을 명백히 증언하셨습니다. 당연히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권한을 받으신 것이고, 백성들에게 가르칠 권한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사람으로부터 온 권한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온 권한을 지니기 위해 노력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하늘로부터 온 권한은 사람들을 내리누르기 위한 권한, 코너로 몰아붙이기 위한 권한이 아니라 사람을 격려하는 권한입니다. 사람을 일으키고 살리는 권한입니다. 이웃 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권한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마르코 11,27-33
마음을 빼앗기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경찰공무원, 심지어는 동네 KFC 직원 채용에서도 혼자만 낙방하며 실패만 거듭하다가 결국 알리바바라는 유통회사를 성공시켜 아시아 최고 갑부가 된 마윈 회장에게 한 기자가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회장님이 함께 일하기 힘든 사람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마윈 회장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가장 일하기 힘든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공짜로 무언가를 주려고 하면 그들은 함정이라고 할 것입니다.
작은 비즈니스에 대해 이야기하면 돈을 별로 못 번다고 하고, 큰 비즈니스에 대해 이야기하면 돈이 없다고 합니다.
새로운 것을 시도하자고 하면 경험이 없다고 하고,
전통적인 방식을 시도해보자고 하면 경쟁이 많아서 어렵다고 합니다.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이라고 하면 다단계라고 하고, 상점을 하나 같이 운영하자고 하면 24시간 내내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자유가 없다고 하고,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자고 하면 전문가가 없다고 합니다.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구글에게 물어보기를 좋아하고, 희망이 없는 친구들에게 의견을 듣는 것을 좋아하고, 대학교 교수보다 더 많은 생각을 하지만 장님보다 더 적은 일을 하죠.
그들에게 한 번 물어보세요.
더 나은 삶을 위해 ‘지금 당장’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명확한 답을 내지 못할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공통적인 한 가지 때문에 실패합니다.
그들의 인생은 기다리다가 끝납니다.
사업을 시작하기에 모든 게 갖추어진 완벽한 타이밍을 기다리고 공부를 시작하기에 알맞은 시간을 기다리고 아이디어가 있어도 바보 같다는 소리를 듣기가 두려워 기다립니다.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너무 늦었다며 그저 늙어 죽기를 기다리죠.
그렇게 기다려주어서 고맙다고 어떤 억만장자가 다가와서 돈을 주고 가기를 바라죠.
가만히 앉아서 생각만 하고 있는 대신에 무언가를 그냥 해보세요.
현재 자신에게 한 번 물어보세요. 당신은 가난한 사람인가요?”
[출처: ‘당신이 가난한 이유’, 북튜브, 유튜브]
마윈 회장이 말하는 함께 일하기 힘든 ‘가난한 사람’이란 실제로 돈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용기가 없는 사람입니다.
두려움에 가득 찬 사람을 말합니다.
그 두려움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서 가난해지는 것입니다.
그 사람 안에 가득 찬 두려움은 바로 자아입니다.
자기 자신의 생각만으로 가득차서 아무 것도 못합니다.
자아에게 마음을 빼앗긴 사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사람은 ‘육신-영혼-영’으로 이루어져있는데 육신을 빼앗겼으면 조금 빼앗긴 것이고 영혼을 빼앗기면 많이 빼앗긴 것이지만 영을 빼앗기면 다 빼앗긴 것입니다.
영은 마음이라고도 합니다.
마음이 자아에 빼앗기면 자신의 의지로 자아가
원하지 않는 다른 무언가를 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마음이 일어나야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을 주면 다 주는 것이고 마음을 빼앗기면 다 빼앗긴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빼앗겼다면 그 누군가가 나의 완전한 주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마음을 자아로부터 다시 빼앗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마음을 자아에게 빼앗겨 독사의 자식들이 된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입니다.
마음은 자아에게 내어주고 겉만 하느님께 내어주려는 위선자들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몰아내는 행위를 보고 그들은 ‘무슨 권위’로 그렇게 하느냐고 묻습니다.
당연히 예수님은 당신 마음을 아버지께 내어드렸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셨기 때문에 하느님의 권위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마음을 마귀에서 빼앗긴 이들은 알아들으려하지 않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요한이 세례를 준 것은
어디에서 오는 권위냐고 물으십니다.
분명 세상이나 자기 자신에게서 오는 것은 아닐 것이고, 그렇다면 하늘에서 온 권위로 그렇게 한 것이겠지만 그러면 ‘요한이 증언한 당신은 왜 믿지 않느냐’라고 할 것을 알기에 그들은 그냥 ‘모른다’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렇다면 당신의 권위가 어디에서 오는지 말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해봐야 그들을 머리까지만 이해시킬 뿐 그 가르침이 그들의 마음을 빼앗지는 못할 것임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미 마음으로 예수님을 미워하기로 작정한 이들입니다.
그런 이들에게는 어떤 설득도 통하지 않습니다.
그저 트집을 잡거나 자신들이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으로 사용하려는 것뿐입니다.
주님을 가진 이만 부자입니다.
우리 마음은 누구의 소유입니까?
내가 좋아하는 것이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보통은 가장 많이 생각하게 돼 있습니다.
나는 무엇에 마음을 빼앗겼습니까? 가장 많이 생각하고 바라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면 나는 마윈 회장이 말하는 가난한 사람입니다.
마음을 다른 것에 빼앗긴 채 머리와 몸만으로 주님을 믿으려고 하면 현대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됩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르 11,27-33: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합니까?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또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28절) 이런 일이란 성전정화사건이지만, 예수님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라는 그리스도교계의 주장에 대해 유다교의 지도자들이 무슨 증거가 있느냐고 반론을 제기한 것이다. 즉 합법적인 근거의 제시를 요구하여 그 답변에 따라 예수님을 반박하고자 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지혜롭게 그들에게 질문을 던지심으로써 그들을 당황케 하신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 대답해 보아라.”(30절). 예수님의 이 질문은 그들에게 허점을 찌른 질문이었다. 그들은 어떻게 대답해도 곤경에 처하게 된다.
군중들의 돌팔매질이 두렵기도 했지만, 진실을 인정하기가 더 두려웠던 그들은 진리이신 분께 거짓말로 대답했다. “모르겠소.”(33절) 아는 것을 모른다고 부인하면서 그들 스스로 문을 닫았기에, 주님께서도 두드리지 않는 그들에게 문을 열어 주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도 그들의 위선적 태도에 대해 ‘대화의 단절’을 선언하신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33절). 자기 자신의 안위에 집착하여 진리를 알면서도 그 진리 앞에 자신의 눈을 가리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다. 그들은 그렇게 자신을 스스로 소경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진정한 신앙보다 자신들의 우월감과 홀로 잘살고 있다는 교만한 마음을 예수께서는 책망하신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의 자세를 확실히 가져야 할 것이다. 우리는 나름대로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고, 복음을 전하면서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당신은 무엇 때문에 이런 일들을 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유다인들처럼 모르겠다고 대답할 수는 없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그분이 명하신 계명과 가르침을 실천하면서 그분을 닮기 위하여 이런 일들을 하는 것이라고 답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삶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또한 모든 이를 하느님께로 인도할 수 있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또한 예수님과 같이 지혜를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지혜롭게 되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만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느님의 성령을 우리 안에 모실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지혜롭게 답하시면서 유다인들을 당황케 하시는 것은 당신 안에 항상 성령과 함께하시는 삶에서 나오는 것이다. 성령과 함께 하는 삶이란, 예수께서 아버지 하느님과 맺으신 ‘관계’ 안에 사시는 것과 같이 우리도 그 관계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성령 안에 머무는 것이다. 즉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완전한 사랑의 관계인 성령 안에 계시기 때문에, 하느님의 아들로서, 또한 지혜 자체이신 분으로 나타나시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과 진정 사랑의 관계를 맺는다면 우리도 그러한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 지혜는 하느님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맺는 사랑의 관계를 통하여 우리도 드러낼 수 있다. 올바른 신앙인의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캄보디아의 독재자, 학살자, 일명 ‘킬링필드’로 불리는 학살을 주도한 인물이 있습니다. 피비린내 나는 20세기 세계사를 넘어 인류 역사 전체를 통틀어도 최악의 학살자라고 불림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캄보디아 전체를 문자 그대로 황폐화한 최악의 독재자로 손꼽히는 이 인물은 바로 ‘폴 포트’입니다.
‘국가의 발전을 가로막는 자들은 모두 죽여야 한다’라는 취지의 대학살극을 벌입니다. 4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 최소 130만 명 이상에 달하는 사람들이 ‘폴 포트’의 학살로 사망했습니다. 그가 명령한 사람 중에는 안경 쓴 사람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안경을 착용한 사람들은 지식인 계급, 부르주아, 그리고 농민의 착취자라는 이유였습니다. 새로운 사회 질서를 위해 이들은 모두 제거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안경 쓴 저도 그 당시에 캄보디아에 있었다면 사형입니다).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라는 생각이 엄청난 학살을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그런 사람이 없을까요? 아닙니다. 지금 나의 이웃을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틀렸다면서 거리를 두는 사람이 참 많음을 보게 됩니다. 그 안에서 소외되고 상처받으며 홀로이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생기게 됩니다.
인간은 절대 진리 그 자체가 될 수 없습니다. 나는 옳다고 생각하지만, 너무나 많은 부분에서 내가 틀렸습니다. 주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우리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따르는 존재일 뿐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보여주신 겸손의 덕으로 자신을 무장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소외되는 사람 없이 모든 이가 주님 안에서 하나를 이룰 수가 있습니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 그리고 원로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또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을 거부하고 올가미를 씌우려고 물었던 것입니다. 당시 성전에서 유일하게 권한을 지닌 이는 대사제밖에 없었지요. 대사제는 하느님께 권한을 받아 백성을 대표하고, 백성 앞에서 하느님을 대신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하느님께 권한을 받으셨다고 답하시면, 예수님의 행위는 하느님과 그를 대신하는 대사제를 모독하는 행위가 되고, 대사제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권한을 받으셨다고 하면 이 권한은 부정한 권한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무조건 예수님은 틀렸다는 단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틀렸다는 가정에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게 됩니다. 우리 역시 ‘틀렸다’라는 단정을 너무 많이 합니다. 이런 단정 안에서는 예수님과 함께할 수 없습니다.
오늘의 명언: 사랑한다는 그 자체 속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어서 사랑하는 것이다(블레즈 파스칼).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성령 안에서 기도하십시오.”(유다 17,20ㄴ)
성령 안에서
기도하려면
우리의 기도를
온전히
성령께 맡겨드려야 한다네.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 기도할 때
우리의 기도는
성령의 기도가 되고
우리의 뜻은
하느님의 뜻이 된다네.
우리의 기도는 유한하지만
성령의 기도는
주님의 권능으로 무한하다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
사제의 자격은 하느님에게서 부여되는 겁니다.
사제의 권한과 권위도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오는 것은 남용이고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는 월권입니다.
사제가 부정적 성품이 커지는 이유는
이 점을 겸허하게 인정하지 않고 간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쉽게 사제 연차가 늘어나면서
나도 모르게 권위적이 되고
독단적인 모습이 나오게 됩니다.
저 역시도 모르는 사이 매너리즘에 빠지고
교우들을 대할 때 권한을 앞세워
권위적인 모습으로 다가가고 있지는 않은지
깨어 살펴야 할 것입니다.
저에게 유일한 권한은
양들을 보살피고 섬기는 일입니다.
그래서 양들을 보살피고 섬길 때
저는 행복한 사제입니다.
양들을 먹일 영적인 양식을 준비할 때
제일 보람되고 기쁩니다.
영적인 양식을 먹으러 많은 사람이 모여
행복해하며 영적 양식을 나눌 때
사제로서 제일 보람이 있습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의 뜻에
초점을 맞추는
권한은
우리모두를
살게합니다.
그 누구도
하늘에서 온
권한을
뭉갤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권한은
예수님의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랑을
방해하는 것은
언제나
사랑의 실천이
부족한
우리들 삶입니다.
사랑을
마치 받아야 할
권리처럼 따지기
보다는
먼저
마음의 체온을
나누는 사람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단 한순간도
우리를 위해
뒤바뀌지 않습니다.
세상의 권력은
세상을 씹어
먹지만
예수님의 권한은
사람들의 밥이 되고
빵이 되시는
권한입니다.
밥과 빵의 삶을
선택하십니다.
투신과 참여로
하늘에서 온
세례성사는
더욱 풍성합니다.
우리의 신앙 또한
신앙과
실천이라는
본래의 뜻을
놓치지 않는
우리들이길
기도드립니다.
예수님의 권한은
하느님 백성을
내리누르는
권한이 아닙니다.
봉사하고
섬기고
꼴찌가 되고
가라지까지
기다려주시는
살리고
살게하시는
권한입니다.
사랑의 권한으로
사랑의 일을
실천으로 행하는
기쁜 날 되십시오.
사라지지 않을
사랑의 권한이신
예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이병우 루카 신부님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마르11,28)
'하느님의 자기계시!'
오늘 복음(마르11,27-33)은 '예수님의 권한을 문제 삼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셔서 성전 뜰을 거닐고 계실 때,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이 예수님께 와서 말합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또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마르11,28)
'예수님은 하느님의 자기계시'입니다.
자기계시란?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 아버지께서 완전하게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인류 구원 계획을 완전한 방식으로 실현하시려고 '당신과 본질이 같으신 성자(聖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파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맡기신 일을 그대로 실행하셨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철저하게,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철저하게 순종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자기계시이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주신 하느님의 권한으로 하느님의 일을 하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와 온전하게 하나가 되셨습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던진 유다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신원(정체성)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자신들 눈에 예수님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메시아(그리스도)의 틀에 맞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나무에 매달기까지 배척했던 것입니다.
오늘은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입니다.
그리고 오늘부터 '예수성심성월'이 시작됩니다.
하느님의 권한(힘)으로 일을 하고,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님의 마음 안에 머물러 있도록 합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오늘도 기도합시다!
복음말씀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1,27-33
그 무렵 예수님과 제자들은 27 다시 예루살렘으로 갔다.
예수님께서 성전 뜰을 거닐고 계실 때,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이 와서, 28 예수님께 말하였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또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에게 한 가지 물을 터이니 대답해 보아라.
그러면 내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30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 대답해 보아라.”
31 그들은 저희끼리 의논하였다.
“‘하늘에서 왔다.’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하고 말할 터이니,
32 ‘사람에게서 왔다.’ 할까?”
그러나 군중이 모두 요한을 참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군중을 두려워하여, 33 예수님께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