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운의 그리움 알알이 詩가 되고…
정교한 詩는 사대부를 사로잡았다
배전의 작품 ‘묵매’. 김해 출신인 배전은 김해 문인화맥의 개조(開祖)로 평가받고 있다.
배전의 작품 ‘묵죽’.
봄이 되어 매화가 피니 임 생각이 더욱 간절하다. 강담운의 ‘매화를 대하며 차산 낭군을 그리워함(對梅花憶山郎)’이란 시에도 그리움이 절절히 묻어난다.
매화가지 잡고서 임인 듯 여기나니
(枉把梅花擬美人)
빛깔은 가을물처럼 맑아 티끌도 없네
(文章秋水絶殲塵)
시 짓느라 여윈 몸을 상상하면서
(想像緣詩淸瘦骨)
낡은 오두막 눈바람 몰아쳐도
가난한 줄 모르네
(廬風雪不知貧)
비가 내려도 임 생각이 더욱 간절해진다. 김해에 잠시 들렀다가 또다시 서울로 떠난 임을 보고는 싶지만, 돌아올 날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서화가 배전, 연인 강담운 시첩 간직
고종의 사촌 이재긍이 읽어보고 감탄
‘지재당고’ 출간 돕고 서문도 직접 써
시월 강남에 비 내리니
(十月江南雨)
북쪽에는 눈 내리겠지요
(知應北雪時)
북쪽에서 눈 만나시거든
(在北如逢雪)
빗속에서 그리워하는 저를 생각하세요
(懷雨裏思)
떠날 때 주신 귤 하나
(臨行胎一橘)
손의 반지인 듯 아낍니다
(愛似手中環)
양주로 오시게 되면
(願作揚州路)
돌아오는 날 만 개를 드리오리다
(歸時萬顆還)
남녘에 늦가을 비가 내리는 것을 바라보며 천리 길 한양에 있는 연인을 그리워하는 심정, 귤 하나를 만 배의 사랑으로 키워가는 강담운의 마음이 애절하고 아름답게 다가온다.
‘봄꿈(春夢)’에도 그런 그녀의 마음이 잘 담겨 있다.
수정 주렴 밖 해 기울고
(水晶簾外日將)
길게 늘어진 버들 푸른 난간 덮었네
(垂柳深沈覆碧欄)
가지 위 꾀고리 울음 상관하지 않고
(枝上黃鸚啼不妨)
그대 찾아 꿈에 장안에 이르렀네
(尋君夢已到長安)
강담운은 다정하면서도 섬세하고 고운, 여성스러운 마음씨를 가졌던 모양이다. ‘차산 낭군에게 답함(答山郎)’이라는 시와 ‘늦봄(暮春)’이란 시를 보자.
낭군께서는 핀 꽃이 좋다고 하시지만
(郎道開花好)
저는 피지 않은 꽃이 좋습니다
(好未開花)
꽃이 피면 열매 맺는다고
(花開耽結子)
화장이 잘 받지 않아요
(褪却艶鉛華)
시든 꽃 참으로 박명하여
(殘花眞薄命)
밤에 불어온 바람에 떨어졌구나
(零落夜來風)
아이 녀석도 가련한 듯
(家如解惜)
뜰 가득한 붉은 꽃잎 쓸지 못하네
(不掃滿庭紅)
◆ 시는 정을 드러낸 것
배전은 서울에 있으면서 흥인군 이최응(흥선대원군 이하응의 형)의 아들이자 고종의 사촌인 이재긍(홍문관 부제학)에게 강담운의 시를 보여주었다. 시를 본 이재긍은 감탄하며 시집 ‘지재당고’ 출간을 돕고, 서문 ‘지재당소고서(只在堂小稿序)’를 직접 썼다.
녹규관에 세 번째 눈 오는 밤. 수선화가 처음 피고 매화가 맺힐 때 홀로 깨끗한 책상에 기대 앉으니 가슴속이 시원하여 한 점 티끌도 없다. 마침 차산 선생이 소매에서 여인의 시첩을 꺼내어 보여주면서 말했다. “이것은 지재당 담운의 시입니다.” 내가 열어 보았더니 시정과 언어가 투명하여 티끌이 하나도 없으며, 환하여 그림과 같았다. 금릉의 풀 하나, 꽃 하나, 산 하나, 물 하나가 환하게 눈에 들어왔다. 밝고 투명함이 남전에 나는 옥과 같고 햇볕처럼 따뜻하며, 여룡의 여의주가 밤을 밝히는 듯하여 차마 손에서 놓지 못하였다. 몇 번이나 만지작거리면서 후세에 전할 생각을 하였다. 아! 현재와 미래에 아마도 알아줄 자가 있어서 비단병풍과 비단부채에 써서 전하는 자가 있을 것이니, 내가 차마 손에서 놓지 못했던 뜻을 알게 될 것이다. 담운은 차산 선생의 조운(朝雲: 소실을 뜻함)이다. ‘지재’라는 당호는 ‘지재차산(只在此山)’의 뜻을 취한 것이다. 이날 밤 이 시집을 읽었다. 그때 설매(雪梅)와 수선(水仙)이 곁에 있어 이 사정을 알았으니 이 또한 특이한 모양의 묘한 증거라 하겠다.
통정대부 행 홍문관 부제학 겸 규장각검교대교 지제교 완산 이재긍이 제하다.
안광목이 쓴 발문 ‘지재당고발(只在堂稿跋)’도 보자.
시는 정을 드러낸 것이다. 정이 없는 자는 시를 지을 수 없다. 그러나 또한 정이 있지만 시가 공교하지 않은 자도 있다. 새가 봄에 우는 것은 정이다. 그러나 잘 울고 잘 울지 못함이 있으니, 하물며 시에 있어서랴! 금릉(김해)의 강담운 여사는 정도 있고 시도 공교하다. 타고난 재주와 영특함으로 일찍 문장을 알아 정에 따라 많은 시를 지어, 깊이 중당과 만당의 묘한 경지를 얻었다(深得中晩之妙). 아름다운 문채가 한번 드러나면 곧 사람들에게 회자되었다.
내 일찍이 말하길 ‘천하의 여자로 시를 잘하는 사람이 없지 않았다. 양에 ‘옥대편’이 있고, 당에 ‘화한집’이 있어 각기 한 시대에 아름다움을 독차지했다. 아 지금 담운은 옛 여인들에 비교하여도 부끄럽지 않으니, 그 시를 전함에 옥대편과 화한집처럼 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라고 했다.
이우향 학사가 모아 편집하고 출판하면서 나에게 말미의 글을 맡겼다. 곧 자리에서 읽어보니 운율의 쟁쟁함은 쇠로 찧고 돌을 부딪치는 듯하고, 기운의 태깔은 칼의 번쩍거림과 별의 번뜩거림이었다. 그 시경의 팽팽함은 이슬이 꽃에 맺히고 노을이 달에 걸린 듯하며, 그 광채의 환함은 짙푸른 풀빛이 물에 일렁이는 파문과 같았다.
한마디 말과 하나의 글자가 정에 근거하지 않음이 없다. 그러나 그 정이 꿰뚫어 보이고 있는 것은 비록 심상하게 사람을 그리워하고, 옛날을 추억하는 시이지만 죽지사·조간사의 미미한 세속적 격조와는 같지 않다.
그 당호 ‘지재’는 ‘지재차산’의 뜻을 취한 것이니, 그리움의 그윽한 아취와 한결같은 맹서의 심정을 또한 알겠다. 마침내 글을 써서 지재당의 발문으로 삼노라.
정축년(1877) 납일에 총계산인(叢桂山人) 요산(搖山) 안광묵이 쓰다.
◆ 배전은
차산(此山) 배전(1843~99)은 조선말의 개화사상가이자 문인화가다. 경남 김해 출신으로 김해 서화사에서는 문인화맥의 개조로 꼽히고 있다.
배전은 장년기에 10여년을 서울에서 문인이자 서화가로 활동했다. 고종 때 선전관을 지냈으며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시로써 교우했던 친형 배환을 통해 흥선대원군 문하에 출입하면서 서울 생활을 했다. 배환은 흥선대원군의 조카 이재완의 가정교사를 하기도 했고, 그가 사망하자 대원군이 장례를 치러주고 만시를 남길 정도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배전은 또한 개화당에 관계하던 지운영을 비롯한 ‘육교시사(六橋詩社)’ 동인들과 교유했으며, 시인이자 개화사상가로 육교시사 맹주였던 강위(1820~84)를 통해 추사의 영향을 받음과 동시에 개화사상에도 눈을 뜨게 되었다.
배전은 임오군란(1882)에 이어 갑신정변(1884)이 일어나 혼란해지자 1885년부터 김해에 칩거, 시서화로 후학을 가르치며 보냈다.
첫댓글 우리나라에도 로미오와 쥴리엣 못지않은
사랑이야기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즐감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