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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새디스트였던
선비의 아내들 (2~2)
(사랑을 빼앗긴 아내들의 무서운 복수)
남편의 사랑을 빼앗긴 아내들은 갖은 방법으로 첩이나 남편의 사랑을 받는 종들을 학대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했다.
머리카락 자르기, 두들겨패기 , 성기를 못 쓰게 만들기 등이 자주 쓰이는 방법이다.
중종 7년의 한 사건을 보면 끔찍하기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였다.
남편과 가까이한 종의 입을 솜으로 막은 다음 불에 담근 쇠로 음부를 지지고 돌로 내리쳐 화를 풀고는 죽였다.
남편이 정식으로 맞아들인 첩일 경우에는 갖은 모략으로 우선 남편과 떼어 놓은 다음, 학대하거나 창피를 주어 내쫒았다. 심지어 독살 시키는 경우도 있다.
고금을 통틀어 가장 흉측한 사건은 중국 한나라 고조의 부인 여후가 저지른 일이다. 여후는 한 고조가 사랑한 척 부인을 몹시 질투했는데 남편 생전에는 어쩌지 못하고, 남편이 죽자 척 부인의 팔을 자르고 눈을 뽑았으며, 약을 먹여 귀까지 멀게 했다.
척 부인에게 정상적인 것은 냄새맡는 코 뿐이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용서할 수 없었던 여후는 척 부인을 평생 변소에서 살게 함으로써 자신이 받았던 정신적 고통을 한풀이 하고 만다.
첩을 거느리는 것은 권력가와 재력가의 특권이었다.공식적으로는 엄연히 일부일처제가 시행되고 있었지만, 이런 남자들은 다수의 첩을 거느렸다.
고려시대에는 일부다처나 일부다첩이 관행으로 묵인되었지만,
조선 태종 13년에 일부다처가 공식적으로 금지되었다. 아무리 많은 여자를 거느려도 정식 아내는 하나였다.
그리하여 양반댁에서는 처와 첩 사이의 보이지 않는, 혹은 노골적인 질투와 투기가 횡행하게 되었다.
사랑 때문에 살고
사랑 때문에 학대받고...
첩의 신분은 비참한 것이었다.
첩에게서 낳은 자식은 서녀, 서자가 되어 온갖 신분상의 제한을 받았고 과거에 응시할 수도 없었다. 첩은 남편의 친족과 친족의 호칭관계를 가질 수 없었고, 죽어도 남편과 함께 묻힐 수 없었다. 하지만 의무는 많아서 정식부인, 혹은 정식 부인의 소생이 죽었을 때는 길면 3년까지 상복을 입어야 했고, 남편에 대해서 정조의 의무를 지켜야 했다.
남편을 고소하면 목을 졸라 죽였고, 남편을 배반하고 도망치거나 첩의 신분으로 다른 남자를 만나 개가하면 모두 엄한 형벌에 처해졌다.
그렇게 비참한 처지였지만 첩이 살아갈 수 있었던 유일한 동기는 바로 남편의 사랑이었다.
정식 아내들은 첩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지위를 누렸지만, 남편의 사랑을 잃는 것은 그 어떤 지위로도 보상받을 수 없는 비참한 것이었다. 첩에 대한 본처의 질투와 가혹한 학대는 남편의 사랑을 빼앗긴 데 대한 복수였다.
감사합니다___⚘️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