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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의 바람둥이, 무모한 사업가, 기이한 행동과 괴팍함으로 유명한 은둔자 그리고 방치와 학대로 만신창이가 된 채로 죽음을 맞이한 인물. 한 사람에게 집중된 이 수식어들 중 일부는 영화 아이언맨 토니 스타크를 떠올리게 한다. 이것들은 미국의 최고 갑부이자 억만장자였던 하워드 휴즈의 이야기이다. 하워드 휴즈 1976년 4월 5일, 텍사스주 휴스턴 감리교 병원에 존 T. 코너버라는 남자의 시신이 휴스턴 공항에서 병원 시체 안치소로 향했다. 이것은 극도의 보안을 요하는 상황이었다. 왜냐하면 존 T. 코너버는 유명한 억만장자 하워드 휴즈의 가명이었기 때문이다. 병원에 도착한 휴즈의 시신은 도저히 미국 최고의 갑부로 보기 어려울 만큼 처참했다. 그의 시신을 부검한 의사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휴즈는 심각한 영양실조와 탈수 증상으로 키는 188cm에 몸무게는 42ㅏg밖에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 뿐만아니라 신체 곳곳에서는 심각한 부상들이 발견되었다. 두개골 부상, 찢어진 상처들, 각종 골절, 그리고 팔 속에 박힌 채 부러진 주삿바늘까지 이 시신이 미국 최고의 갑부 하워드 휴즈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워드 휴즈 시신의 부러진 주사바늘들 언론은 그의 충격적인 말로를 연일 보도하였고 미국 국민들은 부유하고 유능하며 강인했던 하워드 휴즈의 죽음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50년 이상을 세간의 주목을 받으며 살아온 하워드 휴즈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하워드 휴즈는 엄청난 업적과 함께 기행으로도 유명한 인물이었다. 항공 공학자였던 그는 항공 역사를 개척해 나갔으며 비행 조종사로는 비행속도와 거리에 관한 신기록을 세우며 엄청난 명성을 얻었다. < 하워드 휴즈(중앙)의 미국 횡단 비행 성공 축하 퍼레이드( 평균 시속 534km로 역대 최고 기록) > 그는 영화 제작자로도 명성을 떨쳤으며 유명 여배우 진 할로와 제인 러셀을 발굴했다. < 진 할로 / 제인 러셀 > 또한 공학자로써는 항공 우주, 인공위성, 첩보기술을 선도했고 자본가로써는 라스베가스에 최초로 대규모 부동산 투기를 시작했다. 그는 타고난 도전가였으며 이는 그의 성공 요인이었다. 여러모로 대단한 인물이었으나 그를 유명하게 만든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바로 괴팍하고 기이한 행동들이었다. 갑작스런 종적 감추기, 상식을 넘어선 크리넥스(휴지) 집착증, 몇 달 동안 쉬지 않고 계속되는 영화 감상, 필기에 대한 집착으로 지시사항을 반복 기록, 극도의 세균 공포증에 시달리면서도 옷을 갈아입거나 목욕을 하지 않는 등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로 그는 세간의 이슈가 되었다. 하워드 휴즈의 이런 이상 행동들을 당시 사람들은 그저 억만장자의 변덕이나 기행쯤으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날의 견해는 다르다. 의학적, 정신 분석학적 분석에 따라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알아보자. 하워드 휴즈의 어머니는 불결함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가진 중증 세균 공포증 환자였다. 그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과잉보호 속에 친구도 거의 없이 외롭게 자랐다. < 하워드 휴즈와 그의 어머니 / 어린 시절의 하워드 휴즈 > 이는 종종 다른 사람들에게 거만함으로 비치기도 했다. 어른이 된 휴즈는 부족한 사회성을 돈으로 메꾸었다. ( 하워드 휴즈는 사람보다 기계와 더 친밀했다. ) 1905년 하워드 휴즈는 휴스턴의 대 부호 집안에서 태어났다. 휴즈 공구 회사를 가진 그의 아버지는 혁신적인 석유 시추용 드릴을 개발했고 뛰어난 사업 수단으로 전 세계 시장을 개척해 엄청난 수익을 걷어드렸다. < 휴즈 공구 회사 > 하워드 휴즈는 15살 때 직접 비행기를 몰수 있었고 이 경험을 계기로 비행에 푹 빠져들었다. 2년 간격으로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면서 18살에 하워드 휴즈는 고아가 됐으며 막대한 재산을 모두 상속받았다. 하지만 그는 사업가보다는 비행기 조종사와 헐리우드 영화 제작자가 되고 싶어 했다. 이런 휴즈의 꿈은 그에게 뜻밖의 불행을 안겨다 주었다. 1976년 4월에 진행된 부검에서 의사들은 하워드 휴즈가 최소 3차례나 두개골 골절상을 당했다는 것을 알아냈다. 첫 번째 대형 사고는 사망하기 약 50년 전인 1928년 그의 유명한 영화 ' 지옥의 천사들 ' 촬영 기간에 발생했다. < 영화 지옥의 천사들 > 당시 역대사상 가장 많은 제작비가 들어간 이 영화는 여배우 진 할로를 세계적인 여배우로 만들었으며 하워드 휴즈가 직접 감독과 각본을 맡았다. < 영화 제작 당시 하워드 휴즈 > 완벽한 공중 전투 신을 찍기 위해 많은 비행사를 고용했던 하워드 휴즈는 비행사 한 명이 위험한 저공비행을 하지 못하겠다고 하자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직접 스턴트 비행을 했다. 그 결과 비행기는 추락했고 휴즈는 처음으로 심각한 뇌진탕을 일으켰다. < 하워드 휴즈와 지옥의 천사들 공중 전투신 > strong> < 영화 지옥의 천사들 공중전 동영상 > 하워드 휴즈는 추락 당시 얼굴과 이마를 조정실 계기판에 강하게 부딪치며 안와전두피질에 외상을 입었다. 안와전두피질은 뇌에서 오류 감지 기능을 담당하는 영역으로 오차가 발생해 수정해야 한다고 생각할 때 작동한다. < 안와전두피질 ( 붉은 색 ) > 안와전두피질에 손상을 입을 경우 오류 감지 능력이 떨어질 수도 있다. 이런 측면으로 볼 때 그의 첫 번째 사고로 인해 지시 사항을 집착적으로 반복해서 기록하는 이상 행동이 나타났을 수도 있다. 하워드 휴즈는 지옥의 천사들 제작에 꼬박 3년을 투자했다. 그동안 완벽한 장면이 나올 때까지 수많은 장면을 재촬영했고 밤낮을 쉬지 않고 편집 작업에 몰두했다. 주변 사람들은 휴즈가 완벽한 영화를 만들려는 강박증에 쌓여있다고만 생각했고 이것이 젊은 억만장자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 했다. 예산을 훨씬 초과하여 400만 달러를 쏟아부은 끝에 1930년 1월 30일, 그라우만스 차이니즈 극장에서 '지옥의 천사들 ' 첫 시사회가 열렸다. 역대 최대 규모의 시사회였으며 50만 명이 이를 지켜보기 위해 거리를 메웠다. < 영화 ' 지옥의 천사들 ' 첫 시사회 현장 > 영화는 큰 성공을 거두었고 특히 공중 전투신은 역대 최고의 장면으로 호평받았다. 이를 계기로 하워드 휴즈는 더욱더 비행에 빠져들었다. 하늘에서 휴즈는 대인공포증과 세균 공포증으로부터 벗어나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1932년, 휴즈 항공사를 설립한 하워드 휴즈는 회사 문을 연지 얼마 되지 않아 종적을 감춰버렸다. 그리고 가명을 써서 텍사스주 아메리칸 항공에 수화물 담당자로 취직했다. 수화물 담당자가 된지 몇 주 되지 않아 하워드 휴즈는 부조종사로 승진했고 그의 정체가 탄로나 자 다시 캘리포니아로 돌아왔다. 캘리포니아로 돌아온 하워드 휴즈는 비행기를 설계하기 시작하고 시험 비행에 나섰다. 그가 만든 첫 번째 비행기는 H1 실버불렛으로 날렵한 경주용 비행기였다. 휴즈는 이 비행기에 많은 신기술을 도입했다. < H1 실버불렛 > H1 실버불렛은 그의 공학적 천재성과 비행속도에 대한 집착을 알 수 있는 좋은 예였다. 1935년 9월, 실버 블렛이 사탕수수밭에 불시착하자 하워드 휴즈는 그 즉시 기자회견을 열었다. < 불시착한 H1 실버불렛과 하워드 휴즈 > 그는 기자회견에서 사고 경위를 설명했고 직접 기자회견 장면을 감독하며 수차례 재촬영했다. 이 기자회견 하워드 휴즈는 계속해서 바지를 잡아당기며 눈에 띄는 불안 장애 증상을 보였다. 이것은 그의 정신 상태가 악화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로부터 8년 후인 1943년, 휴즈는 신형 수상비행기 S43을 조정하다 호수에 또다시 불시착했다. < S43 불시착 > 그는 또다시 머리에 중상을 입었고 승무원 한 명이 사망했다. 같이 탄 승무원의 사망은 휴즈에게 큰 충격을 줬을 것이다. 이 사고로 하워드 휴즈의 괴이한 행동은 더욱 심각해져갔다. 세균 공포증으로 인한 반복적인 손 씻기는 어릴 적부터 계속됐고 자신의 업무와 지시 사항을 끊임없이 기록하고 확인했다. 또한 물건을 완벽하게 대칭으로 정돈하려고 했다. 이것은 전형적인 강박성 장애에 해당했지만 당시에는 이런 강박성 장애가 잘 알려져있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한 진단과 치료가 불가능했다. 1940년대, 하워드 휴즈가 설립한 회사들은 빠르게 팽창해나갔지만 그는 정신적 휴식을 취할만한 시간조차 갖지 못 했다. 그의 기행은 더욱 심해져만 갔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전쟁으로 인해 휴즈 항공사는 다수의 무기 개발 계약을 얻어낼 수 있었다. HK1과 신형 고공정찰기의 시제품인 XF11이 여기에 해당했다. 하지만 두 사업 모두 휴즈의 잦은 설계도면 변경 때문에 예산과 기한을 초과하고 말았다. < HK1과 XF11 > 1946년 7월 7일, XF11을 탄 휴즈는 45분 동안 완벽하게 LA 상공을 높고 빠르게 비행하였으나 갑자기 프로펠러가 고장 나며 LA 골프장 근처 베벌리힐즈 주택 지붕을 뚫고 추락해버렸다. < XF 11 추락 현장 > 이 대형 추락 사고에 사람들은 하워드 휴즈가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휴즈의 상태는 위독했고 의사들은 살 가망성이 별로 없음을 휴즈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이 사고로 휴즈는 죽지는 않았지만 심각한 두부 손상을 입었으며 3도 화상과 거의 모든 늑골과 경추 3개가 부러지는 큰 부상을 당했다. < 사고 당시 하워드 휴즈 > 사고 후유증으로 인한 고통을 하워드 휴즈는 다량의 진통제로 해결했다. 이후 10년 동안 하워드 휴즈는 매일 진통제를 먹었으며 그 양도 급격하게 늘어났다. 여성들과의 스캔들은 그가 이룩한 항공분야의 업적만큼이나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잘생긴 외모에 부자였던 그는 여자들에게 선물공세를 퍼부었다. 하지만 하워드 휴즈는 여성들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감정적으로 그녀들에게 끌리진 않았던듯하다. 그는 동시에 많은 여자들을 만났고 자신의 연애행각이 들통 나지 않도록 비밀유지에 노력을 기울였다. < 하워드 휴즈가 만난 헐리우드 여배우들 중 일부 > 컨피덴셜이란 3류 잡지에서 하워드 휴즈의 여성 관계에 대한 기사가 실렸고 이에 하워드 휴즈는 격분했다. 하워드 휴즈는 잡지가 발매되자 자신이 만나던 여성들이 잡지를 보지 못하도록 모두 사들이라고 지시했다. 그는 영화제작자라는 위치를 이용해 여배우로 만들어주겠다며 끊임없이 신인 여배우들을 유혹했다. 그리고 그녀들에게 아파트와 생활비, 각종 연기 공부에 필요한 모든 교육비까지 지급했다. 휴즈는 여자친구에 대한 의심이 병적일 정도여서 탐정을 고용해 철저히 감시했고 그녀들이 먹는 음식부터 만나는 사람까지 모두 통제했다. 여자들과 교류하던 중 휴즈는 매독에 걸렸고 그의 세균 공포증은 더욱 심해졌다. 1950년대, 하워드 휴즈는 RKO라는 영화사를 소유하면서 헐리우드의 확고한 거물이 되었고 극비의 통신 및 첩보기술을 개발하는 대형 항공 우주회사도 설립했다. 1940년대 말, TWA 항공사를 인수받은 휴즈는 최초의 대륙 행단 노선을 만들어 굴지의 기업으로 키워냈다. 1947년, 42살의 하워드 휴즈는 정부와 맺은 계약에 비리가 있다는 의혹을 받고 의회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했다. 청문회에서 자신의 회사가 전쟁으로 인해 폭리를 취했다는 의혹을 강하게 부인했다. strong> < 청문회에서의 하워드 휴즈 > 청문회 내내 휴즈는 당당했고 의회와 언론에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했다. 하워드 휴즈는 이때를 마지막으로 대중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50대가 된 하워드 휴즈의 강박성 장애가 매우 심각해졌다. 그는 타인과의 악수는 물론 문 손잡이도 맨손으로 만지지 않았다. 회사 경영에 필요한 지시사항은 전화로 반복적으로 전달했으며 조금이라도 어긋날 시 불같이 화를 냈다. 1957년에 이르러서는 그의 사업 파트너들과 친한 동료들까지 그가 미쳐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 진 피터스 > 휴즈가 진 피터스와 결혼을 결정한 이유에 대한 소문은 무성한데 그중 하나가 자신을 정신병원에 수감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순종적인 아내를 만들어 이를 피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 수감을 결정하는 것은 아내 ) 하워드 휴즈는 비밀 결혼식을 위해 진과 측근 몇 명을 데리고 네바다주로 날아갔다. 결혼식은 모텔 안에서 신부를 포함한 전원이 오리 사냥꾼 복장을 입은 채로 신속히 이루어졌다. 하워드 휴즈는 결혼한 지 1년도 안돼 그의 일생에서 가장 기이한 일화를 남겼다. 1957년 11월, 그는 선셋 대로에 있는 나섹 스튜디오의 어두운 영상실에서 두문불출하며 4개월 이상을 지냈다. 그는 나체로 앉은 채 영화를 보며 초콜릿과 우유만으로 식사를 했고 회사 업무는 전화를 통해 해결했다. <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하워드 휴즈) 주연의 에비에이터중 > 필요한 것들은 종이에 아주 자세하게 적어 측근들에게 전달했다. 측근들은 그를 볼 수도 말을 걸 수도 없었다. 또한 휴즈는 수십 개의 크리넥스 휴지 상자를 쌓고 다시 쌓는 행동을 반복했다. ' 크리넥스 지침서 ' 라고 불리는 휴즈의 유명한 메모 속에는 크리넥스로 세균감염을 막는 방법이 장황하게 적혀있었다. ( 문 손잡이를 잡을 땐 8~10장을 사용 등과 같이 지침이 적혀있음 ) 이 모든 것이 강박성 장애의 징후들이다. 4개월이 지난 후 드디어 하워드 휴즈는 영상실에서 나왔다. 몇 달째 목욕이나 면도도 하지 않은 그의 모습은 거지나 따로 없었다. 그는 나섹 스튜디오에 있는 동안 극심한 신경쇠약에 시달렸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영상실은 나온 휴즈는 베버리힐즈 호텔에서 몇 년 동안 생활했다. 그는 호텔 생활 동안 자신의 측근, 아내, 여자친구들을 위해 많은 객실을 임대하기도 했다. 그의 기이한 행동은 호텔에서도 계속됐다. 휴즈는 호텔의 분홍색 수건만은 걸친 채 나체로 있었다. 신기한 것은 이런 상황 속에서도 휴즈 자신의 회사들을 계속해서 성장시키며 이끌어나갔다는 것이다. 하워드 휴즈의 거대 제국의 중추신경은 헐리우드 로메인 7000번가에 있었다. 직원들은 이곳을 요새라고 불렀고 휴즈의 개인 기록과 비밀문서, 사업 기록이 모두 이곳에 보관되어있었다. < 로메인 7000번가의 하워드 휴즈 회사 > 이곳의 주 기능은 걸려오는 전화를 24시간 휴즈에게 연결해주는 것이었고 출입 가능한 사람은 극히 소수였다. 그의 거대한 제국은 여전히 건재했다. 휴즈 공구 회사를 비롯한 RKO 영화 스튜디오, TWA 항공사, 휴즈 우주항공 회사, 그리고 엄청난 부동산까지.. 특히 정부와 맺은 첩보 및 정찰 개발 기술은 누구도 넘볼수 없는 사업수단이었다. 하워드 휴즈는 자신의 오랜 심복을 해고하고 CIA와 연줄이 있는 전직 FBI 요원 로버트 메휴 ( 현재 휴즈 네바다 사업단 CEO )를 오른팔로 고용했다. < 로버트 메휴 > 메휴는 휴즈의 여자친구와 회사 직원 감시뿐만 아니라 법적으로 하워드 휴즈가 소환되는 일도 막았다. < 하워드 휴즈의 소환이 힘들 자 현상금까지 내검 > FBI는 하워드 휴즈를 평생 감시하고 쫓아다녔다. 정부는 최대 군수 계약업체인 휴즈의 회사가 정치권에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해 이익을 취하고 있다고 의심했다. 그뿐만 아니라 FBI는 휴즈의 정신 상태에도 큰 관심을 가졌다. 휴즈의 사업 대부분이 국가 방위와 관련 있었기 때문이다. 1960년, 법원은 TWA 항공사 자금을 부당하게 사용했다며 경영권을 포기하란 명령 내렸다. ( 지방의 작은 항공사를 하워드 휴즈가 국제적인 규모로 키워낸 것이 TWA 항공사 ) < 직접 TWA 항공기를 조정하기도 했음 > 하지만 회사 주식의 상당수를 보유하고 있었던 하워드 휴즈는 매각 압력에 굴하지 않았다. 하워드 휴즈는 이 모든 사항을 어두운 호텔 방안에서 전화 와 쪽지만으로 해결했다. 또한 사고 후유증으로 인한 통증을 억제하기 위해 약물 사용량을 늘렸다. 1966년, 휴즈는 건강이 악화되자 애착을 가졌던 TWA 항공사의 주식을 매각할 수밖에 없었다. 라스베가스의 데져트 인 호텔 펜트하우스에 투숙한 하워드 휴즈는 다른 고객이 사용할 수 있도록 펜트하우스를 비워달란 호텔의 요청에 호텔을 통째로 사들였다. < 데져트 인 호텔 > 이것을 시작으로 휴즈는 아직 미개척지이던 라스베가스에 큰 투자했다. 몇 년 만에 하워드 휴즈는 라스베가스에서 가장 많은 토지를 소유한 사람이 되었다. 그 후 하워드 휴즈의 기행은 더욱 이상해졌다. 충동적으로 지역방송국을 사들인 후 한밤중에 전화를 걸어 자신이 볼 특정 영화를 방송하도록 했다. 하워드 휴즈는 자신을 호텔이란 감옥 속에 가두어두었다. 하워드 휴즈와 이혼한 진 피터스는 그가 정신이상자이며 반사회적 성향의 사람이라고 비난했다. < 영화 에비에이터의 스틸컷 > 1970년 추수감사절, 그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한밤중에 종적을 감췄다. 3주 후 바하마에서 모습을 드러낸 하워드 휴즈는 로버트 메휴를 해고했고 기업의 업무를 모르몬교 측근들에게 위임했다. 하워드 휴즈 제국의 내리막이 시작된 것이다. 이 측근들은 하워드 휴즈에게 통하는 모든 연락을 통제했다. 일부의 주장에 따르면 이들이 휴즈의 약물 의존증을 악용해서 그를 통제했다고도 한다. 이 기간 동안 하워드 휴즈는 세상과 철저히 단절되어 있었기 때문에 치밀한 사기극의 당사자가 될뻔했다. 1972년, 클리포드 어빙은 하워드 휴즈의 전기가 발간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어빙은 세상을 등진 휴즈 덕분에 사기극의 성공을 확신했고 성공 직전까지 갔다. < 실제 클리포드 어빙과 이 사건을 다룬 리차드 기어( 클리포드 어빙 ) 주연의 영화 혹스 : 욕망의 법칙 > 처음에 휴즈는 이 책에 관한 모든 인터뷰를 거절했지만 결국 전화 인터뷰에 응해 이것이 국민사기극임을 알렸다. 이 전화인터뷰는 대중에게 공개된 휴즈의 마지막 음성이기도 했다. 얼마 후 휴즈는 런던으로 건너갔고 이번에도 호텔에 묵었다. 1972년 6월, 하워드 휴즈는 다시 한번 비행기 조정에 나섰다. 조정석에 앉은 휴즈는 옷을 모두 벗고 알몸으로 런던 상공을 비행했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비행이었다. 잠시 후 비행기가 런던에 추락하며 하워드 휴즈는 엉덩이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다. 부상으로 더 이상 걸을 수 없게 된 휴즈는 진통제에 더욱 의존하게 되었다. 앙상하게 뼈만 남은 하워드 휴즈는 1976년 4월 5일, 7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휴즈 가족묘지 > 하워드 휴즈의 부검에서 많은 의문점이 제기되었다. 일부에서는 그의 측근들이 그를 방치해서 죽음이 이르게 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하지만 현대의 의사들은 여러 사고와 정신적 문제에도 하워드 휴즈가 오래 살았다는 것에 놀라워한다. 그만큼 적절한 치료가 이루어졌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부검 결과 오랜 기간 동안 다량으로 투여된 약물로 인해 회복 불능의 심장손상이 사인이었다. 하워드 휴즈는 평생 동안 진단받지 못한 강박성 장애, 여러 차례의 머리 부상, 엄청난 통증, 다량의 약물 복용에 의한 부작용과 맞서 싸워왔다. 만약 그가 현대의학에 의해 치료를 받았다면 괴벽스러운 기인이 아니라 20세기의 천재로 기억됐을지도 모른다. < 하워드 휴즈 ( 실제 ) / 하워드 휴즈의 실화 영화 에비에이터 > 에비에이터 예고편 ( 네이버 영화 ) http://movie.naver.com/movie/bi/mi/mediaView.nhn?code=38881&mid=3619 출처 : http://jsy2125.blog.me/220221935584 모세와 10가지 재앙 http://jsy2125.blog.me/220109575756 이스터섬의 비밀 / 낙원에서 지옥으로 http://jsy2125.blog.me/220111659455 존 F. 케네디 암살사건 / 음모론과 마법총알 http://jsy2125.blog.me/220119475891 타락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http://jsy2125.blog.me/220125139545 잉카제국의 마추픽추 http://jsy2125.blog.me/220127224186 통치자 드라큘라 / 실제 드라큘라 http://jsy2125.blog.me/220133047815 사막속 바위도시 페트라 / 알카즈네 http://jsy2125.blog.me/220137795522 폼페이의 비극적인 종말 http://jsy2125.blog.me/220143087429 마릴린 먼로의 삶과 죽음 그리고 음모론 http://jsy2125.blog.me/220148583217 스파르타쿠스, 자유를 찾아 로마에 대항한 검투사 http://jsy2125.blog.me/220157212386 저주받은 보석, 블루 호프 다이아몬드의 진실 http://jsy2125.blog.me/220162173267 인터스텔라를 보기전에 보면 좋은 영상 / 블랙홀, 웜홀, 상대성이론 다큐 http://jsy2125.blog.me/220173594177 지상에 건설된 신들의 사원, 앙코르 와트 http://jsy2125.blog.me/220182677407 인체자연발화 현상 http://jsy2125.blog.me/220189658603 초대형 육식공룡, 스피노사우루스 http://jsy2125.blog.me/220196333349 고대 신전의 공학기계들, 신들의 마법 http://jsy2125.blog.me/220199646103 공룡을 멸종시킨 소행성 충돌 http://jsy2125.blog.me/220207577752 좀비 바이러스의 출현 가능성 http://jsy2125.blog.me/220214027815 하워드 휴즈, 미국 최고 갑부의 기이한 죽음 http://jsy2125.blog.me/220221935584 버거킹, 파파이스 한번 쯤은 드셔보셨을텐데요. 맥도날드 주식은 있는데 버거킹 주식은 왜 없지? 궁금해하신 분도 계실겁니다. KFC는 Yum! Brands (얌! 브랜즈, Yum! Brands. Inc., Yum, 맛있다) 소속으로 상장되어 있구요. 버거킹은 Resrestaurant Brands International 소 속으로 상장돼 있습니다. 레스토랑 브랜즈 소속 브랜드로는 캐나다에서 가장 친숙한 카페 팀 홀튼이 있고 한국에도 유명한 버거킹, 파파이스가 있습니다. 레스토랑 브랜즈 인터내셔널은 2014년 팀 홀튼과 버거킹이 합병하며 상장된 캐나다 토론토에 본사를 둔 기업입니다. 실적발표가 있었으니, 기업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RBI의 브랜드
성장환경 때문인지 휴즈는 군중 속에 있는 것을 항상 불편해하는 내성적인 성격을 가지게 되었고
덕분에 휴즈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 사고 당시 하워드 휴즈가 조정했던 비행기 >
특히 휴즈는 XF11을 차세대 비행기로써 선보이고 싶어 했기 때문에 직접 시험 비행을 했다.
1925년 헐리우드로 처음 왔을 때 하워드 휴즈는 아내가 있었지만 많은 여성들과 교제했고 비행기 추락사고를 당한 1946년엔 이미 이혼한지 오래였다.
하워드 휴즈는 이때 10여 년 동안 교제해온 진 피터스라는 여배우와 결혼하기로 전격 결정했다.
1950년대 후반 하워드 휴즈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하고 비밀에 쌓인 세상을 등진 갑부로 묘사되었다.
하워드 휴즈는 자신의 대리인인 로버트 메휴와 직접 만나는 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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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최초의 연쇄살인사건, 보스턴 교살사건 http://jsy2125.blog.me/220169072244
레스토랑 브랜즈 인터내셔널과 소속 브랜드
레스토랑 브랜즈에는
3가지 브랜드가 있습니다.
캐나다에서 가장 친숙한 카페인
팀 홀튼은
캐나다 아이스하키 선수
팀 홀튼이 은퇴후
1964년 창업한 기업인데요.
캐나다 국민 10명중 9명에게
카페를 어디가냐 물어보면
팀 홀튼에 간다고 할 정도로
캐나다의 국민 프랜차이즈입니다.
한국에는 없지만
캐나다와 미국을 중심으로
2020년 기준 4,932개의
매장을 운영중에 있습니다.
팀 홀튼은 한번도 가본 적이 없지만
기회가 되면 한번 방문해봐야겠네요.
버거킹은 한국에도 정말 많으니 유명하죠.
버거킹의 와퍼는 한번쯤 다들 드셔보셨을 겁니다.
버거킹은 밀레니얼 세대와
Gen Z를 겨냥한 경영방식을 보여주는데요.
패스트푸드를 먹지만
건강을 생각하는(?)
밀레니얼 세대를 공략하기 위해
타 브랜드들보다
칼로리는 30%,
지방은 40%가량 적은
튀김옷이 얇은
감자튀김을 판매하고,
한정판 메뉴 전략을 통해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몬스터 와퍼,
할라피뇨 와퍼,
까망베르 머쉬룸 와퍼 등
시즌에 맞는 한정메뉴 출시는
소비자들의 꾸준한 소비를
유도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대망의 파파이스가 있습니다.
이번 실적의 주인공인데요.
파파이스는 2019년
북미지역 최고 인싸(?) 음식
치킨샌드위치의 주인공입니다.
2019년 하반기부터 시작된
치킨샌드위치 광풍은 정말 엄청났습니다.
반드시 먹어봐야 하고
인스타그램에 인증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파파이스의 치킨 샌드위치 인기로
맥도날드, 스타벅스, 던킨 등
많은 기업들이 치킨 샌드위치 메뉴를
출시하고
치킨 샌드위치 전쟁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파파이스의 치킨 샌드위치
인기가 엄청나다 보니
웃지 못할 일도 있었는데요.
치킨 샌드위치를 먹기 위해
인파가 몰리다보니
줄을 기다리다가 새치기 시비가 붙어
흉기난동 사건도 발생할 정도였으니
파파이스 치킨 샌드위치가
한국에도 상륙한다면
한번 그 맛을 느껴보러 가야겠네요.
작년에 레스토랑 브랜즈 인터내셔널에서
브랜드 포트폴리오 추가를 위해
도미노 피자를 인수한다는
썰(?)이 향간에 나왔는데
과연 인수가 정말 이루어질지 궁금하네요.
칠곡군 왜관읍
‘호국의 도시’ 칠곡의 심장부
칠곡군 왜관읍은
9개의 법정리로 구성된
인구 3만4천의 도시다.
6.25 전쟁 시
낙동강 최후의 방어전으로
격렬한 전쟁을 치른
호국의 고장을 상징하는 곳이다.
남북으로 경부고속도로와
경부선 및 국도 4호선, 67호선이
지나가고 있는 교통요충지다.
또 대구와 구미를 연계해
왜관지방산업1, 2, 3단지 등
400여 개의 기업체가
가동 중이다.
이 밖에도
도시근교 농업이 발달해
참외, 오이, 포도, 화훼 등
과수 및 특용작물의 재배로
높은 농가 소득을 올려
1, 2, 3차 산업이
골고루 발전하는 지역이다.
신라 시대는 팔거리현,
고려 시대는 팔거현에 속했다.
원래는 달오 뒤에 있는
파산의 이름에서 유래된
파며면이었다가
파미면으로 고쳐
월매, 사라, 장달, 중매, 상매, 월오,
두동, 평장, 회동, 이동, 관동,
상석, 고제, 반송, 서매, 신매,
좌봉, 장자, 관동 등의
19개 동리를 관장했다.
명칭유래
왜관이라는 지명은
고려 말기 이후 조선 초까지
왜구의 노략질이 심해지자
태종 때 일본인 사신이나
교역자들이
머물게 하고
물자를 교역하게 하던 장소로
왜관을
부산포, 제포, 염포 및
서울 동평관 등에 지어 관리했다.
임진왜란 후에
수로를 이용하는 일본인을 위해
설치한 왜관지로는
두모포, 절영도, 가배량 및
초량 등과
낙동강의 중간숙소인
소규모 왜관으로
약목면 구호리 구왜관,
왜관읍 금산리 강창,
김해, 창원, 화원창 등 5개소,
모두 10여 개소를 설치했으나
그 지명이 그대로 내려오는 곳은
칠곡군 왜관뿐이다.
칠곡군의 중심지다.
북쪽으로 자고산이 솟아
석적읍과 경계하며
서쪽으로는
낙동강과 갯 들이
남북으로 길게 형성돼 있다.
왜관읍을 중심으로
금무봉이 솟아 있고
동쪽으로는 장원봉이
지천면과 경계하며
여기서 시작한 매원천이
서쪽으로 흐르면서
삼청평야를 지나서
낙동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경부선 철도,
경부고속철도,
경부고속도,
국도와 지방도가 모두
동서남북으로 지나가고 있어
교통이 편리리하며
대구광역시와 구미시는
20~30분 거리에 있으며
1959년부터
미군보급부대가 주둔하고 있어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문화유적
장진홍 의사 기념비를 비롯한
애국지사들의 기념비 6기와
경찰위령비,
UN전승기념비 등이
세워진 애국동산이 있다.
호국의 의 다리
이 다리는
일본이 우리나라를
대륙침략의 기지로 삼고
노일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1905년에 군용철도를 개통한
전장 469m, 폭4.5m, 높이 8m의
철골 트러스조인
단선 경부선철교로 건설했다.
1937년
일제는
다시 중일전쟁을 일으킨 다음
그들의 군수 물자를
신속하게 보급하기 위해
경부선을 복선화하면서
단선 철교 상류에
1941년 11월 30일
507m를 새로이 가설하면서
이 다리는 인도교로
이용하게 됐다.
1950년 한국전쟁 때는
최후의 보루로
낙동강 교두보가 구축되면서
그해 8월 3일 오후 8시 30분.
북한 인민군의
남침 도강을 저지하기 위해
왜관에서 두 번 째 교각이
유엔군에 의해 폭파됐다.
1953년
휴전 후
폭파된 구간을
목교로 연결하고
다시 인도교로 이용돼 오다가
1979년 11월
목교의 노후화로
통행이 전면 중단된
때도 있었다.
1970년 11월
이 다리 위쪽에
경부선 국도의
왜관교를 새로 가설한 후
복구해
현재는 인도교로만 사용하고 있다.
1952년
칠곡의 향토유지들이
단민회를 조직해
단군의 이념을 받들어 오다가
1960년
국조전 건립계획을 세우고
전 군민의 성금으로
기금을 마련해
국조전을 건립했다.
그 후 주위 환경이 부적합하고
건물이 노후 협소해
1993년에 현재 위치
(왜관읍 석전리 산1-2 만치골)에
이건 건립했다.
왜관읍은
칠곡군청 소재지로
장영철(82) 전 영진전문대 총장,
곽경호(64) 경북도의원,
김정숙(64) 도의원,
손영배(46) 서울중앙지검 부장,
송필각(69) 전 경북도의회 의장,
이병우 (49) 칠곡경찰서장,
이인기(65) 3선 국회의원,
이진수(48)
부산지방법원 전 부장판사,
장재환(60) 칠곡군의원,
전혜숙(63) 20대 광진갑 국회의원,
황호동(50) 법무법인 제현
변호사 등을 배출했다.
장영철 전 국회의원은
명지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노동부장관,
3선 국회의원,
관세청 청장,
영진전문대 총장을 역임했다.
소탈하고 원만한 성품에
각계 인사들과 교분 폭이 넓어
마당발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으며
정관계 요직을 두루 거친
실력파 인물이다.
송필각 전 의장은
지난 1991년 제4대 경북도의원으로
등원 후 5대, 8대, 9대 의회
후반기 의장을 역임했다
베트남참전유공전우회
칠곡지부 회장,
경상북도 체육회 이사,
경북레슬링협회 회장,
대한민국재향군인회
칠곡군연합회회장의
경력을 갖고 있다.
이인기 전 의원은
지난 2000년
16대 국회의원으로
의회 등원 후 17대 18대
국회행정안전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강정석 춘천지방검찰청
영월지청 지청장은
고려대학교 법학
학사 출신이다.
경북도의회 교육위원회
곽경호 도의원은
2017년 제4회 우수의정대상
시상식에서
우수의정대상을 수상했다.
곽 의원은
칠곡군의회 의장을 역임하고
제10대 도의회에 입성했다.
기초의원 경험과
비법을 살려
다선의원 못지않은
초선의원으로 소문나 있다.
이병우 칠곡경찰서장은
순심고,
경찰대(7기)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1991년 경찰에 입문했다.
취임 일성으로
인권을 강조하는
경찰상 확립을 강조했으며 직
원 대상 다양한
인권 체험 교육을
주도하고 있다.
장재환 군의원은
적극적이고 역동적인
의정활동으로
동료 의원들로부터
신망이 두텁다는 평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