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9장 1-2절『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뤼페 모이 에스틴 메길레)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오뒤네 테 카르디아 무)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모이 테스 쉬네이데오스 무 엔 프뉴마티) 증언하노니(쉼메르튀르세르) (내용없음)』뤼페 모이 에스틴 메길레는 크다란 슬픔이 나에게 있다는 의미다. 오뒤네 테 카르디아 무는 그 마음에 아픔이다. 바울은 자기에게 엄청난 근심과 끊임없는 아픔이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생겨난 것이다. 성령의 탄식과도 같다. 즉 성령의 탄식이 바울을 통해서 나타난 것이다. 구원받지 못하는 자들은 바로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들인 것이다.
모이 테스 쉬네이데오스 무 엔 프뉴마티는 『나의 그 함께 아는 것이 거룩한 성령 안에서』쉼메르튀르세르(증언하면서) 라는 말이다. 쉬네이데오스는 쉰(함께)과 오이다(깨달아 알다)의 합성어다. 그런데 정관사 테스가 있으므로 함께 아는 그것이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이 함께 하심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9장 3절『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에위코멘) 바로라』에위코멘은 내가 원했었다 라는 것이다. 바울은 한때 기독교인들을 핍박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바울은 메시야로부터 분리되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육신의 종교심을 따르는 자신의 형제들과 친척들을 위해 자신이 총대를 멘 것이다.
9장 4절『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바울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정체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 양자됨, 그 영광, 그 언약들, 그 율법 제정, 그 제사장직 섬김, 그 선포들이다. 이것들은 모두 하나님과 관계된 것이다. 바울은 동사를 현재시제로 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과거나 지금이나 선민사상은 같다는 것이다.
9장 5절『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엑스 혼 크리스토스 토 카타 사르카)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엑스 혼 크리스토스 토 카타 사르카는『그들에게서 육신을 따라 그리스도가 그것들을 (동사 생략)』이다. 토는 관사이면서, 목적어이고, 중성 단수이다. 이와 같은 문법으로 사용된 것은 로마서 8장 3절에서 사용된 바, 아나데마(저주)인 것이다. 그러므로 토는 저주를 의미한다. 이스라엘에게서 육신을 따라 나온 저주는 예수 그리스도와 끊어지는 저주인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통해 율법에 묶여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저주를 대신 받으셨다. 우리말 개역개정은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라고 번역된 것이다. 즉 동사생략 부분이 대신 저주를 받으셨다는 것이다. 번역에서 오류가 나타난다.
9장 6절『그러나 하나님(데우)의 말씀(호 로고스)이 폐하여진(에크렙토켄) 것 같지(호이온) 않도다(우크) 이스라엘에게서(에크 이스라엘) 난 그들이 다(판타) 이스라엘이 아니요』 헬라어 성경을 보면, 우크 호이온 데 호티 에크렙토켄 호 로고스 투 데우 우 가르 판테스 우 테크 이스라엘 후토이 이스라엘이다. 이를 번역하면 『그런데 그와 같지 않다.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며 이스라엘로부터 온 모두가 이스라엘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스라엘에 대해서 부정적인 표현을 하는 것이다. 그들에게서 하나님의 말씀(호 로고스)이 떨어져 나갔다고 했다. 에크펩토켄은 에크(~로부터)와 펩토(떨어지다)의 합성어로서 ~로부터 떨어져 나갔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 말씀인 호 로고스로부터 떨어져 나간 것이다. 호 로고스는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9장 7절『또한 아브라함의 씨(스페르마)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소이) 씨(스페르마)라 불리리라 하셨으니』모든 자녀들이 아브라함과 같은 씨로 존재하지 않다는 말이다. 아브라함 사람이 모두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진 자가 아니라는 표현이다. 스페르마(씨)는 시작의 의미다. 이삭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이삭 안에서 너에게 씨라는 칭호가 주어질 것이다 라는 의미다.
9장 8절『곧 육신(테스 사르코스)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타 테크나 테스 에팡겔리아스)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테스 사르코스는 그 육신이다. 육신은 신을 받아드리는 종교심을 의미한다. 이 종교심을 가진 아브라함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약속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육신의 자녀와 약속의 자녀가 대조된다.
9장 9절『약속의 말씀(에팡겔리아스 호 로고스)은 이것이니 명년 이 때에(토 카이론 투 톤)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심이라』약속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다. 에팡겔리아스 호 로고스는 말씀이신 호 로고스(그리스도)가 우리에게 하신 약속이다. 토 카이론 투 톤은 명년(내년)에 아들을 주실 것이라는 약속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아들을 주실 것이라는 약속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했던 “사라에게서 난 아들을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씨로 주실 것이라”는 약속이다. 이삭이 약속의 씨가 된다. 마찬가지로 성도는 약속의 씨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드리는 것이다.
9장 10절『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하나님이 믿음의 여인 사라를 통해서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씨를 주신 것 처럼 리브가와 같은 믿음의 여인을 통해서 그 믿음의 씨를 물려준다는 것이다. 리브가는 쌍둥이를 잉태했다.
9장 11절『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에크 에르곤)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에크 투 칼룬투스)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태어나지 않은 자들에게 미리 하나님 나라의 씨를 택한다고 하는 표현이다. 그 이유를 설명한다. 에르곤은 사역을 의미한다. 투 칼룬투스는 특별히 부르신 소명이다. 인간은 알 수 없지만 잉태한 상태에서도 하나님은 될만한 씨를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보고 씨로서 부르신 것이다.
9장 12절『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이 이야기는 창세기 25장 21-26절의 말씀을 바탕으로 한다. 리브가는 태중에 두 아이가 다투는 것을 느꼈으며 하나님께 여쭈어 보았다. 누가 장자권이 되겠는가 라고 물은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대답하시기를 두 민족이 나뉘게 될 것이고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될 것이라는 예언적 말씀이다. 그리고 리브가는 하나님의 말씀을 깊히 생각하면서 에서와 야곱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리브가는 야곱이 장자권이 가져야 함을 깨달은 것이다.
9장 13절『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말라기 1장에서 인용한 말이다.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서 하신 말씀은 하나님이 태어나기도 전에 야곱은 사랑했고 에서는 미워했다는 말이 아니라 에서는 장자권을 가지고 태어났음에도 그 장자권을 소중히 여기지 않아서 하나님이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했다는 것이다. 동사는 아오리스트 시제이다.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9장 14절『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파라 토 데오)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파라 토 데오는 하나님 옆에서 라는 의미다. 즉 하나님 옆에 라는 말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는 불의가 없느냐 라고 묻는 것이다. 교회 사람들이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어떻게 완벽하게 살 수 있느냐 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는 불의함이 있지 않았으면 좋겠다 라는 말을 한다. 이것은 소망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