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같은 부부, 사랑에서 우정으로!
집회 6,5-17; 마르 10,1-12 / 연중 제7주간 금요일; 2025.2.28
오늘 미사에서 들려오는 말씀의 주제는 우정과 사랑입니다. 집회서의 저자가 들려주는 우정의 지혜가 주옥 같은 내용으로 들려왔고, 마르코 복음사가는 고약한 질문으로 예수님을 괴롭히려던 바리사이들의 꼼수를 하느님 창조의 섭리로 대응하신 슬기로운 답변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두 꼭지의 말씀을 종합한 초점은, ‘친구 같은 부부, 사랑에서 우정으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마르 10,2). 이는 매우 도발적인 질문이었습니다. 세상에 이혼하려고 혼인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가 혼인하여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노력도 많이 합니다. 그러나 혼인과 가정 생활을 잘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남편과 아내가, 그리고 자녀들과 함께 가정 생활을 잘 할 수 있을지에 대해 물었어야 했습니다.
질문의 의도가 당신을 시험에 빠뜨리려던 것임을 간파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되물으셨습니다: “모세는 너희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느냐?”(마르 10,3). 혼인에 대한 모세의 율법은 일부일처제를 준수하는 현대 사회의 혼인 질서와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3천여 년 전의 규정임을 감안하면 대단히 선진적인 윤리 규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아내가 불륜을 저질렀을 때 불가피하게 이혼을 허락하지만, 재혼을 할 수 있도록 이혼장을 써 주고서야 가능하다고 단서를 붙인 것뿐이었습니다(신명 24,1). 그런데 되물음을 받은 바리사이들은 이 단서 조항을 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은 허락하였습니다”(마르 10,4).
예나 지금이나 부부간에 일생동안 상호 정결을 지키는 일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하는지는 두 말할 필요가 없지만, 설사 불륜이 저질러지는 경우에 이는 남녀 공히 관여되어 있는 범죄인데도 아내의 불륜만 문제를 삼는 것만 보아도 그 당시 이스라엘 사회가 얼마나 남성 위주의 가부장적인 관행이 굳어졌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바리사이들은 모세도 허용한 이혼을 예수님께서 반대하실 경우, 모세의 권위에 대항했다는 빌미를 잡으려고 함정 질문을 던졌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네들이 들먹인 모세 법보다도 더 근원적인 근거로서 창세기의 말씀을 인용하여 응수하셨습니다: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고, 남자가 여자와 결합하여 한 몸이 된 후에는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창세 1,27; 마르 10,9). 함정 질문에 방어적으로 응수하시느라고 가장 근본적인 진리만 꺼내 놓으신 이러한 예수님의 뜻과 가르침을 본격적으로 펼치자면 이러합니다.
그것은, 남자와 여자의 자유로운 선택과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혼인과 가정은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라 할 만큼 중요한 인간의 일이지만, 근본적으로는 하느님께서 시작하신 일이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하느님의 일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는 세상 모든 일과 마찬가지로 혼인과 가정에 있어서도 하느님의 주도성을 깨달아야 합니다.
교회는 이를 근거로 혼인 성사를 거행하고 있는데, 이를 위한 조건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로, 혼인은 남녀의 자유의사로 이루어져야 하며, 그렇게 하여 이루어진 가정은 일부일처제여야 하고, 이 가정의 존엄성은 존중받아야 합니다(혼인의 단일성, 가정의 존엄성). 둘째로, 자유의사로 이루어진 남녀의 사랑과 혼인 속에 이미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하므로 한 편의 배우자가 죽기 전에는 갈라설 수도, 갈라놓아서도 안 됩니다(혼인의 불가해소성). 셋째로 부부 사이에서 태어날 자녀는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축복이므로 자녀에게 하느님을 알려주어야 합니다(신앙 교육 의무). 이는 부부와 자녀들의 행복을 위한 최소한의 필요조건입니다. 혼인 성사 예식에서는 반드시 이 세 가지 조건에 대해 신랑과 신부가 동의해야 하기 때문에, 주례 사제는 공개적으로 이를 질문합니다.
행복한 가정은 기본적인 희망 사항이고, 궁극적인 목표는 보람 있는 인생을 가족들에게 제공해 주는 가정이 되는 데 있습니다. 가정은 가족들만의 삶으로 영위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교회의 보호와 존중을 받고 있고 또 그래서 세상과 교회를 위해서도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정의 보람을 위한 충분조건은 가족들이 거룩하게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가정이 성화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가정을 교회로 건설해야 합니다. 이는 신앙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은총입니다. 따라서 위의 세 가지 조건, 즉 혼인의 단일성과 가정의 존엄성, 혼인의 불가해소성 그리고 자녀들에 대한 신앙 교육 의무를 기본적인 필요조건으로 삼고 나서는 ‘가정 교회’라는 공동체 형성을 필수적인 충분 조건으로 삼아야 합니다.
가정을 교회로 삼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사제직에 대한 의식입니다. 그리고 가부장(家父長)인 남편뿐만 아니라 가모장(家母長)인 아내도 가정 교회의 사제입니다. 사제직의 기본은 하느님께 봉헌하는 제사를 지내는 것인데, 가정 교회에서 부부는 자신들과 자녀들의 가정생활을 하느님께 봉헌하며 하느님의 보호하심을 청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혼인 성사에서 약속한 부부간 상호 정결 서원을 일생동안 충실하게 지켜야 할 뿐만 아니라 서로의 구원을 위해서 성실하게 사랑하고 돌보아주어야 합니다. 또한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을 하느님의 축복으로 받아들여 감사드려야 할 의무가 있는데, 이 모든 뜻을 모아서 부부와 자녀들이 함께 기도 바치는 가정 기도가 가정 교회의 제사입니다.
요컨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생명의 축복으로 주신 성은 추악하게 죄로 타락시킬 것이 아니라 아름답게 사랑으로 승화시켜야 하며, 하느님께서 주신 천부적인 권리인 가정의 행복은 누구나 누릴 수 있도록 세 가지 필요조건을 채워야 하고, 세상을 당신의 나라로 만들어 가기를 기대하시는 하느님께서는 모든 신앙인들에게 가정의 행복에 만족하지 말고 가정 성화의 소명을 다해서 가정의 보람도 성취하기를 바라십니다. 이 과정에서 부부의 공동 노력이 필수적인 바, 남녀 간의 사랑에서 출발하여 친구 같은 우정으로 발전해야 할 몫이 있습니다. 단순히 남성과 여성으로서의 성적인 역할을 넘어서 진실한 친구 사이에서 발휘될 수 있는 우정이야말로 가정을 성화시키는 데 필요한 그 허다한 노력을 함에 있어서 힘을 합쳐 협력해 나갈 수 있기 때문에, 자연의 섭리에서 하느님의 섭리로 승화되어야 할 몫인 겁니다. 젊은 부부 시절에 남녀 간의 성적인 역할로 자녀를 출산하고 양육하고 나서 장성한 자녀들을 출가시키고 나면, 그 후부터는 온전히 노년의 부부 관계가 성적인 역할이 아니라 성적인 인격성에 기반한 관계만이 남기 때문입니다.
혼인과 가정에 관한 이러한 교회의 가르침을 가장 잘 반영하는 복음서 본문은 요한 복음에 나오는 ‘카나의 혼인 잔치’(요한 2,1-11) 이야기입니다. 여기서는 잔치에서 꼭 필요한 술이 떨어지는 바람에 예수님께서 물 여섯 동이를 맛있는 포도주로 변화시키신 기적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첫 기적이었는데, 동행했다가 지켜본 제자들이 비로소 그분을 믿게 되었다는 체험담이 부록처럼 달려 있습니다.
이 부록 체험담이야말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기적의 의미를 말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기적으로 그 혼인 잔치에서 부부로 맺어진 남녀 두 젊은이를 축복하신 것입니다. 젊은 남녀가 서로의 매력에 끌리기는 쉽습니다. 자연의 섭리에 따른 본능적 경향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가정을 이루어서 살아가다 보면 그 매력은 어느 덧 사라지고 단점과 결점 그리고 의견과 취향의 차이가 더 도드라지게 마련입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가정에 닥치는 여러 시련도 부부가 함께 극복해야 합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켜 주신 예수님의 축복입니다. 부부로 살아가기로 결심할 만큼 시작된 남녀 간의 사랑을 서로를 위해 희생할 수도 있을 만큼 진실한 우정 같은 거룩한 사랑으로 변화되어야 백년해로(百年偕老)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물은 본능으로 끌리는 성적 사랑에 해당되고 포도주는 서로 노력해서 이룩하는 인격적인 사랑 즉 진실한 우정에 해당됩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화되듯이 부부의 사랑은 성적 사랑으로 시작해서 인격적인 사랑으로 성숙해야 완성됩니다. 이는 자녀를 낳아 기르고 장성한 자녀들을 출가 시켜 부부만 남게 된 노년 시절에 더욱 절실한 덕목입니다. 이때부터는 오늘 독서인 집회서 6장의 말씀이 적중합니다. 바로, 사랑으로 시작해서 오래된 친구 같은 부부가 되어 진실한 우정을 키우는 것입니다.
“성실한 친구는 든든한 피난처로서, 그를 얻으면 보물을 얻은 셈이다. 성실한 친구는 값으로 따질 수 없으니, 어떤 저울로도 그의 가치를 달 수 없다. 성실한 친구는 생명을 살리는 명약이니,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은 그런 친구를 얻으리라. 주님을 경외하는 이는 자신의 우정을 바르게 키워 나가니, 이웃도 그의 본을 따라 그대로 하리라.”(집회6,1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