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래포구 종합어시장
소래포구는 일제강점기 때 소금을 생산하는 염전이 있는
황량하고 한적한 어촌이었다
. 이곳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의 일이었다.
특히 한국전쟁 이후에 고향을 잃은 사람들이
소래포구로 들어와 살면서 주거지가 형성되었다.
특히 북쪽에서 내려온 월남민들이 많았는데,
그것은 한국전쟁 이후 수도권에서 인천이
가장 먼저 수복되어 안전하다는 인식과 고향과 가깝다는
심리적인 거리감 때문에
인천을 비롯한 소래 지역에 거주지를 정했던 것이다.
당시만 해도 소래포구는 밤이면 귀신이 나온다고 할 정도로
황량하고 한적한 어촌
이었다. 그러나 언제든 통일이 되면 고향에 가겠다는 마음으로
소래포구에 정착했던 것이다.
이들은 1960년대 초반에 5~6척의 돛단배를 이용해
생선을 잡고 가까운 바다에서 새우를
잡아 새우젓을 만들어 팔았다.
주로 수인선 열차를 이용하는 인천과 부평, 서울 등지가
판매처였다. 이때만 해도 해변 가까이에서 그물만 던져도
숭어가 잡힐 정도로 바닷물이 깨끗했다.
그런데 인천의 내항이 준공된 이후 새우를 잡는
소형 어선의 출입이 어려워지자, 인천항을
드나들던 새우잡이 배들이 소래포구로 발길을 돌려
한가하던 포구가 갑자기 붐비기 시작했다.
이렇게 소래포구는 새우잡이 포구로 부상했다.
그것은 소래포구의 자연환경과도 관련이 깊다.
소래포구는 이전까지 활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천연으로 갯골과 갯벌이 형성되어 있었다.
썰물이 되면 폭이 100m 정도 되는 갯골이 드러나
민낯을 보였다가 밀물이 되면 고기를 잡기 위해 나갔던
작은 배들이 물길을 따라 들어왔다.
서해는 조수간만의 차이가 최고 9m나 되었기 때문에
썰물과 밀물에 따라 다른 풍경이 나타났다.
밀물 때 바다로 나갔던 배들이 들어와 다양한 해산물을 포구에
내려놓으면 한적했던 포구는
사람들의 목소리로 가득 차며 활기가 넘쳤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과 더불어 무동력선이 동력선으로
바뀌면서 어선의 숫자도 늘어났다.
그러자 포구에 쌓이는 해산물과 새우,
새우젓 등이 늘어났고,
수원과 인천 등지에서 해산물과
새우를 구입하려는 상인들이 수인선을 타고 찾아오기 시작했다.
또한 소래포구에 대한 소문이 나면서 일반 사람들도 찾아와
해산물과 새우를 구입했다. 그뿐만
아니라 협궤열차와 포구라는 낭만을 찾아서
젊은 사람들이 놀러오는 관광지로 변해 갔다.
협궤열차는 1990년대까지 하루 세 차례 운행이 되었는데
날씨가 좋을 때는 3량에 불과한 열차에
사람들로 가득 차 300~400명씩 소래를 찾았다.
이렇게 환경이 변화하자 1973년 소래의 주민 450여 명이
힘을 합쳐서 소형 선박이 접안할 수 있는
부두인 물양장을 완성했다.
그 이후 물양장을 중심으로 200여 개에 달하는 각종 수산물을 파는
상점들이 들어섰다. 1974년 새우 파시가 개설되면서
소래어시장은 본격적으로 문을 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해 새우튀김을 파는
가게와 횟집들이 하나둘씩 문을
열었고, 소래어촌계는 여러 시설들을 갖추고 본격적으로 관광객을 유치했다.
이렇게 해서
1980년대에 소래포구는 대단위 관광어촌으로 성장했다.
1960년대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어시장에는 350여 개의 좌판이 만들어졌고
포구 입구에는 큰 횟집들이 자리를 잡았다.
어시장 옆 골목에 있는 소래역과 포구 사이에는 생선구이집들이
자리해서 생선 굽는 냄새가 사람들을 반겼다.
소래(蘇萊)라는 지명에는 여러 가지 유래가 있다.
먼저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
과의 관련설이다. 660년(무열왕 7) 나당 연합군을 결성한 당나라가 백제를 공격하기
위해 장수 소정방을 출격시켰는데,
출발한 곳이 중국 산둥성의 내주(萊州)였고,
도착한 곳이 오늘날의 소래포구 지역이었다.
그래서 소정방의 소(蘇)와 내주의
래(萊)를 취해 ‘소래’가 되었다는 설이다.
그 밖에 과거 이 지역의 냇가에 소나무 숲이
울창해 ‘솔내(松川)’로 불리다가 소래가 되었다는 설,
이 지역의 지형이 소라처럼 생겨
소래가 되었다는 설, 그리고 지형이 좁다는 뜻의 ‘
솔다’에서 비롯되었다는 설 등이 있다
소래포구 재래어시장
바다 건너 시흥쪽으로 가는 작은 도선장이었던 소래포구 지역은
1930년대 염전이 생기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1937년 일제가 수탈을 목적으로 수원과 인천 사이에
협궤철도(狹軌鐵道, 수인선)를 부설할 때,
천일염을 수탈하기 위해 소래역을 만든
이래로, 소래포구는 작업인부와 염분를 실어 나르는 배들이 정박하면서
더욱 활성화됐다. 1974년 인천내항 준공 이후,
새우잡이 소형어선이 정박 가능한 소래로 포구를
옮기면서 새우 파시로 발전하여 수도권의 대표적인 재래어항이 되었다
인천광역시 남동구청과 소래포구 축제추진 위원회는 2001년부터
‘인천 소래포구 축제’를 열고 있다.
2007년부터 2009년까지 문화관광
예비축제로 선정됐고,
2010년, 2011년에는 유망축제로 선정된 바 있다.
한편 소래포구의 시작이었던 염전은 1996년 폐쇄되어
현재는 소래습지생태공원으로 이용되고
소래역사관
소래·논현 도시개발사업의 추진과 함께 급속한 산업화, 도시화 등으로
소래지역의 역사와 전통적인 문화가 잊혀져 감에 따라 소래역사관을
건립하여 소래지역의 역사를 보존하고 아름다운 옛 모습을 추억하자는
취지에서 건립이 되었다.
소래어촌의 생활풍습, 어구 등 어촌의 전통 및 생활사 보존
소래염전의 유래, 소금생산과정 및 도구 등 보존
소래역사(驛舍), 수인선 협열차 등 추억과 낭만을 재발견
오래전 소래포구를 지나던 열차가 지금도 이렇게 보관되어 있는데 그만큼 포구로서 역사가 깊은
이곳은 인천에서도 볼거리와 먹을거리가 풍성한 곳으로 옛날 기차가 다니던 시절을 짐작케한다.
소래포구는 인천경제 자유구역이 있는 송도와 거리상으로 가깝다.
조개와 생선, 젖갈 등 신선하고 좋은 해산물들이 풍부한 이곳은 일년 365일 소래포구의 명성때문인지
많은 사람들이 찾아가는 인천의 대표적인 명물거리가 된지 오래다.
이곳은 오래전부터 소래포구의 명성을 지켜온 수산시장의 메카다.
전통을 지켜온 시장의 상인들의 미소가 정다운 곳으로 나도 가끔 이곳을 들르곤하는데
그중에 게들이 싱싱해서 가락시장이나 노량진수산시장 대신 크고 물이 좋은 놈들을 사러 줄곧 이곳을 들르곤한다.
그릇에 겹겹이 쌓아둔 조개가 눈을 호화롭게한다.
소래포구에선 말만 잘해도 덤으로 여러개가 올라오는 사람 사는 정이 느껴지는 곳으로
재래 시장을 찾는 사람들의 포근한 마음이 묻어나 세상은 살만한곳이다라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다음으로 우럭/광어회가 나왔습니다 생각보다 양이 많더라구요.
바로 회뜬거 먹은거 치곤 상당히 쫄깃하고 괜찬았어요
두껍게 쓸려있어서 씹는 맛도 괜찬았구요.
이건 이모님께서 서비스로 주신거에요.
가리비, 멍게, 해삼, 전복, 개불, 새우, 소라, 문어 등등이 골고루 들어가 있더라구요.
나름 맛은 괜찬았지만, 싱싱한 것은 아니더군요. 아무튼 서비스이니 만큼 기분이 좋았어요!
첫댓글 꿀꺽 그림만 보구 침넘어 갑니다 소래포구
구경잘했읍니다 감사합니다
아름다운 작품과 글 감사한 마음으로 즐감하고 나갑니다 수고하여 올려 주신 덕분에
편히 앉아서 잠시 즐기면서 머물다 갑니다 항상 건강 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잘 보고 갑니다
잘 보고 갑니다.
알차고 멋진 작품 감상 잘하고 갑니다. 대단히 수고 많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소래포구에 대한 역사관가 알차고 얼켜진 멋진 풍경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소래포구 종합어시장 잘보고감니다 감사합니다
소래포구 잘 보고감니다 감사합니다,
소래포구에 대한 전설과 먹음직스러움이 많은 생선들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역사의 해설과 함께 올여주신 영상 잘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수고 하셨읍니다
건강 유념 하세요 감사 합니다 ! ㅎ
소래 포구 역사이야기 유래등 잘 보구갑니다 감사합니다 코로나 감기조심하세요
종합어시장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不老無病長生長壽 하셔서
북한 고향에 함께 갑시다
좋은 내용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잘보았습니다 소래포구 풍경
소래포구 구경 잘 보고 갑니다.감사합니다.
멋진소래포구 어시장을 비롯많은사진 작품 감사 합니다.
선배 님
소래포구의 전설등 포구의 다양한
풍경들을 멋지게 담아 주셨습니다
덕분에 잘,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