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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리나라에서 꽤 유명한 의과대를 졸업하고
인턴과정을 거친 후
이제 1년 차가 돼가는 정신과 레지던트야.
내가 정신과를 선택하기까지
많은 고민과 망설임이 있었지만
1년 레지던트 생활 동안
이 과를 오길 잘했다고 생각 한
여러 이유가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 사람.
1년 차 펠로우로서, 나한테는 까마득한 선배야.
좋고 싫은 게 분명하고
일에 있어 굉장히 냉정한 사람이야.
말이나 표현도 직설적인 편이라
내 동기뿐만 아니라 바로 위 선배들도
여자를 무서워하고 어려워해.
그런데
내가 레지던트로 막 출근 한 날
여자가 나를 방으로 부른 일이 있었어.
주위 사람들은 여자가 개인적으로
누구를 방으로 불러 얘기하는 일은
혼낼 때뿐이라고 하면서
첫날부터 내가 찍힌 것 같다고 말했어.
나는 긴장된 마음으로 여자의 방으로 들어갔어.
여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날 올려 보더니
무심한 듯 말해.
"밖에서 무슨 얘길 들었는지 몰라도
걔네는 나 잘 몰라.
다 나랑 안 친해."
나는 앞뒤 설명 없는 여자의 말에 당황스러워
보고만 있어.
그러면서 여자는
"너는 나랑 친하게 지내보자.
그러니까 나 보면
긴장하지 말고 웃어."
긴장한 채 여자를 바라보던 나는
여자의 말에 그제야 살짝 숨을 고르며 미소를 보였고
그런 날 보며 여자도 보일 듯 말듯 웃었어.
그 후부터 여자는 늘 나를 옆에 데리고 다녔어.
회진을 돌면서 내가 꼭 알아야 할 것들을
틈틈이 얘기해주면
나는 놓치지 않으려고 쉴 새 없이 메모를 해.
그런 나를 여자는 몰래 흐뭇하게 바라봐.
나를 보며 꼭 자기의 레지던트 시절이 떠오르기도 하고
열심히 배우는 내가 예쁘다는 생각을 해.
또 하루는
내가 사소한 실수를 저질렀는데
한 선배가 조금 과하게 혼을 냈어.
풀이 죽어 온종일 기운이 없는 내가
신경이 쓰였던 여자는
동기와 다른 선배들이 있는 자리에서는
차마 다가오지 못하고
모두가 자리를 비우고
내가 의국에 혼자 남아 있는 걸 보고는
얼른 나한테로 와.
"괜찮아. 그 정도면 잘했어.
내가 다음에 걔 혼낼 때 두 배로 갚아줄게."
하며 다정하게 웃고는 내 머리를 가볍게 흩트려.
그런 여자의 위로가 우울한 마음을 다 날려주는 듯해.
나는 이렇게 나를 위해주는 여자에게 더 잘하고 싶단 생각을 해.
그렇게 여자와 함께하는 날이 많아지면서
우린 더 가까워졌고
처음으로 병원 안이 아니라 밖에서 여자를 만난 적이 있어.
점심을 먹기 위해 약속 장소에
먼저 도착해 여자를 기다리는데
얼마 안돼서 여자가 걸어 들어와.
평소 의사 가운을 입은 여자가
정말 멋있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렇게 사복을 입은 여자를 보니
여자는 어떤 모습이라도 저렇게 멋있고 예쁘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나도 모르게 가슴이 뛰어.
한 달 전부터는
여자의 추천으로 우린 같은 숙소에 살게 됐어.
의국에 있는 시간은 레지던트인 내가 더 많기 때문에
대부분 여자가 먼저 집에 가 있으면
나는 거의 밤 12시가 넘어야만 집에 들어가.
그러면
"짠."
"아직 안 잤어요?"
"니가 안 오는데
내가 잠이 오겠어?"
여자는 귀엽게 투정을 부리듯 말해.
나보다 더 피곤할 텐데도 생글생글 웃으며
날 기다리는 여자의 모습을 보며
나는 두근거려
또
나한테만 다정하고 따뜻한 여자가
나는 점점 진심으로 좋아져.
그런데
너무 가깝게 지내는 나와 여자의 모습을
질투하는 시선들이 생겼고
심지어 나와 여자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이상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어.
나는 여자에게 피해가 갈까 봐 겁이 나.
그날 밤 여자와 술을 마시며
"의국에... 이상한 소문 도는 거
들어 보셨어요?"
내가 조심스레 물어.
여자는 살짝 술에 취해 고개를 옆으로 눕히며
"들었지.
너랑 나랑 사귄다는 소문."
나는 이 소문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솔직히 잘 모르겠어.
아직 사실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사실이었으면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거든.
그런데
"누가 물으면 아니라고 해."
여자가 너무 덤덤하게 말해.
나는 살짝 섭섭한 마음이 들려고 하는데
"그 소문에 발목 잡혀서
좋은 의사가 되겠다는 니 꿈이 꺾이면 안되지.
내가 널 얼마나 아끼는데."
여자의 말에 나는 눈물이 그렁해져.
좋아한다는 말보다 더 나를 울컥하게 해.
나와 여자는 밤새 술잔을 기울였고
둘 다 만취가 돼서 집으로 돌아왔어.
그리고 다음 날
나는 새벽에 일어나서 병원으로 출근했어.
여자는 나보다 조금 늦게 집에서 나와.
과음한 탓에 머리가 지끈거려 인상을 쓰며
출근하고 있을 여자를 위해서
나는 내 사진을 찍어 보내며
'인상 쓰지 마요. 내가 선배를 얼마나 아끼는데.'
라는 문자를 함께 보내.
그걸 본 여자는
"너를 어떡하니 정말."
여자는 내가 귀엽고 예뻐 어쩔 줄 몰라.
오늘은
병원 내 펠로우급 의사들의 전체회의가 있는 날이야.
여자도 그 때문에 거의 온종일 의국을 비워야 해.
여자가 의국에 없던 적이 처음이라
나는 왠지 허전한 마음이 들어.
다행히 오늘은 특별한 일은 없는 것 같아
나는 오후 일찍 맡은 일을 끝내고
못 잔 잠을 자려고 의국 여자 휴게실로 향해.
그리고 문을 여는데
"어? 안녕?"
나는 순간 놀라 넘어질 뻔했어.
아무도 없는 줄 알고 들어왔는데
웬 여자애라니.
나는 놀란 마음을 잠시 진정시키고
"누구니?"
내가 물어.
그러자 여자애가 씩 웃으며
"나 일주일 동안 VIP실에 살거든요.
혹시 나 생각나면 찾으러 와요."
여자애는 이 말을 남기고 방을 나가.
나는 황당해서 헛웃음이 나.
정신과에서 일하다 보니 별일이 다 있구나 싶으면서
새로 들어온 환자인가 하는 짐작을 해.
그렇게 1시간 정도 낮잠을 자고 일어나
의국으로 돌아가려는데
불현듯 아까 그 여자애가 생각이 나.
나는 VIP실이 모여있는 9층으로 향해.
그리고 차트에 나와 있는 각 방 이름과 입원한 날짜를 살피는데
오늘 환자가 들어온 방이 있어.
그런데 이상하게 이름은 없어.
나는 방 앞으로 가.
그리고 노크를 하고 조심스레 문을 여는데
내가 문을 여는지도 모르고
자기 생각에 빠진 여자애가 서 있어.
아까 그 발랄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너무나 차분하고 심지어 어두운 모습이 낯설게 느껴져.
그때
여자애가 나를 봐.
그런데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어.
그러더니
"나 좀 도와줄래요."
여자애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
10분 정도 지났을까.
여자애가 정신을 차렸어.
그리고 나는 여자애의 아픈 과거에 대해 듣게 돼.
어렸을 때 어머니와 함께 살며 밝게 자라왔는데
사고로 어머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됐어.
그런데 어머니의 사고를 목격한 게
여자애에게 트라우마로 남아서
그 후부터 줄곧 조울증을 앓아왔고
증상이 심해지면 정신을 잃고 쓰러지게 돼.
여자애가 유일하게 아픈 과거를 잊는 순간이
모델로 무대에 서는 거라고 해.
큰 키와 예쁜 얼굴로 이제 2년 차지만 제법 인정을 받았는데
그마저도 마음껏 할 수가 없어.
아버지가 여자앨 병원에 가둬뒀거든.
그리고 그 아버지는 병원장이고.
여자애는 병원장의 숨겨진 딸이라서
딸이 혹시 유명해져 본인의 명성에 흠집을 남길까 봐
절대 모델 일을 할 수 없도록 이렇게 잔인한 방법을 쓰는 거야.
담담히 말하면서도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는 여자앨 보며
나는 어렸을 적 내 모습이 떠오르며 마음이 아파.
"내 병은 아무래도 괜찮아요.
그냥 이렇게 오늘처럼 내 옆에 있어만 주면 좋겠어요."
울먹이며 말하는 여자애를
나는 조용히 품에 안아 다독여.
"약속할게. 니 병은 내가 고쳐.
오늘부터 내가 있을게.
그러니까 울지마."
나는 주치의로서 내 첫 환자로
여자앨 선택하기로 해.
어떻게든 여자애가 아프지 않게 지켜주고 싶어.
그날 밤
여자애는 저녁에 열리는 패션쇼 무대에 서야 한다며
의국으로 나를 찾아와서는 자길 내보내 달라고 해.
나는 낮에 쓰러진 영향 때문에
위험하다고 안된다고 말을 했지만
무대에 서지 못하는 게 더 힘들다는 여자앨 돕지 않을 수가 없어.
"알았어
대신 가서 나한테 멀쩡하게 인증샷 찍어 보내."
여자애는 아까 눈물을 흘리던 때랑은 180도 다른
개구진 표정으로 웃으며 나가.
환히 웃는 걸 보니
내 마음이 다 따뜻해지는 느낌이야.
그리고 두 시간 후
진짜 여자애에게서 인증샷이 도착했어.
쇼 중에 친구에게 부탁해 찍은 거라며
무대 중의 영상을 보내온 거야.
나는 병원에서와는 완전 다른 모습에
신기하면서 또 예뻐 보이기도 해.
다음 날
여자앨 기다리다 의국에서 밤을 새운 나는
돌아오지 않는 여자애 때문에 마음이 불안해.
병원 1층 로비에서 서성이며 있는데
그 애가 모습을 드러내.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왜 이렇게 늦었냐고 핀잔을 주는데
아랑곳하지 않고 날 카페 구석으로 데려가더니
"선물이에요!"
나는 웬 꽃인가 싶어 놀라서 보는데
"레지던트 1년 차면 이제 주치의잖아요.
나처럼 어리고 예쁜 애를
첫 환자로 둔 걸 축하해요."
환하게 웃으며 나한테 꽃을 건네는 여자애를 보는데
나는 미소가 절로 지어져.
정말 어리고 예쁘다 싶으면서
묘한 떨림이 느껴져.
그런데 여자애와 있으면서
나는 자꾸 여자는 잘 있으려나 걱정이 돼.
그러면서 동시에 미안한 마음이 들어.
그날 오후
나는 여자애의 치료를 위해
당분간 집에 가지 않고
의국에 머물겠다고 여자에게 얘기해.
"무슨 말인지 알겠어."
여자는 별말 없이 알겠다고 해.
하지만 왠지 표정이 좋지 않아.
나는 그런 여자가 마음에 걸리지만
내 첫 환자에게 집중하겠다는 마음으로 이해를 구해.
그 후로 나는 여자애와 계속 시간을 함께 보냈어.
근처 공원으로 함께 산책을 나가기도 하고,
여자애는 자기 때문에 의국에 있는 날 위해
몰래 밤참을 만들어 가지고 오기도 해.
"뭐하러 힘들게 몰래 만들어 와."
내가 핀잔을 주면
"좋아하면.
원래 다 해주고 싶고
그런거 아니에요?"
여자애의 당돌한 대답에
나는 뭐라 더 말 못하고 웃고 말아.
단 며칠 만에
나와 함께 치료하고 시간을 보내며
여자애는 눈에 띄게 증상이 호전돼.
나는 의사로서 뿌듯하기도 하고
나를 잘 따라주는 여자애가 예쁘기도 해.
그리고 며칠이 더 지난 후
나는 옷도 챙길 겸 잠시 집에 들르기로 해.
그런데 집에 도착해서
여자는 내게 아무 말이 없어.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간단히 필요한 짐을 싸는데
드디어 여자가 말을 걸어와.
"너 그 애 누군지 알지."
전에 없이 차가운 말투에 나는 살짝 놀라.
"네 알아요.
병원장님 딸이잖아요."
"왜 하필 그 애야?
병원장이 니가 그 애를 돕고 있는 걸 알면
너 바로 해고야!"
여자가 처음으로 내게 화를 내.
하지만 나도 내 뜻을 굽히지 않아.
"외롭고 아픈 애예요.
내 첫 환자니까.
최선을 다하고 싶어서-"
여자가 내 말을 끊으며
"그럼 나는.
하루 종일 니가 혹시 잘못 될까 봐
걱정되 미치겠는 나는?
나는 안 외롭고 안 아픈 거 같아?"
여자의 가슴 아픈 고백에
나는 순간 얼음이 된 듯 몸이 굳어.
여자의 눈에 눈물이 고이고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미안함에 그냥 눈물만 흐르는데
여자는 그대로 밖으로 나가.
그렇게 이틀이 지났어.
여자는 병가를 내고 병원에 나오지 않았어.
그런데
이날 오후
동기에게서 여자가 병원에 짐을 가지러 왔단 얘길 들어.
미국 큰 병원으로 갈 기회가 생겼다는 거야.
붙잡고 싶은데
지금 나는 그럴 자격이 없는 거 같아.
더 넓은 세상에서 여자가 잘되길 바라는 마음만 갖기로 해.
그런데
평소 여자와 가깝게 지내던
심장내과 교수한테 갑자기 전화가 와.
"너는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걔 지금 심장이 많이 안 좋아."
교수의 말에 나는 멍해져.
"국내에서 수술이 불가능해서
미국으로 가는 거야.
너한테는 얘길 하라고 했는데
걔가 니 걱정을 좀 해야지."
나는 그날 밤
여자가 했던 말이 떠올라.
'나는 안 외롭고 안 아픈 거 같아?'
나는 여자의 방으로 전속력을 다해 뛰어.
그리고
짐을 들고나와 차마 발걸음을 옮기지 못한
여자가
서럽게 울고 있어.
여자에게 천천히 다가가는데
전화 진동이 울려
나는 누군지 확인도 할 정신 없이 그냥 전화를 받는데
"할 말 있어요.
기다리고 있으니까 지금 나올래요?"
1.공효진
2.이성경
이거 가끔 계속 생각남;;ㅠㅠㅠㅠㅠ 공효진 이성경 둘다 너무좋아...
1아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