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짐달 스무닷새, 믈날.
올 한해는 내 삶에서 가장 숨 가쁘게 달린 나날이었습니다.
전에도 그런 나날이 없지 않았고,
보다 숨찼던 일들이 또한 있었지만
올해 달린 것에는 또 다른 묵은 것들을 해치우는 것이었으므로
‘가장 숨이 가빴다’고 말해도 될 것 같습니다.
교회라는 세계에 발을 들여놓을 때에야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으니
그것이 제대로 된 선택이었는지 아닌지를 헤아릴 수 없었고
그게 그리 늦은 것도 아니었는데도
‘이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음에도
결국 거기다 내 삶 전체를 걸어야겠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그 자리에 남기로 했던 일,
그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마흔네 해 전의 일입니다.
사실 내가 보기에 교회라는 곳은
정상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이 머물 수 있는 곳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 밑바닥에는
존재의 진실과, 정직하고 성실한 삶의 태도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살면서 겪게 된 거듭되는 실망과 좌절은
이게 사람 사는 세상이냐고 물을 수 있는 일들 때문에 생긴
때로 슬프기도 하고
때로 답답하기도 하고
때로 화가 나기도 하는 일들이었습니다.
그동안 들었던 하느님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가 있었지만
알고 보니 그 모든 것들은 인간의 관념이 빚어낸 허상이었고
그런 조잡한 논리들을 가지고 꾸려가는 교회 조직과 교회라는 집단은
상식에도 어긋났고,
온갖 비합리의 조합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거기 남아서 공부했고
그 공부의 마지막으로 신학을 전공했으며
마침내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 사이 내 안에는
‘이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거듭해서 맴돌았는데
수없이 겪은 일들 때문에
안에서 들끓는 분노와 증오심은
종교적 감성을 날마다 갉아먹는 위험한 자아의 한 부분이었고,
그래서 이것에 대해 글을 쓰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
벌써 서른 해 전의 일이었지만,
글을 시작할 때마다
몇 줄 쓰지도 않아
이것은 글이 아니라는 생각에 지우고 미뤄 두기를 거듭했습니다.
나이도 먹고,
그 사이 증오심이나 분노 또는 적개심은
어느 정도 가라앉았고
그때 다시 글쓰기를 시작한 것은 두어 해 전의 일입니다.
물론 이 글의 배경은
우리 ‘충북사회문제연구소’에서 진행한
두 교실입니다.
하나는 ‘성서학당’이라는
신학적인 내용까지 담아서 풀어낸 이야기였고
다른 하나는 상식의 선에서 성서를 읽기로 한 ‘이야기 성서’였습니다.
두 교실을 진행하는 동안
참으로 많은 것들을 배웠고
올해 비로소 두 교실에서 진행한 내용을 하나로 묶을 수 있었습니다.
묶어놓고 보니 겹치는 것이라든가 군더더기들이 너무 많아
아무래도 정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손질을 시작했고
그 사이 이 글을 책으로 묶어도 괜찮겠다는
출판사의 긍정적 입장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집중해서 손질을 하던 저 일이야말로
그야말로 ‘숨 가빴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시간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렇게 첫 번째 손질을 마쳤지만 여전히 남는 아쉬움,
다시 붙잡고 두 번째 손질을 했고
그래도 부족한 것이 너무 많이 보여 세 번째 손질 시작,
그 사이 『말이 되는 성서 읽기』라는 이름까지 확정을 했고
‘출판준비위원회’도 꾸렸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손질을 마친 뒤
다시 네 번째 손질 시작,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를 거쳐
어제 저녁때 마침내 일곱 번째 손질을 마쳤습니다.
이제 출판사로 보낸 다음 의견을 듣고
손질할 것이 있으면 한 번 더 손질을 하면서
‘출판준비위원회’에서
‘출판기념회준비위원회’로 조직을 바꾸고 위원을 조금 더 채운 다음
책으로 내는 마지막 과정을 거쳐야 할 것 같습니다.
부족합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는 생각이고
나머지는 출판사와 출판
그리고 읽는 이들에게 맡겨 두기로 합니다.
어쨌든 그렇게 일곱 번재 손지을 마쳤다는 것을 알립니다.
후련합니다.
날마다 좋은 날!!!
- 키작은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