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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 라이징> 앞부분엔 폭풍을 헤치고 나아가는 주인공 일행이 등장한다. 배가 고장 나서 말을 듣지 않을 때, 그걸 고치던 아시아계 여자 배우가 뜬금없이 "X팔 얼어 죽겠어"하고 우리말로 욕을 한다. 아마도 이국적 느낌이 들게 하고 싶었던 감독이 원어(?)로 욕을 한번 해 달라 했겠지만, 난데없이 한국계 여배우를 발견하는 기분은 신기하고 묘했다. <딥 라이징>에서 인상적인 욕을 던지며 등장했던 '우나 데이먼'은 <트루먼 쇼>에서도 얄미운 아시아계 캐릭터로 등장했고, <딥 임팩트>, <스파이더 맨> 같은 영화들에도 얼굴을 비췄다. <딥 라이징>에서는 주인공 일행에 속했고, 처음에는 대사도 많아서 기대를 걸었다. 그런데 백인 여자 주인공이 합류하기 무섭게 괴물 뱃속으로 사라진 비운의 캐릭터가 되었다.
<볼케이노>라는 영화 자체가 백인 주거지와 흑인 주거지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을 펼치다가 인종 화합으로 매듭짓는 설정을 하고 있다. 그래서 한국계 배우가 아시아계 쿼터를 차지한 것도 한국계가 많이 사는 LA라는 배경을 고려한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한국계 여배우들은 이민 1.5∼3세대들이다. 이들은 어려서 미국으로 건너갔거나 미국에서 태어나 자라났기 때문에 아시아계 배우가 할리우드로 진입할 때 첫 번째 장벽으로 존재하는 영어 문제에서 자유롭다. 미국에 거주하는 아시아계 중에서 인구 수나 경제력, 특히 교육수준에서 한국계가 차지하는 위상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기 때문에 한국계 배우들의 출연 기회도 그만큼 늘어난다고 볼 수 있다. 아직 다른 인종에 비해 아시아계가 주연을 맡는 것은 쉽지 않지만, 성별에 대한 편견이 만들어낸 틈 덕분에 남자보다는 여배우들에게 오히려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지기도 한다. 단순하게 말해서 아사아계 남성이 백인 여성을 이끄는 것은 부담스럽지만, 백인 남성이 아시아계 여성을 이끄는 것은 허용되는 폭이 넓다는 것. 그래서 꼭 아시아계 캐릭터가 필요한 상황이 아니고 그냥 여자 캐릭터가 필요할 때, 한국계 여배우에게도 기회가 주어진다는 얘기다.
<배틀스타 갈락티카>에 출연하고 있는 젊은 여성 캐릭터들 중에서 가장 여성스러운 캐릭터로 인기를 끌고 있는데, 아시아계에 대한 인종적 안배와 관계없이 하나의 여성 캐릭터로 자기 자리를 차지했다.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한국계 여배우로 가장 중심에 다가선 배우가 바로 '산드라 오'다. 평론가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던 <사이드웨이>에서 주연을 맡아 강렬한 연기를 선보여 호평받았다. 또 산드라 오는 인기 TV 시리즈 <그레이 아나토미>에서 괄괄한 성격의 인턴역을 맡아 제63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TV부문 여우조연상을 거머쥐었고, 시리즈의 성공으로 제작사인 터치스톤TV에서 2백만 달러의 보너스를 받기도 했다.
기자는 서울에서 열렸던 단편영화제에서 <먹이>를 보았다. 이때만 해도 산드라 오를 보고 참 독특한 캐릭터라 생각했지, 불과 10년 만에 변방에서 할리우드 중심으로 돌진할 것이라고는 미처 짐작하지 못했다. 그녀의 성공에 박수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