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안 맛있는 겨울여행
초겨울 도루묵·양미리, 한겨울 도치·장치·곰치
저주받고 걷어차이던 그들, ‘식객’에 ‘딱~ 걸려’
아침 기온이 영하로 떨어졌다. 겨울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다. 이맘 때 나서는 여행길은 사실 을씨년스럽다. 두껍게 깔린 눈벌판도 없고 찬바람만 매섭다. 그러나 추울수록 제 맛 나는 여정도 있다. 동해안 포구 여행이다. 어판장마다 제철 만난 맛난 것들이 깔리고 쌓인다. 본디 노는 물이 차가운 바닷고기들이다. 이것들을 굽고 끓이고 조리면 동해안 바닷가는 한결 따뜻하고 구수해진다. 썰렁한 바다, 찬바람 몰아치는 포구들을 진하고 깊고 삼삼한 바닷고기 내음이 감싸 안는다. 11월 말부터 2~3월까지 생김새·맛·가격이 천차만별인 개성 뚜렷한 어족들이 여행객을 기다린다. 약 치고 먹이 줘서 기르지 않은 순수 자연산 겨울 바닷고기들이다.
동해안 바닷고기를 만나러 가기 전 주변 사람들에게 물었다. 겨울 동해안 하면 떠오르는 해산물이 무엇인가. 오징어를 떠올린 사람이 제일 많았고(안타깝게도 오징어 제철은 6~11월이다), 다음이 명태였다(아쉽게도 동해안 명태는 거의 사라졌다). 겨울 동해안 맛의 주인공들은 따로 있다. 주로 못난이들이다. 알려진 대로 초겨울엔 도루묵·양미리가 주인공이다. 한겨울엔 도치·장치·곰치(곰치는 사철 잡히지만 겨울에 제 맛이 난다)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이들의 공통점은 과거에는 버림받았다가 최근에야 그 진가를 인정받은 ‘못난이 물고기’들이란 점이다.
순수 자연산 그대로…김치두루치기·찜·조림 등 무한변신
대부분 못난 모습에 먹어볼 것 없어 보이는 몸집을 하고 있다. 잡히면 재수 없다고 바다에 던져 버리거나(곰치), 잡아도 팽개쳐둔 채 발로 걷어차고 다녔고(곰치·도치), 너무 많이 잡혀서 지겨워했으며(양미리·도루묵), 잡혀도 그만 안 잡혀도 그만(장치)이던 것들이다. 이랬던 놈들이 다양한 요리법 개발과 자연산 별미 찾기에 혈안이 된 미식가들의 입맛 덕에 인생역전을 이뤘다. 온난화와 해양오염, 남획으로 말미암은 기존 어족자원의 고갈도 어민들이 못난이들에게 눈 돌리는 구실을 했다.
거저 줘도 시큰둥해하는 대접을 받던 이들 바닷고기들은 이제 고성·속초·양양·강릉·동해·삼척에 이르기까지 각각 전문식당까지 생겨나 문전성시를 이룰 정도로 인기다. 애호가들이 늘면서 요리 방식도 진화를 거듭하는 추세다. 지금 동해안(정확히는 동해안 중북부 강원도 해안)에선 도루묵과 양미리가 한창 제철이다. 늦가을부터 초겨울 사이에 포구에 쏟아져 들어오는 도루묵·양미리는 동해안 겨울 맛의 서막이다. 겨울이 깊어가면서 김치두루치기로 이름난 도치, 찜과 조림 맛이 빼어난 장치가 제철을 맞고, 사철 잡히는 곰치(꼼치)도 한결 제 맛을 뽐낸다.
딱 떨어지는 여행지를 찾아내기 어려운 요즘, 이름도 생소하고 생김새도 야릇한 동해 바닷고기 체험여행을 떠나보시는 건 어떨지.
동해안/글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 맛난 바닷고기 순례
지금부터 동해안 포구 여행길이 맛있어진다. 구체적으로는 동해안 중북부 강원지역 해안이다. 지금 한창 도루묵·양미리가 제철이고, 12월부터는 강원 중북부 해안의 새로운 별미 재료로 떠오르고 있는 도치·장치·곰치들이 어민들의 손길을 바쁘게 하기 때문이다. 양미리·도루묵을 잡던 어민들의 일부는 1월부터 본격적인 도치·곰치·장치잡이에 나선다. 고성·속초·양양·강릉·동해·삼척의 맛있는 겨울 바닷고기 순례를 떠난다.
▷ 도루묵
부드럽고 쫀득쫀득, ‘말짱 도루묵’에서 다시 ‘은어’로?
제철이 10월~12월 중순이다. 아시다시피, 옛날 피란길의 한 임금이 ‘묵’이라는 고기를 맛보고 맛에 감탄해 ‘은어’라 부르도록 했는데, 그 뒤 그 맛을 못 잊어 대궐로 돌아와 다시 먹어보니 그 맛이 아니어서 ‘도로 묵으로 고치라’고 했다는 그 바닷고기다. ‘말짱 도루묵’이란 속어도 여기서 비롯했다.
농어목 도루묵과에 속하는 바닷고기다. 1960~70년대엔 도루묵 알이 원폭 피해자들을 치료하는 데 효과가 있다고 알려지면서 일본으로 대량 수출되기도 했다. 동해안 어민들은 산란기에 연안 바위 부근에서 많이 잡히므로 돌메기(돌묵·돌목어)라 부른다. 10월엔 수심 200m 이상 깊이에 살다가 산란기(11월 말~12월 초)가 다가오면 수심 10m 안팎의 연안 바위 쪽으로 이동한다. 바위틈의 해초에 ‘알을 싼다’.
어민들은 알이 가득 든 암컷 ‘알갖이 도루묵’을 선호한다. 쫀득쫀득하면서도 부드럽게 씹히는 맛이 좋기 때문이다. 알은 산란기에 가까울수록 딱딱해진다. 특히 냉동시킨 도루묵 알은 고무줄처럼 질겨 제맛을 잃는다. 보통 무와 파·마늘 등을 넣고 찌개로 끓이거나 물을 자작하게 넣고 매실청 따위를 넣고 조려 먹는다. 통째로 석쇠에 구워 먹어도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어떻게 조리해도 소주 안주로 딱이다. 살집이 부드러우면서 다소 미끈거리는 게 특징이다.
10월~12월 초 강릉의 주문진항, 고성 거진항, 속초 청초항 등 강원 중북부 동해안 주요 포구 대부분의 식당에서 도루묵을 다룬다. 도루묵 배는 새벽 4시쯤에 나가 그물을 걷어 7~8시쯤 들어온다. 어판장에서 경매를 통해 넘긴다.
올해는 도루묵 어획량이 지난해의 절반으로 뚝 떨어져 값이 갑절 이상 올랐다. 지난해 11월 한 두름(20마리)에 7천~8천원까지 떨어졌으나(평년 1만~1만5천원선), 올해엔 2만원 이상까지 급상승했다. “미처 잡을 시간이 없어 안타까울 정도로 흔했다”거나, “어판장에 산더미처럼 쌓일 적이 많았다”는 옛날과는 천양지차다. 포구나 주변 어시장에서 한 두름에 2만~2만5천원에 살 수 있다.
▷양미리
도루묵과 달리 수놈이 제 맛…풍어로 또다시 천덕꾸러기 될라
제철 11월~12월 하순. 도루묵과 비슷한 시기에 동해안 중북부에서 나는, 비슷하게 흔하던 바닷고기였다. 하지만 최근 도루묵과 생산량·가격에서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 도루묵은 갈수록 귀해져 값이 비싸지는 반면, 양미리는 갈수록 풍어를 이뤄 값이 떨어지는 중이다. 20마리에 2천원 정도 밖에 안 하는, 아마도 그 크기에 비해 가장 값싼 어족이 아닐까 싶다. 강릉 사천항에서 만난 한 어민이 말했다. “단가가 맞아야 많이 잡아도 신이 날 텐데, 많이 잡을수록 값이 똥값이 되니 욕이 절로 나와요.”
풍어를 이룬 양미리가 어떤 신세인지는 포구 주변 어시장에서 여느 고기를 사보면 금세 알게 된다. 다른 고기를 사면 덤으로 몇 움큼씩 퍼주고 끼워주는 고기가 바로 양미리다. 말린 양미리도 한 두름에 2천~2500원 정도다. 그러나 식당으로 들어가 양미리 구이를 시키면 숯값·자리값 명목으로 10마리에 1만원 안팎을 부른다.
그래도 그 맛만은 만만찮다. 특히 소금을 쫙 뿌려 석쇠에 구워 먹는 양미리는 ‘잔질’이 거세지게 만든다. 말려뒀던 양미리를 냄비에 조리면 밑반찬으로 훌륭하다. 어민들이 도루묵 암놈을 선호한다면, 양미리는 수놈을 골라 먹는다. ‘곤’ 또는 ‘곤지’라 부르는 정액 주머니가 맛을 한결 부드럽게 해주기 때문이다. 양미리잡이는 12월 말까지 한다. 양미리를 잡던 배들은 1월부터 도치나 대게잡이에 나선다.
▷도치
묵은 김치와 찰떡 궁합 ‘알의 제왕’…생김새 따라 심퉁이
12월~2월이 제철이다. 도치는 복어처럼 둥근 공 모양인데, 배 쪽에 큼직한 빨판이 달려 있다. 바위에 붙으면 손으로 떼어낼 수 없을 정도로 흡착력이 강하다고 한다. 생긴 모습이 심통 맞게 생겼다 하여 심퉁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별 볼일 없었던 못난이 바닷고기였다. 물컹거리는 살집이 먹을 게 별로 없었고, 알만큼은 푸짐해 어민들이 가정에서 알탕으로 주로 끓여 먹었던 고기다. 이게 요즘 뜨고 있다. 도치 알과 묵은 김치의 궁합이 딱 맞아떨어져, 시원하고 얼큰한 찌개로 각광받기 시작하면서다. 도치알탕 또는 도치두루치기라는 이름으로 동해안 포구 식당들 차림표의 주종목으로 떠올랐다.
가격도 치솟았다. 알도치를 쳐주므로 수컷보다 암컷이 훨씬 비싸다. 커봐야 어른 손바닥 벌린 크기 정도의 도치 암컷 한 마리가 1만5천~2만원(수컷은 5천~6천원) 선이다. 몸집 크기에 비해 아주 비싼 고기에 속한다. 수심 100~200m에 사는 냉수성 어종으로, 산란기가 되면 연안 바위 쪽으로 이동하는데, 이때가 도치잡이철이 된다.
이걸 끓여 놓으면 냄비 안은 도치 알의 바다를 이룬다. 이 바다에 뜨고 가라앉은 묵은 김치 쪽과 얼기설기 썰어 넣은 거뭇하고 희끗한 도치 살점이 곁방살이하듯 끼어 있다. 살집은 졸깃하고 비린내는 거의 없다. 어민들이 좋아하는 게 알탕의 국물이다. 얼큰하고 걸쭉한 국물을, 밥 말아 먹고 들이켜고 하며 땀을 뺀다. 도치가 한창 나오는 한겨울엔 도치 알을 따로 모아 굳혀 두부처럼 썰어낸 ‘도치알 두부’도 맛볼 수 있다.
▷곰치(물곰)
흐물흐물거려 그냥 후루룩…1m나 되는 ‘대물’로 ‘조폭 짝퉁’
험악하게 생기기로 둘째가라면 섭섭해 할 이 바닷고기의 본명은 꼼치다. 우리나라 연안에서 사철 두루 잡히는데 주로 어민들이 술 마신 다음날 속풀이용 해장국으로 즐겨 조리해 먹던 고기다. 고성·속초·양양 등에선 물곰, 동해·삼척 등에선 곰치로 부른다. 지역에 따라 물메기·물텀벙이·물고미·물미거지 등으로 다양하게 불린다. 물텀벙이란 이름은 옛날 어민들이 그물에 이놈이 걸리면 재수 없다며 곧바로 바다로 던져버렸던 데서 나왔다.
큰 것은 길이 1m 가까이 되는 대형 어족이다. 수컷은 거무튀튀하고 암컷은 붉은빛이 도는 갈색이 많은데, 암수 가리지 않고 몸체가 흐물흐물하다. 통에 담으면 이놈들은 몸을 가누지 못하고 퍼질러져 거의 액체처럼 출렁거린다. 이걸 보면 일단 식욕이 싹 달아난다. 하지만 이걸 국이나 탕으로 끓여 내면, 어민들 말마따나 “비교할 상대가 없는 최고의 속풀이 해장국”으로 거듭난다.
동해·삼척·울진 등에선 묵은 김치와 곰치만으로 깊은 맛을 내는 곰칫국을 끓인다. 고성·속초·양양 등에선 파·마늘과 무를 듬뿍 썰어 넣고 맑게 끓여 깔끔한 맛을 내는 물곰탕을 만든다. 최근엔 두 지역의 특성을 결합한 중간 형식도 나왔다. 양양이나 속초 일부 식당에선 맑게 끓이는 방식에다 고춧가루를 넣어 얼큰하면서도 개운한 탕을 차림표에 올리고 있다. 그 이름도 뒤섞여서 곰치탕·곰국·곰탕·물곰매운탕 식으로 식당마다 다르다.
일부 지역에선 회로 먹기도 하고 말려뒀다가 쪄 먹기도 한다. 흐물거리기는 수컷보다 암컷이 더하다. 식당에서 끓여낼 때는 대개 암수를 가리지 않고 섞어 넣는데, 고기 맛은 흐물거리는 부위가 적은 수컷이 좋다. 들이마셔도 될 정도로 부드럽고 구수하다.
곰칫국·물곰탕이 동해안 식당들의 주요 종목으로 떠오르면서 곰치 값은 천정부지로 솟았다. 몇년 전까지도 마리당 1만원 안팎이던 것이, 요즘엔 수컷의 경우 3만~4만원(암컷은 2만~3만원)이 보통이다. 날씨가 궂어 배가 뜨기 어려울 때엔 6만~7만원까지 올라가기도 한다. 따라서 곰칫국·물곰탕 값도 1인분에 8천~1만원이 예사다.
▷장치
졸깃하고 푸짐한 살집에 찜 제격…알은 독성 ‘올챙이 뻥튀기’
“이 장치찜은 여 사람들밖에 모르는 음식이래요. 동해안에서도 강원도 중북부 지역에서만 잡히니까는. 장치 잡히는 데가 여밖에 더 있나 어디.”
고성 거진항 한 식당 주인의 말이다. 그러나 장치라는 고기 이름은 백과사전에 없다. 동해안 어민들은 이 고기를 노장치·노쟁이·노대구 등으로도 부른다. 대개 “장어처럼 길게 생겨서 장치 아니냐”고 말한다.
강릉 국립수산과학연구원에 따르면 장치의 본명은 벌레문치다. 농어목 등가시치과에 속하는 냉대성 어종으로 우리나라 중북부 이북 지역의 수심 300~500m 바다 밑바닥에 산다. 길이 50~60㎝짜리에서부터 큰 것은 1m에 이른다. 한겨울이 제철이다.
알이 든 암놈은 거대한 올챙이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장치 알은 독성이 있어 먹지 않는다. 한겨울 도치나 곰치를 전문으로 잡는 어민은 있어도, 장치만 전문적으로 잡는 어민은 드물다. 다른 고기 그물에 걸려든 것들이 대부분이다. 많이 잡히지도 않거니와 도치·곰치에 비해 상대적으로(몸 크기에 비해) 값이 싸기 때문이다. 큰 것도 마리당 1만원 정도다.
장치는 주로 약간 말렸다가 쪄 먹거나 조림으로 먹는다. 살집이 졸깃하면서도 푸짐하게 씹히는 맛이 부드러워 누구나 즐겨 먹는다. 최근 장치찜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들이 늘면서 장치 주가도 올라가고 있다. 장치를 전문으로 다루는 식당들은 대개 문앞이나 집 뒤에서 수십마리씩 손질한 장치를 내걸어 말렸다가 저장해둔 뒤 사철 장치찜을 낸다. 주로 감자와 함께 고춧가루를 듬뿍 넣어 국물이 자작하게 쪄낸다. 얼큰하고 구수한 맛이 아주 좋다. 그 국물에 밥을 비벼 먹어도 좋다.
글 이병학 기자 사진 박미향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