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전령사인 매화와 산수유가 지면 뒤를 이어 벚꽃이 피어난다. 꽃 중에서 벚꽃만큼이나 화사한 꽃도 드물다. 벚꽃이 화사한 자태로 우리 앞에 다가올 때면 봄빛이 더욱 완연해짐을 느낀다. 바람이라도 불어 꽃잎이 함박눈처럼 휘날리는 모습은 영화의 한 장면이다. 경남 하동군의 화개장터에서 쌍계사에 이르는 10리 벚꽃길, 섬진강변 19번 국도의 벚꽃 터널은 가히 국내 최고의 벚꽃 감상 여행지라는 타이틀을 붙여도 무방하다.
<화개 탑리에서부터 쌍계사까지 화개천변을 따라 만발한 벚꽃.(하동군청 사진)>
꽃비 맞으며 백년해로 기약하는 길
화개면 화개장터에서 쌍계사 입구까지의 10리 벚꽃길은 젊은 남녀들이 백년해로를 기약하는 경우가 많다고 해서 '혼례길목'으로 불릴 만큼 환상적인 코스로 인정받고 있다. 수령 70년을 넘은 아름드리 벚나무가 구불구불한 화개천 개울을 따라 활짝 피어나면서 터널을 이룬다. 아침나절 화개천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역광 속에 꽃잎이 빛나는 모습을 감상하는 방법이 가장 인상에 오래 남는다. 벚꽃이 필 무렵 화개천 주변 차밭과 보리밭도 초록색으로 물들어 벚꽃의 화사함을 더욱 환하게 살려준다.
<차밭의 녹색이 벚꽃의 화사함을 살려주고 있다.(하동군청 사진)>
<화개천변에 피어난 벚꽃(하동군청 사진)>
화개장터가 자리한 탑리에서부터 꽃길은 시작된다. 중간쯤에 이르러 두 갈래 길이 나오는 장소가 10리 벚꽃길의 압권지대이다. 벚꽃을 감상하고자 이곳을 찾은 여행자들은 그 지점에 이르러 감탄사를 토해내지 않을 수 없다. 탑리에서 쌍계사 입구까지는 약 5km, 도시인들에게는 다소 멀게 느껴지기도 하는 벚꽃길을 산책한 후 노변의 찻집에 들러 화개녹차로 목을 축이면 지리산의 정기가 온몸으로 스며든다.
화개 벚꽃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새벽 무렵에 찾아가는 것이 좋다. 오후 들어서는 전국 각지에서 모인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탓이다. 오전 일찍 벚꽃길을 걸어야만 만개한 벚꽃들로부터 환영인사를 올바르게 받을 수 있고 기념사진을 찍는 시간도 충분하다.
<쌍계사 대웅전의 불상>
벚꽃길이 마무리되는 지점에 명찰 쌍계사가 있어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절집 답사로 이어진다. 국보 제47호로 지정된 진감선사대공탑비 등 문화유적이 많은 쌍계사는 신라 성덕왕 23년(723)에 의상의 제자인 삼법이 창건한 고찰이다. 840년에는 진감국사가 중국에서 차나무를 가져와 심었고 정강왕 때에는 쌍계사라 이름을 바꾸었다. 그후 벽암, 백암, 법훈, 만허, 용담, 초산 스님의 중창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웅전과 팔상전 영산회상도, 적묵당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고 현판과 주련들이 많아 문화유산 답사객들의 발걸음이 줄을 잇는다.
어느 해 사월인가, 도종환시인은 화개로 여행을 왔다가 다원에서 ‘화개’라는 시 한 편을 남겼다. ‘…나는 붓 들어 내 남은 날이 / 섬진강 모래처럼 순하고 부드럽기를 / 화심에 수백 만 개 향기의 촛불을 켜들고도 / 화려하기보다 은은한 벚꽃처럼 살 수 있기를 / 며칠째 비어 있는 방명록 여백에 적었다…’
<봄의 정취가 가득한 화개장터>
화개 10리 벚꽃길을 뒤로 하고 화개장터를 들르면 여로는 더욱 흥겨워진다. 예로부터 산수가 아름답고 골이 깊은 이곳 화개는 김동리의 단편소설인 '역마'의 주무대이기도 했다. 지금처럼 교통이 좋아지기 이전 화개장날(1일, 6일)이 되면 장터가 비좁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큰 장을 이루었다. 지금도 장터의 풍경은 살아남아 훈훈한 인심을 만날 수 있다. 이곳에서는 가수 조영남씨가 부른 유행가 '화개장터' 가 절로 흥얼거려진다.
금오산에 올라 다도해 일출 감상
화개장터에서부터 하동읍내에 이르는 섬진강변 19번 국도는 시쳇말로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이다. 4월 초순이면 도로 양편으로 벚꽃이 만발, 터널을 이룬다. 중간에 박경리선생의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가 되었던 악양면 평사리가 있다. 박경리선생이 쓴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가 되었던 곳이 바로 이곳 아닌가. 지리산과 섬진강의 정기가 죄다 이 들판에 모여 있는 듯하다. ‘사람이 살기에 좋고 산수가 대단히 아름답다’라고 이중환의 택리지에도 나와 있듯이 악양은 산, 강, 들이 골고루 넉넉하게 포진한 고장이다.
<19번 국도의 벚꽃터널>
악양면 평사리의 민속마을 구실을 하는 최참판댁은 실제 존재했던 가옥들이 아니라 소설의 줄거리에 따라 하동군에서 고증을 거쳐 조성했다. 마당을 오고가다 보면 소설 속 인물들이 가까이 다가와 말을 걸어올 것만 같다. 때로 사랑채에서는 훈장님의 천자문 낭독 소리가 청아하게 울려 퍼지기도 한다. 최참판댁 윗편에 들어선 평사리문학관에 가면 박경리선생의 문학세계를 살펴볼 수 있다.
발걸음은 다시 남쪽으로 향한다. 하동읍과 전남 광양시를 이어주는 섬진교 주변에는 하동포구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잠시 노래비에 적힌 노랫말을 음미해본다. ‘하동포구 80리에 물새가 울고 / 하동포구 80리에 달이 뜹니다 / 섬진정 댓돌 위에 시를 쓰는 사람은 / 어느 고향 떠나온 풍류랑인고 / 하동포구 80리의 굽도리배야 / 하동포구 80리에 봄을 실어라…’
<산책하기에 좋은 하동 송림(하동군청 사진)>
그 아랫녘의 하동송림은 차분히 쉬면서 여행의 즐거움을 마무리할 공간을 제공한다. 하동송림은 조선 영조 21년(1745)에 바람과 모래먼지를 막을 목적으로 섬진강변에 소나무를 심었는데 이것이 오늘날 보배스런 숲으로 변했다. 1천여 그루의 노송이 뿜어내는 솔향기를 맡으며 사색을 즐기기에 좋은 공원이다.
한편 하동 여행 중 장엄한 일출을 감상하려면 진교면과 금남면 경계에 솟은 금오산을 찾아간다. 하동군청소년수련원에서 등산로를 이용해도 되고 차량으로도 정상까지 오를 수 있다. 포장도로이긴 하나 폭이 좁으니 안전운전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 정상은 송신탑이 자리를 차지, 그 바로 아래 헬기장 옆에 정상표지석을 세워놓았다. 금오산과 소오산이라는 두 가지 명칭이 씌어 있는 것은 이 산이 옛날에는 노적가리를 쌓아놓은 듯 보인다고 해서 그렇다고 한다. 일출 무렵 ‘해맞이공원’이라는 이름이 지어진 전망 데크에 자리를 잡으면 방아섬, 토끼섬, 솔섬 등 작은 섬들과 사천만 바다가 황금빛으로 물드는 장관에 푹 빠지게 된다. 헬기장으로 이동, 북쪽으로 시선을 두면 천왕봉, 반야봉, 노고단도 시야에 들어온다.
여행정보
◎ 하동군청 문화관광과 : 055-880-2371
◎ 쌍계사 종무소 : 055-883-1901
◎ 평사리문학관 : 055-882-6669
하동의 맛
쌍계사 입구의 단야식당(055-883-1667)은 반드시 예약 후 찾아가야 제대로 된 음식을 대접받는다. 미리 만들어두지 않고 그때그때 예약한 인원수에 따라 음식만들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더덕산채정식을 주문하면 각종 전과 장아찌, 산나물, 두부조림, 부각 등이 맵시 있게 상에 오른다. 특히 사찰국수가 인상에 남는 음식이다. 면은 메밀 40%, 쌀 20%, 밀가루 40%로 구성되어 있다. 국수의 국물은 들깨를 기본으로 삼아 고소한 맛의 견과류가 몇 종류 더 첨가돼서 만들어지며 간은 3년 이상 묵힌 천일염으로 맞춘다. 국수에 채썬 호박이 더해지는 것은 밀가루성분의 소화를 돕기 위해서이고 표고버섯은 국물의 영양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넣는데 들깨국물과도 궁합이 잘 맞는다.
하동읍내의 여여식당(055-884-0080)은 재첩국이 맛 좋기로 소문났다. 식당 이름 옆에 쓰인 문구, ‘원조 섬진강 재첩 전문, 도소매 전국 주문배달’이란 글씨는 당당하게만 보인다. 향토음식축제 우수상 수상 업소라는 점도 빼놓을 수 없는 수식어이다. 그만큼 이 집의 재첩국은 믿을만하다는 이야기이다. 재첩국백반 외에 재첩회덮밥, 재첩회무침을 맛볼 수 있다. 재첩국은 간 기능 활성화, 황달 장애 해소, 숙취 해소 기능이 탁월해서 특히 술 마신 다음 아픈 뱃속을 다스려주는 해장국으로도 일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