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바라기의 비명碑銘/함형수
―청년화가 L을 위하여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가운 빗돌을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
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 달라.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같이 태양같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라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시 읽기> 해바라기의 비명碑銘/함형수
시인 함형수는 1914년 태어나 1946년에 죽었다. 32세, 단명이다. 서정주, 김동인 등과 《시인부락》 동인 활동을 했지만 시 열일곱 편을 남겼을 뿐이다. 이북이 고향인 시인은 노동자 숙소를 전전하고 정신착란을 앓다가 짧은 생을 끝냈다.
「해바라기의 비명」은 화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를 떠올리게 한다. 고흐는 가난했고, 생은 불우했다. 둘 다 해바라기를 사랑했다. 이 시는 누군가의 묘비명을 그대로 옮긴 듯하다. ‘청년화가 L을 위하여’라는 부제로 유추하자면 묘비명의 주인은 청년화가 L이다. 후대의 독자들은 그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이 시의 핵심은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가운 빗돌을 세우지 말라./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는 구절이다. 무덤 앞에 빗돌을 세우지 말고, 그 주변에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는 요청은 애절하면서도 소박하다. 그 소박함에는 목숨에 애면글면하지 않는 단호함도 녹아 있다. 각각의 시행이 세우지 말라, 심어 달라. 보여 달라. 생각하라, 부탁과 청유의 뜻을 담은 종결 어미로 끝나는 게 인상적이다. 시인 함형수는 불우하게 죽었지만 그의 꿈만은 사라지지 않았을 테다. 지인들에게 “푸른 보리밭 사이로” 솟구쳐 날아오르는 노고지리를 “나의 꿈”으로 알아달라고 요청한 것은 과연 이루어졌을까?
―장석주, 『삶에 시가 없다면 너무 외롭지 않을까요』, 포레스트북스,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