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왕암, 노을에 젖다
하루가 바다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대왕암에 닿았을 때 햇살은 이미 낮아져 있었고, 바다는 천천히 저녁의 빛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늘 끝에서 번지기 시작한 주홍빛은 수평선을 따라 길게 퍼졌다. 구름 가장자리에도 불이 붙었다. 바위와 소나무, 바다와 하늘이 한꺼번에 붉어지는 시간. 나는 그 풍경 앞에서 걸음을 늦춘다. 아름다운 것은 이상하게 사람을 조용하게 만든다.
대왕암으로 이어지는 길을 걷는다. 바닷바람을 오래 견뎌 온 소나무들이 바위 위에 서 있다. 반듯한 나무보다 굽은 나무가 많다.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몸을 낮추고 가지를 틀어 올린 모습에서 긴 세월이 보인다. 바위 틈에 뿌리를 내린 채 바다를 바라보는 소나무는 말이 없다. 견딘다는 것은 어쩌면 저렇게 소리 없이 자신의 모양을 바꾸어 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길 아래로는 거대한 바위들이 이어진다. 매끈하지 않다. 갈라지고 깎이고 패인 자국마다 시간이 들어 있다. 수없이 밀려온 파도가 바위를 두드렸을 것이다. 태풍이 지나고 거센 바람이 몰아치던 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위는 상처를 감추지 않는다. 오히려 그 흔적 때문에 더 장엄하다. 오래 살아온 것에는 새것이 흉내 낼 수 없는 표정이 있다.
대왕암이라는 이름에는 신라 문무왕의 왕비가 죽은 뒤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어 이 바위 아래에 잠겼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바다를 바라보며 그 이야기를 떠올리니 바위가 단순한 돌덩이로 보이지 않는다.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이 바다를 바라보며 품었던 염원과 두려움, 그리움이 바위 사이에 켜켜이 쌓여 있는 듯하다. 전설은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남는 것이 아니라 때로 한 장소의 마음을 오래 보존하기 위해 살아남는다.
대왕암으로 건너가는 길이 바위와 바위 사이를 잇는다. 그 길 위로 사람들이 천천히 걸어간다. 멀리서 바라보면 사람들은 점처럼 작다. 거대한 바위와 끝없는 바다 앞에서 인간의 크기는 그 정도다. 우리는 일상에서는 자신이 세상의 중심인 듯 살아간다. 걱정 하나가 세상 전부인 듯 밤을 지새우기도 한다. 그러나 넓은 바다 앞에 서면 마음을 가득 채웠던 일들이 조금 작아진다.
노을이 더욱 짙어진다. 하늘은 한 가지 색으로 저물지 않는다. 금빛에서 주홍빛으로, 붉은빛에서 연분홍으로, 다시 보랏빛으로 천천히 깊어진다. 바다도 하늘의 색을 따라 변한다. 조금 전 푸르던 물결이 금빛으로 반짝이고, 이내 붉은 물감을 풀어 놓은 듯 물든다.
나는 난간 가까이 서서 오래 바라본다. 사진을 찍다가 휴대전화를 내려놓는다. 렌즈 안에 풍경을 가두는 일이 갑자기 아깝게 느껴진다. 노을은 기록보다 바라봄에 더 어울린다.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동안에도 빛은 계속 달라진다. 같은 노을을 두 번 볼 수 없는 이유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하루도 그렇다. 아침의 나는 저녁의 나와 조금 다르다. 한 사람을 만나고, 한마디 말을 듣고, 작은 기쁨과 서운함을 지나며 마음의 빛깔도 달라진다. 그런데 우리는 변화하는 자신을 인정하기보다 어제의 모습에 붙잡아 두려 할 때가 많다. 자연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저녁이 온다고 낮을 붙잡지 않고, 가을이 온다고 여름을 붙들지 않는다.
노을은 사라지기 때문에 아름답다. 영원히 저 모습으로 머문다면 우리는 매일 저녁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을 것이다. 곧 사라진다는 것을 알기에 잠시 멈추고 바라본다. 어쩌면 삶에서 소중한 것들도 대부분 그렇다. 함께 걷던 시간, 부모의 따뜻한 손, 아이의 어린 목소리, 친구와 나눈 웃음, 어느 여행지에서 만난 바람까지. 지나간 뒤에야 그것이 얼마나 빛나는 순간이었는지 깨닫곤 한다.
바위 끝의 소나무를 바라본다. 바람에 가지가 조금씩 흔들린다. 저 나무는 얼마나 많은 노을을 보았을까. 수없이 해가 지고 다시 떠올랐을 것이다. 사람들은 찾아왔다 떠나고, 계절은 바뀌었지만 나무는 같은 자리에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러면서도 어제의 노을을 기다리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 오는 빛을 오늘의 모습으로 받아들였을 뿐이다.
우리도 그렇게 살 수 있다면 좋겠다. 지나간 아름다움을 그리워하되 그곳에 오래 머물지는 않는 것. 오지 않은 내일을 걱정하되 오늘을 잃지는 않는 것. 지금 내 앞에 도착한 시간을 온전히 바라보는 것. 그것만으로도 삶은 조금 따뜻해질 것 같다.
파도가 바위 아래에서 부서진다. 하얀 포말이 피었다 사라진다. 또 다른 파도가 밀려와 같은 자리를 두드린다. 바위는 말없이 받아낸다. 파도와 바위의 만남은 언제나 짧다. 부딪치는 순간 파도는 부서지고 다시 바다로 돌아간다. 그런데 그 짧은 만남이 오랜 세월 바위의 얼굴을 바꾸어 놓았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도 그렇다. 잠시 스쳐 간 사람이 뜻밖에 오래 마음에 남기도 한다. 무심코 들었던 한마디가 삶의 방향을 바꾸기도 한다. 우리는 얼마나 오래 함께했는가로 인연의 깊이를 재지만, 어떤 만남은 짧아서 더욱 선명하다. 시간이 아니라 마음이 남기는 흔적이 있기 때문이다.
대왕암의 바위들이 붉은빛에 잠긴다. 낮에는 거칠어 보였던 바위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진다. 노을은 바위의 상처까지 따뜻한 빛으로 감싼다. 순간 마음속 오래된 상처들도 저 빛 아래 내려놓고 싶어진다. 살아오면서 누구에게나 말하지 못한 흠집 몇 개쯤은 생긴다. 이루지 못한 꿈도 있고, 돌이키고 싶은 선택도 있다. 마음에 남은 미안함과 서운함도 있다. 우리는 그것을 지우려고 애쓰지만 세월은 오히려 말한다. 지우지 않아도 된다고. 대왕암의 갈라진 바위가 그 상처 때문에 더 아름다운 것처럼 지나온 흔적도 결국 한 사람의 모습이 된다.
하늘의 붉은 기운이 조금씩 엷어진다. 먼바다에는 배 한 척이 천천히 지나간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 수평선 가까이 떠 있는 작은 배를 바라보니 문득 인생이라는 여행도 저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바다를 건너고 있다. 같은 하늘 아래 살아도 각자 다른 파도를 만나고 다른 항구를 향한다. 그렇다고 언제나 목적지를 알고 가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길을 잃고, 예상하지 못한 곳에 닿기도 한다. 지나고 보면 우회했다고 생각했던 길에서 더 많은 것을 만나기도 한다. 인생은 가장 짧은 길을 찾아가는 여행이 아니라, 지나온 길을 자신의 이야기로 만들어 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노을은 이제 마지막 빛을 바다 위에 풀어놓는다. 붉었던 하늘 한쪽부터 푸른 어둠이 번져 온다. 산책로의 작은 조명들이 하나둘 켜지고 바위 사이의 길이 은은하게 드러난다. 낮이 물러나자 밤의 길이 생긴다. 그 모습을 보며 생각한다. 하나가 사라지는 자리는 언제나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해가 지면 별이 오고, 낮이 물러나면 등불이 켜진다. 어떤 끝은 또 다른 시작을 위한 자리를 내어주는 일이다. 그래서 저무는 풍경이 꼭 쓸쓸하지만은 않다.
돌아서는 길에도 자꾸 뒤를 바라본다. 대왕암의 실루엣이 어둠 속으로 조금씩 잠긴다. 소나무도 바위도 이제 하나의 검은 윤곽이 되어 바다를 지키고 있다. 화려했던 노을은 거의 사라졌지만 이상하게 아쉽지 않다. 오늘의 빛이 제 몫을 다하고 떠났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우리에게도 저녁은 필요하다. 하루 종일 붙잡고 있던 것들을 내려놓고 마음을 어둠 속에 잠시 쉬게 하는 시간. 잘한 일도 부족했던 일도 오늘이라는 이름으로 접어 두는 시간. 그래야 다시 아침을 맞을 수 있다. 대왕암을 떠나며 마지막으로 바다를 바라본다. 노을은 사라졌지만 내 마음 한편은 아직 붉다. 풍경은 눈앞에서 사라진 뒤에야 비로소 마음속에서 오래 머물기도 한다.
그날 대왕암에서 나는 해가 지는 것을 본 것이 아니었다. 한때 찬란했던 것이 아름답게 물러나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끝까지 빛을 다한 뒤 미련 없이 저무는 저녁을 보며, 나의 남은 시간도 저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서두르지 않고, 지나온 날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지금 가진 빛을 아끼지 않는 삶. 그렇게 하루가 바다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나는 오래도록 그 노을에 젖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