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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네스크 미술은 영상 자료를 많이 이용할 계획이오니
수업자료를 예습삼아 읽어 오십시오.
분량이 많아도, 이미 공부한 내용이 많습니다.
로마네스크 건축
1) 배경
중세 예술사를 한 마디로 ‘교회 건축사’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로마네스크 - 고딕 - 르네상스로 바뀌어 가는 예술 양식에는 성당과 수도원의 건물이 중심이 되었다. 비잔틴 미술에서는 회화와 조각은 건축의 한 부분으로만 존재하였다. 로마네스크에서도 회화와 조각은 건축물의 부속물이었다.
로마네스크라는 말의 뿌리도 Roman이고, 로마 양식이라는 뜻이다. 서방의 그리스도 미술로 말해지는 로마네스크는 그 뿌리가 라틴 문화라는 뜻을 담고 있다(이태리 로마는 라틴어를 사용한다.). 로마 미술에서 로마네스크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1000년 경의 유럽에서는 농업 기술이 발달한 반면에 자유 농민의 수는 줄어들고, 예속 농민의 수는 증가하였다. 평균 수명도 40세를 넘지 않았다.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칼의 힘(군사력)에 의존하였다. 대토지의 소유주와 군인(기사)이 귀족 계급을 구성하였다.
인구의 90%를 차지하는 농민들은 작은 창을 가졌고, 내부 공간은 어둡기만 한 집에서 살았다. 집의 내부는 벽으로 나뉘어지지 않은 체 하나의 커다란 공간이었다. 탁자나 의자 등의 가재도구도 단순하기 짝이 없었다.
마을은 어두운 숲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숲을 불태워 작은 공간에서 농사를 지었다. 숲에는 짐승과 독충이 살았고, 넝쿨이 뒤엉킨 체 길도 없었다. 사악한 악령이 머무는 곳으로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공간이었다.
2023.02.06.
*로마네스크 미술의 배경
로마네스크 미술을 가장 잘 보여주는 시기는 11세기이다.
역사로는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북방의 게르만 족이 남하하여 여러 국가를 건설한 후이다.
로마 멸망과 게르만 족의 대 이동은 가치관의 이동(변화)도 가져왔다.
농경문화가 바탕이었던 그리스-로마 문하에서 유목문화가 바탕인 게르만 문화로 신전 등의 기념비적 문화(농경)가 의미 또는 상징을 가지는 작은 형상물로(유목문화) 바뀌면서 작은 공예물이 나타난다.
그리스-로마의 석조 문화가 요새나 성당의 장식물로 변화가 온다.
초기의 중세인 카롤링거 문화(프랑코 왕국)에느 거대한 석조물이 없다.
대신에 종교적(기독교) 의미를 담는 소형 조각이나, 보석류가 만들어진다.
석재가 퇴보하고, 장식성 보석이 등장하면서 구불구불한 곡선 양식(바이킹 양식이다.)이 중심이 된다.
예술은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보여준다. 인간은 역사적 삶 속에서 이루어진다.
11세기의 역사적 사실은 이슬람의 진출이 주춤하면서 스페인에서는 이슬람 세력의 축출운동이 프랑스 등의 유럽 본토는 십자군 운동이 일어난다.
이때 기독교의 대수도원이 성당을 지으면서 수도원 문화가 펼쳐진다.
962 –오토 1세의 신성 로마 제국
987년 위그 카페 왕조 건국
3국(프랑스, 독일, 이태리) 분립
분쟁과 다툼이 잔인한 전쟁으로 이이지고, 유럽은 공포 분위기 였다.
천년왕국 사상 — 공포 분위기로 종말론이 유행했다.
이후로 성지 순례와 성당 건립이 유행한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야고보 성당 – 무역항이 지중해서 유럽 서해안으로 이동한다)
성당 — 바실리카 형으로(로마네스크 양식이다.)
라틴 문화와 그리스 문화가 결합하면서 목조 천정이 석조 천정으로
바뀌어지면서 하나님의 집이라는 개념이다.
성당은 하나님의 집이고, 낙원이라는 개념이다.
기독교 미술에서 성화(聖畵) 찬반 논쟁
(성경에는 우상숭배를 금지했다.)
반대로자 —신은 본성이 비물질적임으로 물질적 형상을 만들 수 없다.
찬성론자 —눈에 보이는 세계를 통해서 저 너머의 세계를 직관적으로
포착할 수 있다 (신플라톤 주의)
*그리스도는 사람의 몸을 빌려서 이 세상에 왔으므로 만들 수도 있다. 성화상은 무지한 백성이 신앙생활을 하는데 도움을 준다.
역사적으로 기독교는 서방교회와 동방교회로 나뉘었고, 동방의 비잔틴 제국이 권력을 가졌으므로 비잔틴 제국에서 성상 논쟁이 치열했다.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는 예수가 신성과 인성을 함께 가졌느냐. 신성만을 가졌느냐의 교리 논쟁에 뿌리를 둔다. (신성만이라면, 신은 절대적이므로 신성 안에 인성을 내포할 수도 있다.)
찬성론자는 육체의 관능적 요소를 무시함으로 정신성을 나타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843년 — 성상 옹호론이 승리했다.
성상 금지령이 해제되었다.
(비잔틴 제국은 황제권이 교황권보다 우위였다. 황제를 표현하면서
전지전능하신 예수 앞에 무릎을 꿇는 황제를 표현했다.)
성당의 팀파늄이나, 성당의 내부 장식(모자이크 상)으로 황제 부부 상이 많이 나온다.
성화로 즐겨 표현하는 도상
오란테 상, 성모자 상, 수태고지, 예수의 탄생, 아기 예수를 성전에 바치는 상, 세례를 받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현성용, 라자로의 소생, 예루살렘의 입성, 그리스도의 수난, 부활, 승천, 성령강림 등이다.
예수상 — 덥수룩한 수염, 긴 머리, 원숙한 중년의 모습 --- 성부와 성자의 상을
동시에 표현
채색세밀삽화 필사본 — 성화를 삽화로 한 필사본 제작이 많았다.
성인상도 즐겨 표현했다.
중세 사회는 농민사회이다.
역사적으로 인구는 팽창과 수축을 반복했다. 1000년 ~ 1300년 사이에 인구가 2-3배가 늘었다.
수축기로 접어든다. 기아, 질병, 전쟁이 원인이다.
기아 — 인구 팽창과 토지 사용으로 지력이 떨어지고, 생산력이 줄었다.
농민은 자영이 힘들어서 영주의 농노(소작 내지 노비로)가 되고
점점 더 가난해져 갔다.
질병 — 페스트
전쟁 — 봉건제도에도 국가주의로 바뀌면서
기사 계급은 세습됨으로, 놀고 먹는 자가 늘어났다.
===> 농민의 삶이 어려워지면서, 악령을 믿었다.
==> 농업의 일은 공동체를 필요로 한다. 공동체 자치주의를 하면서
농민 반란의 조직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스도교는 사람들에게 악령의 두려움을 떨쳐내게 해주었다. 웅장하고 화려한 성당은 어두운 세상의 두려움을 떨치고 몸을 의탁할 수 있는 성스러운 곳인 동시에 낙원의 상징이었다.
수도원이 교회당 보다 더 부유하였고, 건물도 훨신 더 발달하였다. 수도사는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다. 소속된 장인들도 공예품 제작에 열중하였다. 한편으로 교황과 세속 황제 간에는 권력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성지 순례가 유행하였고, 십자군 전쟁을 치루는 중이었다.
그리스도 교인의 생사관은 ‘이 세상은 영원한 삶의 장소가 아니고, 잠시 머무는 곳이다. 천국에 가서 영원한 삶을 누리기를 바랐다.’ 성경에는 이 세상이 끝나는 날에 예수가 구름을 타고 강림하여 최후의 심판을 한다고 하였다. 죽은 영혼들도 이 날에는 깨어난다고 하였다. 죽음과 심판에 대한 공포가 팽배해 있었다.
이에 대처하는 방법으로 성인이 자비를 베풀면 기적이 일어난다고 믿었다. 성당에 있는 성인의 유물을 참배하면 부적의 효과가 나타난다고 하였다. 성인의 유물이나 유해가 보관되어 있는 곳은 순례지가 되었다. 야고보의 유해가 있다고 한 산티에고의 콤포스텔라 성당이 제일 인기가 있었다. 은하수는 산티에고 교회로 인도하는 길이라고 하였다.
(기독교 성인이 순교에서, 자비를 베푸는 자로 바뀌어 간다.)
순례객이 찾아가는 성당 입구의 박공은 삼각형 형태이고(팀파늄), 거의 대부분 경우에 최후의 심판의 날을 조각 하였다.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두려움은 교황도 가지고 있었다. 인간에게 천국은 아득하게 먼 곳이고, 지옥은 아주 가까운 곳이었다. (기독교에서는 한 번 지옥에 떨어지면 영원히 천국으로 돌아 올 수 없다. 불교에서는 돌아 올 수 있다.) 그러나 성인이 자비를 베풀면 병이 낫는 기적도 일어나고, 지은 죄도 없어지는 기적이 일어난다고 믿었다.
(성지순례)
이러한 두려움이 천년왕국 사상과 결합하면서 성지 순례가 대유행하였다. 순례길 주변에는 유물을 팔거나, 숙박업 등으로 살아가는 마을이 생기고, 도시로 발전하였다. 성당에서도 순례객을 불러오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심지어는 다른 성당에 모셔져 있는 유물을 훔쳐오기도 하였다. (생 포아 성당) 성지 순례 의식은 성당에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이득을 주었으므로 교회에서 성인 숭배 의식을 조장하였다고 한다. 이때의 영주는 절대 권력을 가지지 못 하였으므로 교회의 신임을 얻기 위해서 성지 순례를 곧 잘 떠났다.
수도승은 중세의 정치와 문화에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수도원의 규울이 유럽 사회로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다.(일하지 않으면 먹지 말라는 등의) 수도원의 수도 급격하게 늘어나서 당시의 유럽에 약 1000개의 수도원이 있었다고 한다.
수도회 성당(로마네스크 시대)은 수도사의 성당인 동시에 순례객의 성당이었다. 성인의 시신을 안치하여 신도의 신앙심을 이끌어 내었다. 순례성당은 엄청난 순례객을 계산에 넣어서 설계하였을 것이다. 순례객은 익랑으로 걸어가서 내진(apse)를 삥 돌아서 익랑으로 나오도록 설계하였다.(ambulatory) 밝은 채광창(clerestory)을 만들므로 성당을 빛의 공간으로 만들었다.
11세기에는 교회와 왕이 협력하여 스페인에 자리 잡은 이슬람 세력에 대항하였다. 이슬람 세력을 점차 압도해 나갔다. 교황 우르반 2세는 비잔틴 제국의 도움으로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려 십자군 전쟁을 일으켰다. 1097년에 이슬람을 수복하여 약 100년 간 기독교 국가를 세워서 통치하였다. 비록 전쟁이더라도 동서의 교류가 이루어지므로 동방의 발달된 문화와 학문이 서 유럽 쪽으로 흘러갔다.
2) 건축물
건축물에서 바탕이 되는 것은 평면, 구조, 그리고 양괴를 조합하여 그 효과를 적당하게 나누는 일이다. 건축물은 근본적으로 쌓아올리는 기법이 기본이다. 쌓아 올릴 때는 무게(荷重)가 기법의 중심 과제이다. 재료와 기술 또한 관건이 된다.
구축물의 시각적 효과와, 시각적으로 만족을 얻는 것은 예술에서 생명이다. 빛나는 표면, 명암의 풍요와 관련되는 것은 빛이다. 이처럼 건축물은 변화와 발전을 해 왔다. 바실리카에서 거대한 벽과 압축된 궁륭을 가진 로마네스크 건축물로, 다시 홍예와 늑재를 가지는 고딕 건축물로 발전하였다.
로마네스크 형 건축물의 기본 양식은 바실리카 형이다. 반구형의 천정과 아치, 열주가 기본 구조이다. 지붕은 목조 대신에 석조 지붕으로 바뀌었다. 아치형 궁륭으로 만들었다. 야만족의 침입을 방어하려는 성곽의 개졈이 강하다고 하였다.
궁륭을 지지하기 위해서 강하고 튼튼한 기둥과 벽이 필요하였다. 벽은 두껍고, 벽돌로 쌓아서 아주 튼실하게 하였다. 지붕이 너무 무거워지자 가볍게 하기 위해서 늑재 궁륭(Rib vault)를 고안하였다. 11세기가 되어서 원통형 궁륭으로 만들었다.
그림 자료에 늑재 궁륭 사진이 있다.
하느님의 영광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건물의 서쪽 지붕 위에 두 개의 4각형 철탑을 쌓고 상부는 뽀족탑으로 솟아오르게 하였다. (천국으로 상승을 의미한다고 한다.) 출입구 위 부분의 팀파늄은 조각으로 장식하였다.(팀파늄-현관 위의 대블보 위 부분) 족각 작품은 우아하지 않고, 육중하고, 엄숙하게 만들었다.
로마네스크 건축이 건축사에 남긴 공헌은 아치와 궁륭의 확대이다. 후진(apse)이나 포치(입구)에 한정되었던 석재 가로대 아치는 건물 전채로 확대하였다. 이로서 내부의 천정은 연속적으로 반원 천정이 이어졌다.
천정의 힘이 옆으로 밀리는 것을 감당하기 위해서 측랑(aile) 의 천정도 신랑과 같은 높이의 궁륭을 만들어서 서로 밀리는 힘이 상쇄되도록 하였다. 외부의 벽은 궁륭 천정이 바깥으로 밀어내는 힘을 감당할 수 있도록 벽을 두텁게 하고, 창문을 적게 하였다. 또 강력한 버팀벽(부벽을 만들었다.)
<천년왕국 사상과 마녀 사냥>
(*성당건립)
종말이 온다고 공포에 떨던 1000년이 지나자 유럽에서는 성당 건립이 붐을 일으켰다. 세상 사람들의 열띤 신앙심은 그리스도가 구원을 하러 강림한다는 사실을 굳게 믿었다. 성당을 건립함으로 심판의 악몽에서 깨어나려 하였다. 1000년이 지나가자 상업을 생계수단으로 하는 ‘도시’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성지를 찾아가는 순례 행렬도 엄청나게 늘어났다. 사람들이 제일 많이 몰려간 곳이 스페인 북부 해안 피레네 산맥 지역에 있던 산티아고 드 콤포스텔에 성 야고브가 있다고 믿고 제일 찾아가는 순례지가 되었다.
카롤링가 왕조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서기까지 유럽 사회는 혼란하였다. 그러한 사회 분위기를 전해주는 구전 문학 동화를 통해서 중세 사회를 좀 더 이해할 수 있다.
제단사가 공주를 구한다는 구전 문학은 신분의 유동성을 보여준다. 중세는 수공업의 황금시대라고 한다. 수공업자인 재단사가 일반 동화의 왕자 역할을 하였다. 평민이 성인이 된 전설도 많이 전해온다.
혼란한 시기와 천년왕국 사상 등으로 민간에서 이단 종교가 나타났다. 천년왕국 사상은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여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여 천년 동안 통치하는 기간을 말한다. 유대교의 종말론이 뿌리이지만 이 신앙은 그리스도교의 초기에는 별다른 거부감이 없었다. 그러나 점차 정통 교회에서는 이 사상을 부정하였다. 따라서 이 사상은 서서히 사라졌으나 중세 시대에 영적 열광주의자들 사이에 유행하였다. 이들은 비밀히 활동하였다,
민간 신앙으로 광란의 춤을 추는 의식을 치루기도 하였다. 무도병으로 알려져서 전해온다. 한편으로 숲속으로 도망가서 야성적인 삶을 즐기는 무리들도 나타났다. 이들은 미개간지에서 은신처를 만들고 아담의 삶을 추구한다고 하였다. 종말론과 여생의 도래를 믿는 것과 관계가 있다. 성적으로 문란하다 하여 제도권의 공격을 받았다. 카톨릭에서는 이들을 척결하기 위하여 종교 재판소를 열었다. 숲속의 야성인을 사냥해도 좋다는 사냥권까지 주었다.
이런 신앙도 뿌리를 찾아가 보면 고대 사회의 여신신앙, 특히 메소포타미아의 이슈타르 신앙에서 성결합을 신성한 결혼이라 하여 성스러운 의례로 행한 일이 있었다. 이것이 민간 차원에서 비밀리 이어져 왔다. 흔히 비의(秘儀)라며, 비밀리에 의식을 치루었다.
중세는 결코 낙원이 아니었다. 그러나 문학의 소재로 낙원을 찾아가는 길을 많이 다루었다. 또한 로마네스크 건축물에 상징물로 많이 새겨졌다.
이단을 제거하기 위하여 악마와 인간의 관계를 다룬 고대 신앙을 이용하여 이단을 제거하고 교회를 지키려 하였다. 하나의 방법이 마녀 재판이었다. (칼 대제 때 처음 시작하였다고 한다.) 마녀 재판이 절정에 달한 것은 근대에 들어와서라고 한다.
마녀사냥의 대상은 대부분이 여자였다. (남녀비가 10:1이라고 한다.) 직업은 주술사(점쟁이 등 무당류), 조산사, 약초를 다루는 사람(민간의학 분야 종사자이다.) 등으로 어느 정도 과학적 지식을 갖춘 현명한 여자들이었다.(마녀로 분류된 여자는 지금의 무당 신분에 가깝다. 기독교가 교인의 이탈을 방지하려는 목적이 강했다고 한다.) 이들을 처벌한 것은 주민들이 교회를 이탈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러한 내용들이 판화 형식으로 중세 미술에 많이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