左翼은 알고 右翼은 모르는 미래의 韓國 政治 : 論理의 政治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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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을 열면서,
미국 민주당 지지자 레이크어프의 [‘우익은 알고 좌익은 모르는 미래의 정치 : 도덕 정치’]를 그대로 배울 수는 없다. 미국 진보주의자의 보수주의자들에서 배우자는 주장의 책으로 한국 보수 세력에는 ‘전혀 고칠 게 없는 동어반복’으로 그칠 가능성이 높다.
한국 보수 세력에는 주제를 뒤집어야 한다. [좌익은 알고 우익은 모르는 미래의 정치 : 논리의 정치]가 된다. 한나라당 중도파(위장된 좌파 포함) 세력들이 좋아하는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실천이론 수준의 좌익 이론에서 배우자는 원색적 추수주의(tailism)은 하지 않을 것이다.
좌익의 이론을 바다를 건너다는 이제는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그런데, 논리적으로 쓰면 일관되어 맺어진다. ‘비약’과 ‘과장’과 ‘정략적 혼동’등이 있어서 약점들이 우파 네티즌들에 함락되더라도, 대부분의 좌파 네티즌들은 일관된 차원으로 생각을 한다. 뿐만 아니다. 좌익의 이론들은 전체의 ‘대동단결’을 위한 명백한 밑그림을 가지고, 다양한 생각의 가능성을 제한하고 있다.
한국 우익의 주장들은 수미일관하게 자기 전개를 시키는 경우가 없다. 부분을 이루는 작은 동심원 파벌의 ‘끊어 붙이기’는 되고, ‘작은 동심원을 가지는 파벌’의 파벌주의를 ‘小我’로 평가할 만큼의 큰 그림을 그려서 대중들에 동의를 받는 일을 본 바 없다. 소파벌
한국 우익들이 왜 20대 30대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실패하며, 중도파벌들을 잔챙이 선거에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나? 대통령선거 같은 큰 선거에서는 왜 실패하는가? 그것은 ‘論理의 政治’가 한국의 미래의 정치임을 몰랐기 때문이다. ‘구호의 정치’와 ‘동원의 정치’가 설득력을 다했음을, 70년대에 데모와 구호 정치로 한가닥했던 한국 보수세력의 정신적 리더들만 모른다.
최근에는 ‘구호의 정치’와 ‘동원의 정치’가 빚는 역설찾기가 먹혀서 돌아가는 순간 찾기 보다 쉽다. 노무현 정부의 부동산에 대한 사회주의적 정치기조의 세금폭탄은 온갖 구호주의로 포장해도, 국민의 불신이다. 마찬가지로, 강남 죽이기 구호주의 때 강남 부동산은 천정 부지로 치솟았다. 관심의 다변화로 대중 동원의 다수 획득이 어려워 지는 측면은 느껴진다. 자발성에 의한 대중동원의 가능성은 약해지되, 조직과 권력에 의한 동원의 가능성은 남아 있다. 구호주의 정치의 배경에는 ‘국민을 교육시키기’ 앞서서, “잔말 말고 따라와” 의 전제가 깔려 있다. 동원주의의 경우에서도 그렇다. 갈수록, ‘대박 시청율 가진 드라마’가 어렵다. 저가 케이블 텔레비전이 일반화되면서 관심이 다양화되었다. ‘신문의 정치’ 시대에 신문광고 연속 두들기면 동원이 가능하던 시절이 확실히 지나갔다. 70년대 ‘구호주의’와 ‘동원의 정치’로 끝 발 날리던 분들이, 왜 한국의 보수당에는 그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느냐는 질책을 하는 데, 정말 ‘생뚱 맞다’.
권력과 힘에 의한 강제적 복종 보다는, 학력 수준이 높아진 자원을 이용하며 부강시켜서 나가는 ‘동의’와 ‘설득’ 메카니즘을 강화시켜야 하는, 진정한 문민 보수 정권을 창출해야 하는 것이 미래의 정치일 것이다. 지지자들이 논리적 차원으로 일관된 꿈을 꾸는 것은, 당 정체성의 논리성을 의미한다. 지지자들이 비논리적으로 착종된 모순적 꿈을 꾸는 것은, 정권 재창출에 매몰된 피동성을 의미한다.
현재의 ‘한국 보수정치’는 ‘왜?’란 질문에 답을 안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대권에서 부족한 표를 얻으려면 물잔에 늘 얼만큼 부족한 상황의 ‘정책’과 ‘세계관’요소의 차원이 아니라, 그 부분에 대한 짤짤 넘치는 바가 있었어야 했다.
‘군인’과 ‘목회자’들만의 소통권역 내에서는 ‘왜?’가 필요 없었다. 그러나, 非군바리 정서와 非목회자 정서를 끌고 오지 못하는 좌파의 분열정치에, 대중들에 넉 놓고 고립되기 일 수 이다. 그래서, 쓸 수 있는 카드는 좌파 실정 강조에 대한 ‘네가티브’정치만 가능한 것이다.
‘미래의 비전’에 대해서 일부만이 알고 있고, 나머지들에 공개 안된 상황에서 ‘잔말 말고 따라와’의 가닥은 오늘날에 맞지 않다. 강준만교수는 [노무현과 국민 사기극]이란 책의 서두에서, 이러한 차원을 사기극으로 규정했다. 10년보다 작은 시간 축이었지만, ‘구호’와 ‘동원주의’가 가능한 ‘진리의 보고’로서의 절대적 지식인 주체를 무조건 신뢰 하는 가닥은 전방위적으로 조롱되고 있다.
2. 한국 우익의 기본 모델 : 王族 출신 基督敎徒 이승만대통령의 건국
한국 좌익의 기본 모델 : 고종황제 사망 이후의 백성들의 연대&저항의식
레이크어프는 미국의 정치를 ‘가정’모델에서 ‘엄한 아버지’와 ‘자상한 아버지’에서 찾았다. 그러나, 레이크어프 논리는 온당치 못하다.
김영삼대통령 이후의 보수 세력들은 ‘자상한 아버지’모델을 압도적으로 내세웠고, 또, 현재의 보수 세력은 보수주의 페미니즘의 가능성의 신뢰로서 ‘박근혜대표’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보이고 있기도 하다.
한국 우익들엔 ‘대통령 없는 대통령제’나 그 수준을 넘어서 ‘헌법 개정’을 통한 일체의 권력 구조를 흔드는 사태가 낯이 설 것이다. 그러나, 한국 좌익들의 기본 가닥은 왕이 없는 시대에서 시작했기에 ‘지배 질서’의 혼란은 친숙한 것이다.
(연재글....... 이어서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