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역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으로 역사문에 가입한지는 꽤 되었지만, 회원분들의 수준 높은 대화에 비해
보잘 것 없고 그마저 정확한 출처 없이 모래 위에 쌓은 지식 뿐인 학생이라 글 한 번 쓰지 못하였다 이제야 글을 쓰네요.
늘 대충 관심있는 주제를 살펴보거나 그 때 그 때 이슈가 되는 자료만을 찾아보다, 어젠 날을 잡고 [조선과 근대 토론방]의
게시물을 처음부터 현재까지 보았네요.
기존 회원분들이 반 십년 이상 쌓아온 결과물을 단 하룻밤에 훔쳐본 (?^^;) 것에 심히 부끄러울 따름이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진심으로 얻은 것이 많았습니다. 역사 전공도 아닐 뿐더러 그저 풍문에 떠도는 이야기만을 주로 듣고 기껏해야 다큐멘터리
역사 프로그램을 찾아보는 저에게 정확한 출처를 인용하고 그의 해석에 대해 토론하는 이 카페의 모습은 실로 놀라운
모습이었습니다. 학부만을 경험해 본 저의 무지도 한 몫했겠지만, 어떤 분야에 대해 전문가적 의구심을 갖는 모습과 또한
진리와 사실에 대한 토론에 있어 이처럼 이성적인 자세와 태도가 일관되게 유지되는 인터넷 게시판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겟습니다.
특히 글을 읽으면서 김용만 선생님의 지도적 모습이나. 운영자분들(닉네임이 숯검뎅이이신^^;)의 이성적인 운영방침(특히
가끔 찾아오는 고집쟁이들에 대한 유연한 대처모습이 인상 깊었습니다^^) 그리고 글을 읽는 내내 아마 이 카페의 주전격 활동을
하시는 舊 안양사랑(미주가효님ㅎㅎ그런데 전 오름차순으로 글을 보았기 때문에 글을 보고 안양사랑님이 미주가효님일 것
같다라는 느낌이 너무나 들더군요. 정말 문장으로 표현되는 어투의 존재를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 특히 한중록 부분에서 많은
이야기를 해주신 이도형님^^ 또한 여러 분들(추모왕님, 여휘님, 이하 많은 회원분들^^)의 고견에 하루하루 제 자신의 모자람을
깨우치고 있습니다.
긴 소개글이 되었지만, 앞으로도 종종 전문가적 의구심과 능력이 결여된 제 글이 올라오더라도 좋은 가르침 많이 부탁드립니다.
이렇게 글을 쓰게 된 것도 초등학생이 올린 방학 숙제에 대해서도 친철한 설명과 격려가 끊이지 않았던 카페의 분위기를 보고
올리게 된 것이니 크게 걱정은 하지 않습니다. 다만 역사문 카페 회원분들을 믿고 있다는 것을 먼저 말씀드린 것입니다.
오늘 새벽 제가 조선토론방의 글을 읽으면서 배운 점과 동시에 많은 궁금증을 가지게 된 부분은 바로 [도량형]에 대한 것입니다.
특히 임진왜란(명칭에 대해선 이미 많은 토의가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조일전쟁"이란 말씀도 많이 하셨지만 저 개인적으로도
주체적인 명칭과 또한 전통적으로 우리나라는 간지(일진)으로 사건을 나타내려 한 점을 이유로 사용하겠습니다.)을 기점으로
우리나라와 일본의 국력차에 대한 논의 중 [석, 섬]을 기준으로한 양곡생산량을 기준으로 한 토의를 보고 갖게된 의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현재의 kg 단위의 도량형이 조선 후기, 임진년 당시의 조선 도량형에 대한 의문이 들었고 이것에 대해
많은 분들의 셈이 엇갈리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석, 섬을 검색하다 섬이 일제 시대 "가마니"로 바뀌는 역사를 발견했습니다.
------------
가마니(용기)
곡식·소금 등을 담기 위해 짚으로 쳐서 섬처럼 만든 용기.
출처 - 다음 백과사전-
가마니
출처 - 다음 일본어 사전-
섬 (영문명칭 : Rough Straw-bag)
곡식이나 사료 등의 분량을 나타낼 때 쓰이는 짚으로 된 용기로 석(石)또는 섬이라고 한다. 섬은 가마니가 등장하기 전에 널리 사용되었던 것으로 가마니와 형태는 비슷하나 짚을 거칠게 쳐서 양끝을 안으로 우겨놓고 꿰맨다. 가마니를 짤 때보다 소요되는 짚의 양이 3배정도 많으며, 한 장의 무게도 10kg 정도로 비교적 무거운 편에 속한다. 그러나 약해 곡식을 담아 운반할 때는 반드시 새끼줄로 가로 세로 적당히 얽어 매야만 했다.
만드는 방법은 새끼로 날을 삼고 짚으로 엮어 가마니와 비슷하게 만들어 양끝을 안으로 넣어 꿰맨다. 섬의 크기는 날의 수로 따진다. 보통 5날섬과 7날섬이 있으며, 7날섬은 30말이 들어간다. 섬은 용량을 계산하는 단위로서 1말의 10배를 가리키는 말로도 쓴다. 주로 곡식이나 액체를 다룰 때 섬의 단위를 쓴다. 가마니가 대두(大斗) 5말이 들어간다. 그래서 2가마니를 1섬 또는 양석이라 한다. 섬은 10말들이가 보통이다. 소금섬, 숯섬 등 용도에 따라 여러가지가 있다.
예로부터 1섬의 용적은 15두(斗) 또는 두 가마니로 알려져 있으며, 다른 단위들은 10진법 단위 제도로 되어 있었던 것에 비해 15진법수로 되고 있었던 것이 특이하다. 이는 중국의 양제(量制)의 기준이 1승으로, 장년 농부가 양손을 모아 거기에 담긴 곡물량으로 정해진 데에서 비롯되었다. 그 부피는 대략 313.6㎤로 밝혀지고 있는데, 그것의 10배를 1두, 100배를 1석이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그 용적이 신량두(新量斗)로서 15.625두가 되었을 1석도 백성들 사이에서는 널리 쓰이고 있던 이유에서 이것을 15두라는 단위명으로 계속 사용하면서 10두 단위명을 제정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관습은 지금까지도 계승되고 있어, 곡물 분량의 표기에는 반드시 석 단위가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도량형제도만이 지니고 있던 특징이기도 하다.
<참고문헌>
度量衡과 國樂論叢.朴興秀博士華甲記念論文集刊行會 [編]. 발행사항, [서울] : 朴興秀博士華甲記念論文集刊行會 , 1980),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쌀과 문화(이춘녕, 서울대학교출판부, 1991), 겨레와 함께 한 쌀 도록(국립중앙박물관, 통천문화사, 2000), 쌀의 인류학(오누키 에미코, 소화, 2001)
-출처 http://www.emuseum.go.kr/relic.do?action=view_d&mcwebmno=117499-
이와 같이 조선 시대 이전의 우리 도량형( 그것이 비론 중국 양제를 기준으로 했지만 )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현재 대부분의
국민이 쌀은 "한 가마니" 그의 셈에 있어서도 "한 가마, 두 가마"를 말하고 있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또 한 지자체에서 "전통가마니짜기 축제"는 물론이고 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한자와는 다른 어감인 "가마니"를 우리말로
받아들이는 현실에 아직 정리되지 않은, 끝나지 않은 일제시대의 잔재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 섬과 가마니의 ㅡ가장 큰 차이는 바디의 존재로 인해 베틀과 같이 씨줄과 날줄이 교차되게 직물의 구조를 띄는 것 같습니다 )
( 가마니 짜기에 쓰이는 바디)

(저희 시골에서도 위의 베틀이 있지만, 이것이 일제에 의해 개량된 것인지 아니면 전통의 모습인지는
제 전공이 아니므로 정확히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여러 베틀의 모습(외발 쌍발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이 있는 현재의 상황을 보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 개인적 생각입니다.)
(전통적(?)이라고 이야기 되는 가마니짜기의 모습)
특히 군산 등지의 미곡수탈지에선 해마다 늘어나는 가마니 수요(일제로의 반출을 위해 또한 조선내 쌀 도량형의 일본화를 이루기 위해)로 인해 일제는 가마니짜기대회와 소작농에게 가마니짜기 부업을 권장하는 일이 있었다고 하니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졌을 것이 불보듯 뻔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분명 저의 첫 의문은 분명 석과 섬이 무엇이 다른지 석이 10두를 의미하는지 15두를 의미하는지로 시작했지만, 문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통에 꽤나 오랜 시간 검색을 해야했습니다.
글 한 번 쓰기가 이렇게 어렵다는 것을 느끼곤 어젯밤 하루에 회원분들이 쌓아온 이야기들을 들춰본 것이 더욱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조선과 왜 그 두나라의 국력비교는 미주가효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단순히 총산출량(gdp)의 기준이 아닌 얼만큼 효율적으로
물량과 행정력이 전쟁에 이용될 수 있는가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제 개인적 결론은 양적으로도 효율적으로도 당시 일본이 우리나라를 앞선다는 것이 제 개인적 생각이지만,
그러한 토의 이전에 도량형에 대한 명료한 해석과 기준이 있어야 소모적인 토론이 없을 것 같아 생각해보았습니다.
쓸데없이 긴 글이 되어버린 듯 하지만, 앞으로도 많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첫댓글 특히 저 개인적으로는 가마니에 비해 섬의 짚 소요량이 3배에 이른다는 말을 듣고 많이 놀랐습니다. 당시 짚은 집의 지붕은 물론이고 미투리, 짚신의 원료는 물론이며 때로는 난방의 연료로도 사용되며 가축들의 먹이로도 사용되던 농경사회의 중요한 자원 중 하나인데 단순 이동수단으로써의 섬의 제작에 가마니보다 3배나 많은 자원이 필요했다면 이를 단순히 여길 부분이 아니여서 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즉, 공예에 대한 기술개발 저하가 저런 부분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는 것에서 크게 신경이 쓰였습니다.
제가 예전에 쓰던 닉네임이 안양사랑입니다. 예전 글을 일일이 읽어 보신 분이 있을 줄은 몰랐네요. 말씀하신 글이 어떤 것이었는지 대략 기억이 납니다. 말씀하신 고민은 저도 종종 하는 것입니다. 글을 쓰다 보면 사실 그렇게 대단한 내용이 있는 글이 아님에도 찾아 보아야 할 자료가 급격히 늘어나곤 합니다. 그게 귀찮아서 새 글을 쓰는 건 사실 조금 꺼려지기도 합니다. 최근 제 글이 시시콜콜한 이야기 외에 주로 댓글이나 답글 위주인 것에는 그런 이유도 있지요.
P.S.
국력에 있어 그 국가의 총 자원보다는 실제 동원 가능한 자원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는 찰스 틸리(C. Tilly) 라는 학자가 (근대)국가를 설명함에 있어 자원총량보다
중앙정부가 실제 추출할 수 있는 자원량이 더 중요하다고 본 데에서 착안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더 진전시키게 되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가능합니다. 고대의 중국과 우리나라를 비교할 때 중국의 전 자원량과 우리나라의 전 자원량을 비교하여 양국의 세력을 비교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중국이 우리나라와 대결할 때 실제 동원가능한 자원과 그 때 우리나라가 동원가능했던 자원을 비교하는 게 실제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국력이 100이고 중앙정부가 80을 추출했다고 할 경우, 티벳쪽에 20, 북방유목민에게 30, 남방에 10 정도를 투입하여 방어해야 한다면 우리나라에 투입할 자원은 20인 셈인데 우리나라에서도
20 정도의 자원을 추출해서 투입할 수 있다면 고대의 우리나라가 중국에 화친하거나 사대하는 대신 강력히 저항하거나 되려 도발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라 볼 것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이런 관점에서 명 초기에 조선(태종 이후)이 명에 굴복하고 사대하는 것이 어쩔 수 없었다거나 청 초기에 북벌계획을 허황되다 하면서 하는 이야기들이 명과 청의 '조선에 동원 가능한 국력' 을 염두에 둔 평가인지 '중국의 전체 국력' 을 비교대상으로 한 평가인지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
이야기가 엉뚱한 곳으로 새어 버렸군요. 앞으로 愛到永遠 님의 많은 활동을 기대하겠습니다.
미주가효님께/ 악의(?)로 본 것이 아니니 크게 걱정은 안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어떤 무리에 들어감에 있어 분위기 파악은 하고 들어가야할 것 같다는 의미에서 훑어본 것일 뿐이니깐 말입니다^^ 요즘엔 그걸 인터넷에선 닥눈삼(눈팅만 삼일하라고 하는 이야기더라구요. 물론 삼일 했어야할 눈팅이 년 단위로 늘었지만 말이죠^^;;)찰스 틸리에 대한 자료는 따로 제가 알아 보겠습니다. 아직 제 의견의 밑바탕이 되는 절대적 독서량은 물론이고 제대로된 기반이 없어 저의 카페 활동은 주로 자료수집 또는 조언을 구하는데 촛점이 맞추어지겠지만 수동적이지 않게 활동하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사진자료 잘보았습니다....
음. 제가 그 게시판에는 쓴 글이 별로 없는데...-.-;; 암튼 엄청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전혀 몰랐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