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다니엘 기도회를 통해 매일 은혜받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무엇보다 강사들의 간증 내용이 정말 많이 달라졌습니다.
아쉬우면 아쉬운 대로 무엇이 문제인가를 알게 하시니 감사하고,
은혜가 넘치면 도전과 깨달음을 주시니,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장차, 주님과의 깊은 교제의 견증자도 그 자리에 서서
창세전 하나님의 계획 하심과 십자가를 통한 다 이루심과
이 땅에서부터 영생을 누리는 성도의 참 기쁨을 증언하게 하옵소서.
주님의 놀라우신 간섭을 기뻐하며 기대합니다.
새날 주심을 감사합니다.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십자가 보혈을 의지하오니
자격 없는 자, 정결한 마음이 되어서
오늘도 아버지 품속의 평강을 누리게 하옵소서.
성령님,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3.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자기에게 패망을 이루고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받느니라
14. 지혜 있는 자의 교훈은 생명의 샘이니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
15. 선한 지혜는 은혜를 베푸나 사악한 자의 길은 험하니라
16. 무릇 슬기로운 자는 지식으로 행하거니와 미련한 자는 자기의 미련한 것을 나타내느니라
17. 악한 사자는 재앙에 빠져도 충성된 사신은 양약이 되느니라
18. 훈계를 저버리는 자에게는 궁핍과 수욕이 이르거니와 경계를 받는 자는 존영을 받느니라
19. 소원을 성취하면 마음에 달아도 미련한 자는 악에서 떠나기를 싫어하느니라
20.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
21. 재앙은 죄인을 따르고 선한 보응은 의인에게 이르느니라
22. 선인은 그 산업을 자자 손손에게 끼쳐도 죄인의 재물은 의인을 위하여 쌓이느니라
23. 가난한 자는 밭을 경작함으로 양식이 많아지거니와 불의로 말미암아 가산을 탕진하는 자가 있느니라
24.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25. 의인은 포식하여도 악인의 배는 주리느니라
(본문 주해)
13절 :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삶의 방향을 돌아보면서 말씀 앞에 두려워하는 자가 있다면 영원한 생명을 상으로 받을 것이다. 그러나 말씀을 멸시하면서 세상의 썩어질 것을 추구하는 일에 마음이 급하고 그것들만을 갈망한다면 결국 영원히 패망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건은 말씀을 멸시하는 모습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말씀을 멸시한 자임을 알고 회개하는 자들이 생명을 얻는 자들이다.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하나님의 말씀을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지 않는 것이다.
14절 : 예수님은 최고의 지혜이시며 생명의 샘의 원천이 되시는 분이다.
성도는 이 생명의 샘을 증거 하는 자로서 지혜로운 증인들이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생명임을 전한다. 이러한 증언을 받아들이는 자들이 생명의 샘을 마시는 자들이다.
15절 : 이와 같은 말씀으로 일반적인 세상의 교훈을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은 궁극적인 진리를 말한다.
선한 지혜 또는 선한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시다. 그 선하신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신 분이 예수님이다. 그러므로 예수님만이 선한 목자이시다. 이 선한 목자는 은혜를 베푸시지만 악한 자는 멸망의 길로 인도한다.
16절 : 슬기로운 자는 지식으로 행하지만 미련한 자는 자기의 미련한 것을 나타내기 마련이다.
그런데 인간이 평소에 살아가는 방식은 슬기로운 지식 곧 생명의 길로 가는 자들이 아니라, 자기의 미련한 것을 위하여 가고 있다. 물론 스스로는 발견하지 못한다. 미련한 길 곧 멸망의 길을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면서 간다. 사람들에게 주장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도 자기의 길이 옳다고 주장하는 자가 미련한 자들이다.
이런 미련한 것들이 드러나는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인 것이다. 이럴 때 택함을 받은 자는 자신이 가는 길이 미련한 것임을 알고 회개한다.
17절 : 심부름을 하는 자가 게으르고 악하면 자기도 망치고 심부름을 시킨 분도 곤란하게 만든다. 그러나 충성된 심부름꾼은 그 보낸 자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것이다.
‘악한 사자’란 하나님의 계시를 바르게 전달하지 못하는 거짓 선지자로 볼 수도 있다. 이들의 말을 듣고 따르면 거짓 선지자와 함께 멸망의 길로 가게 된다.
그러나 충성된 사신은 시키는 대로 하는 자이다. 사람의 비위를 맞추는 자가 아니라, 보내신 분의 뜻만 따르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범사에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가야 한다.
18절 : 잠언의 말씀도 십자가를 중심으로 해석해야 한다.
십자가를 버리는 자는 영원한 궁핍과 수치를 당하지만 십자가를 받는 자는 존영을 받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십자가를 인간이 스스로 취할 수가 없기에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분이 그들을 이끌어 가시는 것이다.
19절 : 미련한 자는 악에서 떠나기를 싫어하기에 소원의 성취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니, 이 소원이 무엇일까?
악인이 원하는 소원과 의인이 소원하는 것이 전혀 다른 것이다.
의인의 소원은 요한복음 10장 10절에서 본 것처럼 생명과 생명의 풍성함이다.
그러나 미련한 자의 소원은 생존의 풍성함만을 바라본다. 생명도 아닌 썩어질 것들의 풍성함만을 바라는 자들은 미련하기에 그 악에서 떠나기를 싫어하는 것이다.
20절 :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는 자를 14절부터 보면 생명의 샘물을 마시는 자이며 교훈과 훈계를 받아들이는 자이며 슬기로운 자이다. 이것은 주의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성령이 임한 자들은 돌처럼 단단하게 굳어진 자아와 주체성이라는 것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경험하는 자들이다.
이러한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과 동행하면 지혜의 풍성함으로 나아가지만, 이와 반대로 말하고 가는 자들과 사귀면 해를 받는다.
21절 : 인간은, 재앙이 주어지는 자와 선한 보응이 주어지는 자를 겉으로만 보고 판단을 한다. 하지만 현재 재앙을 당하는 것처럼 보여도 궁극적인 선한 보응이 있는 자가 있고, 지금 선한 보응을 받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 재앙을 당하는 자가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지금의 겉모습을 보고 선과 악의 판단을 함부로 할 수는 없다.
진짜 재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서 끊어진 것이 재앙이다.
그러므로 선한 보응이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아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얻은 것이다.
22절 : 선인의 산업이 자자손손에게 미친다는 것이 세상의 기업을 두고 하는 말씀이 아니다. 세상의 산업으로 영원한 것은 없다.
어떤 산업을 자자손손에게 물려주어야 하는가? 우리의 영원하신 기업, 생명보다 귀한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다.
23절 : 가난한 자가 밭을 경작한다는 것을 영적인 양식을 구하는 것으로 본다.
영적인 양식은 누가 구하는가? 마음이 가난한 자들이다. 마음이 가난해진다는 말은 세상의 것으로 채워지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찾고 구하고 두드리게 된다. 이들에게 성령이 임하게 되면 생명의 양식으로 풍성하여 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을 탕진해 버리는 것, 곧 그것이 불의인 것이다.
24절 : 자녀가 분명한 잘못을 하였을 때에 그 잘못을 인지시키고 정당한 체벌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물론 자기의 분노를 자녀에게 푸는 것은 안 된다.
신약은 자녀를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한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6:4)
25절 : 의인이 포식한다는 것은 세상의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이 생명의 양식으로 포식하는 것을 가리킨다.
의인은 중단 없이 늘 살아 계신 빵-예수-을 먹음으로 천상음식으로 자기 영혼을 채우고 만족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악인의 상태라는 것이 어떠할 것인지를 알 수 있다.
(나의 묵상)
“소원을 성취하면 마음에 달아도 미련한 자는 악에서 떠나기를 싫어하느니라”(19절)
“소원이 이루어지면 마음이 즐겁지만, 미련한 사람은 악에서 떠나기를 싫어한다.”(새번역)
“소원이 이루어지면 마음이 달갑다. 그래도 어리석은 사람은 나쁜 일에서 손 떼기를 싫어한다.”(공동번역)
“소원을 성취하면 마음이 즐거우나, 어리석은 자들은 악에서 떠나기를 싫어한다.”(쉬운 성경)
본문의 ‘소원’은 세상 사람들이 가지는 그런 땅의 소원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미련하고 어리석은 자가 그렇게 방관할 리가 없다.
미련하고 어리석은 자가 관심도 두지 않는 소원, 그래서 악에서 떠나야겠다는 마음을 들게 하지 않는 소원, 그들이 아무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는 그 소원이 무엇일까?
그것은 의인의 소원으로서 생명과 그 풍성함에 대한 소원이다.
그러나 미련한 자의 소원은 ‘생명’이 아니라 ‘생존’에 있기에, 썩어질 것만을 구하고 쌓기를 원하는 소원인 것이다. 그러니 미련하고 어리석은 자들은 자신의 생존과는 아무 상관이 없을 뿐만 아니라 걸리적거리기만 하는 생명의 복잡한 이야기가 싫다는 것이다. 더구나 그들이 원하는 바를 추구하기 위해 저지르는 그 악에서 떠난다는 것은 더욱 생각조차 하기 싫은 일인 것이다.
나는 언제 아들의 생명과 그 풍성함을 구하는 자가 되었는가?
이것이 참으로 달다는 것을 언제 느꼈는가?
세상이 주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즐거움이란 것을 언제 알게 되었는가?
그것은 매일 말씀 앞으로 나아가 주님을 조금씩 알아가게 됨으로 이루어진 일이다.
그것은 내 힘과 실력으로 된 일이 아니라, 전적으로 성령께서 주신 선물이다.
나는 내가 만든 신, 내 소원을 이루어주는 예수를 스스로 만들어 세웠으니,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섬기던 금송아지 우상을 세우고 섬겼던 것이다.
창세 전 하나님의 약속도 모르고,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도 모르고, 오로지 죄의 세력의 노예가 되어 세상 것만을 탐하는 자가 아니었던가?
성경이 증거 하는 하나님과 예수님은 알고 싶지도 않았으니, 오늘 말씀처럼 미련한 자가 악에서 떠나기를 싫어하는 모습 그대로였다.
그런 나였는데 주님께서 그 죄악 된 세상에서 나를 뽑아내어 아들의 나라에 옮겨 심어주신 것이다. 그리고 어리둥절해하는 나를 성령께서 말씀의 자리에 앉혀주셨다.
그러니 나는 말씀의 빛을 피하여 그저 땅으로 기어들어가고 싶어하는 벌레처럼 허둥지둥한다.
성내고 반항하면서....한숨 쉬고 낙심하면서......드디어는 감격하여 울면서.....성령께서 그렇게 나를 주님께로 한 걸음씩 걸어가게 하셨다.
주님은 참으로 성실하신 분이심을 내 삶을 간섭하시는 데에서 다시 한번 깨닫는다.
성실하게 징계하시니 처음에는 그것이 괴로움이었으나 이제는 그것이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사랑의 손길인 것을 안다.
그렇게 악에서 떠나기를 싫어하여 땅에 묶인 행복감으로 살던 자를 그곳에서 떼어내시고, 지금까지 품어보지 못한 새로운 소원을 품게 하시니 이것이 어찌 사람의 힘으로 되는 일일까?
나의 소원은, 주님을 더 잘 알게 되는 것이고, 그것이 지식으로 남지 않고 순종의 삶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과연 나는 이 순종의 삶을 살게 될까?
자신이 없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도해 주신 성령님, 매일 가슴 치며 울며불며 주님을 따라가게 하신 성령님을 생각하면, 이 일도 이루어 주시리라 생각한다.
(묵상 기도)
주님,
저는 흙을 먹고 땅을 기어다니는 뱀의 저주를 그대로 받아
그것이 자신의 행복인 줄 알고 뱀의 삶을 살았던 자입니다.
그러니 저는 잠언의 많은 말씀의 훈계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 죄인이었습니다.
멀리 있는 하늘의 복보다는
현실에서 나 자신을 풍요롭게 하는 땅의 복을 탐내던 자입니다.
그런 저를 구원하여 주셔서
하늘의 복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하시고,
이 땅에서부터 영생을 누리는 자로 살게 하시니 웬 은혜인지요!
그리고 참 소원과 소망을 가지게 하십니다.
주님을 더 잘 알고, 아는 만큼 순종의 삶을 살기를 원하는 소원,
주님 다시 오시기를 기다리는 소망입니다.
성령님, 남은 생도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