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 회개의 초점, 가난한 이들과의 나눔
집회 17,24-29; 마르 10,17-27 / 연중 제8주간 월요일; 2025.3.3.
성경과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돌아보면, 유다교가 놓치고 가톨릭이 잊어버린 것이 있습니다. 바로 가난한 이들과의 나눔,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가 곧 교회의 복음화라는 계시 진리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모인 교부들이 그토록 강조했건만, 아직도 많은 신자들은 이 진리를 그저 실천하면 좋은 부수적인 사회복지 덕목으로만 여기거나 개인적인 차원에서 자선을 행하라는 도덕적 권고 정도로 여기는 것 같습니다. 유럽 교회나 미국 교회는 물론, 우리 한국 교회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복음사가들이 증언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면,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는 사회복지 차원의 자선 활동을 훨씬 넘어섭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찾아온 부자 청년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분이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여행을 다니시던 중에 길을 떠나시는데 어떤 젊은이가 달려와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묻는 바람에 일어난 대화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러 다니실 때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 중에는 질병이나 장애나 마귀들림 등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그분께서 그들을 도와주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기적들이 일어나곤 했는데 그 기적들에 대해 군중은 감탄하며 그분 소문을 더 널리 퍼뜨렸지만 바리사이들은 그럴수록 그분에 대한 트집을 잡고 악소문을 만들어 가짜 뉴스를 유포하는가 하면 노골적으로 함정을 만들어서 모함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악한 무리들과는 달리, 이 청년은 그 악소문에 휘둘리지 않고 그분의 선의를 올바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처음 뵈오면서도 ‘선하신 스승님!’이라고 부름으로써 깍뜻하게 예의를 갖추었습니다.
이전까지 예수님을 만나러 온 사람들은 저마다 청원을 가지고 왔습니다. 더구나 그 앞에 무릎까지 꿇고 존경심을 표하는 이들은 다 그랬습니다. 나병 환자가 그랬고, 회당장 야이로가 또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달랐습니다. 무언가 도움이 필요해서 어떤 절박한 청원을 하러 온 것이 아니라 매우 차원 높은 질문이 있어 온 것이었습니다. 그 질문이란,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언듯 보기에도 유복하게 자랐고 그 젊은 나이에도 많은 재물을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드문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매우 차원 높은 질문을 가지고 왔으되 그리 절박하게 답을 구하는 처지는 아니었고 조금은 한가한 상황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먼저 예수님께서 ‘선하신 스승님!’이라는 호칭으로 대우 받은 데 대해,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고 말씀하시며 사양하셨습니다. 대다수 백성이 로마 제국의 억압과 수탈로 가난하게 살던 그 시대에 그 어느 누구보다도 가난하게 살며 떠돌아다니시던 그분으로서는, 호사를 누리며 유복하게 살던 청년으로부터 과분한 호칭으로 불리는 일은 불편한 일이셨을 겁니다.
그러고 나서 십계명을 거론하시며 이것부터 지키는 일이 영원한 생명의 출발점임을 상기시키셨습니다. 그 당시에 십계명은 그동안에 조상들이 잘 지키도록 율법 학자들이 계명을 잘 지키기 위한 규정들을 세세하게 첨부하는 바람에, 열 가지로 시작한 계명이 지켜야 할 규정 248 가지, 금지해야 할 규정 365 가지 등 모두 613 가지로 늘어나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 복잡하고 까다로운 율법 규정들을 제대로 알기도 어렵거니와 온전히 지키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은,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하고 자신있게 대답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에 비추어 십계명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단 두 가지의 계명으로 간추려 이해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그 청년을 대견하게 보시면서도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이웃 사랑의 정신으로 한 가지가 더 필요함을 상기시키셨습니다. 그에게 부족했던 것 한 가지는 바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사실은 예언자들도 익히 강조했던 바를 당시 유다교가 놓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영원한 생명은 물론 현세에서도 행복한 삶을 바라는 많은 종교인들과 신앙인들도 잊어버리고 있는 바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점이 회개의 초점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초대 교회 시절에는 물론 신앙고백문이 확정되던 고대 교회 시절에까지도, 가난한 이들과 가진 것을 나눔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던 가톨릭 교회의 전통은 너무나 엄중하고 그 기억 또한 생생해서 새삼 강조할 필요조차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하느님께로 돌아오려는 가난한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면제해야 한다던 사도 바오로조차도 가난한 이들을 기억하는 일은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일이라고 일깨워주었고(갈라 2,10 참조), 가난한 이들을 무시하면 그리스도의 교회를 무시하는 일이라고 경고한 바도 있습니다(1코린 11,22 참조). 가난한 이들에게 베푼 것은 곧 그리스도께 바친 것이라는 가르침(마태 25,40 참조)은 최후의 심판에서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줄 잣대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 이렇게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나자렛 회당에 모인 고향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선언하신 예수님께서는, 실제로도 갈릴래아 지방을 두루 찾아다니시며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루카 6,20)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이 드러날 수 있는 계기는 치유 기적을 통해서든 구마 기적을 통해서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들을 때였습니다(루카 7,22 참조). 그렇다면 우리 교회가 그리스도의 교회로 드러날 수 있는 계기도 교회의 사목 및 선교 활동과 신자들의 삶과 활동을 통하여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들을 때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 활동을 사회복지 차원의 자선 활동 정도로 여긴다면, 이는 마치 중세까지 유럽 가톨릭교회에서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는 천동설을 신봉하던 것만큼이나 시대착오적인 태도입니다.
하지만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지동설이 과학적 진리이듯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가난한 이들을 돕는 자선 활동을 통하여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들음으로써 비로소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신학적 진리입니다. 어떻게 해야 가난한 이들이 소외된 처지를 벗어나서 복음을 들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고민하고 성찰하며 자기 변화를 도모할 때라야 비로소 회개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 10,21) 하고 부자 청년에게 하신 말씀은 곧 현대 가톨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현 교황이 2014년 8월에 방한하여 주교단을 만난 자리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가 되라고 당부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이미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부들은 벌써 반 세기 전에, “기쁨과 희망, 슬픔과 번뇌, 특히 현대의 가난한 이들과 고통받는 이들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번뇌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신자들의 기쁨과 희망이요 슬픔과 번뇌인 것이다.”(사목헌장, 1항) 하고 선언한 바 있습니다.
그러니 사순 시기를 바로 앞두고 들려온 이 말씀에 따라 회개하자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한 이들의 기쁨과 희망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고 고통받는 이들의 슬픔과 번뇌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결국 그 부자 청년은 가진 것을 나눌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울상이 되어 돌아갔지만, 오늘날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그래서는 안 됩니다. 영원한 생명을 놓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를 통해 받게 될 성령의 이끄심과 거룩한 활력도 놓치게 될 것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라는 명제는 하나의 도전이면서 동시에 희망의 초대입니다.
도전과 초대라는 복음적 관점에서 그리고 가난한 이들의 눈으로 교회와 세상을 바라보면, 빈곤으로 고통받는 가난한 이들의 기쁨과 희망 그리고 슬픔과 번뇌는 주거와 고용 문제, 보육과 교육 문제, 의료와 돌봄 문제로 모아집니다. 우리 사회에서 빈곤의 대물림괴 걍제 양극화 구조를 고착화시키는 원인이 이 여섯 가지 영역에서 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한 길이 오로지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만 맡겨져 있는 데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가난은 나라도 구제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은 임금이나 왕실이 나라의 땅과 자원을 소유하고 있었던 왕정 시대에나 해당되는 말입니다.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주권자인 국민의 다수가 무주책자요 비정규직 노동에 종사하는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얼마든지 헌법과 법률 그리고 정책으로 빈곤을 퇴치하고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비상 계엄으로 내란을 일으킨 현직 대통령에 대한 헌법 심판이 마무리되어 가고 있고 파면 결정이 가시화되고 있는 현 정국에서 조기 대선이 불가피해 보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민주 정부가 들어서고 나면, 1987년에 개정된 현행 헌법에서 지난 30여 년 간 드러난 많은 문제점들을 새로이 보완하자는 논의도 급물살을 탈 것 같습니다. 많은 이들은 대통령의 임기라든지 총리의 책임 범위, 국회의원에 대한 국민소환제, 재판에 대한 국민 배심제를 강화하고 판사와 검사의 주요 보직을 선거로 선출하는 등 권력 구조의 개편에 관심을 쏟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개헌 논의는 국민의 기본권을 더욱 강화하는 일입니다. 87년에 개정된 현행 헌법은 자유권적 기본권, 즉 대통령을 국민의 직접 선거로 뽑고 5년 단임제로 제한하는 등에 초점이 맞추어진 나머지 경제 양극화와 빈곤 대물림으로 고통받는 다수 국민들의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기본권에 대해서는 국가의 의무와 책임을 그저 선언하는 조항으로만 채워져 있습니다. 하지만 주거와 고용, 보육과 교육, 의료와 돌봄 문제는 국가가 국민에게 실질적으로 보장해 주어야 하는 기본권으로 헌법에 규정되어야만 빈곤을 퇴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도전과 초대라는 복음적 관점을 견지하면서 가난한 이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교회라야 생겨날 수 있는 사회적 관심사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교회에 부족한 한 가지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실천에 따르면, 이 부족한 한 가지를 채우는 일이 하느님의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