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말인가?
교회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을지라도 구체적으로 말하면 박해시대에 처했을 때에도, 교회가 왕성하게 번성했을 지라도 예수님께서 초대교회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대로 신앙생활을 해야할 것인지 아니면 상황이 바뀌어 졌으니 거기에 따라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신약 성경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냐? 라고 반문하는 분도 계시겠지만 실상을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서 이런 글을 써 본다
초대교회때부터 교부시대까지 역사
대부분의 성도들이 알다 시피 우리 기독교는 초대교회 300년 어간에는 로마제국 10명 황제의 박해로 말미암아 로마 지하의 묘지로 숨어서 생활을 했다 . 그것을 카타콤시대라고 한다. 터키의 갑바도기아도 그때의 피신처로 알려져 중요한 순례지가 되었다.
기독교의 공인과 카톨릭교회의 역사
AD 313년 콘스탄티누스 때부터 기독교를 인정하며 나중에는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었다. 이때부터 교회는 음지에서 양지로 그것도 교황제도가 들어서 동서 로마로 갈려진 후 1,000여년 동안은 로마캐톨릭교회 수장인 교황이 황제 이상의 권세자로 행세했다.
종교개혁과 현재까지
종교개혁이 일어나 교황과 캐톨릭이 성경에서 너무 벗어난 것을 지적하며 일어난 이후 로마캐톨릭교회는 많은 힘을 잃었으나 아직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UN 총회가 열릴 때 상석에 유일하게 교황의 자리가 있는 것도 그 일례다
소 결론
기독교가 공인될 때까지만 해도 초대교회 가르침은 성경대로 였다. 그러던 것이 기독교가 국교로 대접을 받고 5대교구중 로마 교구교회 나중에는 자신들이 공교회다 라는 의미로 불려진 캐톨릭 세상이 되면서, 성모마리아를 숭상하고, 교황이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하면서 캐톨릭교회가 말하는 대로 믿어야만 구원이 있다고 구원론을 변개시키며 심지어는 속죄권을 파는 그야말로 천벌 받을 짓을 했던 것이다.
한국교회 역사
1885년 조선에 언더우드와 아펜셀라 선교사가 들어와 신학교를 세우는 것을 시작으로 조선기독교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 이전에도 간헐적으로 조선에 복음을 전했던 분들이 있었지만 말이다.
1)한국 기독교의 초기 역사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인 언더우드와 아펜셀러가 조선황실의 인정을 받고 기독교를 전파한 후 일제 36년 동안 한국 기독교는 조선시대의 유교의 전통과 일제의 박해로 말미암아 기독교의 초대교회처럼 어려움에서 신앙생활을 하였으며 이때는 당연히 성경 그대로 특히 세대주의 영향을 받아 성경을 문자대로 믿는 신앙생활을 하였다
2)한국교회의 성장과 번영기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정권때부터 기독교의 박해시대는 끝나고 성장기를 맞이해 1992년 다미선교회의 휴거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 전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없는 대단한 성장을 이루어 교인수가 1,300만명에 가깝게 되었다
3)한국교회의 침체기
1990년대 후반기부터 기독교세는 감소되기 시작해서 현재에 이르렀다. 지금은 650만명 정도라고 하는데 이것은 이단을 포함한 숫자다. 앞으로도 감소추세는 계속될 것이라고 전문가가 아니라도 그렇게 다들 인식하고 있다
소 결론
한국교회 초대 역사는 기독교 초대교회의 역사처럼 박해속에서 성경대로 믿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으나 박해시대가 끝나고 교회가 인정받고 교회가 왕성해질때는 성경대로 신앙이 아닌 교회가 말하고 가르치는 대로 신앙생활이 변질이 되었다.
중세기때 서구 나라들이 성경대로 신앙생활을 한 것이 아니라 캐톨릭교회 교황의 지침에 따라 신앙생활을 했드시 한국교회도 일제 박해시대가 끝나고 성장시대에 들어오니 교회에서 가르치는 잘 살아보자 라는 번영신앙과 자유주의 신앙과 캐톨릭과 연대해야 한다는 신앙 등으로 변질이 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총 결론을 내려보자.
이 글을 읽은 분들이여, 당신들은 말은 성경대로 믿는다고 말하고는 있지만 한국교회가 번성하기 시작하면서 목사들이 하는 말을 실제로는 따르라고 하고 있지 않는가?
귀하들의 목사가 과연 성경대로 양육을 하는지 아니면 세상이 변했으니 세상 속에 있는 교회도 변해야 된다면서 세상 속에서 사명을 다해야 한다며 영혼구령에 촛점에서 벗어나 사회참여 심지어 성시화. 타 종교화와 대화를 넘어 모든 종교는 인류의 평화공존을 위해서 힘써야 된다고 말하는데 까지 성경의 본질을 훼손시키고 있는 중이다.
세상은 장망성이라고 하고 있지 않는가? 마귀를 이 세상의 신 혹은 왕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그런 세상 출애굽에서 구출받아(구원받아) 가나안(천국의 삶을 실행해 보는) 으로 인도받은 것이 기독교인의 정체가 아닌가?
이 세상 임금 마귀가 주는 세상 권력을 갖기를 원하는 자들의 각축전에 온 정신이 빠져 주님 오시는 것에는 무관심하는 자들이 되어 가고는 있지 않는가?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알고싶은게 있어서 질문드립니디아직도 UN총회 상석에 교황자리가 있는지요?
그리고 교황이 참석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지금은 어떤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전에 본 사진과 글에서 봤습니다
제가 영어가 안되니 누가 확인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나그네 목사님 안녕하세요. 송구스러운 말씀이지만,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했다는 말은 잘못된 것입니다. 콘스탄틴 1세 황제는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선포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기원후 313년 밀란 칙령을 발포하여 일부 그리스도인에게 자유를 허용하고, 일부 그리스도인에게 경제적인 기원도 한 것이 사실이지만, 기원후 325년 후 2년 뒤에는 정통 그리스도교를 박해하고 탄압하였습니다. 그 대표적인 피해자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총대 감독인 아타나시우스입니다.
AD 313년 콘스탄티누스 때부터 기독교를 밀라노칙령으로 인정하고 국교로 인정한 것은 테오도시우스 황제이지만 자세한 것까지 말하면 길어질 것 같아 그렇게 쓴 것입니다. 오해할 수 있도록 쓴 제 불찰입니다 감사합니다
@나그네365 그럴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소임은 정확한 것을 성도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비난은 아닙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콘스탄틴 1세는 그리스도교의 신자가 아니었습니다. 첫째 당시 로마의 황제는 신으로 숭배를 받았습니다. 둘째, 콘스탄틴 1세 황제는 솔신을 숭배하였습니다. 섯째, 점성술을 행하였습니다. 넷째, 저기의 큰 아들 크리폭스를 죽었고, 여동생의 남편도 살려주겠다고 약속하여 놓고도 죽였습니다. 다섯째, 이단인 아리우스를 유배에서 석방시켜 주었습니다. 여섯째, 정통 그리스도교를 박해하였습니다. 일곱째., 죽어 갈 때 아리우스 이단에게 안수받고 죽었습니다.
콘스탄틴 1세 황제 보다도 먼저 그리스도교에 종교 자유를 허용한 로마 황제는 갈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Galerius Maximianus, 250년경–311년, 재위: 305-311)입니다. 그는 신학자와 목사는 잘 모르고 있지만, 갈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황제는, 311년 4월 30일에 그리스도교에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는 칙령이 공포하였습니다.
그렇습니까 알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284-305) 로마 황제는 다신교를 숭배하였고,황제를 신격화시켰으며, 그리스도교를 혹독하게 박해하였습니다. 그리스도교를 마지막으로 박해했던 황제입니다. 그는 통치 초기부터 제국을 넷으로 분할하여 통치하였습니다. 그래서 부제(Caesar)로 임명받은 갈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황제도 당연히 그리스도교를 박해 한 줄로 잘못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를 공인했던 서로제국의 황제는 여러명이 있었고, 마침내 동로마제국의 황제인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서로마제국까지 모두 지배하게 되는데, 기원후 392년 동서로마 제국에 국교를 그리스도교로 반포하였습니다.
콘스탄틴 1세는 그리스도교를 이용하여 막시무스 황제와 전쟁했던 분열을 막고 통일된 로마제국을 건설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교를 자기의 개인 종교로 만들려 지배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콘스탄틴 황제 때 그리스도교가 로마 원시 종교와 혼합되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기원후 니케아종교 회의 때 전 세계에는 5대 그리스도교의 총대 교구가 있었고, 감독은 1,800여 명에서 2,000여명 정도로 추산되는데, 니케아 종교회의에 참석한 감독은 전체 그리스도교 감독 중에 겨우 16% 정도만 모였습니다. 그 만큼 그리스도교의 감독인 콘스탄틴 황제를 불신했다는 뜻입니다.
니케아 공의회(公議會: Council of Nicaea)는 주후 325년 5월 20일(소집)~7월 29일(폐회)에 죽을 때까지 태양신을 숭배했던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1세(ConstantinusⅠ, A. D. 280-337) 황제가 각 지역의 감독들에게 안내장을 보내 소집되었다. 소집한 동기는 성경의 진리에서 벗어난 이단 사상을 주장했던 아리우스파와 정통파의 극한 대립으로 서방과 동방이 분열되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이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고, 부활절 날짜도 정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동방교회는 유월절을 지키고 있었으며, 서방교회는 주일을 중시했다.
니케아 지역은 소아시아의 비두니아 지방으로, 현재의 터키 북서방 해안의 작은 동네인 이즈니크(znik) 지방이다. 이 종교회의에 참석했던 나라의 사람들은 스페인의 코르도바의 감독(주교)을 비롯하여 프랑스, 이탈리아, 이집트,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 페르시아 등에서 모였으며, 서방교회는 거리가 멀고, 헬라어를 잘 모르기 때문에 10명만 참석했다.
이곳에 참석했던 사람들 가운데는 로마 황제들의 기독교 박해로 고문을 당하여 눈도 멀고, 양손이 잘린 사람들과 고행을 겪은 사람들도 다수 참석했다.
니케아 종교회의는 로마제국의 여러 교구에서 각 감독들이 투표권이 없는 장로 2명과 수종을 드는 수행원 3명이 참석했다. 그곳에 모인 전체 감독의 수는 콘스탄틴 황제의 친구이며, 중도론자였던 유세비우스(가이사랴 감독)는, 250명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아타나시우스는 318명이 참석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두 사람의 기록한 숫자에 차이가 나는 이유는 기록자가 감독과 장로만 기록하였을 경우도 있고, 수행원까지를 포함하는 경우일 수도 있으며, 늦게 회의에 참석했던 이유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종교회의에 모인 사람들이 318명이라고 하더라도 로마제국 전체 교회 감독 숫자의 불과 6분의 1 정도로 약 16% 밖에 되지 않는다. 이 부분에 대하여 필립 샤프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곳에서 황제는 재위 20년인 325년(그러니까 즉위 20주년이 되던 해)에 주교들에게 초대의 편지를 보내고 오도록 하고, 그들의 편의를 위해 탈 것을 보내고, 니케아에서의 체류 비용과 귀환 비용을 국고에서 지원했다. 주교마다 두 명의 장로와 세 명의 하인을 대동하도록 했다. 주교들은 더러는 국가의 우편 마차를, 더러는 말과 노새 혹은 나귀를 이용했고, 더러는 걸어서 왔다. 많은 주교들이 사적인 분쟁 건들을 황제 앞에 가지고 왔는데, 황제는 주교들이 제출한 문서들은 한 장도 읽지 않는 채 태워버리도록 지시했고, 서로 화해하고 협력하라고 당부했다. 회집한 주교들의 수는 고작 318명밖에 되지 않았다. 이것은 제국 전역의 총 주교 1/6밖에 되지 않는 수였으며(제국 전역의 주교 수는 적어도 1천 8백 명가량 되었을 것으로 추정), 칼케돈 공의회 참석자 절반 밖에 되지 않는다. 장로들과 집사들과 그 외 수행원들의 수를 합하면 총 참석자 수는 1천 5백 명 내지 2천 명가량 되었을 것이다. 동방 교구들은 대부분 대표들을 파견했다. 반면 라틴 교회는 고작 일곱 명의 대표만 파견했다"라고 기록하였다.
당시 이스라엘의 총대 교구, 시리아 안디옥 총대 교구, 콘스탄틴노플 총대 교구, 이집트알렉산드리아 총대 교구, 로마 총대 교구의 1명이 대 감독이 수행원 5명과 동행했다고 합니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총대 교구의 대감독은 알렉산더였으며, 부제(집사, 성직, 성경을 교회에서 읽어 주는 독경사) 젊은 아타나시우스였습니다. 아타나시우스는 발언권, 투표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가 모독을 당하고 있을 때 황제에게 당당하게 말하여 발언권을 얻어서 정확하게 삼위일체 하나님을 설파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본질(우시아’, ουσια, 본질, 실체, 본체, 본성, 호오우시아)이 하나이신데, 삼위(성부, 성자, 성령, 휘포스타시스, 位格, ὑπόστασις, 5287, hypostasis)가 계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니케아 신조의 핵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