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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년 상 만력 20년, 선조 25년(1592년)
봄 왜인 귤광련(橘光連)이 의(義)를 위해 죽다. 귤광련은 일명 강광(康光)이라고도 하는데, 일본 대마도(對馬島)
의 작은 두목[小酋]이다. 경인년(1590, 선조 23) 이전에도 누차 왜의 사신이 되어 우리나라에 내빙(來聘)하였는
데, 우리 조정에서는 후한 상과 높은 작위로 특별히 회유하였다. 경인년에 이르러, 그가 현소(玄蘇) 등과 함께
정탐하러 왔을 때, 귤광련이 은밀히 우리 조정에 고하여, “일본의 사람들은 변덕스럽고 간사하기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여러 해 동안 모략을 쌓은 끝에 상국(上國 명 나라를 말함)을 침범할 계획을 결정하였으니, 지금
온 두목들을 죽여서 큰 화를 막도록 하십시오.” 하였는데도, 우리나라에서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이번에는 수길(秀吉)이 귤광련이 우리나라를 자세히 안다고 해서 그로 하여금 의지(義智) 등과 함께 선봉을
갈라 맡아 가지고 날짜를 정해 바다를 건너가게 하였지만, 귤광련이 그 명령을 거부하고 말하기를, “이번 출병
(出兵)은 무슨 명목에서인가. 조선으로 말하면 일본의 좋은 이웃이다. 2백 년 동안 조금도 틈이 없이 우호
관계를 유지하며 최대한의 성심을 다해 왔는데, 어찌하여 맹약을 어기고 군사를 일으켜 상국의 땅을 범하려고
한단 말인가. 하물며 나는 상국의 후한 은혜를 받았으니 죽을 것을 산 것도 뼈에 살을 붙여 준 것도 모두 그
은덕이 아닌 게 없다. 내 비록 보잘것없는 존재이지만 그래도 사람의 마음만은 지니고 있다. 머리 위에 하늘의
해를 이고 있으면서 어떻게 차마 은덕을 잊고 감히 조선을 짓밟고 지나가겠는가. 한 번 죽기는 마찬가지다.
군사를 몰고 바다를 건너가는 짓은 결코 하지 않겠다.” 하다.
의지가 이 말을 수길에게 전하여 알리자, 수길이 대노하여 곧 귤광련을 잡아다 목 베어 대중에게 보이게 하고
또 구족(九族)을 멸하게 했다. 귤광련의 한 아들은 요행히 상인으로 먼 섬에 나가서 머물러 있었는데,
이 변고를 들어 알게 되자 곧 행장을 버리고 성명을 바꾸고는 도망가 숨어서 생명을 보전할 수 있었다.
그 후 만력 34년 병오년(1606, 선조 39) 일본 국왕 원가강(源家康)이 평성(平姓)을 다 없애고, 서신을 써서
사신을 보내고는 다시 통신하기를 청해 왔다. 예조(禮曹)에서는 무과첨지(武科僉知) 전계신(全繼信)과 역관(譯
官) 박희근(朴希根)을 회답사(回答使)로 하여 일본에 보냈다. 이들이 대마도에 당도하여 귤광련의 아들을 만나
보기를 원했더니, 성이 귤과 다른 한 왜인이 와서 그 이유를 캐는 것이었다. 전계신 등이 그가 귤광련의 아들
임을 알아채고 백방으로 그를 위로하면서 극진한 은의를 베풀었다. 귤광련의 아들은 눈물을 흘리며 전에 있었
던 일을 다 말했다. 회답사가 돌아와서 경상 감사에게 자세히 보고하였고, 감사 유영순(柳永詢)이 이 일을
조정에 갖추어 상주(上奏)하니, 조정에서 의론한 끝에 귤광련의 사당을 부산(釜山)에 건립했다.
그 후 신해년(1611, 광해군 3)에 유상(柳相)이 나한테 이 일을 자세히 전해 주기에, 내가 기특하게 여겨
그 일을 기록하고 이어 시를 짓기를,
천부의 양성이란 구해서 오는 것이 아니련만 / 秉彝良性非求至
난에 임해서는 어찌하여 신의 적단 말고 / 臨亂胡爲少信義
의관 갖춘 사람마저 나라 저버리고 부끄러움 모릅디다만 / 衣冠負國尙不恥
이적 땅의 사람으로 이럴 수 있었고야 / 夷狄之人乃如此
하였다.
여름 4월. 왜적 평수길(平秀吉)이 그의 장수 평수가(平秀家) 등 36명의 두목들을 보내어 상세한 것은 강항(姜
沆)의 장계(狀啓)에 있다. 군사를 거느리고 우리나라에 침입해 들어오다. 평행장(平行長)이 평의지(平義智)ㆍ
평조신(平調信) 등과 함께 선봉이 되어 병선 4만여 척과 군사 1백만으로 바다를 덮고 와서는, 13일 새벽 안개
가 자욱한 기회를 타서 곧장 부산(釜山)으로 쳐들어 왔다. 그때 첨사(僉使) 정발(鄭撥)은 절영도(絶影島)로 사냥
을 나가 있었다. 처음에는 조공(朝貢) 오는 왜인이라고만 생각하고 걱정거리로 여기지도 않았는데, 잠시 후
병선이 무수히 몰려오는 것을 보고야 급히 돌아와 성으로 들어갔다. 성문이 겨우 닫히자 왜적들은 이미 상륙
하여 성을 백 겹으로 포위하였으며, 얼마 안 가서 성은 함락되었고 정발은 죽었다.
왜적의 변란이 심히 다급해서 조야(朝野)가 창황하였다. 정 발은 나라를 위해 순절했으나 은명(恩命)을 받지는
못했었는데, 그 후 만력 31년 계묘년(1603, 선조 36)에 정발의 처 임씨(任氏)가 글을 올려 억울함을 호소하기
를, “발은 고립된 성을 지키면서 힘을 다해 싸우다 죽었는데도, 어떤 사람은 정발이 성을 버리고 달아나 버렸
다고 하니, 지하의 억울한 혼이 눈을 감지 못합니다. 이 억울함을 풀어 주시고 특별히 포상을 내려주시기를
청원합니다.” 하였다.
이에 임금이 본도 순찰사(巡察使)에게 명하여 정발이 전사한 곡절을 탐문해서 아뢰라 하니, 순찰사 이시발
(李時發)이 좌수사(左水師) 이영(李英)에게 이첩하였고, 이영이 회보하기를, “그때 토병(土兵) 가은산(加隱山) 등
3명은 탈출할 수가 있어서 죽지 않았는데, 이들이 모두 말하기를, ‘첨사가 사냥을 나갔다가 왜선이 무수함을
보자 급히 부산진에 돌아와서 성 밖의 주민과 군인 등을 독촉하여 빠짐없이 성 안으로 들어오게 하고는
사람을 시켜 왜관(倭館)에 머물러 있는 왜인을 가보게 했는데, 단지 네 명이 있을 뿐이어서 곧 잡아 가두게
하였습니다. 또 전선(戰船)ㆍ방패선(防牌船)ㆍ중선(中船) 등 도합 세 척을 모두 배 바닥에 구멍을 뚫어 물에
가라앉게 한 뒤에, 첨사는 남문의 성루(城樓)에서 밤을 지냈습니다.
그 이튿날 날이 샐 무렵에 왜적이 성 뒷산을 둘러싸고 진을 치자 첨사는 군중(軍中)에 영을 내려 동요하지
않도록 조심하게 하고는, 마침내 서문으로 옮겨가 수비했습니다. 그런데 왜적이 일시에 함께 진격해 와 높은
곳을 점령하고 고함을 치면서 탄환을 비오듯이 쏘아대는데, 쏘는 탄환치고 맞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첨사는 탄환에 맞아 죽었고 첨사의 첩도 스스로 목 베어 죽었으니, 성은 마침내 함락되었습니다.
가은산 등은 쌓인 시체 속에 숨어 있었는데, 오후에 왜적이 군중에 영을 내려 남은 백성들을 죽이지 말라
하여 다 배 위에 잡혀 있다가 17일에 석방되어 돌아왔습니다. 운운.’ 하였습니다.” 하다. 순찰사가 그 회보에
의하여 자세히 아뢰다.
14일. 왜적이 동래(東萊)를 함락하였는데 부사(府使) 문과(文科) 출신의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평화시의 예에
따라 파견되었다. 송상현(宋象賢)은 죽고, 좌위장(左衛將)인 울산 군수(蔚山郡守) 이언성(李彦誠) 등은 군사를
거느리고 왜적에게 항복하다. 하루 전에 송상현은 왜적이 대거 침입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인접 고을 군사를
불러다 동래성을 지켰다. 이리하여 좌병사(左兵使) 이각(李珏)이 동래성에 달려 들어왔는데, 부산이 이미 함락
됐다는 소식을 듣자, “나는 절제장(節制將)이니 본영(本營)을 지켜야지 여기에 있을 게 아니다.”라고 핑계하고,
성을 나가려 했다.
이때 송상현이 큰 소리로 외쳐 말하기를, “고립된 성이 함락되려고 하는데, 주장(主將)이 구원해 주러 왔다가
어찌 차마 버리고 간단 말이오.” 하였으나, 이각은 듣지 않은 채 아병(牙兵) 20명만을 남겨 놓고 가 버렸다.
이날 날샐 무렵 적병이 대거 진격해 와서는 우선 허수아비를 만들어 붉은 옷에 푸른 건을 씌우는 한편,
등에는 붉은 기를 지우고 허리에는 긴 칼을 채워서 그것을 긴 장대 끝에 꽂아 담 사이에 늘어 놓자, 성 안의
사람들이 크게 놀라 도망치며 울부짖었으며, 왜적은 칼을 휘두르면서 마구 성 안으로 쳐들어 왔다.
조방장(助防將) 홍윤관(洪允寬), 중위장(中衛將)인 양산 군수(梁山郡守) 조영규(趙英珪), 대장(代將) 송봉수(宋鳳
壽), 교수(敎授) 노개방(盧盖邦) 등이 모두 이 싸움에 죽었다. 송상현은 남문 성루에 올라 갑옷 위에 단령(團領)
을 입고 관대를 띠고는 교의에 앉아 있었다. 왜적은 그가 부사임을 알고 생포하려 하였으나, 송상현이 가죽신
신은 발로 두 차례나 차고 왜적을 꾸짖기를, “이웃 나라의 도리가 과연 이러한 것이냐. 우리는 너희를 저버리
지 않았는데 너희는 왜 이런 짓을 하기에까지 이른단 말이냐.” 하니, 왜적이 몹시 성내면서 그를 잡아 끌고
목 베려 할 즈음에도 그의 안색은 변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부사가 남문의 성루에 있을 때 왜적이 칼을 휘두르며 돌입하자 부사는 그를 쏘아
죽였으며, 뭇 왜적이 난입하자 부사는 장검으로 두 왜적을 쳐죽이고 죽었다.” 하는데,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
겠다. 그의 첩은 북도의 기생이었는데 역시 굴복하지 않아 왜적이 송상현과 함께 죽였다. 양첩(良妾) 이소사
(李召史)는 자녀를 데리고 일본에 잡혀 갔다가 그 후 갑오년(1594, 선조 27)에 평행장(平行長)이 경상 우병사
김응서(金應瑞)와 화평을 의논할 때 석방되어 돌아왔다.
왜적은 그들을 의리 있는 사람이라 여기고는, 두 사람의 시체를 거두어 성 동문 밖에 묻고 나무패를 세워
표적을 해주었다. 부사가 조용히 죽음을 당할 그때 관노(官奴) 급창(及唱)이 소리쳐 울며 달려 들어가 손으로
부사의 옷자락을 잡고 기꺼이 그와 함께 죽으니, 왜적이 더욱 기이하게 여겼다. 애초에 부사가 경내의 대소
부녀들을 모아 모두 성 안에 들어와 있게 하였는데, 성이 함락되자 왜적들이 그들을 모두 문루 위로 몰아
오르게 하고, 기생과 악공에게 풍악을 잡히고 술자리를 벌여 모여 신나게 놀았으며, 창고를 다 털어서 준비했
던 배에 싣고 저희 나라로 돌려보내다.
포위를 당하기 전에 송상현은 북쪽을 향해 재배하고 부채에, “외로운 성에 달무리[暈] 서매, 크디큰 진영(鎭營)
을 구해 내지 못하누나. 군신의 의리는 무겁고, 부자의 은혜는 가볍다.”라고 손수 써서 그것을 집 종에게 주어
그의 부모한테 가서 알리도록 하다. 그 후 왜적들도 포로된 자에게 말하기를, “너희 나라의 충신은 오직 동래
부사 한 사람뿐이다.” 하다.
부채면의 16자(字)는 안 상산(顔常山)의 “신(臣)은 무상(無狀)하니, 죽는 것이 마땅합니다.” 한 말과 문신국(文信
國)의, “인(仁)을 이룩하고 의(義)를 취한다.” 한 찬(贊)과 더불어 전후로 같은 정신이다. 글을 읽고 비감(悲感)에
젖어 모르는 결에 눈물을 흘렸으니, 천고에 걸쳐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린 역적들의 마음을 격동시키기에
족하리라. 그때 본도의 감사(監司) 김 수(金睟)가 진주(晉州)에 있었는데, 부산의 급보가 졸지에 도착하자
마침내 좌우 도(道)의 군사들을 독촉 징발해서 계속 구원하러 나가게 하다.
15일. 김수가 진주로부터 달려 반성(班城) 진주의 속현 까지 갔는데, 거기에서 부산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식
을 듣자 곧 장계를 갖추어 급히 보내고 군대를 정비해 가지고는 함안(咸安)을 거쳐 칠원(漆原)에 이르렀다.
본도의《순영록(巡營錄)》에 나온다. 그때 본도의 우병사 신길(申硈)은 이미 갈리어 조대곤(曹大坤)이 그와 교체
되었으나, 조정에서는 조대곤이 노쇠하다는 이유를 들어 그를 경질하고 김성일(金誠一)로 대신하였다.
○ 이일(李鎰)을 순변사(巡邊使)로, 변기(邊璣)와 조경(趙儆)을 경상 좌우 방어사로, 성응길(成應吉)ㆍ양사준(梁士
俊)ㆍ박종남(朴宗男)ㆍ변응성(邊應星)을 경상 중좌우 조방장(慶尙中左右助防)으로, 곽영(郭嶸)을 전라 방어사로,
이유의(李由義)ㆍ김종례(金宗禮)ㆍ이지시(李之時)를 전라 중좌우 조방장으로, 이옥(李沃)을 충청 방어사로 하다.
16일. 왜적의 군사가 길을 나누어 전진했는데, 중도(中道)로 오는 왜적이 양산(梁山)을 지나면서 그곳을 깡그리
불태워 버렸다. 김수는 영산(靈山)에 이르러 왜적이 이미 양산을 통과했다는 소식을 듣고 곧 밀양(密陽)으로
달려갔는데, 적병이 대거 이르자 바로 영산(靈山)으로 후퇴하였다가 밤중에 초계(草溪)를 건너 전라 감사에게
이첩하였는데, “구원을 계속해 달라는 부산ㆍ동래ㆍ양산이 이미 함락되었고 적이 또 밀양(密陽)에까지 범했는
데, 그 병세(兵勢)를 보니 사세가 버티어 나가기 어려워 또 함락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의 일은 정말 말할 수도 없는 형편이고 이 일을 생각하니 정말 가슴이 아픕니다. 이는 개인의 화가
아니고 나라의 일이니, 귀도(貴道)의 군사 3, 4천 명과 도의 군관 3, 4명을 보내 주시오.” 하다.
이 통첩이 도달하자 호남은 겁에 질려 들끓고 다들 적을 피할 마음만을 지니고 있었다.
○ 경상 좌병사 이각(李珏)이 후퇴하여 소산(蘇山) 동래의 속역(屬驛)이다. 에 머물렀다. 이각은 이날 병영으로
달려 돌아가서는 싸우고 지키고 하는 대비에는 뜻이 없었고, 수석 진무(鎭撫)를 독촉해서 사람과 말을 내어
자기 첩과 면포(綿布) 천여 필을 운반해 옮겨 놓으라고 시키다. 진무가 어려운 기색을 보이자 이각이 대노하여
당장에 그를 목 베다. 본도《순영록》에 나온다.
○ 경상 좌수사 박홍(朴泓)은 왜적이 도달했다는 소식을 듣고 양식과 기계를 불태우고는 도망쳐 버리다.
본도《순영록》에 나온다.
17일. 좌우의 왜적이 여러 고을에 가득 찼고 길을 나누어 진격하다. 한 대열은 언양(彦陽)에 함빡 몰려 들었다
가 이어 경주(慶州)를 범했고, 중도(中道)로 오는 왜적은 곧장 밀양 가는 길로 해서 바로 들어 갔다.
부사 박진(朴晉)은 양산에서 후퇴하여 돌아와 황산(黃山)의 높은 잔교(棧橋)가 강에 임해 있는 그곳에서 적의
길을 막았다. 적장은 은색 가마를 타고 은색 우산을 펴고서 줄기차게 휘몰아 바싹 뒤쫓았다. 박진은 힘을 내어
싸워 여러 급(級)의 목을 베었고, 박진의 군관 이대수(李大樹)와 김효우(金孝友) 역시 연달아 여러 왜적을 쏘아
죽이고 자신도 탄환에 맞아 죽었다.
그러나 왜적이 이미 재[嶺]를 넘어 그의 귀로를 끊어 앞뒤로 적을 맞이하자 박진이 본부(本府)로 달려 돌아와
창고를 불사르고 성을 나섰는데, 왜적은 이미 성 밖에 가득 차 있었다. 박진은 단기(單騎)로 충돌하여 포위를
허물고 왜적의 목 2급(級)을 벤 다음 달아나니, 이로 말미암아 원근의 사람들은 곧 박진의 이름을 알게 되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18일. 왜적의 배 2백여 척이 부산에서 이동하여 김해(金海)를 함락시키자 부사 서예원(徐禮元)은 성을 버리고
달아나다. 애초에 중위장(中衛將)인 초계군수 이유검(李惟儉)이 서문을 지키고 서예원은 남문을 지키면서 종일
접전했는데, 밤중에 이유검이 야경(夜警)이라 사칭하여 문지기를 찍어 죽이라 하고는 먼저 도망했고 서예원
역시 이유검을 추격한다고 청탁하고는 서문으로 해서 달아나, 김해성이 마침내 함락된 것이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19일. 적병이 밀양에서부터 또 영산(靈山)ㆍ청도(淸道) 등지를 범해 깡그리 불태워 없앴는데, 그 기세가 바람에
불길 같고 진동하는 우레 같아 지나가는 곳이 다 초토(焦土)가 되었다. 김수는 합천(陜川)에 머물러 있으면서
또 전라도에 이첩하였는데, “경상감사가 전달하는 일입니다. 흉악한 왜적이 어제 밀양에서 성을 함락시킨 다음
또 영산에 침범하고 곧장 성주(星州) 길로 향했는데, 이어 대구 길로 올라갈지의 여부는 미리 알 수 없습니다.
현풍(玄風)ㆍ창녕(昌寧) 등지의 공사(公私) 집들은 다 비어 있고, 본도의 각 병영에서는 모두 우관(右關) 운봉현
(雲峯縣)에 달려가 보고했습니다.” 하다.
20일. 경상 우병사 김성일(金誠一)이 병영으로 갔다. 애초 김성일이 어명을 받고 잽싼 걸음으로 달려 내려가
의령(宜寧)에 당도하고는, 정진(鼎津)을 거쳐 병영에 직접 가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때 적병이 강의 우안(右岸)
에 가득 모여 들자, 김성일의 휘하 장병들이 서로 말하기를, “이 길은 왜적의 소굴에 가장 가까우니 진주로
해서 함안(咸安)에 도달하느니만 못하다. 그렇다면 왜적과도 좀 멀리 떨어지게 되지만, 만약 그렇지 않으면
주장은 군령이 엄하여 곧장 전진하고 두려워하지 않으니, 이 길은 위험하다.” 하고는, “정진에는 배가 없습니
다.” 하고 김성일을 속이고 다시 그의 아들 김혁(金湙)에게, “강물이 불고 배가 없으니 진주 길로 가는 것이
편리합니다.” 하고, 힘들여 간하도록 당부했다. 김성일이 군관 김옥(金玉)을 시켜 가보게 했는데, 김옥이
돌아와서는, “배가 없어서 건널 수 없으니 진주 길로 빨리 가야 하겠습니다.” 하고 속여 보고했다.
그때 전 목사(牧使) 오운(吳澐)이 촌락의 집에 있다가 새 장수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가서 배례하고,
“영감이 오셔서 군민의 기운이 배가했습니다만 왜 정진으로 바로 건너지 않으시고 진주로 해서 돌아 가시려고
합니까.” 하니, 김성일이 깜짝 놀라면서 말하기를, “나는 이 길을 와 본 일이 없소만, 틀림없이 휘하 장병들이
왜적을 두려워하여 나를 속인 것이오.” 하다. 그리고는 직접 가서 보니 큰 배가 강 언덕에 대어 있었다.
김성일이 대노하여 김옥ㆍ김혁 등을 잡아들여 형을 집행하게 했는데, 김옥이 큰 소리로, “김옥의 죄는 마땅히
참형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공이 전쟁에 임하실 때 한 번 목숨을 바쳐 속죄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하고 외치
니, 김성일이 말하기를, “네가 속죄를 요구하였으니 앞으로 왜적을 만나거든 반드시 먼저 나서서 싸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전의 죄까지 다스리어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 하고는, 곧 군사들을 재촉하여 강을 건너 해망원
(海望原)에 이르렀다. 전 병사 조대곤(曹大坤)이 이미 이곳에 후퇴하고 있었는데, 김성일을 보자 깜짝 놀라
읍하면서 맞이하고 그에게 직인과 부절을 넘겨 주고는 곧 하직하고 가려 하니, 이에 김성일이 그를 준렬하게
책하여 말하기를, “장군은 곤수(閫帥 병사나 수사를 일컬음) 신분으로 군사를 가지고도 진격하지 않고
우두커니 앉아서 김해(金海)를 함락당했으니, 그 죄는 마땅히 형을 받아야 하오. 더구나 세신(世臣)으로 나라의
후한 은혜를 받았으니, 이 극렬한 변란에 임해서 의리상 도망쳐서는 안 되오.” 하자, 조대곤이 부끄러워하는
기색을 띠면서 두 손으로 얼굴을 움켜쥐었다.
얼마 안 있다가 척후병이 와서 왜적의 선봉이 이미 도착했다고 알리자, 조대곤은 겁에 질려 어쩔 줄을 모르면
서 김성일에게 말에 올라 타자고 재촉하는 것이었다. 김성일이 그를 꾸짖어 저지시킨 다음 군사들에게 망동하
지 말라고 영을 내리고, 용맹한 군사를 골라 좌우의 복병을 잠복시키고 왜적을 기다렸다. 두 왜적이 흰 말을
타고 새깃으로 만든 옷[羽衣]과 금 갑옷에, 사방에 귀와 눈이 있어 빙글빙글 도는 게 답차(踏車)의 모양과도
같은 금가면(金假面)을 착용하고는 칼을 휘두르면서 말을 달려 앞으로 다가오자 장병들이 겁내어 떨었다.
그러나 김성일은 조대곤과 편안히 걸상에 마주 앉아 있었는데 왜적은 그가 꼼짝하지 않는 것을 이상히 여겨
감히 가까이 다가오지 못했고, 부채를 휘두르면서 걸어오는 왜적 수십 명이 그 뒤에 있었다. 김성일이 군관
20여 명을 시켜 앞에 가 그들을 쏘게 하고 또 용맹한 군사를 골라 돌격하게 했으나, 다들 서로 돌아보며 먼저
나가라고 미루는 것이었다. 김성일은 특히 김옥을 불러서 말하기를, “네 기왕에 먼저 나서서 공을 세우겠다고
하여 놓고 지금에 와서 회피할 수 있겠느냐.” 하니, 김옥이 곧 앞장 서서 말에 올라 수 리 밖에까지 쫓아가서
그 금가면의 말탄 왜적을 쏘아 거꾸러뜨리고는, 이긴 기세를 타고 추격하여 금안장[金鞍]ㆍ준마(駿馬)ㆍ보검(寶
劍) 등을 빼앗아 가지고 돌아왔다.
이 전투는 병졸이 1천 명도 되지 않고 병기도 쓸어낸 듯이 없었건만, 적의 날카로운 칼날을 좌절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군의 사기가 약간 진작되매, 곧 군관 원사립(元士立)과 이숭인(李崇仁)을 시켜
괵수(䤋首)를 바치고 장계(狀啓)를 올리게 했다. 그리고 나서야 보졸들을 앞에 가게 하고 김성일은 맨 뒤에서
고삐를 조여잡고 천천히 갔다. 이날 밤 김성일이 함안으로 진을 옮기고, 내상(內廂)을 수습하려고 하였는데
자기를 체포하라는 어명이 내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충성스러운 분기에 격동되어
사졸들이 목숨을 내놓고 죽기를 무릅쓰면서 힘을 내어 싸워 강한 왜적이 부지하지 못했는데 당시의 장병들은
왜 이것을 거울 삼지 않았는가.
○ 김수가 합천에서 지례(知禮) 쪽으로 도망쳤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21일. 우도(右道)의 왜적은 영산(靈山)을 거쳐 창녕(昌寧)ㆍ현풍(玄風) 등지를 지나서 깡그리 태워 없앴고, 중도
(中道)의 왜적은 청도(淸道)로부터 경산(慶山)과 대구(大丘)를 지나가 홍수가 밀어닥치듯 산과 들을 메웠으니,
이때부터 강 좌우의 길이 막혀 버렸으며 좌도(左道)의 왜적은 울산(蔚山) 좌병영(左兵營) 등지를 향해 전진했
다. 이각(李珏)은 서산(西山)으로 나가서 진을 쳤는데, 그때 열세 읍의 군사들이 모두 도착하여 성에 들어갔다.
안동 판관(安東判官) 윤안성(尹安性)이 동문을 지키고 있었는데, 이각이 성을 비우고 나가서 진을 치려고 하자
윤 안성이 말하기를, “어찌 성을 버리고 나가서 진을 칠 수 있단 말입니까.” 하니 이각이 대답하기를, “공은 우
후(虞候) 등 여러 수령(守令)과 성을 지키면 되오. 공이 가지고 있는 석전군(石戰軍)을 나에게 예속시켜 주기를
바라오. 나는 정병(精兵)을 거느리고 나가 서산에 진을 치고 왜적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안팎에서 협공하겠소.”
하다. 마침내 이각이 서문으로 해서 성을 나가더니 윤안성 등을 돌아보고 태화강(太和江)을 가리키면서, “너희
들은 왜적의 선봉이 이미 저곳에 꽉 차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 하고는, 곧 서산으로 향해 달려 가니,
윤안성이 흥분하여 꾸짖으며 칼을 잡고 그를 노렸다. 우후(虞候) 원응두(元應斗) 역시 도망칠 생각을 갖자,
윤안성이 성을 내며 힐책하기를, “주장이 까닭없이 성을 나갔으니 그 죄는 마땅히 참형을 받아야 한다. 그나마
너희들을 남겨두고 성을 지키게 했는데, 너희들까지 또 도망가려는 거냐.” 하니, 원응두가 감히 움직이지 못했
다.
적병의 또 한 패가 언양(彦陽)으로부터 사잇길로 해서 전진하여 경주를 함락시켰다. 그때 부윤(府尹) 윤인함(尹
仁涵)은 포망장(捕亡將)으로 서천(西川)에 있었고, 판관(判官) 박의장(朴毅長), 장기 현감(長鬐縣監) 이수일(李守
一) 등은 성 안에 있었다. 왜적의 기병(騎兵) 한 명이 동문 밖에까지 달려와서 패문(牌文)을 꽂아 놓고 갔다.
그것을 가져다 보니, “도주(島主)가 군사를 거느리고 왔으니, 판관은 속히 성을 나와 명령을 듣도록 하라.”
하고 씌여 있으매, 박의장 등은 성을 비우고 도망가 버렸다.
용궁 현감(龍宮縣監) 우복룡(禹伏龍)은 계원장(繼援將)으로 군사를 거느리고 모양(牟陽)까지 달려가고 있었고
하양(河陽)의 대장(代將) 역시 군사 5백여 명을 거느리고 경주로 가고 있었는데, 하양은 본래 방어사의 소속이
었으므로, 병사가 하양 대장으로 하여금 물러가 방어사의 지휘를 받게 하다. 우복룡이 막 길가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가 하양의 군사들이 후퇴하여 돌아가는 것을 보자, 그들이 왜적의 선봉이 된 게 아닌가 하고 의심하
여 불러다 물어보게 하다. 대장이 사실대로 대답하였으나, 우복룡은 몰래 자기 군중(軍中)에 호령하여, “이들은
왜적의 앞잡이가 아니면 틀림없이 도망하는 군사들이다.” 하고는 자기 군사들을 시켜 하양의 군사들을 포위해
잡아다가 점검을 가장하고 깡그리 죽여버리니, 흘린 피가 개울을 이루다. 하양 한 고을의 군민이 이로 인하여
탕진돼 버리다.
우복룡은 곧 토적(土賊)을 잡아 목베었다고 방어사에게 사후 보고를 내다. 《경상도 순영록》에 나온다.
흉악한 왜적에게는 의기를 떨치지 못한 채 도리어 무고한 군사들에게 독수(毒手)를 옮겨 쓰고도 전혀
후회하지 않고 보고를 작성하여 공(功)을 요구했으니, 그런 못된 꼴이 있을 수가 있겠는가.
22일. 김성일(金誠一)이 체포 명령에 응하여 길을 떠나다. 앞서 김성일이 일본에서 돌아와 어탑(御榻) 앞에서,
“일본은 반드시 군사를 출동시키지 않을 것이니 근심할 일이 없을 것을 보증합니다.” 하고 아뢴 적이 있었는
데, 왜적의 변란이 일어나자 임금이 전번에 아뢴 말의 책임을 추궁하여 이 명령을 내린 것이다. 김성일이 체포
명령이 도달하리라는 소식은 들었지만 길이 막혀서 아직 당도하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임금의 말씀
이 아직 내리지 않았고 큰 적은 앞에 닥쳐 있는데, 병사로서 어떻게 진(鎭)을 쉽사리 버릴 수 있겠습니까.”
하였으나, 김성일은, “군명(君命)을 오래 지체시켜서는 안 된다.” 하고 곧 길을 떠난 것이다.
이날 우후(虞候)와 이협(李俠)이 군기(軍器)를 못물[池水] 속에 가라앉히고 창고를 태우고서 도망갔으며, 창원
부사(昌原府使) 장의국(張義國) 역시 성을 버리고 달아나다. 김성일이 가는 도중에 김수(金晬)가 나와 만나보고
그의 피체(被逮)를 위로하니, 김성일은 말이나 안색에 전연 나타내지 않고 다만,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
니, 원컨대 영공(令公)께서는 힘써 왜적을 토벌해서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시오.” 하였다. 영리(營吏)들이 서로
말하기를, “체포된 것은 근심하지 않고, 나랏일만 걱정하고 있으니 참으로 충신이다.” 하다.
조대곤(曹大坤)이 용서를 받아 다시 병사가 되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왜적이 좌병영을 함락시키니, 이각(李珏)과 원응두(元應斗)는 이미 먼저 도망가 버렸고, 열세 읍의 군사들은
다 무너지다. 이각은 무예(武藝)가 뛰어났는데, 본직(本職 즉 좌병사)을 제수하자 그는 포를 쏠 때 탄환(彈丸)
대신 탄환 만한 10여 두(斗)의 해마석(海磨石)을 가지고 시험했는데 소리와 힘이 모두 격렬하니, 사람들이
그를 중진으로 여기게 되다. 그러나 한정없이 탐욕을 부렸고 천성은 또 겁이 많아 왜적이 지경을 침범해
왔다는 소리를 듣기만 하면 허둥지둥 어쩔줄을 몰랐으며, 동래(東萊)가 함락되자 몸을 빼어 달아났고, 병영이
포위되었을 때도 성을 비우고 먼저 도망가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당시 장수들은 겁이 많은데다 또 탐욕스러웠다. 자기 몸을 청렴하게 갖고 군사를 사랑하며 적을 막아
나라에 보답하는 자는 거의 없었으니, 이들은 실로 한(漢) 나라의 공명(孔明)이거나 송(宋) 나라 붕거(鵬擧)의
죄인들이다. 이각의 겁은 적을 보기도 전에 드러났고 이각의 탐욕은 국가가 어수선할 때에 나타났으니,
비단 옛 훌륭한 장수에 대한 죄인일 뿐 아니라 실로 당시 장병들의 죄인이기도 한 것이다.
○ 유학(幼學) 곽재우(郭再祐)가 군사를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다. 곽재우는 경상도 의령(宜寧) 사람이다. 처음에
그는 여러 성이 연달아 함락되고 여러 진(鎭)의 주장들과 방백ㆍ수령들이 모두 깊은 산으로 피하여 감히 교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무섭게 나무라며 말하기를, “성스러운 조정에서 2백여 년 동안이나 신하들을
길러 왔건만, 갑자기 위급한 사태가 일어나자 모두 자신을 보전할 계책이나 찾고 임금의 난경(難境)은 돌보지
않으니, 지금 만약 초야에 묻힌 몸이라 하여 일어나지 않는다면 전국 3백 주(州)를 통틀어 남자란 하나도 없는
결과가 될 것이다. 어찌 만고의 수치가 아니겠느냐.” 이리하여 자기 가산을 전부 뿌려 흩어진 군졸들을 모으
고, 자기가 입은 옷을 벗어선 전사(戰士)에게 입히고, 처자의 옷을 벗겨서는 전사들의 처자에게 입혔으며,
또 충의로써 군사들을 격려하였다.
이때부터 모집된 전사들 중에 심대승(沈大承)ㆍ권란(權鸞)ㆍ장문장(張文章)ㆍ박필(朴弼) 등 10여 인은 다 용감
하고 활 잘 쏘는 사람들로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곽재우와 함께 죽기를 원하였다. 이날 서로 같이 의병을
일으킬 것을 약정하고 수하의 용사 50여 명을 시켜 의령(宜寧)ㆍ초계(草溪)에 있는 창고의 곡식을 풀어 내고,
또 기강(岐江)에 거둬들인 배의 조세미(租稅米)를 가져다가 모집한 군사들을 먹이니, 사람들의 말이 자자하여
어떤 사람은 그가 발광한다고 생각하였고, 어떤 사람은 그가 도적질을 한다고 생각하였다.
합천 군수(陜川郡守) 전현룡(田見龍)도 그를 토적(土賊)이라고 순찰사(巡察使)에게 보고하여 군졸들이 다 흩어져
버렸었는데, 그때 마침 초유사(招諭使)가 내려와 그의 이름을 듣고는 그를 불러다 만나 보고야 의병을 일으키
라고 격려하니, 이리하여 군졸들이 되돌아왔다.
이에 곽재우는 더욱 힘을 내어 왜적을 토벌하였다. 적이 많고 적은 것을 묻지 않고 곧장 앞으로 나아가고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한 사람으로 열 명을 당해내었다. 그가 싸울 때는 반드시 붉은 생초[紅綃]에 안을 댄
옷을 착용하고 당상관(堂上官)의 입식(笠飾 융복(戎服)의 갓에 갖추던 장식을 말함)을 갖춘 갓을 쓰고,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자호(自號)하고 말을 달려 적진을 빼앗곤 했는데, 그가 내왕하는 동작이란
잽싸게 출몰하는 것이어서 왜적들이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 그런 후에 그는 말을 빙그르 돌리고 북을 치면서
천천히 가는 것을 군사를 움직이는 절차로 삼으니, 왜적들은 그의 군사가 많은지 적은지를 몰라서 감히 바싹
다가오지 못하였다.
그는 진을 친 곳으로부터 왜적이 있는 곳에까지 이르는 길의 2, 3식경(食頃)의 거리마다 잇달아 척후소를 두어
이상(異狀)의 유무를 은밀하게 보고하도록 마련하였으니, 왜적이 1백 리 밖에 도착해도 진 안에서 그를 먼저
알고 미리 준비하고 있는지라 언제나 편하고 힘이 들지 않았으며 언제나 조용하고 시끄럽지 않았다. 만약
왜적이 많이 오면 그들이 바라보이는 산에다 사람들을 시켜 손잡이 하나에 가지가 다섯씩 달린 횃불을 밤새도
록 들고서 무서운 함성을 올리며 서로 호응하게 하여 천병 만마(千兵萬馬)가 있는 것같이 하였으니, 왜적들은
바라보다가 곧 달아나 버렸다.
또 정예한 군인을 골라서 요새지에 잠복시키고는 사람이 없는 것같이 잠자코 있다가 왜적이 오면 곧 쏘아
죽이게도 하였으니, 왜적 역시 그를 ‘홍의장군’이라 하고 감히 상륙하여 불사르고 노략질을 하지 못하였다.
곽재우는 또 군사들을 단속하여 말하기를, “요(要)는 왜적을 죽여야 하는 것뿐이다. 목을 베어다 공(功)을 요구
해서 무엇하겠느냐. 만약 후일 공의 대가(代價)를 받기 위해서 왜적을 토벌한다면 그것은 성심에서 우러나
하는 일이 아니다.” 하니, 여러 사람들이 모두 그 말을 좇아 끝내 수급(首級)을 바치는 일이 없었다.
순찰사의 진에 있던 무사 김경로(金景老)ㆍ김경납(金景納) 등이 곽재우를 모함하자, 곽재우 역시 김수(金睟)가
하는 짓에 분개하여 격문을 돌려 그의 죄를 성토하고 그를 토벌하려 하였지만, 김수가 곽재우를 모반죄로
몰아서 장계를 올리는 바람에 곽재우는 헤아릴 수 없는 죄에 빠져들게 되었는데, 초유사가 양편을 조정해 준
덕으로 마침내 무사하였다. 또 초유사가 삼가(三嘉)의 군사를 곽재우에게 주니, 곽재우는 두 고을의 군사를
거느리고서 윤탁(尹鐸)을 대장(代將)으로, 박사제(朴思齊)를 도총(都摠)으로, 허자대(許子大)를 군기제조(軍器製
造) 책임자로, 정연(鄭演)을 독역사(督役使)로, 권란(權鸞)을 돌격장(突擊將)으로, 이운장(李雲長)을 수병장(收兵
將)으로, 심대승(沈大承)과 배맹신(裵孟伸)을 선봉장(先鋒將)으로, 허언심(許彦深)을 군 급량(給糧) 책임자로,
강언룡(姜彦龍)을 무기 수리(武器修理) 책임자로 하였다.
초유사는 또 전 목사 오운(吳澐)을 소모관(召募官)으로 하여 그 수(즉 모집한 군사들의 수효)를 파악하는
일까지 겸임시키고, 성세(聲勢)를 이루어 곽재우를 돕게 하였다. 시골의 넉넉한 집에서는 쌀을 내고 소를 잡아
매일 돌려가며 군사들을 먹이니, 군의 성세가 크게 떨쳤다. 강의 아래 위에 있는 10여 개 소의 얕은 여울목
마다 모두 척후를 잠복시켜, 왕래하는 사람들을 바라보아 서로 응원하니 왜적이 감히 물을 건너 오지 못하였
고, 여러 고을 백성들은 평화시와 다름없이 농사를 지었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초야에서 일어나 충의(忠義) 두 글자를 받들고 수륙에서 승리를 거두어 왜적 1백 급(級)을 쏘고 베고 하여
죽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차주환 신호열 (공역) |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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