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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저녁 정말이지 시원한 축구한판 보셨지요..
기억나는데로의 월드컵 축구를 더듬어보며
어제만치 시원하코 통쾌한 축구경기는 처음이었던듯 싶습니다
2002년 한국에서의 월드컵은 승리하기는 했지만
그다지 개운하지 않은 경기의 뒷맛..
하지만 어제는 달랐읍니다..
정말이지..뭔가를 보여준..축구였지요..
아침에 문득 한국역대 월드컵 역사를 찾아보다가
재미난 글이 있어 옮겨봅니다..
어린시절 기억이 가물가물한 축구스타들의 이야기부터..
지금같으면 상상을 초월하는
해프닝들....
함 읽어들 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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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축구의 월드컵 도전사는 파란만장하다.
2002년 전까지 지역 예선에서는 그런대로 좋은 성적을 올렸으나
본선에서는 4무10패, 단 한 번도 승전보를 전한 적이 없었다.
열네 차례 경기에서 11득점에 43실점이었다.
54년 스위스 월드컵
한국 축구가 월드컵 문을 두드리기 시작한 것은 54년 스위스 월드컵부터였다. 당시 지역예선에서는 일본과 홈 앤드 어웨이로 아시아지역 출전 티켓을 다투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반일 감정을 갖고 있던 이승만 대통령이 일본 선수들의 입국을 허락하지 않아 두 경기를 모두 일본에서 어웨이로 치렀다. 첫 경기에서 한국은 긴장한 탓인지 전반을 0대1로 뒤졌다. 그러나 후반전에 들어서부터 총반격을 개시, 소나기골을 퍼부어 5대1로 대역전승을 거두었다. 2차전에서는 진눈깨비가 내리는 악천후 속에 2대2로 비겨 한국은 1승1무로 스위스행 티켓을 따냈다. 스위스행 티켓을 비교적 쉽게 땄지만 스위스까지 가는 게 보통일이 아니었다.
54년 6월 9일 서울역을 출발한 선수단은 부산까지 열차로, 부산에서 일본은 배로 가서 11명은 프랑스 항공기를 타고 나머지 11명은 미공군기를 탔다. 그리고 60시간이 넘는 대장정 끝에 서울을 출발한지 일주일 만인 6월 16일 월드컵 개막일 밤에야 스위스에 도착했다.
한국은 쉴 틈도 없이 바로 다음날 스위스 대회 우승후보인 헝가리와 경기를 치렀다. 결과는 9대0의 참담한 패배였다. 터키와의 2차전은 주전 선수들이 너무 지쳐서 2진 선수들을 내보냈으나 역시 7대0으로 대패했다.
58년 스웨덴 월드컵
1958년 스웨덴 월드컵에서의 한국의 명에회복은 불가능 했다.
대한 축구협회의 월드컵 담당 직원이 신청서류를 분실하는 바람에 한국의 월드컵 진출의 열기에 깊은 태클을 걸었던 것이다. 한국 축구는 4년간의 병상에 누워있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어이없는 실수로 명함한번 내밀지 못한것이다
62년 칠레 월드컵
62년 칠레 월드컵에서도 역시 일본과 운명적으로 만났다.1960년 11월 6일 서울에서는 일본과 피할 수 없는 재격돌이 시작되었다. 지난 54년 홈그라운드의 잇점을 안고서 선취골까지 얻고도 내리 5골을 내주며 주저앉았던 일본은 타도 한국을 내세우며 나왔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우리의 실력은 일본을 2:1로 이기기엔 충분했다.그리고 6월 11일 일본 동경에서 열린 2차전때는 일본은 우리나라를 물고 늘어졌다. 그렇지만 그경기에서 2대0으로 승리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유고슬라비아가 버티고 있었다. FIFA가 아시아 축구 수준이 너무 낮다고 해서 유고를 아사아에 편입시켰던 것이다. 그 당시 박정희 정권은 공산국가인 유고와 경기를 치르는데 반대하고 월드컵 참가 불가 원칙을 내세웠다. 결국 장기영 축구협회 회장의 설득으로 경기를 치르게 되었으나 선수들의 혼란과 훈련 부족으로 어웨이 경기에선 5:1로 홈경기에선 3:1로 져서 월드컵 진출은 좌절되고 말았다.
66년 런던 월드컵
1962년 월드컵에서 아시아를 홀대한 FIFA는 66년엔 아예 (아시아+아프리카+오세아니아)를 이렇게 한 그룹으로 묶어버렸다.
"유럽과 남미만이 세계축구다"라고 하는 오만한 자세에 아프리카는 항의하는 뜻으로 15개국 모두가 월드컵 출전을 포기했다. 예선전에 나서는 팀은 고작 3팀 호주와 우리나라와 북한이었다.
월드컵에 대비하여 63년부터 월드컵 예선을 치르기 직전까지 29승 1패라는 뛰어난 성적을 가진 북한과의 경기에서 우리가 진다면 그 당시만 해도 북한과의 경쟁이 치열했던 우리 정부의 입장에서 볼때 엄청난 손해였다.
그래서 이길 가능성이 별로 없었던 우리 정부는 불참을 선언했다. 그리고 FIFA에 벌금 5000 달러를 지불해야만 했다.
70년 멕시코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에 참가한 나라는 일본, 호주, 그리고 한국 뿐이었다. 당시 국가대표의 전력은 이전보다 크게 향상되어 있었다.
골키퍼에 유명한 이세연이 있었고, 수비엔 김정남과 김호가 포진해 있었고 공격진에는 이회택과 박이천,정강진 등이 있었다.
그러나 서울운동장에서의 일본과의 첫경기에서 2:2로 비기고 말았다. 먼저 2득점하고 방심한데 그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이틀후의 호주와의 경기에서도 2:1로 지고 말았다. 중간결과는 호주 2승 1무, 일본 무승으로 탈락, 한국은 1승 1무 1패로 호주와의 경기에서 이기면 재경기에 돌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10월 20일 서울에서 대결한 경기에서 1:1로 팽팽한 접전을 벌이고 있을때 우리는 천금같은 PK를 얻어냈다. 그러나 이회택 선수가 찬공을 상대편 골키퍼가 잡고 말았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멕시코행은 좌절되었다.
74년 서독 월드컵
호주에게 KO당한 한국은 1974년 서독 월드컵에서 다시 도전 했다.한국이 자랑하는 수퍼스타 차범근이 있어 더욱 가능성은 높았다.
특히 골키퍼에 이세연, 변호영 수비엔 김호, 김정남, 황재만 공격에 차범근, 김재한, 김진국으로 이어지는 팀컬러는 한국국대 당대 최고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73년 5월 19일부터 28일까지, 한국은 태국, 말레이지아, 홍콩, 이스라엘 등을 맞아 3승 2무의 전적을 올렸다. 1차 예선을 통과한 우리의 앞에는 다시 호주가 있었다.
지난 대회의 치욕을 떠올리며 대결한 1,2차전은 모두 무승부, 특히 호주에서의 2차전을 0:0으로 이끌고, 서울에서의 2차전은 우리가 2:1로 리드하고 있을때 호주의 리차드선수의 롱 드로잉이 바로 수비진에서의 혼전으로 이어졌고 누가 건드렸는지도 모르는 공은 데굴데굴 굴러한국의 골문안으로 들어가고야 말았다. 결국 승부는 제 3국인 홍콩에서 치루어졌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호주의 사기는 충천해 있었다. 결국 힘한번 못써보고 2:0으로 지고 말았다. 또다시 호주에게 발목을 잡혔다.
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어느때나 다름없이 78년 월드컵 예선도 정말 '꿈의 예선전'이었다. 조광래,차범근,이영무,허정무가 이끄는 공격라인은 아시아 최강이라고 지목될 정도. 한국은 조 에선에서 일본과 이스라엘을 꺽고 5강에 진출했다.
첫 번째 상대는 최약체 홍콩 . 그러나 홈그라운드에서 간신히 1:0으로 승리하는데 그치자, 월드컵팀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대표팀의 내분도 보였다. 이어지는 시합에서 한국은 단 1승도 거두지 못하는 졸전을 하였다.이란전 0:0 무승부, 호주전 1:2 패, 쿠웨이트전 2:2 무승부, 호주전 0:0 무승부... 이렇게해서 한국팀의 전적은 1승 5무 1패. 승점 7점에 불과했다. 오일 달러로 무장한 이란과 쿠웨이트는 전통 강호 호주와 한국을 3,4위로 밀어놓고 1,2위로 달아나 버렸다.
82년 스웨덴 월드컵
82년 스페인 월드컵 예선에 도전하는 한국의 목표는 이제 호주보다는 중동세 타도에 있었다. 경제력을 바탕으로 성장한 쿠웨이트와 이란은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한국팀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아시아 최고 공격수 차범근이 분데스리가로 떠난 공백에 최순호가 들어와 있었다.한국과 같은조에 속한 나라는 쿠웨이트, 이란, 말레이지아, 태국. 쿠웨이트는 콜롬비아 주심까지 매수하였다.
쿠웨이트는 2번 경기를 가져야 될 것을 1번에 승부를 가리자고 제안했고, 우리 팀은 승낙을 했다. 그러나 운동장에 들어선 순간 이상함을 느낄수가 있었다. 주심을 맡은 콜롬비아의 길베르토는 한국선수가 공만 잡으면 휘슬을 자주 불어 남발했다. 전반전은 0:0. 후반전은 우리가 먼저 기습적인 중거리 슛에 한골을 허용했다.
그때부터 주심은 더 본격적으로 쿠웨이트의 우승을 지키기 위해 뛰기 시작했다. 11명과 12명의 대결. 후반 29분 이강조의 센터링을 이태엽이 받아 헤딩으로 골을 성공시켰다. 그러나 주심은 노골을 선언 했다.
이태엽이 헤딩을 한 순간 골키퍼를 밀었다는게 노골의 이유였다. 그러나 TV에선 이태엽이 헤딩을 한 순간 골키퍼가 이태엽 선수의 5,6 미터나 옆에 서있는 모습을 계속 보여주고 있었다. 결국 항의하던 이태호 선수는 퇴장당하고 우리는 한골을 더 먹어 2:0으로 져서 1차 예선 탈락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86년 멕시코 월드컵
예선전 두 번째 경기에서 말레이지아에게 1:0으로 패배한 한국의 본선진출은 거의 좌절되는 것으로 보였다.
첫게임에서 네팔 약체에게 PK와 자살골로 2:0승리 한국팀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축구협회는 문정식 감독을 해임하고 코치를 담당했던 김정남씨를 감독으로 승격시켜 다음경기를 준비하게 되었다.
84년 8월에 탄생한 월드컵 대표팀은 7개월 동안 5차례 개편을 겪는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그러나 김정남 감독의 용병술이 빛을 보기시작해서 네팔과 말레이지아를 각각 4:0과 2:0으로 격파하고 다시 인도네시아를 2:0과 4:1로 물리쳐 가볍게 예선을 통과했다. 1차예선을 통과한 한국을 기다리는 팀은 일본이었다. 운좋게도 조편성이 그동안 우리를 괴롭혀온 중동국가들을 피할 수 있게 되어있었다. 게다가 김주성과 청소년 축구대회의 스타 김종부를 보강한, 최상의 전력을 구축하고 있는 현실을 지니고 있었기에 본선진출의 확률은 그 어느때보다도 높았다.
85년 10월 26일 최순호와 정용환, 이태호로 이어지는 팀플레이로 일본을 2:1로 제치는데 성공했다. 11월 3일. 일본은 게임메이커 최순호에게 무자비한 태클로 집중 공략을 시도했다. 후반전에 나서는 최순호의 무릎에는 멍자국이 뚜렸했다. 후반 16분 허정무가 발리킥을 하였고 공이 골포스트를 맞고 튕겨나왔다. 그때 백전노장 허정무가 다시 재차 슈팅해 일본의 골네트를 갈랐다. 1:0 승리, 이렇게해서 우리나라는 드디어 36년만에 월드컵에 진출하게 된 것이다.
한국의 '붉은 악마'들은 86년 5월 31일, 드디어 멕시코 고원의 올림피코스타디움에 태극기를 휘날리며 입성했다.
그러나 월드컵 24강중 최약체로 꼽히는 한국의 조편성은 최악이었다. 한국이 편성된 조는 A조, 남미 축구의 대명사 아르헨티나와 유럽의 전통적인 강호 이탈리아, 그리고 동구권의 다크호스 불가리아가 우리와 같이 편성되어 있었다.
우리의 첫상대는 마라도나가 이끄는 무적함대 아르헨티나. 그러나 한국팀에도 분데스리가에서 활약중인 '갈색 폭격기' 차범근이 가세해 있었다.
최순호, 차범근, 허정무, 김주성을 핵으로 하는 한국팀은 6월 2일 경기를 치뤘다. 그러나 86년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으며 축구신동 마라도나가 버티고 있는 아르헨티나를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서 축구천재 마라도나를 전반전에는 김평석이 맡았고, 후반전에는 허정무가 마크했으나 속수무책이었다. 전반 5분 17분 발다노와 루게리가 터뜨린 연속골과 후반 초반 발다노가 넣은 세 번째 골 모두 마라도나의 발끝에서 시작된 작품이었다.
당시 마라도나를 마크했던 허정무 현 올림픽 대표 감독은 "공이 몸에 붙어다니더군요. 드리블, 슈팅, 패스 등 완벽한 선수였습니다"고 회고했다. 속수무책으로 연속으로 3골을 내주며 추락을 시작하는 순간,한국 팀의 주장 박창선이 25m 장거리 포로 아르헨티나의 골문을 갈랐다.월드컵 본선진출사상 첫 골이 터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의 골은 없었다.
3대1.남미 강호 아르헨티나와의 경기 결과 였다.
다음 상대는 불가리아. 아르헨티나와 이탈리아 보다 한 수 아래라는 점에서 최초의 승리를 움켜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팽팽한 0:0의 경기는 오연교 골키퍼의 펀칭미스로 1골을 내주며 흔들렸다. 뒤늦게 막내 김종부의 슛으로 동점을 만들지만 승리를 잡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1:1 무승부. 월드컵 사상 최초로 승점 1점을 기록하는 순간이었지만 아쉬움이 많았던 한판이었다.
마지막 게임은 강호 이탈리아, 그러나 이탈리아에게는 KOREA 징크스가 있었다. 지난 66년 영국 월드컵에서 복병 북한에게 1:0으로 무릎을 꿇었던 기억이 그들에게는 생생히 작용하고 있었다.
경기시작 7분, 1골을 선취한 이탈리아가 방심하는 순간, 최순호의 그림같은 슛이 이탈리아의 골문을 갈랐다. 그러나 이후부터 심판들의 장난은 시작되었다.
난데없이 페널티킥을 선언했고, 한국에만 계속 옐로카드를 남발하기 시작했다. 한국은 위축된 모습을 보이면서 움츠리기시작, 이탈리아는 연속 두골을 뽑으면서 승리를 확정짓기 시작했다. 허정무의 뒤늦은 추가골로 3:2로 석패한 한국의 귀에는 '심판의 편파판정이 이탈리아를 구했다'라는 현지 신문의 기사가 울려퍼졌다.
90년 이탈리아 월드컵
프로축구가 꽃을피운 88년. 대한 축구협회는 88년 프로리그의 우승팀 감독을 월드컵 대표팀의 감독으로 선임하겠다는 선언을 했다. 결국 포철의 이회택 감독과 현대의 김호 감독이 마지막 대결을 펼쳐, 스타감독 이회택이 월드컵 지휘봉을 잡게되었다. 아시아는 총 6개의 조별리그를 거쳐 각조 수위팀이 다시 최종예선을 벌이는 경기방식으로 월드컵 진출팀을 가리기로 했다.
이회택 감독의 휘하에는 멕시코 월드컵 스트라이커 최순호가 있었으며 김주성 대학 최고의 스타 황선홍이 있었다. 89년 10월, 싱가폴에서 1차예선을 6연전승 25득 무실점으로 통과한 한국은 나머지 5개의 강팀들과 대면했다. 사우디아라비아, 중국, 북한, 카타르, 아랍에미리트. 10월 13일 큰 점수차로 승리할 것이라던 카타르는 밀집수비로 무장하고 한국의 공격을 무력화 시키며 무승부로 이끌었다. 0:0 초반에 3연승(카타르, 북한, 중국)을 올려 월드컵 진출을 확정한다는 '이회택의 구상'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북한과 중국, 사우디아라비아를 차례로 1:0, 1:0, 2:0으로 쓰러뜨리는 저력을 보였다. 그리고 2회연속 월드컵에 진출하는 기쁨을 맛보게된다.
예선전적 9승 2무 무패. 득점 29점. 무실점. 90년 월드컵 대표팀이 에선에서 이룩한 성적은 역대 최고의 기록이었다. 이제 아시아에서 월드컵을 넘보는 나라는 우선 한국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 퍼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시아와 세계 축구의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는 순서가 기다리고 있었다.
16강이니 8강이니 하는 가슴 벅찬 소리가 국민들의 입에서 쉽게 나오던 것도 바로 아시아의 예선 성적만을 생각한 '우물안 개구리'였음을 확연하게 증명해주는 월드컵이, 세계의 고도 로마에 있었다. 세계 수준과의 엄청난 차이를 피부로 체험하게 된 것이다.
한국과 벨기에의 경기는 우리나라 축구의 현주소를 극명하게 드러내 주는 한판이었다. 사실 경기 전에 우리가 16강 아니 8강까지 노린다는 희망어린 소문이 떠돌았었다. 어찌보면 황당한 얘기를 한셈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아시아 수준에 있질 않았고, 벨기에는 당시 최고 미드필더 중 하나인 엔조 쉬포가버티고 있었다. 당시 유럽 예선전에서 가장 먼저 티켓을 거머쥘 만큼 강팀이었고, 게다가 1순위 그룹으로 분류 되어서 시드를 받았다. 우리가 상대를 몰라도 너무 몰랐었고, 우물안 개구리의 극치를 보여 주었다고 할 수있다.
나중에 차범근씨도 얘기했지만, 엔조 쉬포를 못잡은 것이 경기내내 질질 끌려 다닌 이유라고 말했다. 스코어는 2:0이었지만, 사실 최인영의 선방만 아니었으면 서너골 더 줄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두 번째 상대인 스페인도 유럽 예선에서 돌풍을 일으켰던 강국이었다. 경기 시작과 함께 변병주, 김주성 등이 골키퍼와 맞서는 기회를 놓친 한국은 이후 스페인의 기동력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전반 23분, 스페인의 미첼이 벗진 발리 슛으로 한국을 유린했다. 1:0. 그러나 전반 43분, 한국의 전광석화같은 동점골이 로마를 뒤흔들었다. 골문에서 30m 떨어진 지점에서 최순호가 얻은 프리킥. 전반 종료 2분을 남긴 마지막 기회. 최순호가 살짝 밀어준 볼을 황보관이 슛팅을 했다. 미사일처럼 뻗어나간 볼은 스페인의 골네트에 그대로 명중했다.
당시 슛팅한 볼의 속도가 114km/h 라고 월드컵본부가 공식 확인한 이 골은 90년 월드컵에서 한국이 기록한 유일한 득점이 되었다. 그러나 후반에 연속 2골을 허용하여 결국 3:1로 패하고 말았다.
마지막 경기는 우루과이. 전통적으로 남미축구에 강점을 보였던 한국은 마지막 희망을 우루과이에 걸었다. 그러나 주심은 언제나 중립을 고수하지 못했다.
0:0으로 끈질긴 접전을 계속하던 후반 25분, 주심은 수비수 윤덕여에게 돌연 퇴장을 선언하였다. 윤덕여는 당시 우루과이의 콜리에게 턱을 받힌 상태.
적반하장격으로 윤덕여가 퇴장을 당한 것이다. 10명이 싸우는 최악의 상황 그러나 끈질긴 수비로 0:0균형을 유지하뎐 때에 엉뚱한 일이 벌어졌다.
공식기록 후반 45분 정확하게 오프사이드 위치에 있던 우루과이의 혼세카가 헤딩으로 골을 넣었다. 그러나 선심은 오프사이드 깃발을 들지 않았다. 그리고 경기는 정말 분통하게 끝나버렸다.
94년 미국 월드컵
86년과 90년 두번연속으로 월드컵 본선무대를 밟아본 한국은 '아시아의 최강'이라는 자만심이 싹트고 있었다. 94년 미국 월드컵에 참가한 아시아국가는 무려 29개국. 모두 6개조로 나눠서 1차예선을 갖고 각조 1위 팀들이 다시 2차예선을 치르는방식이었다. 한국은 그저 '본선무대에서 어떻게 싸울까?'만을 생각하는 어정쩡한 상황에서 1차예선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세계 각지에서는 약팀들이 강팀들을 제압하는 이변? 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었으며, 이는 아시아의 지각변동을 예고하는 조짐이기도 했다.
1차예선은 7승 1무로 그럭저럭 통과했지만 최종예선에 진출한 5개국 팀은 모두가 강팀이었다. 기동력의 북한, 프로리그 출범으로 급성장한 일본, 그리고 막강한 중동의 3총사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이라크. 만만한 상대는 한팀도 없었다. 93년 10월 16일 이란과의 첫경기를 시작한 한국은 박정배, 하석주, 고정운이 골을 성공시켜 이란을 3:0으로 제압했다. 김호감독은 앞으로 2연승(이라크, 사우디)을 거두어 본선진출을 확정짓겠다고 하였다. 이날은 특히 북한이 최강이라고 지목되던 이라크를 성대로 3:2로 통쾌한 역전승을 거두어 '남북한 월드컵 동반 진출'이라는 희망까지 돌기 시작했다.
이라크는 북한에게 역전패를 당해 감독까지 교체하는등 월드컵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대 이라크전에서 우리는 먼저 선취골을 내주고 공격의 활로를 찾지못해 허둥대고 있었다. 그때 김호감독은 서정원을 빼고 노정윤을 투입했다. 노정윤은 그라운드를 누비며 동점골 어시스트와 PK를 얻어냈다. 그래서 2:1. 그러나 종료 3분전 수비의 실수로 동점골을 허용하고 말았다. 그리고 또 사우디와의 경기에서도 1:0으로 리드한 후반종료 5분전 동점골을 허용하고 주저앉았다.
10월 26일 일본과의 4차전. 누구도 일본에게 패배한다는 상상을 하지않았던 우리국민들은 다시한번 좌절감을 맛봐야만 했다. 1:0으로 일본에게 지고만것이다. 6개팀이 4경기씩을 끝낸 상황에서 북한은 승점 2점으로 탈락이 확정되었고 나머지 5개팀은 모두 승점 4점 5점을 기록하여 아무도 본선진출을 장담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사우디와 일본이 승점 5점으로 선두, 한국과 이란 이라크가 승점 4점으로 뒤를 쫓고 있었다. 남은경기는 사우디와 이란, 일본과 이라크, 한국과 북한의 경기였다. 이 세경기는 사전 담합의 소지를 없에기 위해서 같은 시간에 똑같이 시작되었다.
전후반 90분의 경기가 모두끝나는 순간, 각 경기장의 스코어는 우리에게 허탈감을 가져다 주었다. 후반 45분 현재 한국과 북한 3:0 한국 승리, 사우디와 4:2, 일본과 이라크 2:1 승리. 사우디는 승점 7점으로 월드컵 진출을 확정지었고 일본도 7점 한국은 6점으로 탈락이었다. 그런데 아직 일본과 이라크의 경기는 루즈타임이 적용되고 있었고 45분 18초에 이라크는 일본을상대로 동점골을 터트렸다. 이렇게되서 한국(+5)과 일본(+3)의 골득실차로 우리는 월드컵 3회 연속 진출을 어렵게 확정짓게 되었다.
스페인 팀은 지역예선에서 유럽 챔피언팀인 덴마크를 제치고 올라온 팀이었다 경기전 기자회견에서 스페인 팀 감독인 하비에르 클레멘테(Xavier Clemente)는 '5-0으로 이기겠다'란 말을 서슴치 않았고 한국의 김호 감독은 '그럼 우리는 딱 1-0으로 이기겠다'란 말로 응수를 했다. 6월 18일 달라스 코튼 볼 스타디움. 붉은색과 노란색의 물결의 스페인 응원석과 얼굴에 태극무늬와 손에 태극기를 들고 응원하는 한국 응원석 사이로 선수들의 입장을 하면서 경기는 시작된다.
당초 비쇼베츠 기술고문이나 축구전문가는 스페인의 전후반 시작 15분을 조심해라고 했는데 역시 스페인의 초반 공세는 매서웠다. 스페인은 훌렌 게레로(Julen Guerrero)와 페르난도 이에로(Fernando Hierro), 안도니 고이코에체아(Andoni Coicochea)의 미드필더들이 한국의 미들필더보다 개인기가 앞서기 때문에 미드필더 싸움에서 이길것이라고 자신하고 나왔지만 이영진(Lee Young-Jin)과 노정윤(Noh Jung-Yoon), 김주성(Kim Joo-Sung)등의 한국 미드필더들이 조금도 밀리지 않자 스페인 선수들이 당황했다. 더구나 수비엔 박정배(Park Jung-Bae)가 스페인 스트라이커 훌리오 살리나스(Julio Salinas)를 철저히 묶고 있어 당초 스페인 팀의 작전은 미스로 빗나갔다.
한국의 홍명보는 수비를 조율있게 풀어나갔다. 홍명보는 월드컵을 한번 거쳐온 스타답게 루이스 엔리케(Luis Enrique) 에게 볼을 빼앗아 낸뒤 파울에 넘어지자 '연기' 하나로 엔리케에게 경고를 주는데 성공했고 그는 그의 정확한 패스로 고정운(Ko Jung-Woon)의 1:1 찬스를 만들어줄뻔했으나 스페인 스위퍼 미구엘 안겔 나달(Miguel Angel Nadal)이 고정운에게 파울, 프로페셔날 파울로 인해 퇴장을 당하게 한다. 그리고 이영진이 밀어준 볼을 강하게 슛팅한 것이 골키퍼 호세 카니자레스(Jose Canizarez)의 멋있는 선방으로 막혀버렸다.
그 슛팅 하나로 한국팀은 주도권을 잡는데 성공했고 이영진의 패스를 받은 황선홍(Hwang Sun-Hong)이 카니자레스와 1:1 찬스를 맞았으나 카니자레스 키를 넘기지 못해 득점이 실패되는 안타까운 상황이 벌어졌다. 또한 전반 종료 직전엔 이영진의 강슛이 골포스트를 넘어 아쉬운 상황만 계속되었다. 후반전. 한국은 여세를 몰아 초반공세를 강화했다. 노정윤이 측면을 뚫고 패스한것이 고정운이 살짝 방향만 틀어 슛팅했지만 카니자레스의 선방으로 또 무산되었고 스페인의 역습에 말려버렸다.
신홍기(Sin Hong-Ki)가 무리하게 끌고 나가다 루이스 호세 페레즈 카미네로(Luis Jose Perez Caminero)가 패스한 것을 살리나스가 슬쩍 밀어넣어 스페인이 선취골을 빼낸다. 그 골 하나로 선전하던 한국팀의 수비의 조직력이 무너지면서 코이코에체아에게 헤딩슛을 허용 2-0으로 벌어진다. 패배에 익숙해진 탓일까? 그리 당황한 모습을 보이지 않던 한국팀은 김주성을 빼고 서정원(Seo Jung-Won) 홍명보가 게임메이커로 나서면서 다시 재정비를 하고 경기를 진행했고 스페인은 2-0으로 앞서자 살리나스를 빼고 펠리페 미남브레즈(Felipe Minambres)를 투입한다. 그때부터 한국팀의 공격력이 살아나기 시작한다. 하석주가 노정윤와 교체 되어 투입된 뒤 한국팀은 다시 공격력이 살아났다.
서정원이 왼쪽/오른쪽 크게 움직이면서 상대 수비를 교란시켰고 서정원이 수비를 제치고 측면을 돌파한것을 너무 성급히 생각한 나머지 옆그물을 때리는 슛팅을 해 좋은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러던 중 홍명보는 그의 매끄러운 패싱력으로 상대 수비를 교란시켰고 패스한 볼이 하석주에게 갔다. 하석주가 알베르트 페렐(Albert Perrer)을 돌파하려다 실패하고 프리킥을 얻었다.
후반 40분. 이영진이 밀어준 볼을 홍명보가 강하게 슛팅 한볼이 이에로 발을 맞고 골문으로 빨려들었갔고 한국팀은 기사회생의 절호의 기회를 잡는데 성공한다. 골이 들어간지 불과 1분채 못되어 홍명보의 스루패스를 받은 서정원이 다소 볼컨트롤이 부정확해 1:1 찬스를 놓치고 만다. 신홍기의 센터링이 너무 길어 시간을 빼앗겼지만 다시 홍명보의 능수능란한 패싱력으로 한국팀은 계속적인 공격을 퍼붓는다. 홍명보의 스루패스를 받은 황선홍이 다시 홍명보에게 패스, 홍명보가 골문 앞 빈공간으로 치고 들어가는 서정원에게 패스한 것을 서정원이 오른쪽 골 포스트를 보고 침착하게 골로 연결시킴으로써 극적인 2-2 무승부를 연출함과 동시에 한국 축구의 저력을 월드컵에 시선이 모아진 세계인에게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대 볼리비아전에서 우리는 무승부를 함으로서 사실상 16강 진출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우리 선수들이 어떤 각오로 출전했는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전력상으로 수읽기가 가능한 팀이 볼리비아라는 것은 확실했다. 물론 볼리비아도 우리쪽을 보고 그렇게 생각했을 터이다. 황선홍은 득점 찬스에서 여러번 실축함으로서 무승부에 한몫을 했다. 지금은 왼발의 달인이라 불리우는 하석주도 그당시 일대일 찬스를 놓치는 실수를 범한다. 결국 0대0 무승부를 이루고 만다
전대회 우승국 독일. 통일 독일로 인해 더욱더 탄탄해진 전력을 갖추었다고 자인했으나, 개막전 대 볼리비아와의 경기는 그 전력을 의심케 했다. 또 스페인과의 두번째 경기에서도 선취골을 내줬으나 클린스만의 억지슛(?)으로 겨우 비기는데 성공해 전과는 다른 전혀 독일 답지 않은 면모를 보였다.
한편 아시아 최종에선의 우여곡절 끝에 기적적으로 미국땅을 밟은 한국. 아시아 최초로 월드컵 4회 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룩하고 스페인과의 첫 경기에서 또 한번의 기적으로 2:2 동점을 기록하며 86년 대회이후 처음으로 승점 추가에 성공했으나 두 번째 볼리비아와의 경기에서 수차례의 공격시도가 무산되며 아쉽게도 독일과의 힘겨운 승부를 기다려야 했다.
드디어 6월 28일 댈러스 코튼볼 구장. 심판의 호각소리가 울리자마자 한국은 투지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실력차는 투지만으로는 극복하기 어려웠는지 한국팀의 패스가 원래의 위치인 스토퍼에서 게임메이커로 올라온 부흐발트(Guido Buchwald)의 태클에 걸리며 클린스만 (Jurgen Klinsmann)에게 연결되자 한국팀이 요주의 인물로 주목한 헤슬러 (Thomas Hassler)에게 어김없이 패스가 이루어진다.
한국팀의 오른쪽 정진영을 파고든 헤슬러는 몇번의 페인팅 모션끝에 클린스만에게 땅볼패스를 질러주고 클린스만은 독일 최고의 스트라이커 답게 오른발로 찍어 올린 후 터닝슛으로 가볍게 골을 성공시킨다. 스코어 1:0. 너무 순식간에 이루어진 골로 한국팀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다시 또 한국진영 오른쪽에서 드로잉. 이번에도 역시 출발은 헤슬러에게서 나왔다.
헤슬러가 길게 드로잉한 볼. 자칫 잘못 패스된 볼이 될수 있었으나 한국팀 수비수 박정배와의 몸싸움끝에 부흐발트가 페널티박스 모서리에서 넘어지면서 오른발 센터링을 시도한다. 어이없게도 골포스트를 맞고나온 볼은 리들레(Karl-Heintz Riddle)에게 정확히 걸려들었고 리들레는 당연하다는 듯 골로 연결시킨다.
스코어 2:0. 경기사작 내내 당하고만 있던 한국. 전반점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조진호의 강한 땅볼 슛팅이 무산되자 다시 독일의 역습. 패널티 지역의 오른쪽에서 프리킥을 얻은 독일은 한국팀에게 원한이라도 있는듯 이날 경기에서 최고의 기량을 발휘한 헤슬러가 프리킥 센터링. 클린스만의 컨트롤이 정확지 못해 공중에 뜬 볼이되자 박정배는 온 몸을 날려 클린스만의 슛팅을 저지햇다.
그것이 도움이 되었는지 클린스만도 빗맞은 어설픈 슈팅을 했고 당연히 볼은 GK 최인영의 손에 있어야 했으나 어처구니 없게도 골문 안으로 들어갔다.스코어 3:0. 이렇게 전반전이 끝났다.너무나도 무기력한 플레이를 보인 한국. 경기 초반에 꽹과리와 징으로 응원하던 한국 응원단도 사기가 떨어져서 응원 소리는 온데간데 없었다.
많은 골을 내주긴 했으나 어차피 도 아니면 모라고 생각한 한국은 스위퍼인 홍명보를 첫경기인 스페인전 처럼 플레이 메이커로 옮겨놓고 경기를 풀어나갔다. 드디어 한국팀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수비수 박정배가 이번엔 공격가담 중앙선에서 드리블하며 반대편 황선홍에게 롱패스를 했다. 지금까지 원톱 스트라이커 답지않게 한골도 성공시키지 못해 비난을 받던 황선홍은 왼발로 컨트롤, 오른발로 뛰어나온 GK 일그너 (Bodo Illgner)를 넘기며 골을 작렬시켰다. 이후 한국팀의 공격은 매서워 지기 시작했다.
고정운이 반대편으로 센터링 하려던 볼을 중앙에 있던 수비수 콜러가 (Jurgen Kohler)가 헤딩으로 걷어낸다. 볼은 홍명보의 발 앞에갔고 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최고의 스타로 부상했던 독일팀의 주장 마테우스(Lothar Matthaus)와 마주친 홍명보. 페인팅 모션후 오른쪽으로 재낀뒤 슛. 마테우스가 왼발로 저지하려했으나 볼에 닿지않고 볼은 일그너의 손을 스치며 한국팀에게 두번째 골을 선사한다.
이후 한국팀은 전선수가 나와 공격에 가담하지만. 고정운의 강력한 프리킥이 일그너에게 막히고 최종수비수였던 최영일의 슈팅마저 일그너의 선방에 무산돼자 한국팀은 투지반 초조함 반이 교차돼는 듯 했다. 독일팀은 노장선수로 구성된 약점을 여실히 드러내며 전반전 한국이 그랬듯이 제대로 된 공격한번 시도하지 못했다.
GK 최인영까지 이운재로 바꾸며 눈부신 투지로 폭풍처럼 몰아치는 한국의 공격이 일그너의 게속된 선방끝에 경기는 끝나고 한국선수들은 그라운드에 쓰러진다. 깊은 허탈감과 최선을 다했다는 생각 뿐이었다. 관중들의 환호와 박수는 처절한 사투를 벌인 한국팀에게 돌아가고 독일은 2승 1무 승점 7, 득점 5, 실점 3점으로 C조 선두로 16강에 진출하고 한국은 2무 1패 승점 2, 득점 4, 실점 5점으로 예선탈락의 고배를 다시한번 마셨으나 역대 최고성적이라는 격려에 만족하며 다음대회를 기약했다.
98년 프랑스 월드컵
98년 프랑스 월드컵은 그 어느때보다도 국민적 관심과 성원이 컸던 대회였다. '갈색 폭격기' 차범근이 선수가 아닌 감독으로 대표팀을 선두 지휘하였다. 최종 예선전에서 한국은 6승 1무 1패라는 역대 최고의 성적을 거두며 무난히 예선을 통과하였다.
한국은 벨기에,남미의 강호 멕시코, 그리고 오렌지 군단 네덜란드와 함께 E 그룹에 속하게된다. 늘 그래왔었지만 어느한팀 얕잡아볼 팀이 없었다. 그리고 첫 경기는 남미의 강호 멕시코와의 일전이었다.
98년 6월 13일(토) 오후 5시 30분(현지시간) 장소는 프랑스 리용 제를랑 경기장 약 4만명의 관중이 운집된 가운데 사상 첫 16강 진출이라는 기대를 안고 98월드컵 한국의 첫 경기가 시작되었다.
골키퍼 김병지를 비롯해 월드스타 홍명보,서정원,유상철,하석주 등 노련미를 겸비한 역전 노장들이 주축이되어 차근 차근 경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멕시코도 남미의 강호답게 우리의 문전을 위협했다.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전반전 28분경 멕시코 문전 정면에서 20여미터 되는 지점에서 프리킥을 얻게 되었다. 킥커는 왼발의 달인 하석주. 직접 슛을 하기엔 다소 거리가 있었지만 하석주는 강하게 왼발로 직접 슛을 날리고 공은 수비수의 머리를 맞고 골대로 들어간다. 골인이었다. 월드컵 출전 사상 첫 선취득점이었다. 선수들을 비롯하여 국민들은 열광하였다.
그리고 16강에대한 희망은 더 이상 희망이 아니라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고 느꼈다. 그러나 2분이 채 지나지도 않은 시간. 멕시코 진영에서 공격을 하려던 공격수를 하석주 선수가 뒤에서 태클을 하였다. 이번대회부터 빽태클에 대해 엄한 처벌이 내려진다는 FIFA의 강한 결의를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바로 레드 카드가 보여졌다.
선취골에 대한 기쁨이 채 사그라들기도 전에 한명의 선수가 퇴장당하고 10명의 선수로만 경기를 치뤄야했다. 선수들은 점점 움츠려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멕시코의 맹렬한 반격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다행으로 선취골을 지킨채 전반전은 끝났다.
10분간의 휴식 시간에 한국팀은 전열을 가다듬고 16강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를 품고 운동장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11명이 싸우는 축구 경기에서 10명이 그것도 강적을 상대로 경기한다는게 여간 어려운게 아니었다.
그래도 한국 선수들은 맹렬한 멕시코 선수들의 공격을 투지로 막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후반 6분경 동점골을 내주고 만다.
이때부터 한국 선수들은 흔들리기 시작했으며 후반 29분,39분에 멕시코의 영웅 에르난데스에게 연속 골을 주고 만다. 결과는 1대 3. 결국 선취점을 지키지 못한체 1패를 하게된것이다.
멕시코 전에서의 패배를 거울삼아 심기일전의 마음으로 네덜란드전에 임한 한국 선수들. 하지만 네덜란드는 세게적인 스타 베르캄프가 지키고 있는 강호중의 강호였다.
6월 20일(토) 오후 9시(현지시간) 프랑스 마르세이유 벨로드롬 경기장. 유럽의 난폭한 훌리건들과 약 5만 5천여명의 관중이 운집한 가운데 우리선수들은 더이상 물러설수 없다는 마음으로 배수의 진을 치고 전반전을 시작했다. 그러나 변변한 공격한번 해보지 못하고 전반 37분경 네덜란드의 코쿤에게 한점을 내주고 만다. 그리고 5분후 오베르마스에게 또 한점을 허용한다. 결국 전반전은 2대0으로끝나고 만다.
후반전이 시작되고 한국선수들도 간간히 슛팅을 날리면서 만회골의 기회를 노렸으나 오렌지 군단에겐 역부족이었다. 후반 26분. 베르캄프에게 한골을 허용해 3대0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후반 34분 오베르마스가 한국팀 진영 좌측에서 센터링한 공을 반후이동크가 골 에어리어 우측에서 헤딩 슛. 4대0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4분후 또 다시 한골을 내주면서 경기는 종료되었다. 5대0. 참패였다. 근래에 들어와서 가장 큰 점수차로 지고만것이다.
국민들과 언론의 비난이 쏟아졌고 차범근 감독이 월드컵 도중 경질되고마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터지고 만다. 이미 16강 탈락이 확정된 상태. 하지만 이대로 주저 않을순 없었다. 월드컵 본선 1승을 열망하는 국민들의 기대를 가슴에 품고 마지막 경기인 벨기에전에 대비해 전력을 가다듬어야했다.
본선 마지막 경기인 벨기에전.네덜란드전의 참패로 국민들의 원성이 더 없이 높아졌고 이러한 원성은 1승에 대한 갈망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16강은 이미 탈락한 상태이지만 월드컵 첫 승리를 바라는 국민들의 성원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고자 한국팀은 필승을 다짐했다. 98년 6월 25일(목) 오후 4시(현지 시간) 파리 파르크 드 프랭스 경기장. 더 이상 물러 설곳도 물러 설수도 없는 일전의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전반전이 시작되고 한국팀이 채 전열을 가다듬기도 전인 전반 7분 수비맞고 흐른는 볼을 닐리스 선수가 페널티 에어리어 왼쪽에서 오른발로 슛을 날린것이 우리의 골 넷트를 갈랐다. 하지만 선취점을 내주고 급격히 무너져버렸던 이전과는 달리 한국 선수들은 오히려 더 좋은 플레이를 보이기 시작했다.
간간히 득점기회도 있었으나 무산되면서 전반전이 끝나고 말았다. 후반전이 시작되자 우리에게도 더 많은 만회골의 기회가 왔으나 번번히 실패를 하던중 후반 26분경 하석주가 미드필드 왼쪽에서 왼발 프리킥을 찬것을 유상철 선수가 골 에어리어 오른쪽에서 달려들며 오른발 땅볼 슛을 한것이 벨기에의 골 문을 갈라놓았다.
동점골이었다.선수들은 국민들의 성원에 조금이라도 보답했다는 마음에 기뻐했고 국민들 역시 열광했다. 동점골을 허용한 벨기에의 공격은 더욱 거세졌고 이때부터 우리 선수들의 눈물겨운 투혼은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이임생 선수는 수비를 하던도중 눈위가 찢어져서 시야가 가리고 쓰라린 아픔 속에서도 붕대로 머리를 감싸고 경기에 임했으며 발에 쥐가나는 선수들은 침으로 다리에서 피를 뽑아내가며 경기에 대한 투지를 불태웠다. 이런 투지로 벨기에의 파상적인 공격은 막아냈지만 우리도 더 이상의 추가 골은 나오지 않았다.
1대1. 무승부였다. 그리고 염원하던 1승도 얻어내지 못했다. 하지만 국민들과 외신들은 우리 선수들에게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선수들이 보여준 투혼에 경의를 표했다. 이것이야말로 한국 축구의 저력이라고...
아트 사커가 선보였던 98 프랑스 월드컵은 막을 내렸다.
1무 2패. 이것이 이번 98 프랑스 월드컵의 우리 대표 성적이었다.그 어느 월드컵때 보다도 부진한 성적이었다.
그리고 2002년 월드컵... 우리는 4강진출의 신화를 이루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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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증말로먼가를 보여준 경기(욕심이 넘 많은가)
매번 절케만 하면 우승도 가능 할듯
좋은자료 잘보고 갑니다..
흥미로운 자료 잘봅니다.
자세한 홍보 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