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기미년 3월 1일 정오오 유관순 광복군
1919년 기미년 3월 1일 정오오 유관순 광복군
1902년 12월 16일,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
(지금의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 에서 아버지 유중권(柳重權)과
어머니 이소제(李少悌) 사이의 3남 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유관순의 집안은 개신교 신자였던 할아버지 유윤기(柳閏基)와
숙부 유중무(柳重武) 로 인해 일찍이 개신교 집안이 되었고,
유관순도 자연스럽게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였다.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은 사회개혁, 부녀자 계몽, 교육사업 등을 통해
자주독립의 길을 찾고자 흥호학교(興湖學校) 운영에 가담하여
인재 배출을 위해 노력한 것으로 보이며, 자녀 교육에도 적극적이었다.
이러한 노력 때문에 큰 아들 유우석(柳愚錫)은 공주 영명학교에서,
둘째 딸인 유관순은 서울 이화학당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유관순의 고향은 철도가 부설되기 전 서울과 충청남도 공주를
연결하는 교통로로서 선교사들이 집중적으로 개신교를 전파하던 곳이었고,
이에 따라 많은 교회가 생겨나게 되었다.
지령리에도 1901년경 이미 교회가 들어섰으나,
1907년 8월 국채보상운동에 이 교회가 동참하는
등 애국활동을 펼치자, 그 해 11월 일본군의 방화로 소실되었다.
유관순의 일가인 유빈기(柳斌基)는 케이블(E. M. Cable, 한국명 奇怡富)
선교사와 함께 고향에 개신교를 중흥시키고자, 1908년 조인원(趙仁元)
등과 함께 불타버린 지령리 교회를 다시 세웠다.
이후 숙부 유중무가 선교사로 교회를 이끌면서
유관순도 5∼6세를 전후하여 개신교를 접하게 되었 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