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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울림
황 순 원
모든 금기를 깨고 싶어 하는 게 인간의 본성인가 싶다.
성서에는 아담과 하와의 경우를 그만두고라도, 롯의 아내가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된다는 말을 들었으면서 유황불에 타는 소돔과 고모라를 뒤돌아봐서 소금 기둥이 된 이야기가 있고, 그리스 신화에는 열지 말라고 한 상자의 뚜껑을 판도라가 열어서 ‘희망’이라는 애벌레만 남기고 온갖 재앙이 온 세상에 날아 퍼진 이야기가 있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금기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 들라고 하면 누구나 주저 없이 「나무꾼과 선녀」를 들 것이다. 그만큼 이 설화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데다 그 이본도 많아 한국 정신문화 연구원에서 펴낸 『한국 구비문학 대계』 기간본 총59권 속에 수록된 것만도 25편에 이른다.
깊은 산골에 늙은 홀어머니와 단둘이 사는 가난한 나무꾼 청년이 있었다. 하루는 산에서 열심히 나무를 하고 있는데 사슴 한 마리가 숨을 헐떡이며 달려와, 사냥꾼이 쫓아오니 숨겨 달라고 애원한다. 나무꾼은 자기의 커다란 나뭇짐 속에 숨겨 준다. 살아난 사슴이 그 은혜를 갚고자 나무꾼에게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하는 연못을 알려 준다. 나무꾼은 삼형제 선녀 중 가장 예쁜 막내 선녀의 날개옷을 감추고 같이 산다. 그런데 애 셋을 낳을 때까지 날개옷을 내주지 말라고 한 사슴의 말을 어기고 애 둘을 낳았을 때 선녀가 하도 조르는 바람에 날개옷을 내준다. 그러자 선녀는 그 옷을 입고 양쪽 팔에 애 하나씩을 끼고 천상으로 올라가 버린다. 그 뒤로 나무꾼은 하늘만 쳐다보며 탄식하다가 심화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나무꾼의 넋이 수탉이 된다. 그리하여 지금도 수탉은 하늘을 향해 운다. 이것이 「나무꾼과 선녀」의 기본 줄거리다.
이외에도 나무꾼이 처자식을 잃고 서러움을 못 견뎌 하자 예의 사슴이 나타나 나무꾼에게 일러 주어, 날개옷을 잃은 후부터는 선녀들의 목욕물을 길으려 연못에 내려오는 두레박을 타고 천상으로 올라가 처자식을 만나 행복하게 살았다는 걸로 끝나는 것, 또는 천상으로 올라가 장인 혹은 동서들의 몇 가지 시험을 받으나 선녀의 지혜로 이를 해결한 후 행복하게 살았다는 결말들이 있다.
늙은 홀어머니를 지상에 남겨 두고 과연 진정한 행복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하기는 천상에서 살던 나무꾼이 지상의 어머니를 보고 싶다고 하자 선녀가 천마 한 필을 내주며 어머니를 뵙되 절대로 땅에 발을 딛지 말라고 이른다. 나무꾼이 홀어머니가 있는 지상의 오막살이집에 당도하여 자기가 왔다는 걸 알리자 어머니는 아들이 돌아오면 주려고 끓여 놓았던 호박죽 한 그릇을 아들에게
내다 준다. 그런데 죽이 어찌나 뜨거웠던지 그만 천마의 등에 엎질러 깜짝 놀란 천마가 펄쩍 뛰는 바람에 나무꾼은 말에서 떨어지고 천마만 혼자 하늘로 올라가 버린다. 지상에 남겨진 나무꾼은 나중에 죽어서 수탉이 된다.
이 「나무꾼과 선녀」에서 사냥꾼에게 쫓긴 짐승이 사슴이 아니고 누루로 돼 있는 게 있고, 연못에 목욕하러 내려온 선녀도 셋이 아니고 일곱으로 된 것도 있다. 그리고 사슴이 나무꾼에게 애 셋이 아닌 넷을 낳을 때까지 날개옷을 매주지 말라고 이르나 애 셋 나은 후 날개옷을 내주었더니 선녀가 양쪽 팔에 애 하나씩을 끼고 한 애는 등에 업고 천상으로 올라갔다고 한 것도 있다. 그러나 이런 건 별 문제될 게 없다. 문제는 여느 설화들처럼 읽고 난 다음 순순히 넘겨지지 않는 구석이 남는 데에 있다. 우선 나무꾼이 금기를 깬 일을 그의 잘못으로만 돌릴 수 있을는지. 판도라의 경우처럼 호기심에서 유발된 것도 아니다. 롯의 아내의 경우처럼 두고온 재물이 아까워서도 아니다. 애를 둘이나 셋을 낳은 아내를 믿지 않는 남편이 있다면 도리어 그가 이상한 사람이 아닐까. 게다가 나무꾼은 무척 아내를 사랑했다. 그것이 잘못인 양 그려져 있다니. 오히려 애정보다 타산이 앞선 아내 쪽에 잘못이 있는 게 아닐까. 호강하며 살던 하늘나라만 그리워하다가 데리고 날아갈 수 있을 만큼의 애들을 낳았을 때 날개옷을 달라고 남편에게 조르는 따위. 그런 점으로 보아 여자의 일면인 매정스러움을 나타내 보인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이본 중에는 지상에 남았던 나무꾼이 연못에 내려온 두레박을 타고 천상으로 올라갈 때 애들은 아빠가 온다고 좋아라 하는데 아내인 선녀가 두레박줄을 탁 잘라 버리고 마는 대목에선 사뭇 소름이 끼친다. 그리고 또 설화 중 선녀가 나무꾼에게 천마를 내주며 지상에 내려가 어머니를 뵙되 절대로 땅에 발을 딛지 않도록 하라는 주의를 주었으나 호박죽으로 인해 나무꾼은 땅에 떨어지고 말만 혼자 천상으로 올라간다는 것도 생각해 봐야 할 대문이다. 왜냐하면 오래간만에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 온 아들이 말 위에 앉은 채로 어머니와 대면한다는 건 우리나라 예법으론 말이 안 되는데다가 어머니가 주신 뜨거운 호박죽 때문에 말 혼자 천상으로 올라가게 되는 건 결국 자식을 위하려던 어머니의 애정이 결과적으로 자식을 불행하게 만든다는 게 돼 우리의 마음에 가시를 남겨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이본에 의하면, 어머니가 보고 싶다는 나무꾼에게 선녀가 천마를 내주며 지상에 내려가 어머니를 뵙되 말이 세 번 울기 전에 도로 타야지 그렇지 않으면 다시 천상으로 올 수 없다고 일렀으나 시간이 지체돼 말만 천상으로 올라간 것으로 돼 있다. 이것도 어머니가 아들을 위해 점심을 짓는 동안 말이 한 번 울고 두 번 울고 하여 나무꾼은 점심이고 뭐고 말을 놓쳐서는 안 된다고 급히 뛰쳐나갔으나 말이 세 번째 울음을 울고 하늘로 올라가는 걸로 돼 있는데, 이것은 그렇게 말고 나무꾼 면에서 일부러 말을 놓친 걸로 해야 할 것이다. 오래간만에 뵙는 홀어머님이 그동안 더 늙으셔서 이제는 운신조차 힘들어하시니 이 이상 혼자 계시게 할 수는 없다, 천상엔 아내와 아이들이 함께 있으니 외롭지들 않을 거다, 이제부터라도 나는 어머니 곁에 있어야겠다. 이래서 말이 세 번 우는 걸 듣고도 안 타 야지, 그렇지 않고, 어서 말을 타야 할 텐데, 기왕에 어머님은 젊어서 홀몸이 되셔서 외로움에는 익숙해지셨으니 괜찮다, 어서 처자
식이 있는 데로 가야지, 천마를 놓치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큰일이고말고. 그래 허둥허둥 밖으로 달려 나가 보니 천마가 세 번째 울묵을 울고 하늘로 날아오르기 시작한 때여서, 이봐 천마, 잠깐만 게 서 있어, 잠깐만 제 서 있으라니까, 이 불쌍한 나를 여기 놔두고 가면 어떡한단 말이냐, 어이 천마…… 이 지경에 이르면 우리의 주인공은 참말로 불쌍한 인간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건 어버이에게 효도해야 한다는 윤리성을 놓고 하는 말이 결코 아니다. 인간으로서의 한 점 양심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리고 나무꾼이 늙은 홀어머니와 함께 지상에 남아야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나중 자기도 죽어 넋이 수탉이 돼 하늘을 향해 운다는 뜻이 살 게 아닌가.
「나무꾼과 선녀」가 아닌 「수탉의 유래」라는 제목이 붙은 이본이 있을 정도로 끝에 가서는 나무꾼이 수탉이 된다는 것이 내용의 거의 전부다. 그리고 나무꾼이 홀어머니 대신 고모 밑에서 자라게 한 것도 있는데, 여기서는 나무꾼이 수탉이 된다는 것과 고모를 관련시켜 놓고 있다. 꼬꼬꼬 하는 수탉의 울음소리와 고모라는 말을 연관시켜, 고모 때문에 천마를 놓쳐 처자식한테 못 간 서러움을 수탉이 되어 호소한다는 걸로 돼 있다. 이 대문도 순순히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고모 때문에, 누구 때문에, 하는 것은 우리 주인공의 사람 됨됨이를 격하시키기 때문이다. 수탉 울움소리 얘기가 나온 김에 하는 말인데, 수탉의 울음소리는 나라에 따라 각각 다르다. 우리는 꼬끼오, 중국에선 우우―우ㅡ, 일본에선 고께 곡고오, 영미에선 코코두둘드. 그런데 나무꾼이 수탉이 되어 운 울음은 꼬끼오가 아니고 곧깨오가 아니었나 싶다. 다시 말하면 곧 깨어나라는 뜻을 지니고 있었을 것만 같다. 새벽녘에 울 때는 물론 잠을 곧 깨라는 뜻이 담겨져 있지만, 좀 더 넓게 인생의 허망함에서 곧 깨어나라는 뜻도 곁들어져 있었을 것만 같다. 곧깨오, 곧깨오.
이것저것 금기 설화에 관심을 좀 두어 오면서 살폈더니 우선 이웃 나라 중국과 일본의 것으로는 「담생(談生)」이라는 설화와 「우라시 마 다로」 라는 설화가 인상에 남는다.
「담생」은 중국 작가 노신이 편한 『고소설구침(古小說鉤沈)』에 실려 있는 위나라 때의 이야기로, 젊은 중국 문학자 ㄱ이 번역하여 제공해 준 것인데 길지 않아 전문을 그대로 옮긴다.
담생은 나이 사십이 되도록 장가를 들지 못했다. 어느 날 밤이 이슥하여 나이 15 ∼6세쯤 돼 보이는 낭자가 찾아왔는데 용모와 차림이 아름다워 이 세상에는 견줄 만한 상대가 없을 정도였다. 그네는 담생에게 부부가 되고 싶다고 하면서, “저는 다른 사람과 달라 밝은 불빛에 비추면 안 됩니다. 다만 3년 후에는 비춰 보셔도 좋습니다” 라고 했다.
그들은 부부가 되어 아들 하나를 낳았고 이럭저럭 2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담생이 참지를 못하고 그네가 잠든 틈을 타서 가만히 불을 밝혀 비추어 보았다. 그네의 허리 윗부분은 다른 사람과 다를 바 없었으나 허리 아래로는 바짝 마른 해골이었다. 그네가 잠이 깨어 말하기를, “당신은 저를 버렸습니다. 온전한 사람의 몸을 갖출 날이 멀지 않았는데 어찌 나머지 한 해를 참지 못하고 불빛을 비추었습니까?” 라고 했다.
담생은 미안하다고 사과하였지만 그네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당신과의 인연은 영원히 끝났지만 아기가 걱정이군요. 가난을 이기지 못할 것이 오니 잠시 저를 따라오시면 드릴 것이 있습니다.”
담생이 하는 수 없이 그네를 따라 가니 한 웅장한 저택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저택의 규모는 광대하고 가구들은 화려했다. 그네는 거기서 구술로 수놓인 옷을 건네주면서, “이것이면 먹고살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는 담생의 옷 한 자락을 찢어 지니고서 어디론가 가버렸다.
뒤에 담생은 이 구슬 옷을 시장에 내다 팔기에 이르고, 수양 왕궁에서 이를 천만금에 사게 된다. 수양왕이 이 옷을 보고는, “이것은 죽은 공주에게 입혀 보낸 옷이다. 그놈이 묘를 판 게 틀림없다” 하고 담생을 잡아다가 신문했다.
담생은 사실대로 말했다. 그러나 왕은 믿으려 하지 않았다. 공주의 무덤에 가서 살펴보니 도굴된 흔적은 없었다. 그래도 믿기지 않아 파본즉 거기 관 뚜껑 아래에 담생의 찢어진 옷자락이 있었다.
담생의 아들을 불러다 보았더니 죽은 공주와 꼭 닮아 있었다. 그제야 왕은 이 사실을 믿게 되었다. 즉시 담생을 불러 구슬 옷을 돌려주고 부마로 삼았으며 조정에 알려 아들에게는 ‘시중’의 벼슬을 주었다.
전체적으로 수식이 없고 담담하게 서술된 것이 이야기에 진실미를 주고 있다. 더구나 담생의 처지를 말할 때 사십이 되도록 장가를 들지 못했다는 것 외에 다른 설명을 하지 않다가 나중에 가서 가난하다는 걸 자연스레 알리는 것 또한 고담한 맛이 있어 좋다. 그리고 설화에서 나타난 여성의 본성 중 하나인 부드럽고 따뜻한 심성이 우리의 마음을 감싸 준다는 점도 높이 사고 싶다. 남편이 금기를 깨뜨려 자기의 소망이 무너졌지만 원망하는 기색 없이 오히려 후에 가난을 이기지 못할 것을 염려해 남편에게 구슬옷을 전하는 행위는 「나무꾼과 선녀」에서 선녀의 매몰찬 처사에 비해 얼마나 아름답고 갸륵한가. 우리나라 여성과 중국 여성을 비교하는 말로 생각지 말기를 바란다. 선녀는 실제 이 세상 여성이 아니므로 비교의 대상으로 내세운다는 것도 무리다. 그렇다 해도 그런 선녀를 만들어 낸 건 대체 어느 나라 누구인가. 더 얘기를 말자. 그리고 「나무꾼과 선녀」의 이본 중에는 선녀의 지혜로 인해 만난을 물리치고 행복하게 살았다고 끝맺는 것도 있음을 기억하도록 하자. 그리고 미색에 머리가 좋으니 박정할 수도 있다는 걸로 위안을 삼자.
끝으로 한 가지 흥미로운 건 노신 같은 리얼리스트가 자기가 편한 소설집 속에 이러한 황당무계하다고 할 만한 비현실적인 글을 넣었다는 점이다. 하기는 진정 한 작가의 시야란 다양한 법이니까.
한편 일본의 「우라시마 다로」는 일본 작가 다자이 오사무가 종횡무진 상상력을 구사하여 완전히 자기의 창작물로 다시 만들다시피 한 것인데, 길어서 아쉬운 대로 줄거리만 적는다.
한 궁벽진 갯마을에 우라시마 다로라는 젊은이가 살았다. 집안은 부유한 편이었다. 어느 날 우라시마는 해변을 거닐다가 동네 장난꾸러기 애들이 커다란 거북이를 마구 괴롭히는 결 보고 가엾게 여겨 돈을 주고 사서 바다에 놓아주었다. 얼마 후 그날도 우라시마가 해변을 거닐고 있으려니까 누가 ‘도련님, 도련님’ 하고 불러 그쪽을 보니 예의 거북이였다. 우라시마는 거북이에게, 이러다가 또 애들한테 붙들리면 어떡하느냐, 이번에 붙들리면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니 어서 집으로 돌아가라고 이른다. 그러자 거북이는 도련님을 만나려고 매일같이 여기서 기다렸다면서 자기 등에 올라타라는 것이다. 우라시마가 무슨 일인지 몰라 머뭇거리고 있으려니까 거북이는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 용궁으로 모시려는 것이니 어서 등에 올라타라고 한다. 우라시마는 거북이가 하라는 대로 잔등에 올라탄다. 그리고 천길만길 바다 밑의 진주로 산이 이루어진 곳을 지나 용궁에 다다른다. 이윽고 우라시마는 거북이와 함께 용궁 정전 계단 앞에 선다. 계단이라지만 조그만 구술을 무수히 깔아 놓아서 느리게 경사진 고개와 비슷하게 돼 있다. 우라시마는 그 구슬을 보고 거북이에게 이것도 진주냐고 묻는다. 거북이는 민망스러운 듯 우라시마를 쳐다보며, 구슬을 보면 뭐든 진주로 생각하는 건 곤란하다, 진주는 내버려져 저렇듯 산을 이루고 있지 않느냐, 그러지 말고 그 구슬을 집어 맛을 보라고 한다. 몇 알 집어 입에 넣자 맛이 희한했다. 거북이가 바다의 앵두라고 일러 준다. 그리고 이것을 먹으면 3백 년간 늙지 않는다고 했다. 그때 공주가 영접을 나온다. 우라시마에게는 용궁에서의 무한한 자유가 허용된다. 바다의 앵두, 그 앵두의 꽃으로 된 술, 몇만 년 묵은 조류의 진미, 무엇이든 먹고 싶은 대로 먹으며, 공주가 뜯는 거문고 소리를 들으며, 고기들의 춤을 바라보며, 공주의 방에 가기도 하며, 날이 가는 줄 모르게 며칠을 보낸다. 그러는 동안 차츰 우라시마는 그곳 생활에 싫증이 난다. 무한한 자유와 허용이 역겨워졌는지도 모른다. 뭍에서의 생활이 그리워졌다. 울며불며 아둥바둥 살아가는 뭍의 사람들이 다시없이 정겹고 아름답게 생각됐다. 우라시마는 공주에게 안녕을 고했다. 이 갑작스러운 작별 인사를 공주는 말없는 미소로써 허용했다. 공주는 정전 계단까지 배웅을 하고는 잠자코 조가비 하나를 우라시마에게 건네주었다. 영롱한 오색 빛을 발하는, 꼭 다물어진 조가비였다. 돌아오는 길에 거북이는 잔등에 탄 우라시마에게 그 조가비는 열어 보지 않는 게 좋을 거라는 말을 했다. 우라시마도 그냥 집안의 보물로 보존하겠다고 말한다. 해변가에 닿자 우라시마는 거북이와 작별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서둘러 자기 집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본래의 동네도 자기네 집도 온데간데없었다. 사람의 그림자도 없고 길도 없고 황량한 들판에 선 소나무 가지 울리는 바람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여기서 우라시마는 한참 어찌할 바를 몰라 하다가 마침내 용궁에서 선물로 받은 조가비를 연다. 조가비 속에서 폴싹 흰 연기가 솟는다. 그와 함께 우라시마는 5백 살의 백발노인이 돼버린다.
「우라시마 다로」 이야기는 이걸로 끝인데, 작가 다자이 오사무는 끄트머리에 이렇게 적고 있다. ‘세월은 인간의 구원이다, 망각은 인간의 구원이다’ 라고.
자연을 어기고 오래 산다는 것은 비극이다. 사실 몇백 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 그동안 황폐해진 고향을 눈앞에 하고 자기만 새파란 청년 그대로 남는다면 이보다 더 처량한 신세가 어디 있으랴. 젊음도 그럴 만한 때의 젊음인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세월이 약이라는 말이 있다.
실은 나는 우리나라 현대 금기 설화를 하나 쓰려고 하면서 여기까지 에돌아왔다. 오래전부터 생각해 온 작품이다.
작품의 주인공 강 노인은 나와 같이 서울 변두리의 가까운 주택가에 살고 있다. 내가 이 동네에 산 지는 2대째 되지만 강 노인은 1년 남짓 전에 이 동네로 이사를 왔다. 나이는 같이 일흔두 살로 나보다 강 노인이 달로 넉 달 위였다. 그는 자그마한 키에, 숱이 많은 머리가 온통 새하얀 데 비해 둥그스름한 얼굴은 홍안인 것이 건강해 보였다. 큰아들네와 살고 있는 나와는 달리 강 노인은 은행원인 둘째 아들네와 살고 있다.
우리 두 사람의 집은 좀 떨어져 있었으나 점심과 저녁 사이 때 쯤한 시각에 만나곤 한다. 우리 집 근처에 미끄럼대밖에 없는 어린이 놀이터 비슷한 공터가 있어서 추운 겨울날과 궂은날을 빼고는 거기 걸상에서 매일같이 만나는 것이다. 계절에 따라 햇볕 바른 데로, 혹은 그늘진 데로 걸상을 옮겨 가면서. 그리고 만나서는 이런저런 세상 얘기를 하는 때도 있지만 별 할 일 없이 앉아 있는 수가 많았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 강 노인이 사흘째 공터에 나오지 않았다. 그제 오전 엉뚱한 곳에서 강 노인을 본 후로 어제도 오늘도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그제 오전 나는 조금씩 더디 가는 손목시계를 고치려고 큰길에 있는 시계포를 찾아가다가 큰길 건너편 노점상들 틈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강 노인을 보았다. 늘 데리고 다니는 바둑이와 함께였는데 강 노인은 먼발치로 나와 눈이 마주치 자 고개를 돌려 버리는 것이다. 대체 강 노인이 왜 저기 앉아 있으며 또 왜 나를 외면하는 것일까 싶었으나 나중 돌아오는 길에 알아보자 하고 시계포에 들렀다가 돌아오면서 보니 강 노인은 앉았던 자리에 없었다.
강 노인은 다음 날도 안 나타나고 닷새 만인 그 다음다음 날에야 나타났다. 항상 데리고 다니던 바둑이 없이 혼자였다.
어찌된 일이냐고 바라보는 나에게 강 노인은 상기된 얼굴의 땀을 손수건으로 연방 닦아 내며, “좀 전에 바둑일 팔아 버렸쉐다. 아이네들이 아파트루 이사 가게 됐시요.”
그러니까 며칠 전 강 노인이 큰 거리 길가에 바둑이와 함께 앉아 있었던 건 개를 팔기 위해서였구나. 나는 담배를 피워 물면서,
“이사를 곧 가실 모양이 군요?”
“어디요. 지금 있는 집을 내놨으니끼니 그게 팔레야디요.”
그렇다면 언제 아파트로 이사 가게 될지 모르는 터에 바둑이를 먼저 판 셈이다. 바둑이는 잡견이긴 했으나 크지 않은 덩치에 빠딱하니 선 귀 끝이 조금 밖으로 꺾인 것하며, 약간 튀어나온 동그란 눈하며, 뾰족한 주둥이하며 귀여웠다. 댓 달 전 아들이 아는 집에서 얻어 왔는데 개를 조르던 손자들보다 더 많이 강 노인 차지가 되어 왔던 개다. 강 노인이 이 공터로 올 때는 바둑이를 그림자처럼 데리고 나와 걸상에 앉아 있을 때도 버릇처럼 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고, 바둑이 편에서도 강 노인의 손을 핥고 꼬리를 치고 했었다. 그러던 바둑이 없이 혼자 앉아 있는 강 노인의 모습이 몹시 쓸쓸해 보였다.
강 노인은 애들이 미끄러져 내리는 미끄럼대 쪽으로 눈을 주고 있었으나 딴 생각을 하고 있었던 듯, “진짜루 기를 님잘 찾느라구 메칠 걸랬디요. 어뜬 아주마니한테 팔았는데 믿어두 될 것 같에요. 개장국집으룬 안 갔시요.”
그리고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내가 뵈디 않을 때꺼지 보재기루 개 눈을 가리라구 했디요.”
그 심중이 오죽했으랴 싶어 강 노인의 생각을 딴 데로 돌릴 얘기가 뭐 없을까 하고 있는데, “넝감님, 우리 가서 술이나 한잔합세다” 하고 강 노인이 걸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나는 어리둥절했다. 내가 담배는 피워도 술은 못 마시기 때문이라기보다 강 노인은 술 담배를 할 줄 모르는 걸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어찌 됐건 지금 뭔가 마음이 언짢아 있는 강 노인의 말을 거역하기가 안 되어 따라 일어섰다.
두부를 안주로 소주를 마셨다. 내가 술 한 잔을 받아 놓고 담배 한 대를 피우는 동안 강 노인은 연거푸 잔을 비웠다. 나는 강 노인의 술 마시는 품이 너무나 익숙한 데 의외다 싶어 하면서 실상은 술을 잘하면서도 안 마셨다는 걸 알았다.
강 노인은 술잔을 비우면서 내 담뱃갑에서 담배를 뽑아 피우는 것이었는데 그 피우는 솜씨 또한 조금도 어색 하지가 않았다.
탁자 위 한곳에 눈을 준 채 강 노인이 불쑥, “내 살아생전에 정말 고향 땅을 한번 밟게 되갔쉐까?” 하고 뜻밖의 얘기를 꺼냈으나 나는 곧 얼마 전부터 열리고 있는 남북 적십자 회담을 두고 하는 말이라는 걸 알아차리고는, “글쎄 두구 봐야겠지만 회담이 제대루 돼서 노형두 고향에 가게 된다면 을마나 좋겠수.”
강 노인은 6·25 전쟁 때 평남 안주에서 단신으로 월남해 왔다. 월남할 때의 갖가지 고생한 얘기는 몇 번 한 적이 있으면서도 고향 가족 상황에 대해서는 전혀 운을 떼지 않았다. 그야말로 무슨 금기라도 되듯이.
그런데 이날 강 노인은 술기운이 돌자 여전히 심한 평안도 사투리로, “글쎄 눅이오 때 말이웨다, 메칠만 디내믄 고향 집으루 돌아갈 줄 알았는데 그게 어림 반푼에치두 안 되는 생각이었디 뭡네까” 하고는 크게 한숨을 쉬고 나더니, “지금들 살았대믄 올해루 마누란 니른 살, 아들놈은 마흔야들, 그리고 그 밑으루 여슷 살 아래인 딸이 있디요. 아매 걔들이 살아 있대믄 손주 녀석들두 생겠
갔디요” 라고 하였다.
강 노인이 며칠만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비켜났다가 고향으로 돌아가리라 생각했던 것은 어이없는 판단이어서 그만 부산까지 밀려 내려가게 되었고, 그러고는 남북을 넘나들 엄두도 못 낼 정황에 부딪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고향 가족과의 이별을 굳힐 수 없었다. 홀몸으로 불편을 겪으면서도 참고 견뎠다. 1 년, 그리고 또 1년…….
“말이 3∼4년이디 한창 나이에 홀애비루 산다는 게 생각터럼 쉽디가 않습데 다레.”
결국 강 노인은 주위에서 권하는 대로 지금의 마누라와 짝을 짓고 가정을 이루었다. 그러고는 아무리 안타까워해 봤자 소용없는 북의 가족을 잊어버리기로 작심했다. 그러지 않고는 그쪽이나 이쪽이나 제대로 생활을 영위해 나갈 수가 없다고 나름의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그러고는 꿈속에서라도 북의 가족을 되살려선 안 된다고 강 노인은 굳은 맹세로 오늘날까지 살아왔던 것이다.
“생판 타향에 와서 막노동이구 머구 안 해본 게 없쉐다. 그러면서두 헹펜 닿는 대루 술두 마시구 담배두 피웠디요. 한데…….”
강 노인은 혀가 좀 잘 안 돌아가는 소리로 이어서, “넝감님은 어떤디 모르디만 자식한테 일일이 손을 벌레야 하는 용돈…… 그거 도무디 펜티 않아 못 겐디갔습데다. 그래 술 담뱉 끊었댔디요. ……근데 요즘 와서 술 담배 생각이 간절한 걸 어캅네까. 바둑이 놈두 이 늙은이 마음을 알아줄 거웨다” 라고 중얼거렸다.
다음 날부터 강 노인은 점심과 저녁 사이쯤 한 시각에 공터로 올 때 이미 술을 걸치고 오곤 했다. 그리고 담배도 피웠다. 제일 염가한(싼 값의) 환희였다.
이렇게 강 노인은 지금까지 지켜 온 금기를 깨면서 힘들게 보존해 왔던 안정을 삽시간에 잃고 만 것이다.
나는 장애물 경주를 생각했다. 한 사내가 달리고 있었다. 자기 앞에 운명처럼 놓인 장애물들을 넘고 물웅덩이를 건너 달렸었다. 헐떡이며 달렸다. 얼마나 많은 장애물들을 넘고 물웅덩이를 건넜을까. 사내는 자기가 그것들을 통과하여 용케 예까지 왔구나 하고 마음을 놓는 참에 뜻밖의 장애물이 앞을 막아서는 것이었다. 사내는 잠시 주춤했다. 그러고는 그 장애물에 도전하듯 안간힘을 써
한 발을 내뻗치며 몸을 날렸다.
그렇데 어느 날, 내가 나가고 있는 대학 영문과 ㅅ교수가 내게 보여 줄 게 있다고 하여 연구실에 들렀더니 영자 신문 「코리아 헤럴드」를 내밀며 한곳을 짚어 보였다. 연합통신 제공의 갸름한 박스 기사였다.
사할린에서의 죽음― 소련령 사할린에서 보낸 사진은 그곳 한국계 거주자인 고 김두천 씨(71)가 슬픔에 잠긴 가족과 친척들에 둘러싸여 관 속에 누워 있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그 섬에 살고 있는 김씨의 딸 김복리(33) 씨의 편지에 의하면 금년 2월 3일에 아버지가 헤어진 지 약 40년이 지난 후 경상북도 청송군에 살고 있는 전부인 박상혜 (69) 씨와 아들 진하(47)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은 후 심장 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라고 한다.
기사 맨 위에 흑백 사진이 있었다. 하관하기 전인 듯 뚜껑이 열려 있는 관 속에 흰 시트로 덮인 시신이 얼굴 부분만 내놓고 있고, 관 둘레에 외투와 방한모 차림의, 남녀를 딱히 분간키 힘든 사람들 일고여덟이 슬픈 몸가짐으로 서 있다. 그리고 이 사진 밑에, 그러니까 이 사진과 기사 사이에 김 씨의 사할린 딸의 편지가 사진으로 축소되어 실려 있었다. 그나마 신문의 지면 관계로 편지의 양쪽 끝 부분이 좀 잘려 있었으나 맞춤법과 띄어쓰기가 별로 틀리지 않은 편지는 기사의 내용을 입증하기에 충분했다.
아버지가 한국에서 편지를 받으무로써 심장이 좋지 못하여서…… 값의 2월 3일 저녁 8시 30분에 운명했음니다…… 유감스러운 말씀이지만 한국 친척들의 편지가 아니 였더 라면…… 아버지도 생존하였을 것입니다…….
국문자 신문에는 보도되지 않은, 「코리아 헤럴드」의 이 기사 속 김씨가 사할린에 살게 된 까닭이 무얼까.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패하기 전 사할린의 남반부를 차지하여 가라후로라고 불렀을 때 일제에 의하여 노무자로 끌려간 게 아닐까. 십중팔구 그랬을 것만 같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 고국에 돌아올 수 없는 신세가 되어 거기서 재혼을 한 것이리라. 소생이 몇이나 되는지는 몰라도 기사에 보면 33세의 딸이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이런 김씨가 사할린에 살고 있다는 걸 어떤 경로를 통해 고국에 있는 본부인과 아들이 알게 됐는지는 모르나, 그리고 어떤 내용의 편지를 사할린에 보냈는지도 모르나(기사의 내용과 함께 장례 때 사진이며 김씨의 사할린 딸의 편지를 연합통신이 어떻게 입수했는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고국에 있는 가족의 편지를 받고 김씨는 그 충격으로 심장마비를 일으켜 숨졌다. 그 충격이 어떤 종류의 것이었을까. 나는 심한 착잡감에 사로잡혔다. 아, 고국에 처자식이 살아 있다니 이 얼마나 기쁜 소식이냐, 어서 속히 만나보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은가, 하는 벅찬 희열을 수반한 감격의 충격이었을까. 아니면 이미 과거는 좋든 나쁘든 흘러가 버린 대로 넘겨 버리고 현재의 삶을 조용히 살다가 생을 마치려던 차에 별안간 고국의 가족이 나타나다니 다 늙은 지금에 와서 어쩌자는 거냐, 하는 오히려 고통을 수반한 충격이었을까. 혹은 둘 다 합쳐진 충격 이었을까.
ㅅ교수가 내게 「코리아 헤럴드」의 기사를 보여 준 것은 나 자신이 실향민인 데다가 앞으로 무슨 글을 쓸 때 재료로 삼으라는 뜻에서일 것이다. 그런데 이 기사는 지금 내가 구상하고 있는 강 노인 이야기에 즉각 영향을 끼쳤다. 기사 속의 김씨와 강 노인이 본래 가족과 헤어지게 된 연유는 각각 달랐으나, 김씨가 40년 동안 고국의 가족과 소식 한 번 없이 지낸 것과 강 노인의 35년간의 그것은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김씨는 고국 가족의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심장 마비로 타계했다. 이것은 내가 구상하고 있는 강 노인의 이야기 발전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할 뿐 아니라 도리어 기사 속의 김씨를 생각할수록 강 노인의 앞날이 난감해지기만 했다.
그러잖아도 매일같이 보는 강 노인은 하루가 다르게 초췌해져 갔다. 머리는 새하얗지만 홍안이었던 둥그스름한 얼굴은 꺼칠하게 생기를 잃고, 술 탓인지 눈에 핏발이 서 있었다. 고민에 빠진 티가 역력했다.
그날도 강 노인의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그러나 술을 먹은 기색은 없었다.
나는 담배를 피워 물면서 한 가치 권했으나 강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신관이 좋잖아 뵈는데 괜찮으시우?”
강 노인이 고개를 조그맣게 끄덕였다.
내가 담배를 댓 모금 빨았을 때 강 노인이 처진 목소리로, “술루두 담배루두 안 되누만요. 이거야 어디 맘이 엔띠 않아 살갔쉐까. 글쎄 남북이 터딘대두 난 지금터럼 살라구 했거등요. 이제 고향에 가서 멀합네까. 넷날 식구들을 만나 멀합네까. 기왕 이 디경이 된 것, 그쪽 식구들은 그쪽 식구들대루 살구, 이쪽 식구들은 이쪽 식구들대루 살믄 되디 않갔습네까. 그게 서루 펜하디 않갔습네까. 그래서 귀 틀어막구 눈 감구 입 봉하구서 이날 이때꺼정 맘 잡구 살아왔댔는데…….”
잠시 숨을 돌리고 나서, “모르갔시요. 정말 모르갔시요. 어땠다구 설움은 또 북받치는 겁네까. 알다가두 모르갔시요 정말.”
강 노인은 무엇을 지그시 누르듯 온몸을 우그리고 있다가 등을 한번 들썩했는가 하자 핏발 선 눈에 물기가 핑 돌았다. 강 노인이 얼른 고개를 한옆으로 꺾었다. 흐느낌 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나 어깨가 자잘하게 흔들렸다.
나는 위로의 말을 잃고 있었다. 위로의 말을 한댔자 강 노인의 설움의 두께를 뚫고 들어갈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 아이들이 자기가 먼저 미끄럼을 타겠다고 실랑이를 하는 미끄럼대로 눈길을 돌리고 말았다.
여기서 나는 작품을 일단 보류키로 하고 밀쳐 두는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강 노인을 어디로 끌고 갈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생각지도 않았던 사실을 발견하고 가슴이 뛰었다. 오려 가지고 온 「코리아 헤럴드」의 기사를 들여다보다가 김씨의 사할린 딸의 편지 중 한곳에 눈이 확 빨려 들어갔던 것이다.
묘지는 좋은 자리로 하였으며…… 방문하여 주십시오.
한두 번 읽은 것도 아닌데 이결 무심히 지나쳐 버렸다니! 그저 ‘한국 친척들의 편지가 아니였더라면…… 아버지도 생존하였을 것입니다’의, 뭔가 원망과 그늘이 어려 있다는 데에만 의식이 고착돼 있었던 것이다. 이건 이미 나 자신이 분단에 길들여지고 어느 틈엔가 거기 안주해 버린 탓이 아닐까.
결국 ‘묘지는 좋은 자리로 하였으며…… 방문하여 주십시오’는 ‘한국 친척들의 편지가 아니였더라면…… 아버지도 생존하였을 것입니다’가 드리운 원망의 그늘을 헤집고 한 발 빛 속으로 내딛고 있는 것이다. 물론 김씨의 한국 가족들의 사할린 방문이 이루어질 날이 있을지 없을지, 있으면 언제쯤이 될지 그건 아무도 모른다. 다만 무슨 일이든 마음가짐이 우선돼야 한다고 볼 때 ‘묘지는 좋은 자리로 하였으며…… 방문하여 주십시오’는 결코 쉬운 일은 아닐지라도 언제고 귀중한 출발의 한 기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한국에 있는 아들의 나이는 마흔일곱이요, 사할린에 있는 딸은 서른셋이 아닌가. 일흔한 살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 나이를 생각하면 얼마든지 여유가 있다.
그러다가 문득 나는 깨달아지는 게 있었다. ‘한국 친척들의 편지가 아니였더라면…… 아버지도 생존하였을 것입니다’도 원망으로만 볼 게 아니라 밑바닥에 애정을 바탕으로 한 투정의 말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고는 ‘묘지는 좋은 자리로 하였으며…… 방문하여 주십시오’와의 감정이 이어지지 않는 것이다. 인간 감정의 헤아릴 길 없는 내밀스러움. 나는 보류해 놓고 있는 강 노인 주인공의 금기 설화를 이끌고 나가는 데에 하나의 암시를 얻고 있었다.
-끝-
2016년 11월 4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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