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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화의 소산물이 잘 보존된 대구근대문화골목 투어(Tour) 후기
2014. 12. 16 다른 고장의 문화유적 답사를 가면서도 대구에 있는 문화유적 답사를 하지 못한 나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등하불명(燈下不明)란 말이 있듯이 대구 시내 가까운 거리에 있는 근대문화유산을 제대로 알지 못하니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다. 말로는 대구에 <근대문화골목>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실제 그 곳을 답사하기는 오늘이 처음이다.
동산기독병원과 동산근처
우리나라 근대화(近代化)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선교사(宣敎師)와 교회(敎會)의 활동을 무시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발달된 서양문물(西洋文物)이 이들을 통해서 들어와 우리나라가 개화(開化)가 되었기 때문이다.
대구중구 골목투어 근대路의 여행은 5개의 코스가 있는데 그 중 가장 인기가 있는 제2코스인 근대문화골목(1.64km)과 제1코스와 경상감영달성길의 일부인 경상감영공원(慶尙監營公園)과 대구근대역사관(大邱近代歷史館)을 투어 하였다.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 쪽으로 진입하면 선교사들의 주거지가 나온다
달구벌대로 도로변에서 계명대학교동산의료원 동산(東山) 출입로로 들어서니 <근대路의 여행> 표지가 ‘어서 오라고’ 안내한다. 선교사들의 주거지가 있는 이곳은 과거 대구읍성(大邱邑城) 밖에 위치해 있고 여기는 과거 공동묘지(共同墓地)가 있던 곳이어서 지가(地價)가 싸서 선교사들이 이곳에 선교활동의 터전으로 삼았다고 한다.
멀리 제일교회의 종탑이 보인다
이곳 청라언덕에는 선교사 사택이 3동이 있다. 교육·역사박물관(敎育·歷史博物館-Museum of Education and History)으로 쓰이는 <선교사 블레어 주택>과 의료박물관(醫療博物館-Museum of Medicine)으로 쓰고 있는 <선교사 챔니스 주택> 그리고 선교박물관(宣敎博物館-museum of Mission)으로 쓰이고 있는 <선교사 스윗즈 주택>이다.
교육·역사박물관(敎育·歷史博物館-Museum of Education and History)으로 쓰이는 <선교사 블레어 주택>은 1910년 미국인 선교사들이 지은 주택이다. 2층으로 된 이 집은 남북쪽으로 약간 긴 네모형태를 이루고 있다. 1층의 서쪽에는 현관으로 이어지는 베란다를 두고 현관홀을 들어서면 바로 바로 맞은편에 2층으로 오르는 계단실이 있고 그 오른쪽인 집의 중앙에 거실과 응접실이 앞뒤로 자리 잡고 있다. 응접실을 중심으로 좌우에 침실과 부엌, 식당 등을 배치하였다. 2층에는 3개의 침실과 욕실을 두고 현관홀 위에는 늘 빛을 받아들이는 선룸(sun room)을 설치했다. 건물의 기초와 지하실 부분을 튼튼한 콘크리트로 하고 그 위에 미국식으로 붉은 벽돌을 쌓았다. 이 집의 전체적인 모습에서 당시 미국의 주택 형태를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건물이다. 교육·역사박물관(敎育·歷史博物館)으로 쓰이는 <선교사 블레어 주택>
의료박물관(醫療博物館-Museum of Medicine)으로 쓰고 있는 <선교사 챔니스 주택>은 1906년에서 1910년 사이에 지어진 건축물로 미국인 선교사들의 주거양식과 생활양식을 짐작 할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이 주택에는 계성학교 2대 교장인 <레이너>와 <챔니스>, <샤워택> 선교사 등에 이어 1948년부터 <마펫(Moffett)>선교사가 거주했었다고 한다. 현재 이곳에는 1800년대부터 1900년에 이르는 많은 동서양의 의료기기 등이 소장되어 의학의 발전해 온 과정과 발전상을 엿 볼 수 있었다. 의료박물관 표지석
의료박물관에 전시된 의료기구 1
의료박물관에 전시된 의료기구 2
의료박물관에 전시된 의료기구 3
청라언덕에서 기념촬영, 뒤편에 선교박물관이 보인다
선교박물관(宣敎博物館-museum of Mission)으로 쓰이고 있는 <선교사 스윗즈 주택>은 1893년부터 대구를 찾아와서 선교활동을 하던 미국 선교사들이 1910년 경 지은 서양식 건물이다. 이 건물은 1907년(대구읍성 철거 때) 가져온 안산암(安山巖)의 성(城)돌로 기초를 만들고 그 위에 붉은 벽돌로 쌓았다. 현관을 들어서면 거실·응접실로 직접 연결되며, 거실을 중심으로 주방실 침실과 북쪽에 욕실을 배치하였다. 건물의 전체적인 형태와 내부 구조는 지을 당시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어 대구의 초기 서양식 건물을 살펴 볼 수 있는 중요한 건물이다. 선교박물관과 서양의술 의원인 제중원(濟衆院:동산의료원 전신)
청라언덕은 박태준을 연상하게 한다. 박태준(朴泰俊 1900.11.22.-1986.10,22) 선생이 작곡한 가곡(歌曲) <동무 생각(思友)>에 나오는 청라(靑蘿:푸른담쟁이)언덕이 바로 구 제일교회 쪽에서 바라본 선교사들이 살고 있는 동산(東山)이란다. <청라언덕 표지석>과 <동무 생각> 노래비가 박태준의 애틋한 스토리가 그의 첫사랑을 떠 올리게 한다. 박태준 선생은 대구 출신으로 우리나라 서양음악사의 지평을 열었다. 그는 대구 계성중학교, 평양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의 터스칼럼대학, 웨스트민스터 음대를 졸업했다. 그는 우리나라의 최초의 동요 <기러기>, 최초의 가곡 <동무 생각>을 비롯하여 <오빠 생각> 등의 여러 곡을 작곡하였다. 그는 경남 마산창신학교 교사, 경성의전 교수, 연세대음대학장을 역임하고 평생 음악활동을 하면서 150여곡의 동요와 가곡을 작곡하여 우리나라 음악사에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청라언덕 표지
박태준 선생의 <동무 생각> 노래비
박태준 선생의 <동무 생각>에 얽힌 스토리가 재미있다. 그 당시 계성학교 다니던 시절 제일교회에서 보아왔던 어여쁜 신명학교 여학생을 짝사랑에 빠져 마음 조이며 애를 태웠다고 한다. 그 여학생은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 갔다고 한다. 그 여학생에게 사랑한다는 말도 못해본 심정을 마산 창신학교 교사시절 그 곳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이은상(李殷相) 선생에게 학창시절에 짝사랑했던 스토리를 이야기했다. 이은상 선생은 노랫말을 만들고 박태준 선생은 이 노랫말에 곡을 붙여 가곡 <동무 생각>이 탄생되었다고 한다. 요사이 젊은이들로선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사랑한다는 표현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나타낼 수 있었을 텐데 혼자 마음만 조이고 이었으니 말이다.
우리를 안내한 문화해설사가 이평직 회원에게 가곡 <동무 생각>을 부르게 하니 그는 구성지게 잘 부른다. 다른 친구들도 따라 불러 어느새 많은 회원들이 제창을 하며 청라언덕에 <동무생각>노래가 울러 퍼져 노래에 얽힌 이미지를 깊게 새겼다.
이평직 회원이 청라언덕에서 <동무생각>노래를 열창하고 있다
동산의료원 외국인 묘지(은혜정원-恩惠庭園)에는 14위의 무덤이 있었다. 이곳 묘지도 유럽의 묘지와 같이 무덤은 없고 묘표석(墓標石)만 있었다. 14위중에서 가장 최근에 조성된 <하워드 마펫(Howard Fergus Moffett, 1917~2013)>을 소개한다. 그는 한국의 초대 선교사 사무엘 마펫(Samuel Austin Moffett)의 4남으로 1948년 한국의 의료선교사로 파송되었다. 그는 45년간 동산병원장, 학교법인 계명기독대학이사장 등을 역임하면서 해외모금운동을 적극 전개하여 60병상이던 동산병원을 1천여 병상의 대형 의료원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96세를 일기로 소천(召天)할 때까지 간호대학 설립, 한국 최초 병리기술학교, 무료 소아병원 설립, 800여회의 국내외 의료선교봉사활동, 전국 농어촌에 120여개의 교회설립 등 계명대학교 의과대학을 설립하여 우수한 의학교육기관으로 발전시켰다.
동산의료원 외국인 묘지(은혜정원-恩惠庭園)
하워드 마펫(Howard Fergus Moffett)의 묘
대구제일교회(大邱第一敎會:The First Presbyterian Church of Daegu)는 대구·경북지역 최초의 개신교회(改新敎會)로서, 조선말 부산선교부에 주재하던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버어드(William M. Baird)목사가 경상도 북부지역 순회 전도여행 중 1893년(고종 30년) 대구 읍성에 첫발을 디딤으로써 시작되었다.
대구제일교회(大邱第一敎會:The First Presbyterian Church of Daegu)
1896년 남성로(약전골목) 구 대구제일교회(현 선교관)터에 있다. 건물을 구입한 후 수리하여 교회와 선교기지를 마련하였으며, 1897년 봄 초대 목사인 아담스(James E. Adams) 선교사가 부임하여 이 지역의 초기 선교활동에 크나 큰 공헌을 하였다. 본 교회는 남성로의 교회 구내에 이 지역 최초의 신교육 기관인 희도학교(1900년), 계성학교(1906년)을 개교하였고 신명학교(1907년) 설립을 주도하였으며, 의료 선교사업으로 1898년에 지역최초의 서양의술 의원인 제중원(濟衆院:동산의료원 전신)을 교회 구내에 개설하였다. 본 교회에서 지금까지 분립(分立)한 교회는 1908년 사월교회를 시작으로 범어교회, 서문교회, 남산교회, 중앙교회 등 22개 교회이다. 지금의 제일교회는 1989년 10월 건물을 착공, 1994년 4월에 준공하여 새 성전(聖殿)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 교회는 지하 2층, 지상 5층(종탑 8층)의 철근 콘크리트 구조 건물로 연면적 2,160평, 대예배실 면적 560평에 좌석수 3100석이며 스테인드 글라스 (stained glass) 창 18면과 화강석 외벽으로 마감되어 있어서 외관이 웅장하고 아름다운 고딕(Gothic) 양식의 건축물이다.
1994년 4월에 완공한 제일교회
제중원(濟衆院:동산의료원 전신)
대구 제일교회를 뒤로 하고 <대구 3.1운동 길>을 따라 내려간다. 이 3.1운동 길(90계단)은 청라언덕 노래비에서 이곳 90계단 까지는 3.1운동 당시에 만세 운동을 준비하던 학생들이 일본 순사의 감시를 피해서 도심으로 모이기 위해 통과했던 솔밭 길이라고 한다. 대구시에서는 2003년에 이곳을 <대구 3.1운동 길>로 지정하고 3.1운동 당시의 모습을 되새겨 볼 수 있도록 계단 길 벽면에 사진을 전시해 놓았다. 서울에서는 1919년 3월1일 서울파고다 공원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으나 대구에서는 3월8일에 계성학교, 신명학교, 성서학당, 대구고보 학생들이 동산병원 솔밭 길을 이용하였던 곳이 지금의 3.1운동 길이 되었다. 이 계단을 내려오면서 그 당시의 상황이 짐작이 간다. 만세 운동으로 나라를 되찾기 위해 애썼던 선배들의 생각을 지울 수 가없다. 나라를 빼앗긴 그 당시 국민들의 비통한 심정이 오죽했으랴!
대구 3.1 운동길(90계단)
천주교 대교구 계산 주교좌 대성당(天主敎大邱敎區 桂山 主敎座 大聖堂 ; Roman Catholic Cathedral Church)은 서울과 평양에 이어 세 번째로 세워진 고딕양식의 성당이다. 프랑스인 로베르 신부가 설계하였고 서울 명동성당의 건립에 참여하였던 중국인들이 공사를 담당하여 1902년 완공하였다. 1911년 주교좌성당이 되면서 종탑(鐘塔)을 2배로 높이는 등 증축을 하여 1918년 12월에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평면은 라틴 십자형이고, 종탑부에는 8각의 높은 첨탑 2개를 대칭구조로 세웠으며, 앞면과 양측에는 장미창으로 장식하였다. 대구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며 현존하는 1900년대의 성당 건축물로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한다.
천주교 대교구 계산 주교좌 대성당(天主敎大邱敎區 桂山 主敎座 大聖堂)
게산성당 내부
계산성당의 겉모습만 휙 둘러보고 계산예가(桂山藝家)와 이상화(李相和) 고택 그리고 서상돈(徐相燉) 고택으로 향하였다. 먼저 계산예가에서 근대 예술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계산동과 남성로, 남산동 일대에는 20세기 초 한국 근대문화를 이끌었던 예술인들의 삶터와 활동상이 곳곳에 남아있는 근대문화유산의 보고이다.
계산 예가에서 활동한 예술가들의 각종 결과물
천재화가 이인성의 작품 1
한국문단의 주류를 이루었던 이상화, 현진건, 백기만, 근대 서양음악가의 기틀을 다진 김문보, 박태준, 현제명, 대구에서 서양미술의 뿌리를 내린 이상정, 박명조, 서동진, 대구가 낳은 천재화가 이인성 등은 거의 이 일대를 중심으로 해서 살았던 곳이다. 계산성당과 남성정예배당 그리고 뜻있는 이들이 개설한 학교들은 이 시기에 예술인들이 빛나는 족적을 남긴 요람이며 민족정신을 함양하는 터전이기도 했다.
천재화가 이인성의 작품 2
천재화가 이인성의 작품 3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해방정국과 분단, 6.25전쟁을 거치는 동안 계산동 주변은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문인, 화가, 음악인들로 붐비는 명실상부(名實相符)한 문화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시대를 대표할 만한 문예지 간행이나 동인활동, 미술전람회, 음악회도 줄을 이었다. 그렇지만 20세기 후반 급격한 산업화 과정이 진행되면서 사람들은 흩어지고 미처 기록되지 못한 업적들은 기억에서 사라져 갔다. 그래서 계산예가의 전시실은 이렇게 묻혀버린 근대 예술인들의 당시 생활상과 활동상을 볼 수 있는 공간이다.
계산예가의 그림자료 1
계산예가의 그림자료 2
계산예가의 그림자료 3
계산예가의 그림자료 3이상화(李相和) 고택은 대구 계산동 2가 84에 위치하고 있다. 항일 문학가로 잘 알려진 이상화(1901~1943) 시인이 1939년부터 작고하던 1943년까지 거주했던 곳이다.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에 민족의 광복을 위해 항일정신의 횃불을 밝힌 시인 이상화선생의 시향(詩香)이 남아있는 곳이다. 이상화 시인은 시인, 작가, 독립운동가, 문학평론가, 번역 문학가이며 교육자이다. 그는 <개벽>, <문예운동>, <여명>, <신여성>, <삼천리>, <별건곤>, <조선문단>, <조선지광> 등 문학·동인활동을 하였다.
이상화 고택
이상화 고택 내부 1
이상화 고택 내부 2
이상화 고택 내부 3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으로 너무나 잘 알려진 서상돈(徐相敦)은 1871년 서울에서 대구로 내려와 지물상과 포목상으로 많은 재산을 모았다. 1898년 독립협회와 만인공동회의 간부로 활동했다.그는 1907년 대구의 광문사(廣文社)의 부사장으로 재직 중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할 것을 제의하고, 국채보상취지서를 작성 발표하였다. 이를 계기로 국채보상운동은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다. 이 운동은 비록 일제의 방해로 뜻한 바를 이룰 수 없었지만 일제의 경제침탈(侵奪)과 국권 침탈에 관하여 한국인들을 각성(覺醒)시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서상돈 고택 1
서상돈 고택 2
서상돈 고택 내부 1
서상돈 선생의 근영
서상돈 선생의 연표
구 제일교회와 약령시한의학박물관에 왔다. 계획한 시간의 촉박으로 약령시한의학박물관 앞에서 건물만 바라보았다. 언젠가는 다시 와서 약령시한의학박물관을 자세히 보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구 제일교회는 선교활동 본부로 쓰고 있다고 하는데, 하필 오늘 건물주변에 포크레인으로 보수 작업을 하고 있었다. 약령시한의약박물관
1896년 남성로(약전골목)에 자리한 구 대구제일교회(현 선교관)
약령시와 염매시장을 거쳐 종로의 진골목(long street)로 들어섰다. 진골목은 ‘긴 골목’을 의미한다. 대구읍성의 남문이었던 구 대남한의원 사거리를 통과해 종로로 약 50m 들어서면 우측 편으로 길게 뻗어 들어가는 골목이 바로 진골목이다. 감영시대에서 해방 전까지 이 골목은 달성서씨들의 집성촌이었다. 또한 이곳에는 경상북도의 최고 부자였던 서병국 등 재력가들이 살았고, 해방 이후에는 코롱을 창업한 이원만, 연간 2000억의 매출을 올리는 평화크럿치(현 평화발레오) 창업자 김상영 등 기업인들이 가장 선호하던 주거지였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었던 미도다방
미도다향 시
진골목의 미도다방의 간판
진골목의 역사가 서려있는 안내표판 1
진골목의 역사가 서려있는 안내표판 2
그 당시 2층으로 지은 정소아과 건물
골목을 따라 나가 보면 고색창연한 오래된 가옥과 건물들이 근대문화유적으로 보존하고 있어 보수나 개축 및 수리를 할 수 없다고 한다. 진골목 거의 종점부분에 나오면 2층로 오래된 건물 정소화과와 대구화교소학교도 볼 수 있다.
진골목의 홍성실업
마지막으로 대구중구 골목투어의 제1코스인 경상감영달성길에 속한 대구근대역사관과 경상감영공원을 찾았다. 먼저 찾아간 곳은 대구근대역사관이었다. 전에는 이 근대역사관이 달성공원안 건물에 자리를 마련하여 전시하고 있었으나, 대구시에서 구 식산은행 건물을 무상으로 대여해 주어서 2013년부터 이곳에서 대구근대역사관을 개관하고 있다. 이곳에는 대구의 근대 역사를 조명해 볼 수 있는 자료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다. 구 식산은행 건물에 대구근대역사관이 개관되어 있다
경상감영(慶尙監營)공원으로 가서 경상감영의 본청인 선화당(宣化堂)과 감영의 관사인 징청각(澄淸閣)을 보았다. 감영의 관사가 남아있기로는 대구에 있는 징청각이 유일하다고 한다. 과거에는 감영이 있는 이곳에 경상북도 도청이 있었고, 그 후에는 도청이 산격동으로 옮겨진 후에 중앙공원으로 탄생되었으나 지금은 옛 이름을 되찾아주는 의미에서 경상감영공원으로 재탄생되었다.
경상감영의 변화
경상관찰사가 집무하던 경상감영(慶尙監營) 본청인 선화당(宣化堂)
감영의 관사인 징청각(澄淸閣)
대구의 근대문화골목투어를 하면서 느낀 것은 선교사들의 공로가 지대하다는 것과 해방과 6.25 전화에도 대구의 문화를 잘 지켜온 조상들의 깊은 뜻을 알 수 있었다. 특히 6.25전쟁 속에서도 대구는 북의 공격을 받지 않아 대구의 문화의 자취를 그대로 보존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근대문화의 흔적이 고스란히 보존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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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상세한 닾사기가 세삼 공부가 되는군. 그날 바람이 많이붇어 쫠영하는데 고생이 많았겠는데... 그런 악 조건에도 이렇게 구석 구석 자세히 소개해 너무 고맙네~^^
직접 보는듯한 후기 잘 보았습니다.
코뿔소=이평직님이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잘 부르네요.
그런데, 그 옆에서 손뼉치며.. 장단 맞추어 함께 부르는 분..
아름다운 분,,, 3 분은 누구시요.
바로 옆에서 함께 부르는 분은 "가반 4 번 임창영" 인걸 알겠는데
골목 투어가 참 재미있네..
모두 옛 날에 골목 대장 맞지....
골목에 돌아다니면서...식당 투어는 하지 않았는가?
식당 투어 중에 맛 있는것. 먹고 마시는 투어도 좋지.
근대화 골목 투어, 덕분에 잘 보았어요.
코뿔소를 비롯 '동무생각'을 입 모아 함께 부르는 벗님들 모습 눈에 선 하다오.
아마 박정양 선생님께 배운듯한 '동무생각'을 나도 작은 소리로 읇조려 보았지요!!!!
해박한 지식으로 설명을 덧붙인 사진전문가님의 해설을 들으면서 다시 한번 멋진
장면들을 즐겁게 감상합니다. 아따 그날딸 왜 그리 날씨가 추운지 장갑을 꼈다 벗었다
손을 호주머니에 넣었다. 뺐다를 몇번이나 했을까 그런데도 이런 멋진 촬영을
정말 대단하시지. 정말 감사합니다.
추운 날씨에 안내하느라고 수고가 이만저만이 아닐세. 손은 실어워도 사진은 정확하네 . 초남이 기현씨 애썼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