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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하느님 나라를 관계 안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두 번째 독서로 봉독한 베드로 2서는 우리가 그토록 궁금해하는 하느님의 날,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날을 앞당기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날이 오면 하늘은 불길에 싸여 스러지고 원소들은 불에 타 녹아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언약에 따라,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2 베드로 3, 12-13)
우리가 가장 촉각을 곤두세우는 부분은 아무래도 3가지 점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 과연 어떤 곳일까? 도대체 언제쯤 그 나라가 우리에 올 것인가? 우리는 정말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인가?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체험해본 적이 없는 일이기에 확신은 금물이지만, 하느님 나라를 관계 안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구원자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새 하늘과 새 땅, 다시 말해서 하느님 나라의 주체이십니다.
우리가 그분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에 따라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이미 들어가 있을 수도 있고, 바깥 어두운 곳에서 땅을 치며 울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그분과 적대적인 관계, 전혀 무관한 모습으로 살아간다면 아직도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는 요원한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매일 예수 그리스도와 친밀한 관계 속에 살아간다면 우리는 이미 하느님 나라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 주관하시는 성찬례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그분께서 나눠주시는 생명의 빵이신 성체를 지극정성으로 받아 모신다면, 우리 안에 이미 하느님 나라는 건설되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 강생으로 인해 하느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는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 나라는 현재 진행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쪽 발은 인간 세상에 딛고 서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한 생활, 티없고 흠없는 생활을 통해, 주님 나라의 도래를 앞당기는 사람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은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날, 마지막 날, 종말에 대한 베드로 2서의 가르침에서 우리에게 가장 큰 희망과 기쁨을 주는 표현은 ‘새로움’입니다. 주님의 날이 도래하면 그분 가르침에 충실했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놀라운 은총의 선물이 주어질 것입니다.
새로운 이름이 부여될 것입니다. 새로운 언어로 말하게 될 것입니다. 새로운 도성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곳에서는 주님께서 약속하신 모든 언약이 어김없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급격한 변화의 시대에 대처하는 법
급격히 변화하는 지금의 시대는 눈 잠깐 감았다 뜨면 새로운 것들이 생겨나고 이전에 가치가 있었던 것들이 무가치하게 됩니다. A.I. 기술이 발전하면서 사라지게 될 직업들의 순위가 마구 올라오고 있습니다. 이전에 인기가 있었던 법관부터 의사들도 상당수는 A.I. 기술을 이용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 인기가 점차 줄어들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상황입니다.
이제 가지고 있는 사진 다섯 장만 A.I. 프로그램에 넣으면 증명사진을 만들어주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대처하며 살아야 할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그 해답을 전해주십니다. 우리 시각을 변하는 것보다 변하지 않는 법칙에 고정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해주십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세상엔 카이사르처럼 변하고 사라질 것들이 있고 그 안에서 변하지 않는 ‘법칙’도 존재합니다. 건물은 변합니다. 언젠가는 허물어집니다. 그러나 건물이 허물어진다는 법칙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 법칙을 무시하고 건물에 집착하는 사람은 집이 허물어지기 직전까지 그 집에 집착하며 안타까운 삶을 삽니다.
그러나 집은 언젠가는 허물어진다는 법칙을 아는 이들은 이 법칙을 이용하여 돈을 법니다. 지혜로운 자들이 돈을 많이 버는 이유는 변하는 것보다 변하지 않는 것에 시선을 두기 때문입니다. 모건 하우절의 [불변의 법칙]에는 이런 일화가 나옵니다.
언젠가 워런 버핏과 가깝게 지내는 남자를 만나 점심 식사를 함께했다. 편의상 그를 짐이라고 부르겠다. 그에게 들은 이야기다. 짐은 2009년 말 워런을 차에 태우고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의 시내를 달리고 있었다. 세계 경제가 침체의 늪에 빠져 있던 때였고 오마하도 예외는 아니었다. 많은 상점과 사업체가 문을 닫은 상태였다. 짐이 워런에게 물었다.
“암울하군요. 과연 경기가 회복될까요?” 그러자 워런은 이런 질문을 던졌다. “짐, 1962년에 가장 많이 팔린 초코바가 뭔지 알아요?” “모르겠는데요.” “스니커즈였어요. 그럼 현재 가장 많이 팔리는 초코바는 뭘까요?” “모르겠습니다.” “스니커즈예요.” 그리고 침묵.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올라갈 때가 있으면 내려갈 때가 있고 내려갈 때가 있으면 올라갈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그동안 있었던 법칙입니다. 이것을 알고 있는 워런 버핏에게 언젠가 경기가 회복되겠느냐고 묻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또 경기가 좋을 때 언제까지 좋겠느냐는 질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 다시 불황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아는 이들은 돈을 많이 법니다. 그러나 당장의 변화에 정신이 팔린 이들은 그 변화에 휩쓸려 정신없이 고생만 하다 죽게 됩니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법칙이 있음을 믿읍시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법칙은 세상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차는 법칙대로 굴러갑니다. 그러나 차 자체가 설계도를 만들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법칙이 존재한다면 누군가 그 법칙을 넣어준 것이 확실합니다. 곧 창조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법칙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신앙입니다.
반면 신앙이 없는 이들은 법칙을 무시하고 당장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합니다. 자기 힘만으로 사니 두려움을 견뎌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구약에 사울 왕이 필리스티아 인들과 전쟁하기 직전 병사들이 빠져나가자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가 직접 제사를 올려 하느님을 분노하게 한 예와 같습니다. 이 불순종 행위는 사울의 몰락으로 이어졌습니다.
세상에서 자유를 찾는 이들은 많은 법칙을 아는 이들입니다. 도시락을 팔아 수천억 원의 자산가가 된 켈리 최도 마흔이 넘어 10억 이상의 빚이 있을 때 부자들의 책 [시크릿]을 60번 읽고 그 법칙대로 했더니 5년 만에 큰 부자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는 김승호 회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매일 100번 썼더니 되었다는 것입니다. 간절히 원하면 하늘이 도와줍니다. 이것이 법칙입니다. 그러니 오늘 독서말씀을 잘 들읍시다.
“하느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날을 앞당기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날이 오면 하늘은 불길에 싸여 스러지고 원소들은 불에 타 녹아 버릴 것입니다. (중략)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으니, 무법한 자들의 오류에 휩쓸려 확신을 잃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십시오. 그리고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은총과 그분에 대한 앎을 더욱 키워 나아가십시오.”
카이사르의 것, 곧 사라져가는 것이 아닌 하느님께 드려야 할 것, 곧 하느님의 법을 추구하는 사람이 됩시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르 12,13-17: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문제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14절)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헤로데 당원들의 질문은 예수께 로마 제국과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 어느 편을 들 것이냐 하며 함정을 만든다. 예수님은 로마의 돈인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다 보여다오.”(15절) 하신다. 예수께서 받으신 돈 앞면에는 “아우구스토의 아들, 신성한 아우구스토 티베리오 황제”, 뒷면에는 “최고 성직자의 화폐”라고 적혀있었다. 이것을 보시고 예수께서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황제의 것입니다” 하자,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그들은 예수님께 매우 감탄하였다(16-17절). 이 답은 신학적으로 매우 깊은 의미가 있다.
우선 예수님의 대답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디베리오 황제의 화폐를 사용한다는 것은 이스라엘 안에서 그의 정치적 권력을 인정하는 것이다. 비록 그 화폐를 달리 생각한다고 하여도 그 화폐에는 그의 초상과 그의 문장이 새겨져 있으므로 그의 것이다. 그러므로 황제에게 세금을 바친다는 것은 황제 자신의 것을 바치는 것이므로 그것은 황제에게 바쳐라!”라는 뜻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라는 말씀은 인간은 하느님께 속한 것이므로 하느님께 바쳐야 한다는 말씀이다. 사람은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되었으니 하느님께 속하므로 우리 모든 인간의 삶은 하느님께 바쳐야 한다. 하느님의 초상은 우리 인간에게 새겨져 있으니 우리 인간은 모두 하느님의 것이고, 그러기에 하느님께 바쳐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안에 새겨주신 당신의 초상을 찾아 주시려고 사람이 되셨으니,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되돌려 드려야 한다. 그러기에 황제도 하느님의 모습을 가진, 즉 하느님의 초상이니 하느님께 속한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을 들은 군중들은 그 깊은 뜻을 알아듣고 그 함정을 없애버리시는 주님의 지혜에 대하여 경탄하였다. 동전에는 통치자의 흐리멍덩한 육체적 모습이 새겨져 있지만, 구원받은 우리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모습을 담고 있다. 우리 인간은 우리 안에 새겨진 하느님의 모습을 완성하도록 노력하며 하느님께 분명히 돌려 드려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것이 하느님께 속하는 것이고 올바로 되돌려 드릴 수 있을 때 될 수 있다. 그러한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참된 예물로 이 제단에 봉헌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한 15년 전쯤으로 기억합니다. 어느 노부부를 만나게 되었는데, 이 부부의 모습이 너무 안 좋아 보였습니다. 그리고 저를 만나자마자 “신부님! 저희 죽고 싶어요.”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연은 전화금융사기 사기를 당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만 해도 보이스피싱이 잘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기에, 이를 잘 모르는 연세 많은 노부부는 경찰청이라는 상대방의 말을 굳게 믿고 그가 말해주는 통장에 가지고 있는 돈을 모두 옮긴 것이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칠순이어서 자녀들이 큰 잔치를 해주었고, 용돈이라면서 준 돈이었는데 자녀들 볼 면목이 없다면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이런 돈을 사기당했다면서, 세상에 살 자격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계속 눈물만 흘리시는 노부부를 설득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를 찾아오셨다는 사실만으로도 살고 싶어서임을 알기에 기도하는 마음을 갖고 많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결론은 억울해도 그 돈 없이 충분히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매달 할아버지 앞으로 연금이 나오고 있었고, 두 발 편하게 뻗고 잘 수 있는 좋은 집도 있습니다. 또 부모를 끔찍이 생각하는 효심 깊은 자녀들이 있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주도 있습니다. 있는 것을 따지고 보니 잃어버린 것이 억울하고 아깝기는 하지만 그래도 살 수 있는 이유가 많았습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우리는 행복한 이유를 찾아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더 나쁜 상황만을 찾습니다. 그래서 행복하지 않고, 행복할 자격도 없다면서 스스로 최악의 상황으로 밀어 넣습니다.
과거 순교자들, 또 많은 성인·성녀들은 하나만 있어도 충분했습니다. 바로 주님입니다. 주님만 계신다면 다른 것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습니다. 그래서 늘 기쁨 속에 살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과연 어떠했을까요? 주님 하나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는 믿음을 키워야 합니다.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 몇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 세금 문제를 물어봅니다.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한지, 합당하지 않은지를 묻는 것이었습니다. 세금을 내라고 하면 로마 황제의 편이냐면서 민족의 반역자라고 외칠 것이고, 세금을 내지 말라고 하면 황제의 말을 거역하는 황제의 반역자냐고 따질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 것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하느님의 것을 돌려 드리는 데 집중해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주님 하나로도 만족할 수 있는 굳은 믿음입니다. 그래야 세상 것에 집착하지 않고 하느님 것만을 바라보면 살 수 있습니다. 커다란 만족 안에서 기쁨과 행복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네가 태어났을 때 너는 울었지만, 세상은 기뻐했다. 네가 죽을 때 세상은 울겠지만, 너는 기뻐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아라.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마르 12,17)
세상을 사랑하는 이들은
세상이 원하는 대로
세상을 바라보며
세상의 일을 하다가
결국은
세상의 품으로 돌아가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느님을 바라보며
하느님의 뜻에 따라
하느님의 일을 하다가
언젠가는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간다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
우리가 세상의 가치관에만 얽매여 산다면
황제에게 우리 자신을 바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모상임을 잊고
재물에만 빠져 산다면 우상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세상의 황제에게 무엇을 바치며,
하느님께는 무엇을 바치며 살고 있는지요?
우리는 간혹 내가 가진 것은 내 것이기 때문에
마음대로 써도 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마음대로 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내 욕망을 위해 쓰이게 될 때는
세속의 왕! 카이사르를 주인으로 섬기게 되는
우를 범하게 될 것입니다.
재물을 밑천삼아 제 욕망을 채우려고 할 때
재물은 카이사르의 것이 되어
영혼을 더럽히게 될 것이고,
나눔을 실천할 때
그것은 진정 하느님의 것이 되어
자신의 영혼과 이웃을 살리게 될 것입니다.
남보다 더 가졌다는 것은
분명 축복이 아니라 사명입니다.
복음말씀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2,13-17
그때에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은
13 예수님께 말로 올무를 씌우려고,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 몇 사람을 보냈다.
14 그들이 와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께서 진실하시고
아무도 꺼리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압니다.
과연 스승님은 사람을 그 신분에 따라 판단하지 않으시고,
하느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
15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다 보여 다오.”
16 그들이 그것을 가져오자 예수님께서,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황제의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7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그들은 예수님께 매우 감탄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