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우리역사를 왜곡시킨
‘심상소학역사보충교재’(3)
瓦也 정유순
백제는 “주몽의 장자(長子)가 아버지의 뒤를 이었지만, 장자의 배다른 동생인 온조(溫祚)는 화(禍)가 자신에게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따르는 신하들을 거느리고 마한(馬韓)의 영토로 들어와 백제국을 세웠으며, 마침내 마한을 멸망시키고 그곳을 통일했다. 이때가 바로 스이닌(垂仁)천황[제11대] 시대에 해당한다. 그 나라가 도읍한 곳은 보통 직산(稷山)[충청남도]이라고 한다.”라고 적어 놓아 한성백제를 부정한다.
<서울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모형도>
<풍납토성>
고구려와 백제의 관계에서는 “고구려는 처음에는 중국에 복속되었지만, 점차 강성해져서 동쪽으로는 일본해(日本海)부터 서쪽으로는 요하(遼河)에 이르기까지 그 지역에 있는 여러 종족들을 정복하고, 다시 조선반도의 북부를 쳐들어가 중국의 군령(郡領)을 잠식했다. 이 무렵 중국의 군령은 크게 쇠퇴했기 때문에, 백제는 중국을 도와 고구려와 싸웠다. 그 사이에 고구려 왕 [제16대 고국원왕(故國原王)]은 백제왕에게 공격을 받았는데, 유시(流矢)에 맞아 사망했기 때문에, 두 나라는 영원히 화해할 수 없는 적국이 되었다.” 라고 하며 고구려는 처음부터 중국의 속국으로, 동해는 일본해로 표기하고, 고구려와 백제 관계를 완전히 뒤틀리게 하면서 고구려역사를 왜곡하였다.
<삼족오>
그러면서 일본과 임나제국의 관계를 “신라는 그 서남 지역에 있는 임나제국을 정복하려고 끊임없이 가라국(加羅國)과 싸웠다. 그리하여 가라는 스진천황 때 사신을 일본에 보내 도움을 요청했으며, 일본은 장수를 파견한 적이 있다. 또 이 무렵에 지금의 규슈 지방은 아직 널리 일본 조정(朝廷)의 교화[皇化]가 미치지 못했고, 동쪽에서는 구마소[熊襲]라는 종족이 살고 있는 지방이 있었고, 서쪽에도 역시 조정에 복속되지 않은 사람들이 있어서 조선반도의 남부와 서로 왕래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신라를 비롯한 이들 여러 소국들 간의 분쟁은 곧바로 일본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주아이천황[제14대] 때 구마소는 또한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천황은 이를 평정하려고 황후와 함께 군대를 이끌고 규슈에 행차하셨지만, 불행히도 천황께서는 군중(軍中)에서 돌아가셨다. 그런데 황후는 천황의 뜻을 이어 규슈 전체를 평정하셨을 뿐만 아니라, 다시 친히 바다를 건너 신라를 정복하고 굴복시키고, 또한 장수를 파견하여 임나 제국들을 평정하고 보호하심으로써, 내외 평화의 유지에 힘쓰셨다. 이리하여 일본의 국위(國威)는 비로소 해외에서 빛나자, 백제와 고구려 두 나라도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함께 속국의 예를 갖추었다.”라고 하면서 백제와 고구려를 속국으로 만들어 아예 일본 위주로 조작하였다.
<삼국시대 지도>
다음은 문학(文學), 불교(佛敎), 공예(工藝)부분에 대한 교수요지(敎授要旨)다. “본과는 <심상소학 일본역사> 권1 제4 「진구(神功)황후」의 마지막 절인 ‘학문과 기예의 전래’를 보충하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의 문화가 먼저 조선반도에 전해지고, 다시 본국[內地]에 전파되는 양상에 대해 가르쳐야 한다.”로 적어 조선은 중국이 아니면 문화가 없는 것처럼 암시했다.
<서울 석촌동고분 제3호분>
<백제향로>
강의요령[說話要領]은 문학(文學)의 전래, 고흥(高興)과 왕인(王仁), 불교의 전래, 일본에 불교가 전해지다, 공예(工藝)의 전래 순으로 배열되었다. <문학(文學)의 전래>는 “삼국(三國) 가운데 중국에 가장 가깝고, 일찍부터 중국과 교류했던 것은 고구려였다. 그러므로 중국의 문학은 가장 일찍 고구려에 전래되었다. 이 나라가 일본에 조공할 무렵에는 이미 태학(太學)도 설립되었다.”라고 기술하여 모든 것이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처럼 하였다.
<백제반가사유상>
<고흥(高興)과 왕인(王仁)>편에서 “백제는 고구려보다 늦어 일본에 복속될 무렵까지는 아직 문자로 기록한 적이 없었는데, 고흥(高興)이라는 박사를 얻고 나서야 비로소 기록이 시작되었다. 또 그 무렵 백제는 왕인(王仁)이라는 학자를 일본에 보냈는데 이때 백제의 왕은 <논어(論語)>와 <천자문(千字文)>을 일본의 조정에 헌상(獻上)했다. 이것이 일본에 한학(漢學)이 전래된 시초인데, 즉 오진(應神)천황(제15대) 시대였다. 천황은 왕인 등에게 명하여 기록을 관장하도록 하셨다. 왕인의 조상은 중국인으로, 조부(祖父) 때부터 백제에 들어와 살았다. 고흥은 어디 사람인지 분명치 않지만, 그도 아마 중국에서 온 사람인 듯하다.”라고 하며 고흥과 왕인을 중국인으로 만들었다.
<칠지도>
<불교의 전래>도 “역시 처음에 북중국으로부터 고구려에 전래되었다. 그보다 약간 늦게 남중국으로부터 백제에 들어왔다. 둘 다 닌토쿠(仁德)천황 시대에 해당된다. 신라에는 고구려에서 승려가 온 적이 있다는 것을 믿는 사람이 없었지만, 그 후 불교가 점차 행해져 법흥왕(法興王)[제23대] 때에 이르러 비로소 왕성해졌다. 이는 불교가 고구려·백제에 들어온 때부터 140~150년 후의 일이다.”라고 적어 놓았다.
<불국사 다보탑>
<일본에 불교가 전해지다> 편에서는 “그 후 20여 년이 지나, 긴메이(欽明)천황[제29대] 시대에 백제의 성왕(聖王)[제26대]은 불상 및 경론(經論)을 바쳤으며, 불교는 이때부터 일본에 전해졌다. 이때가 신라에서는 법흥왕에 이어 진흥왕(眞興王)[제24대] 때가 되었으며, 이 나라에서도 불교가 점차 왕성해진 때이다.”로 기록하여 마치 백제가 일본을 섬기는 것처럼 과장하였다.
<백제 무령왕과 왕비 목관>
<공예(工藝)의 전래>도 “학문과 불교가 중국으로부터 삼국에 전래된 상황을 보면, 각종 공예도 역시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것이 많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삼국이 일본에 복속된 후에는, 학문과 불교 외에 이러한 공예는 다시 일본에 전해져, 문화의 발달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로 적어놓아 마치 중국에서 모든 것을 배운 다음 일본으로 전래된 것처럼 왜곡했다.
<충주 고구려비>
<일본부(日本府) 1>편 에서는 교수요지(敎授要旨)와 강의요령[說話要領], 비고(備考)로 구분하였다. 교수요지는 “본과에서는 일본부(日本府)를 중심으로 신라, 고구려, 백제 삼국이 균형을 이루어 정립(鼎立)하고 있던 시대의 상황을 가르치며, 북쪽에서 일어난 고구려에 맞서, 한족(韓族)의 여러 나라들이 일본의 힘으로 그 국가를 보전했다는 것을 알려 주어야 한다.”며 고구려를 조선민족이 아닌 이민족으로 표시했다.
<고구려 안악3호분 벽화>
<안악3호분 견우직녀도>
강의요령[說話要領]에서는 일본과 삼국(三國)의 관계, 광개토왕(廣開土王), 삼국의 수도에 대하여 언급하며, 일본과 삼국(三國)의 관계를 “진구(神功)황후는 신라를 친히 정벌하시고 그를 복종시키신 다음,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도 복속시켰다는 것은 이미 서술했다. 이때 조정은 일본부를 임나(任那)에 설치하고, 장군을 보내 장(長)으로 삼아 한족(韓族)의 영토를 다스리셨다. 신라, 고구려, 백제의 삼국은 모두 일본에 조공했는데, 특히 신라와 백제 두 나라는 왕족을 일본의 조정에 볼모로 보냄으로써, 속국의 예를 다하는 성의를 보였다.”하며 삼국을 아예 일본의 속국으로 만들어 버렸다.
<고구려 개마무사상>
<광개토왕(廣開土王)> 편에서는 “그 다음으로 삼국의 상호 관계를 설명하는데, 만주에 있던 고구려는 점차 조선반도에 있던 중국의 군령(郡領)을 잠식하여 점점 강대해졌다. 닌토쿠(仁德)천황[제16대] 무렵, 고구려에서는 광개토왕[제19대] 이 왕위에 올랐는데, 이 왕은 매우 용맹하여 왕성하게 국토를 사방으로 넓혔으며, 반도에서는 주로 백제와 싸워 그 영토를 빼앗았다. 광개토왕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장수왕[제20대]이 즉위했으며,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더욱 백제의 땅을 빼앗고, 백제의 수도인 한성(漢城)[지금의 경기도 광주]을 함락시키고, 백제의 왕인 개로(蓋鹵)[제21대]를 사로잡아 참수하여, 한강 남북의 땅을 빼앗았다. 고구려의 영토는 한강 이남의 충주(忠州) 근방까지 미쳤으니, 지금의 충청북도 대부분과 충청남도의 일부까지도 고구려의 지배하에 들어간다. 신라는 광개토왕 때 볼모를 고구려에 보내 우호관계를 맺었지만, 고구려를 크게 두려워하여, 백제와 손을 잡고 서로 함께 고구려를 방어했다. 이러한 형세에 이르게 되자, 신라와 백제는 어쩌면 고구려에 의해 멸망을 당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다행스럽게도 이 재난을 면하게 해 준 것은 일본의 세력을 쉽게 움직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하며 일본세력의 배후역할을 강조한다.
<임진강변의 광개토대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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