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학의 「저수지」평설 / 이광호
저수지
이윤학
하루 종일,
내를 따라 내려가다 보면 그 저수지가 나오네
내 눈 속엔 오리떼가 헤매고 있네
내 머릿속엔 손바닥만 한 고기들이
바닥에서 무겁게 헤엄치고 있네
물결들만 없었다면, 나는 그것이
한없이 깊은 거울인 줄 알았을 거네
세상에, 속까지 다 보여주는 거울이 있다고
믿었을 거네
거꾸로 박혀 있는 어두운 산들이
돌을 받아먹고 괴로워하는 저녁의 저수지
바닥까지 간 돌은 상처와 같아
곧 진흙 속으로 비집고 들어가 섞이게 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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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학은 폐허의 시인이다. 이것은 시인이 단지 사물들의 잔해에 매혹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 시인에게 폐허는 기억의 풍경이고 삶의 형식이다. 기억은 폐허 속에서 생의 시간성을 읽어내고, 지나간 시간에 대한 상실감과 부끄러움과 자기혐오는 삶 자체를 폐허의 궤적으로 받아들이도록 만든다. "추억은, 폐허를 건너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시인의 문장은, 그의 시가 폐허로서의 추억의 형식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속에서 한 시인의 내면의 시간들은 버려진 사물들의 몸을 통해 시의 언어로 되살아난다.
시 '저수지'는 그의 두번째 시집 [붉은 열매를 가진 적이 있다](1995)에 수록되어 있다. 이 시집에서 이윤학의 폐허의 미학은 풍요로운 이미지들을 피워내고 있다. '저수지'는 이 시집에서 일종의 서시(序詩)적인 성격을 갖는 것으로 시인의 시적 비전을 아름답게 압축한다. '그 저수지'는 오리떼와 손바닥만 한 고기들이 있는 곳이지만, 그것들은 '내 눈 속'과 '내 머릿속'에 있다. 그 이미지들은 '나'의 감각 안에서만 존재한다. 더구나 그들은 "바닥에서 무겁게 헤엄치고 있"다. 저수지의 바닥은 저수지라는 사물의 깊은 내면에 속한다.
그 저수지를 "속까지 다 보여주는 거울"이라고 비유할 때, 저수지는 거울이지만, 타자를 비추는 거울이 아니라, 스스로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유리이다. 저수지에 거꾸로 박혀 있는 산은 돌을 받아먹고 괴로워하고, 돌은 그 저수지의 바닥 속으로 섞이게 된다. 이 지점에서 이 시는 단순히 풍경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사물들의 고통과 상처가 드러나는 자리가 된다. 저수지는 외부를 비추는 거울이 아니라, 자기 내부의 상처를 보여주는 거울-유리이다. 저수지의 진흙 속으로 비집고 들어가는 상처는 저수지의 상처이면서, 저수지의 풍경으로부터 내부의 상처를 되비추어보는 '나', 그리고 당신의 상처이다. 상처를 받아먹고 괴로워하는 존재들은 그 상처가 자신의 내부로, 자신의 몸으로 뒤섞이는 시간을 겪는다. 내가 받아먹은 상처들은 바닥에 이르러 내 몸의 일부가 될 것이다.
이광호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