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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0. 묵상글 ( 대림 제2주일. - 신망애 삼덕의 길.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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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0. 대림 제2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신망애 삼덕의 길
오늘 대림 제2주일은 오실 주님을 위해 주님의 길을 닦으라는 주일입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그런데 정확히 얘기하면 주님의 길을 닦을 것이 아니라
주님이 오실 나의 길을 닦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의 길이라면 주님이 닦아야지 우리가 어떻게 닦겠습니까?
주님도 당신이 길이라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길이요
우리가 하느님께 가는 길이라고 하셨잖습니까?
사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길을 우리가 닦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 길은 주님께서 몸소 닦고 오시고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미 오신 주님께서 나에게 오실 길만 닦으면 됩니다.
그러므로 관건은 그 길을 어떻게 닦느냐인데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데 방해되는 것들,
곧 방해물인 죄들을 치우는 것이고 회개하는 겁니다.
그것을 저는 올해 신망애 삼덕의 관점에서 봤습니다.
신망애 삼덕을 일컬어 향주삼덕(向主三德)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주님께 향하는 또는 주님을 향하여 가게 하는 세 가지 덕이라는 뜻이지요.
우리에게 이 향주삼덕만 있으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거침없이 오실 텐데
이것이 없으니 주님께서 우리 문 앞까지 오셔서는 들어오지 못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거침없이 오시도록 우리는 첫째로
믿음을 지녀야 하고 반대로 불신과 의심을 우리 안에서 몰아내야 합니다.
그런데 불신이나 의심이 제게는 교만과 무관심과 즉시 연결됩니다.
교만은 주님이 오시건 말건 무관심하게 하고 무시하게 하며,
그래서 실천적 무신론 또는 불신론에 빠지게 하지요.
그러니까 주님이 오셨어도 오시건 말건, 주님이 내 옆에 계시건 말건,
내 안에까지 들어 오시지 못하여 주님께서 내 안에는 아니 계시고
그래서 주님과 상관없이 내 뜻대로 내 좋을 대로 사는 상태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도록
주님께 희망을 걸고 반대로 다른 것에는 희망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래야 하는데 아직 세상에 희망이 있고
세상에 희망을 두는 사람은 주님께 희망을 두기 어렵겠지요.
그래서 세상에 희망을 두다가 실망하고 절망하는 체험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스러질 때가 새로운 희망을 둘 때임을 알아채고
롯의 아내처럼 스러질 것에 연연하거나 집착하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것 곧 새 하늘과 새 땅에 희망을 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모든 것이 스러질 터인데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하느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날을 앞당기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희망의 또 다른 측면이 갈망입니다.
희망이 원하는 것의 성취 차원이라면
갈망은 원하는 사랑의 성취 차원입니다.
희망이 꿈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것이라면
갈망은 사랑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인간적인 사랑으로 대충 대리 만족하기에
하느님 사랑이 없어도 고갈을 느끼지 못하고 갈망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희망의 반대가 절망이라면 갈망의 반대는 욕망이며
이 욕망을 몰아내고 사랑으로 채우는 것이 바로 주님의 길을 닦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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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0. 대림 제2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마음의 광야에서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회개의 여정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후회하다’, ‘보속하다’ 또는 ‘생각을 바꾸다’로 해석될 수 있는 회개는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과정입니다. 즉 회개는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기 위한 첫번째 조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회개의 선포는 하느님의 행업에 자신을 여는 것이며 이웃에게 개방하는 것이고 그리스도가 인간과 만나기 위해 다가오는 순간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신앙을 고백하기 위한 신앙체험의 첫번째 과정입니다.
성 보나벤뚜라는 양심의 가려진 깊은 곳으로 내려가 그곳에서 자신의 과거 및 현재의 모든 잘못, 습관, 감정 및 행동 그리고 모든 죄를 주의 깊게 탐색하고 검토하고 평가함으로써 자신의 내면에서 찾아낸 잘못이 무엇이든 참된 슬픔으로 회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침묵은 회개의 마음을 불러 일으킵니다. 침묵을 지키는 동안 인간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생각하고 자신의 결점이 얼마나 큰지 그리고 자신의 진보는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를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막다른 곳, 모든 친교가 단절된 곳, 아무것도 더 이상 할 수 없는 곳으로 철저히 고립되어 극심하게 외로운 곳 바로 그곳에서 회개가 시작됩니다.
십자가의 성요한이 표현한데로 회개의 시작은 감각의 밤의 시작이며 회개하기를 원하게 됩니다. 좀더 깊이 있는 삶을 영위하기 위해 그 삶의 뜻을 더욱 깊이 추구하고 묵상과 기도와 침묵의 생활로 들어가게 됩니다. 인간 감정에 사로잡힌 무질서한 상태를 초월하여 보다 더 하느님 사랑에 잠긴 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인간의 감각적인 부분이 믿음으로써 정화되는 단계를 뜻합니다.
특히 죄와 자기집착의 문제를 극복하는 단계입니다. 마음의 광야이자 사막이며 골짜기 같은 죄와 자기집착에 벗어나기 위한 버나드 로너간이 말한 3가지 차원의 회개를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종교적이고 윤리적이며 지성적인 회개입니다. 종교적 회개에 의하여 무한한 사랑을 하게 되며 윤리적 회개에 의하여 자신의 가치가 변화되고 지성적 회개에 의하여 생각의 관점이 바뀌게 됩니다. 한마디로 초월적인 하느님의 사랑이 가치관을 변화시키고 생각을 바뀌게 합니다.
바로 이런 통합적 회개는 마음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지 못함이 죄임을 알게합니다. 이러한 사랑의 체험을 통해 자신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되고 자기집착에서 비롯된 잘못된 생각들을 해방시켜 줍니다.
이것이 주님의 길을 마련하는 것이고 그분의 오심을 기쁘게 맞이하는 것임을 오늘 주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십니다.
✝️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그리스도교 신자로 개종한 중국인 아 록
신 대영제국, 비스마르크 군도 -1905년
매우 당황한 그는 곧바로 누군가에게 왜 사제가 이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아기를 제단 위의 아주 작은 나무집에 넣는지를 묻고 싶었다. 또 그 경이스러운 아기가 도대체 누구인지를 알고 싶었다.
그러나 아 록은 거룩한 미사 도중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있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우선은 참아야만 했다.
마침내 미사가 끝나자 아 록은 미사에 참석한 다른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자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가 아주 재간있는 농담꾼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말을 믿지 않고 오히려 그를 바보로 취급하려 들었다. 그가 자신이 본 일을 계속해서 말해도 사람들은 언제나 제단 위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고 대답하였다. 아쿤은 형 아 록에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성스러운 영성체에 대한 가톨릭의 교리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아 록은 그것으로 충분히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날 밤 그는 이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아 록은 실제로 자기가 아기를 보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왜 친구들은 이것을 보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일까? 그 다음 날 아 록은 다시 배를 타고 부나포네로 가서는 선교학교의 성당에서 봉헌된 미사에 참석하였다. 성당에서 그는 어제 보았던 경이스러운 아기가 다시 나타나는 것을 보기 위해 감실의 문에 시선을 집중하였다. 그러나 아 얼마나 큰 실망인가!
그 빛을 내던 아기는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었다.
아 록은 돌아가기 전에 선교사를 찾아가 가톨릭 신앙 교리서를 부탁하였다. 그러나 선교사는 중국어로 된 교리서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하면서 대신 기도서를 주었다.
아 록은 자신의 농장으로 돌아와 매일같이 기도서를 읽었다. 마침내 그는 가톨릭으로 개종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우연히 그는 배(船) 에서 언제나 진지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딕스(Dicks) 신부를 만났다. 아 록은 그에게 세례를 받게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리하여 그 신부는 아 록에게 교리에 관한 것을 물어보았으나, 아 룩의 신앙지식이나 믿음은 아직 불충분한 상태였다. 그 명망있는 중국인은 세례를 받기 위해서 세 번씩이나 시험을 치뤘으나 그 때마다 떨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성공을 거둔 농장주에게는 결코 창피한 일이 아니었다.(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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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0. 대림 제2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마르 1,8)
오늘은 <대림 2주일>입니다. 그리고 “인권주일”이며, “사회교리주간”입니다. 성탄을 기다리는 우리는 지금, ‘광야’에로 초대를 받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음성을 듣습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가슴 안에, 황량한 광야를 품고 살아갑니다. 때로는 그곳에서 황량한 바람이 불고, 이리떼와 승냥이들이 할퀴고 날뛰기도 합니다. 또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이 광야일 때도 있습니다. 내가 속해 있는 우리 가정, 우리 공동체가 바로 광야일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삶 한 가운데에 어둔 밤이 있고, 캄캄함이 있습니다. 공허가 있고, 막막함과 무미건조함이 있습니다. 어찌할 수 없는 나약함과 붙들어 매어지지 않는 흔들림이 있습니다. 불가항력적인 무능함이 있고, 도리가 없이 빠져들 수밖에 없는 무기력이 있습니다. 벗어나지지 않는 고통이 있고, 풀리지 않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디딜 발판이 없는 늪처럼 그것들에 빠져들 때도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에게는 피해 지지 않는, 결코 피할 수도 없는 ‘광야’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광야를 좋으나 싫으나 부둥켜안고 살아가야 합니다. 바로 이러한 광야는 왜 주어진 것일까요?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광야’라는 묵중한 십자가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곧 구원에 이르는 통로로, ‘길’로 주셨습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을 들어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하여라.’”(마르 1,2-3)
오늘 <제1독서>에서는 광야에서 들려올 위로의 음성, 곧 ‘메시아 오심’을 예고하며, <복음>은 그 메시아가 오셨음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제2독서>에서 다시 오실 ‘주님의 날’을 기다리는 이의 거룩하고 신심 깊은 생활에 대해 말합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을 오늘 <복음>에서는 이렇게 소개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마르 1,4)
이는 회개하고 가만있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 증표를 보여라고 말씀입니다. 곧 그 증표로 세례를 받으라고 합니다. 그러면 용서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결코, 자신이 용서할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곧 그는 ‘용서하는 이’가 아니라 용서를 준비할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용서를 위한 회개”를 말하나, ‘선물로 주어지는 용서’는 하지 못함을 말해줍니다. 이로써, 그는 자신이 단지 ‘미리 주님의 길을 닦는 이’일 뿐임을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아닌 다른 분을 증언합니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마르 1,7-8)
이 증언에는 예수님께 대한 세 가지 내용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첫째’로, 그분께서는 “자신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말합니다. 본래 주인이 외출했다가 돌아오면 ‘종’이 그 신발 끈을 풀어주는 법인데, 요한은 그런 일마저도 할 만한 조격조차 없는 ‘종만도 못한 부당한 몸’이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영웅적인 겸손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진정 알았기에 할 수 있는 겸손입니다. 동시에, 자신의 신원을 정확히 알고 인정하는 자라야 할 수 있는 겸손입니다.
‘둘째’로, 그분께서는 자신보다 “뒤에 오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선포되고 있는 사실 “뒤”가 아닌, “지금” 입니다. 시기적으로는 “뒤”지만, 시점으로는 “지금” 입니다. 그래서 “오신다.”라는 동사는 현재형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는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오던 그분이 ‘드디어 오신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지금 ‘막 오고 계신다.’는 긴박한 상황을 강조해 줍니다. 곧 그분께서는 미래가 아닌, ‘지금’ “오신다.”는 선포입니다.
사실, 이는 지금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곧 ‘두 번의 오심’ 사이에, 곧 이미 오신 ‘첫 번째 오심’과 다시 오실 ‘두 번째 오심’ 사이에는 ‘지금 여기에 눈에 보이지 않은 오심’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바로 지금 여기에 늘 오십니다.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기만 하면, 곧바로 우리에게로 들어오십니다. <요한묵시록>의 저자는 말합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셋째’로, 그분께서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세례자 요한과 그분과의 근본적인 차이가 드러납니다. 곧 ‘신원의 차이’뿐만 아니라, ‘사명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납니다.
세례자 요한은 비록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표시’로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결코 죄를 용서 할 수는 없었습니다.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은 하느님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단지 그는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준비를 시켰을 뿐입니다. 그는 성령을 불어넣을 그릇과 그 공간은 만들 수 있었지만, 그 그릇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은 오직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라는 말은 그분께서 ‘용서할 수 있는 분이요, 생명을 불어넣으시는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죄가 용서되고 하느님의 생명을 받는 것, 곧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오셔서 바로 그 일을 하실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사명이었다면, 예수님께서는 그 그릇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 그 사명이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정체성과 사명을 되새겨 보아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이미 세례 받은 이들’입니다. 그러니 이미 받은 그 “새로운 생명”과 “용서”를 선포하고 증거하고 전파해야 할 사명을 받았음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마르 1,3)
주님!
사방이 탁 트여 어디 하나 숨을 곳이 없는 곳,
발가벗겨진 광야로 불러내어 제 실상을 보게 하소서.
회개의 영을 불어 넣으시어 굽은 데를 곧게 하소서.
낮아지고 작아지고, 무력해지고 가난해지는 당신의 길을 걷게 하소서.
위하여 걷고, 함께 걷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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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0. 대림 제2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벌써 대림 초 두 개에 불이 켜졌습니다. 우리 마음도 그만큼 맑고 밝아졌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당신 사랑 안에 머물기를 원하십니다. 요한 15장9절을 보면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하십니다. 이 시간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는 은총을 청합니다.
국어 공부를 잘하면‘주제파악’을 잘하고, 산수공부를 잘하면 ‘분수’를 안다. 지리공부를 잘하면 ‘있어야 할 자리’를 안다. 는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주제파악을 잘한다는 것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자기의 능력과 분별력, 자신의 깊이를 아는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분수를 안다는 것은 자기 역할이 어디까지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자녀로서의 알맞은 처신입니다. 독일 속담에 ‘개구리는 금의자에 올려 줘도 다시 뛰어내려 연못 안으로 들어간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각자는 자기 자리가 있는 법입니다. 있어야 할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례자 요한은 주제 파악을 잘하였고 분수를 지켰으며, 있어야 할 자리에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이 많았고 그래서 그리스도라 사칭하고 사기 치며 돌아다니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마르1,7).고 말하며 자신을 확실히 낮추는 겸손함을 보였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를 따랐고 훌륭한 사람으로 여겼지만, 그는 결코 자신으로 말미암아 오실 주님이 가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요한이 분명히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분명 구세주가 아니었고 주님의 도구요, 연장이었습니다.
우리도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하고 내 역할이 무엇이며 또 어디까지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받는 사람입니다. 질그릇처럼 깨지기 쉬운 연약함으로 실수와 잘못을 범하고 살지만, 그것이 하느님의 사랑을 가로막지는 못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십니다. 죄가 있든 없든 개의치 않고 사랑하십니다. 그것을 안다면 나도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고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하느님의 선택받은 사람다운 처신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된 것은 나의 공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구원을 위한 신앙은 무상의 선물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역할이 분명해집니다. 이웃을 위한 구원의 도구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세상에 맛 들이지 않고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기뻐하시고 마음에 들어 하시는 곳에 서 있어야 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한껏 받들어 올리고 자신을 한껏 낮춤으로써 주님으로부터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11,11).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겸손함으로 주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2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도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2베드3,14) 하느님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주님 앞에 서 있는 나를 먼저 살펴야 하겠습니다.
1독서를 보면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곧 권능을 떨치며 오신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먼저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라,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사막에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거친 곳은 평지가 되고, 험한 곳은 평야가 되어라”(이사40,3)하고 외칩니다.
따라서 혹시라도 우리 마음이 광야요, 메마른 사막이라면 곧게 길을 닦아야 하고 서로 간의 골이 진 골짜기라면 메우고, 나를 높이는 교만함이 산과 언덕이라면 낮추고, 거친 마음이면 평탄하게 하고, 험하다면 평야로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할 때 “그분의 상급이 그분과 함께 오고, 그분의 보상이 그분 앞에 서서 온다”(이사40,10)는 은혜를 체험케 됩니다. 그러나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고 역할이 어디까지인지를 모르면 길을 닦을 수도 없고 골을 낮추거나 평야로 만들 생각 못하고 결국 주님 앞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의 자리에서 주제 파악을 잘해야 하고 분수를 지킬 줄 알아야 하며 있어야 할 자리를 분별해야 합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어머니는 어머니로서의 자리가 있습니다. 남편은 남편의 몫이 있고 아내는 아내로서의 몫이 있습니다. 자식은 자식으로서의 자리가 있고 부모는 부모로서의 자리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신앙인은 신앙인으로서의 자리가 있습니다. 성직자는 성직자로서, 수도자는 수도자로서, 평신도는 평신도로서의 고귀한 자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를 지킨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이 겸손이요, 사랑 안에 머무는 길이지만 때때로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두 마음을 품고 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신부가 성당에서 기도하고 있는데 머릿속엔 텔레비전 드리마의 내용만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결혼한 여자가 멋진 남자를 보고, 아, 내 남편이었으면 좋겠다. 아내가 있는 남자가 어떤 아름다운 여자를 보고 왜 내 아내는 저런 매력이 없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다고 해 보세요. 그 가정 안에 화목함이 있겠습니까? 내 자식은 왜 저 모양일까?....
혹 두 마음을 품고, 엉뚱한 것에 빼앗긴 마음이 있다면 마음을 돌려야 합니다. 빼앗긴 마음을 인정하는 것이 겸손이요, 그것이 회개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길을 곧게 하는 것이요,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겸손은 천국의 문을 열고, 교만은 지옥의 문을 연다.”고 하였습니다. 각자의 자리를 지키는 겸손함으로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고 또한 천국의 문을 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고 한 세례자 요한처럼 자신에 대해 자랑하지 않고 주님을 자랑하는 한 주간 되시길 바랍니다.
인생은 밥 먹는 시간보다 밥하는 시간이 더 길고, 돈 쓰는 시간보다 돈 버는 시간이 더 깁니다. 노력 없이는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 없는 법입니다. 사랑하며 사는 시간보다 미워하며 사는 시간이 더 길고, 만족하며 사는 시간보다 후회하며 사는 시간이 더 길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는 우리들을 위해서 참고 기다리시는 주님을 생각하면서 천상을 향한 삶의 태도를 새롭게 할 수 있는 은혜가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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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0. 대림 제2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LA ‘성 프란치스코 한인 성당’에 갔을 때입니다. 성탄을 준비하면서 구역장, 반장들과 함께 성당 대청소를 하였다고 합니다. 마침 독지가가 있어서 성당 친교실의 바닥을 새것으로 교체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저도 본당에 있을 때는 ‘대청소’를 할 때가 있었습니다. 부활절을 맞이하면서, 성탄을 준비하면서 대청소를 하였습니다. 평소에는 잘 하지 않는 곳까지 청소하였습니다. 성당 벽에 있는 ‘십자가의 길’ 기도를 청소하였습니다. 성당 입구의 성모상도 닦아 주었습니다. 성가대로 들어가는 입구도 청소하였습니다. 주일학교 교사들의 교리실과 학생들의 교실도 청소하였습니다. 물 호수를 뿌리며 성당 올라가는 계단도 깨끗하게 청소하였습니다. 이렇게 한 나절 청소를 마치면 여성 구역에서 국수와 막걸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성당을 깨끗하게 청소하는 것이 주님을 맞이하는 외적인 준비라면,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청소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탄판공’입니다. 어릴 때의 기억입니다. 성탄 판공이 되면 어머니는 내년도 ‘교무금’을 책정하였고, 본당에서 주는 ‘달력’과 ‘판공 성사표’를 받았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주신 성사표를 들고 본당에서 마련한 고백소에서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린 다음 차례가 오면 성사를 보았습니다.
성탄을 맞이하면서 성당을 청소하고, 판공성사를 보는 것은 ‘주님의 길’을 닦아 놓는 것입니다. 또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마태오 복음 25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그렇습니다. 참된 성탄의 준비는 가난하고, 굶주리고, 헐벗고, 병들고, 갇힌 이들의 손을 잡아 주는 것입니다. 그들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는 것입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라.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사막에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거친 곳은 평지가 되고 험한 곳은 평야가 되어라. 그분께서는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 슬픔과 절망의 골짜기를 메우는 것은 무엇일까요? 분열과 갈등의 골짜기를 메우는 것은 무엇일까요? 교만과 욕망의 언덕을 낮추는 것은 무엇일까요? 시기와 질투의 언덕을 낮추는 것은 무엇일까요? 슬픔과 절망의 골짜기는 위로와 희망으로 채우면 좋겠습니다. 분열과 갈등의 골짜기는 일치와 용서로 채우면 좋겠습니다. 교만과 욕망의 언덕은 겸손과 나눔으로 낮추면 좋겠습니다. 시기와 질투의 언덕은 인내와 관용으로 낮추면 좋겠습니다.
2년째 계속되고 있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오면 좋겠습니다. 3달 째 계속되고 있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오면 좋겠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이,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이 삶의 의미를 찾고, 세상사는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꿈을 꾸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되어서 이사야 예언자의 꿈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이제 누군가 그 일을 해야 합니다. 바로 우리들이 그런 일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2000년 전에 오셨던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이것이 언제가 오실 구세주를 기다리는 신앙인의 삶입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을 증언하는 우리의 행동입니다. 사회의 그늘에 있는 사람들,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 감옥에 갇혀있는 사람들, 외국인 노동자들, 누군가가 도와주어야만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위로를 받고, 희망을 볼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신앙인의 삶이어야 합니다. 우리들 모두가 하느님을 닮은 소중한 모상이라는 것을 생각하며, 모든 이들이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거룩하고 신심 깊은 생활을 하면서, 하느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날을 앞당기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러한 것들을 기다리고 있으니,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 그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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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0. 대림 제2주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대림 2주간의 주제는 ‘회개’입니다. 다시 말해 판공성사 시즌이 다가왔다는 말도 되고, 또 하나는 다가오는 성탄에 내 마음과 영혼을 다시금 정갈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들린다. 그러므로 그에게 나아가 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아라.”라고 말입니다.
죄를 고백하는 것은 무슨 뜻인지 알아듣겠는데, 세례를 받으라는 말은 잘 이해가 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죄를 고백한다는 것은 우리가 말하는 고백성사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으라는 말은 우리가 이미 받은 세례 때와 같은 마음으로, 같은 양심으로 그와 똑같이 새로 태어난 사람처럼 때 없이 되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죄를 고백하고 다시금 세례 때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기다리는 준비의 첫 번째 과정이며 이 과정을 다른 말로 ‘회개’라고 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하느님께 돌아서는 것이라고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단순히 마음의 변화를 불러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이나 삶의 방향이 하느님 쪽으로 향해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방향을 틀었다고 해서 하느님 쪽으로 가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금 엉뚱한 길로 접어들기도 하고 다시금 예전에 갔던 잘못된 길로 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겨울입니다. 매서운 바람 소리가 들리십니까? 비 오는 소리? 혹시 눈 내리는 소리를 들어보셨습니까? 조용히 듣고 있으면 이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조용히 있으면 또 들을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소리입니다. 우리의 삶이, 행동이, 마음이 잘못된 길로 갈 때 분명히 하느님은 자신의 소리를 들려주십니다.
조용히 하느님의 소리를 들으세요. 그리고 방향을 틀고 천천히 걸어가세요. 하느님 쪽으로요.
영원하지 않아서….
다이아몬드
골드
여러 가지 보석들….
이런 것들은 영원에 가까운 시간을
변하지 않아서 소중한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런데 반대 아닐까요?
영원하지 않아서 더 소중한 것 아닐까요?
오늘만 만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만남이 얼마나 소중할까요?
지금만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지금이 시각이 얼마나 소중할까요?
영원해서 소중한 것이 아니라
영원하지 않아서 소중한 것 아닐까요?
그대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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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0. 대림 제2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미국 레이더 기자에서 근무하는 어느 장교가 있었습니다. 그날 저녁에 근사한 파티가 있다고 해서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었지요. 그런데 한 사병이 레이더 스크린을 가리키면서, 그 안에 까만 점들이 가득 채우고 있음을 보고했습니다. 적 비행기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많은 숫자였습니다. 더군다나 미국을 상태로 이렇게 적 비행기를 보낼 나라가 없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이렇게 단정 지어 말했습니다.
“걱정하지 마라. 저것은 우리 비행기이다.”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었습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군 비행기 353대가 진주만으로 날아오고 있었던 것이고, 이렇게 레이더 기지에서는 1시간 전에 이미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곧바로 응전했으면 피해를 줄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장교의 안일한 생각에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만 했습니다. 자그마치 미군 3,000명 이상이 사망하고, 177대의 항공기가 파괴되었습니다.
“깨어 있어라.”(마르 13,35)라는 주님의 말씀을 다시금 바라보게 됩니다. 혹시 우리 역시 그 장교처럼 순간에 누릴 쾌락만 생각하면서 안일하게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과연 지금의 모습은 주님께서 보시기에 합당한 모습일까요?
안일한 마음을 벗어버리고, 주님을 바라보는 데 더 집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주님 뜻을 실천하면서 사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주님과 함께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세례자 요한을 만납니다. 그는 광야에 나타나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지요. 그가 이렇게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고 실제로 세례를 베풀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우리가 모두 철저히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 역시 철저하게 준비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를 떠받들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 더 편하고 쉬운 삶을 살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겸손을 갖추어 더 열심히 살았습니다. 성경은 그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들 꿀을 먹고 살았다고 전합니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위해, 그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엘리야 예언자처럼 옷을 입었던 것이었습니다. 또한 엘리야처럼 마지막 날을 준비하려고 순수한 음식인 메뚜기와 들 꿀을 먹었던 것입니다. 바로 제2독서에서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시듯,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너희는 주님의 길을 닦아라.”라고 명령합니다. 진정한 회개와 함께 주님의 뜻인 사랑을 실천하면서 지금을 살아야 합니다. 이런 생활을 통해서만 주님께 더 집중할 수 있으며, 주님과 함께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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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화가 날 때는 10까지 세어라. 화가 너무 많이 날 때는 100까지 세어라(토머스 제퍼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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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0. 대림 제2주일. 키엣 대주교님.
희망과 구원의 길
며칠 전 베트남 중부지방의 홍수로 인해 마을들이 고립되자 전국에서 구호의 손길을 보냈지만 길이 없는 곳은 이 조차 쉽지 않았습니다.
길은 사람과 사람을 만나게도 고립시키기도 합니다.
파괴된 도로는 사람과 사람을 단절시키지만, 고립된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고 재난에 빠진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이 닿게하는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 주는 희망이며 구원입니다.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물리적인 길도 필요하지만 마음의 길, 소통의 길, 영적인 길이 필요합니다. 마음의 길이 상처를 받은 사람은 사람들 속에 있어도 고독할 수 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아름다운 영적인 길이 필요합니다. 아직 주님을 못 만났다면 영적인 길이 구부러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하늘에 닿을만큼 높은 ‘오만’이라는 산 꼭대기에 올려져 있어 나의 부족함과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남을 용서하지도 않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모든 것을 갖고 싶어하는 ‘탐욕의 구덩이’와 같습니다. 불화와 질투, 의심의 구덩이들은 점점 깊이 파고 들어가 밖으로 나올 수 조차 없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왜곡된 길과 위선의 문, 양심이 결핍된 폐쇄된 문을 가지고 있어 다른 사람이 다가오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왜곡된 길은 나 자신은 물론 타인에게도 솔직하지 못하며 심지어는 주님에게도 진솔된 마음으로 다가가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의 영혼은 거친 파도처럼 울퉁불퉁합니다. 남의 비판을 거부하고 방어하기 위해 악한 마음과 잔인한 말로 점점 더 거칠어지고 있습니다. 뾰족한 산과 거친 파도, 탐욕의 구덩이들이 주님께서 오시는 길을 막고 있습니다.
오만한 자존심을 버리고 탐욕과 분열, 불화로 깊어진 구덩이들을 채워 반듯한 길을 만들어야 합니다. 열정과 욕망의 구덩이를 채우고 거짓과 위선으로 왜곡된 길, 잔인한 말과 행동으로 거칠어진 길을 반듯이 펴야 합니다.
마음의 길을 반듯하게 만들었다면 영적인 길도 새로워져야 합니다.
사막과 같이 나만의 고독, 마음 깊은 곳에서 홀로 주님을 만나고 주님과의 친밀함 속에 주님 인도의 은총을 받아야 합니다.
단순하고 소박한 삶, 자신의 부족함을 자각하고 주님께 용서를 청해야 함을 아는 겸손이 바로 구원의 길로 나아가는 출발점입니다.
메뚜기와 꿀만 먹고 살아가는 것처럼 스스로 고행을 통해 몸 속 깊이 뿌리박고 있는 나쁜 것들을 없애고 욕망을 억제함으로써 영혼의 부름에 따르는 삶을 영위해야 합니다.
대림시기에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살아간다면 우리 마음 속의 주님께 다가가는 길이 아름답게 다듬어져 주님을 맞이하는 영광스러운 성탄절이 될 것입니다.
주님, 저희가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저의 죄를 구원하여 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나의 영혼의 길은 지금 어떤 모습인지 돌아보십시오.
2. 세례자 요한이 제시한 것 중 대림시기에 내게 필요한 것은 무엇 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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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0. 대림 제2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라
-희망, 회개, 겸손-
“주여, 우리에게 자비를 보이소서,
또한 우리에게 구원을 주소서,”(시편85,8참조)
방금 우리는 대림 제2주일을 맞이하여 참으로 애절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의 자비를, 주님의 구원을 주십사 기도했습니다. 영롱하게 빛을 발하는 대림 촛불 둘이 주님 오심이 점차 가까워짐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시기는 누구나 시인이 되는 계절입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의 기쁨이. 대림의 희망이 예언자들처럼 우리를 사랑의 시인이, 사랑의 신비가가 되게 합니다.
어제 저는 강론을 통해 배움의 여정, 치유의 여정에 대해, 또 우리의 평생 스승이자 치유자이신 주님께 대해 나눴습니다. 오늘 한밤중 일어나 가톡을 열었을 때 뜻밖의 반가운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제 강론 끝부분이 인용되어 있었습니다. 팔십이 넘은 자매님이지만 늘 푸른 열정과 순수로 하느님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자매님입니다.
-“+찬미 예수님!
신부님, 매일의 강론 말씀은 제 삶의 길잡이입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희의 스승, 저희의 위로자, 저희의 치유자이옵니다.
저희의 사랑, 저희의 생명,
저희의 희망, 저희의 꿈, 저희의 기쁨,
저희의 길, 저희의 빛, 저희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하나되어,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아멘
대림 제2주일 우리가 기다리는 주님은 바로 이런 분입니다. 우리는 행복하게도 이미 이런 주님과 함께 살면서 동시에 이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삶의 광야에서 주님의 길을 닦으며 날마다 설레는 기쁨으로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한 주님의 말씀이 우리를 위로하고 치유합니다.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우리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예루살렘에게 다정히 말하여라.”
오시는 대림의 주님의 위로가, 기쁨과 평화가 우리에게 새로운 힘을 줍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우리를 찾아 오시는 대림의 주님을 실감나게 상징적으로 묘사하며 우리의 분발을 촉구합니다. 분연奮然히 일어나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각자 삶의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을 것을 촉구합니다.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라.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사막에 길을 내어라. 보라, 주 하느님께서 권능을 떨치며 오신다. 당신의 팔로 왕권을 행사하신다. 그분께서는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
바로 이런 착한 목자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시기의 우리들입니다. 탄생하실 우리의 착한목자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는 우리들입니다. 어떻게 은총의 대림시기, 우리 삶의 광야에 주님의 길을 잘 닦을 수 있을까요? 그 구체적 방법을 소개해드립니다.
첫째, 희망과 꿈입니다.
희망이, 꿈이 있을 때 자발적 기쁨으로 주님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희망과 꿈이 힘입니다. 희망과 꿈을 잃으면 살 수 없습니다. 타락과 유혹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라 주님 만날 희망이, 꿈이 우리를 기쁘고 행복하게 합니다. 우리의 궁극의 희망이자 꿈이신 주님이 우리를 하루하루 설레는 기쁨으로 살게 합니다. 오시는 주님이 바로 우리의 희망이자 꿈입니다. 제2독서 베드로 사도의 말씀이 참 적절한 답이 됩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거룩하고 신심 깊은 생활을 하면서, 하느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날을 앞당기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그분의 언약에 따라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날을, 이분을 기다리고 있으니, 티없고 흠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 그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
바로 주님이 새 하늘과 새 땅이요 우리의 궁극의 희망이자 꿈입니다. 바로 이런 새하늘과 새땅의 희망이, 꿈이 우리를 살게 하는 내적 힘의 원천이 됩니다. 이미 궁극의 희망이자 꿈인 새 하늘과 새 땅을 앞당겨 살고 있는 행복한 우리들입니다. 새하늘과 새땅의 희망과 꿈에서 샘솟는 평화와 기쁨이요 꽃처럼 피어나는 행복입니다.
둘째, 회개입니다.
오늘은 인권주일이자 오늘부터 대림 제2주간은 사회교리 주간이기도 합니다. 진정 생태적 회개, 사회적 회개를 통해 정의와 평화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이 되도록해야 하겠습니다. 바로 오실 우리의 희망이자 꿈이신, 새하늘과 새땅을 열어주시는 주님이 우리를 부단히 회개에로 이끌어 줍니다. 지칠줄 모르는 회개의 동력이 됩니다. 회개는 후회나 감상적 뉘우침이 아닙니다. 오시는 주님을 향하여, 맞이하며 우리 삶의 방향을,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이 회개입니다. 회개야 말로 영적혁명이요 끊임없이 날마다 회개의 여정에 충실해야 합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회개를 촉구하는 시적 표현이 참 멋집니다.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거친 곳은 평지가 되고, 험한 곳은 평야가 되어라.”
불평등의 골짜기는 모두 메꿔 평등으로 이끄는 회개요, 산과 언덕의 교만은 낮아지는 회개요, 거친 곳은 평지가 되고 험한 곳은 평야가 됨으로 정의와 공정, 사랑과 평화가 실현되는 회개입니다. 이런 외적 회개와 더불어 우리 내면의 평화와 안정을 상징하는 회개의 은총입니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같습니다. 모두가 순식간입니다.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를 위하여 참고 기다리십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십니다. 회개하여 매일 새롭게 사랑의 삶을 살라고 연장되는 날들입니다. 살아있을 때 회개와 사랑, 찬미와 감사, 기도와 공부이지 죽으면 모두가 끝입니다. 그러니 살아 있을 때 아까운 시간과 정력 낭비하지 말고, 회개하고 사랑하고, 찬미하고 감사하고, 기도하고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겸손입니다.
회개의 참 좋은 열매가 겸손과 온유입니다. 광야의 의인이자 예언자 세례자 요한이 그 모범입니다. 결코 시류와 영합된 괴물같은 모습이 아닙니다. 광야 여정, 세상 것들에 중독되다 보면 괴물도 폐인도 되기 십중팔구입니다. 참 건강한 영혼의 사람, 세례자 요한은 겸손의 전형입니다. 요한의 절제와 극기의 겸손하고 단순소박한 독야청청한 삶의 모습이 우리에겐 신선한 충격이요 우리를 회개에로 이끌어 겸손하게 합니다.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둘렀으며,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다.’
말그대로 무공해의 삶이요 생태적 회개와 자연친화적 삶의 모범입니다. 이어지는 고백에서 그의 겸손한 모습이 또 우리에겐 신선한 감동입니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의 존재이유이자 전부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을 떠난 세례자 요한은 상상할 수 없듯이 예수님 떠난 우리도 상상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바로 자기가 누구인지 아는 것이 겸손이요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 거울에 투명히 드러나는 참나의 얼굴입니다.
그러니 우리 삶의 광야에 주님 오실 길을 닦는데 회개와 겸손보다 더 좋은 수행은 없습니다. 우리의 궁극의 희망이자 꿈이신 주님은 끊임없이 우리를 회개와 겸손으로 이끄십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주님과 함께, 우리를 향해 오시는 주님을 향해 길을 닦으며 마중 나가게 합니다. 끝으로 “詩가 찾아 왔네, 나를!” 아름다운 자작시를 나눔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참 아름다운 시이기게 "시"는 "주님"으로 바꿔 읽어도 좋겠습니다. 늘 읽어도 늘 좋은 그리스도왕 대축일 때 주님께 바쳤던 헌시獻詩입니다.
“詩가 찾아 왔네
나를!
은총처럼 사랑하는 詩가
가슴 설레게 하는 아름다운 詩가
나 외로울 때, 그리울 때, 기다릴 때 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참 반가운 손님, 참 기쁜 선물, 참 좋은 연인, 참 좋은 친구인 詩
늘 詩를 생각하며 詩와 함께 살아왔고 살고있고 살것이라네
詩덕분에 하루하루 날마다 늘 평생 한결같이 살아왔네
詩없이 이 삭막한 광야여정 무슨 맛, 무슨 기쁨, 무슨 재미로 살 것인가
눈이 열리니 온통 詩인 천국이라네
세상에 나보다 평화롭고 자유롭고 부요하고 행복한 사람은 없을 것이라네
나 언제나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예수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살아가는 행복한 하늘 나라의 삶이라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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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0. 대림 제2주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 앞서 나에게>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마르코 1,3)
내가 가야 할
믿음의 길께서
나에게 오시려
당신 앞서 나에게
믿음의 길이
되어달라고 하시니
나 기꺼이
믿음의 길이 되리라
내가 가야 할
희망의 길께서
나에게 오시려
당신 앞서 나에게
희망의 길이
되어달라고 하시니
나 기꺼이
희망의 길이 되리라
내가 가야 할
사랑의 길께서
나에게 오시려
당신 앞서 나에게
사랑의 길이
되어달라고 하시니
나 기꺼이
사랑의 길이 되리라
내가 가야 할
정의의 길께서
나에게 오시려
당신 앞서 나에게
정의의 길이
되어달라고 하시니
나 기꺼이
정의의 길이 되리라
내가 가야 할
진리의 길께서
나에게 오시려
당신 앞서 나에게
진리의 길이
되어달라고 하시니
나 기꺼이
진리의 길이 되리라
내가 가야 할
자유의 길께서
나에게 오시려
당신 앞서 나에게
자유의 길이
되어달라고 하시니
나 기꺼이
자유의 길이 되리라
내가 가야 할
해방의 길께서
나에게 오시려
당신 앞서 나에게
해방의 길이
되어달라고 하시니
나 기꺼이
해방의 길이 되리라
내가 가야 할
평화의 길께서
나에게 오시려
당신 앞서 나에게
평화의 길이
되어달라고 하시니
나 기꺼이
평화의 길이 되리라
내가 가야 할
살림의 길께서
나에게 오시려
당신 앞서 나에게
살림의 길이
되어달라고 하시니
나 기꺼이
살림의 길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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