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비탈길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이성계에게는 초취(初娶)부인으로 한씨가 있었다. 이 한씨는 이성계의 조강지처(糟糠之妻)였으므로 피차 나이도 비등하여 이 성계가 오십고개에 이르렀을 때는 한씨도 오십고개에 이르러 있었다. 한씨 역시 청춘시절에는 남만큼 고와 남에게 밉다 소리를 듣지 않고 지냈 고 또 한씨에 대한 이성계의 사랑도 두터웠다. 그리하여 그들의 슬하에는 육남 외에 이녀까지 두게 되었다. 그러나 한씨는 나이가 많아 여자로서의 미(美), 여자로서의 색향(色香)이 떨어지고 늙기 시작했다. 그런데 또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병 저병도 생 기게 되자 한씨에 대한 사랑이 좀 식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성계는 아름다운 강처녀(康處女)를 맞아 경처(京妻)를 삼은 것이다. 강처녀가 경처로 들어와 이성계를 섬긴 것도 어느덧 십년이 가깝게 되어 슬하에는 이남 일녀가 있었다. "대감! 함흥에 계신 어른이 요즘 병환으로 고생하신다던데 알고 계십니 까?" 하고 물었다. 함흥 어른이란 물론 한씨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알고는 있지. 그대는 어떻게 알았소?" "사람의 왕래가 빈번한데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 사람의 병은 지병(持病)이나깐 그러다 죽고 말 것 같애. 하여간 걱정 이 되는군!" 강씨는 이 말을 듣고 "그러면 한 번 내려가 문병하시지요." "글세? 요즈음 국사가 너무 다난해서 몸을 뺄 수가 없는걸." "그러면 어찌하실 작정이시오? 첩도 대감을 따라가 문병하고 싶은데 요..." 이성계는 이 말을 듣고 뭣인가를 생각하고 있다가 말을 이어 "그대와 동반하여 갈 것은 없어. 가면 나혼자 가는 게 좋을 성싶어." 이성계는 동반해 가는 것을 거부하였다. "왜요?" "왜요가 뭐요. 깊이 생각해 보면 알 일이지." "그건 첩도 알아 차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해서 문병을 안할 수야 있습 니까? 첩은 저대로의 도리는 차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말만은 옳아! 꼭 문병을 하려거든 혼자 가보시오. 나는 그대와 동반해 가기가 싫어서 하는 말은 아니니까..." 강씨는 이성계가 말한 것을 곰곰 생각해 보았다. 강씨는 결국 자기가 천 생의 요염(妖艶)을 지니고 이성계의 경처로 들어와 그의 사랑을 독차지하 고 지내는데다 나이가 젊어 장래가 자기 것이 될 것이므로 한씨가 자기를 환영하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다가 같이 가게되면 한씨 의 마음이 한층 더 산란해지겠으므로 이성계가 동반해 문병하는 것을 기피 한 것으로 생각했다. 정실부인 한씨는 원래 현숙한 부인이었다. 그러나 나이가 늙어 이성계의 사랑이 식어지자 질투의 싹이 트기 되었고 따라서 강씨를 사랑의 도둑, 권 세의 도둑으로 보게 되었다. 그러나 강씨는 요염만 지닌 사람이 아니었다. 부덕(婦德)도 남만 못지 않 게 지닌 사람이었으므로 정실 한씨를 형이나 어머니같이 생각하고 틈없이 지내기를 바랐다. 이런 까닭으로 해서 강씨는 이성계와 동반해 문병할 것 을 말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강씨는 문병문제를 가지고 이성계를 괴롭히 기 싫어서 "대감, 대감께서 첩과 동반하는 것을 싫어하시는 뜻은 대강 짐작해 알겠습 니다. 첩은 동반문병하는 것을 단념하고 기후를 보아 혼자서 문병하겠습 니다. 그러나 대감만은 빨리 내려가셔서 문병하시는 게 좋을 성싶습니 다." 라고 말을 했다. 이성계는 이말을 듣고 "이젠 나의 심중을 안 모양이구먼! 그럼 틈을 보아서 내려가 문병하기로 하지. 지금 형편으로는 틈을 낼 수가 없어!" 대답하자 강씨는 "되도록 틈을 내셔서 내려가 보세요. 그렇지 않으면 부인께서 첩에게 미 쳐서 조강지처를 돌보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실 것입니다. 이를 깊이 생각 하시고 빨리 내려가 보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하며 안타까이 굴었다. "알겠어. 속히 내려가기로 하지. 우선 급한 일만 처리하고 사, 오일 후에 내려가겠소. 이제부터 그 이야기는 치웁시다." "그런데 대감, 끝으로 한 말씀 여쭈어 둘 것이 있사온데 좀 들어주세요. 한씨 부인께서는 저를 사랑이 도둑, 권세의 도둑으로 보시는 것같이 느껴 지는데 첩의 나이 젊은 탓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나 첩은 사랑의 도 둑이나 권세의 도둑이 되려고 대감을 모신 것은 아니옵니다. 첩의 이 심중 을 살피셔서 모든 사람의 말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해 주시면 한이 없겠습니다." 강씨는 이와같이 말을 하고야 이성계를 자리에 들어 쉬게 하였다. 한씨 부인 문병문제가 있은지 한 엿세쯤 돼서 이성계는 함흥으로 내려갔 다. 그는 함흥에 도착하여 종자(從者)를 앞세우고 고향집으로 들어섰다. 고향집 사람들은 "아버지 오셨네!" "대감 오셨네!" 하며 반가이 맞이하였으나 부인만은 병으로 나오지를 못했다. 이성계는 행장을 풀어 놓은 후 부인의 병석으로 나아가 병세를 물었다. 부 인은 사람의 부축으로 간신히 일어나 "대감! 어떻게 내려오셨습니까? 국사에 몸을 빼실 수 없을 텐데... 정말 고마워요. 이젠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하고 인사를 하였다. 이성계는 부인의 손을 잡고는 "벌써 내려오려고 하였지만 요즘의 국정이 하도 문란해서 이제야 간신히 틈을 얻어 내려오게 된 것이요. 이를 양해하고 용서해 주오. 그런데 병 세는 어떻게 돼가오? 몹시 수척해졌구료!" 위로했다. 한씨 부인의 병은 악성 위장병이었다. 그래서 간신히 미음이나 마시고 오 늘까지 목숨을 이어 온 것이다. 그런데 요즘에 이르러서는 병이 더욱 악 화되어 미음도 먹을 수가 없어서 사경(死境)에 빠져 있었다. "위장에 무서운 병이 생긴지가 오래 되었어요. 그래도 밥을 먹고 지냈는 데 요즘에 이르러서는 밥은커녕 미음도 먹을 수가 없으니 어찌합니까? 명 의(名醫)란 명의는 모두 청하여 진료에 힘써 보았으나 그들도 그저 난치의 병으로 돌리고 말더군요. 그래서 이꼴이 되어 버렸어요." "그것 참 큰일났구료. 미음도 먹지를 못한다니..." "먹을 것을 많이 두고서도 굶어 죽게 되니 그게 원통하군요. 그리고 다음 으로는 대감의 앞날을 못보고 죽게 될 테니까 그것이 한이 됩니다. 아마 복이 그만인가 보아요. 지금 형편 같아서는 더 살지 못할 것같이 생각되 는데 어떨는지..." "너무 낙담할 것은 없소. 금방 죽을 병도 거뜬히 낫는 일이 있으니까... 내 서울로 돌아가면 널리 명의를 구해 보내겠으니 좀 마음을 굳게 가지시 오." 한씨는 이 말을 듣고 눈물을 머금었다. "대감 고맙습니다. 그런데 첩은 대감께 청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 은 신정(新情)도 좋지만 구정(舊情)을 잊지 마십사 하는 것입니다. 이것 이 첩의 오직 하나의 원이올시다." 한씨는 이렇게 말하고 더 앉아 있을 수 없어 자리에 눕고 말았다. 이성계는 한씨의 병세가 자못 위독했으므로 며칠을 두고 한씨의 병석 곁에 서 시간을 보냈다. 이성계의 몸은 한가한 몸이 아니었으므로 처음 생각으 로는 하루나 이틀쯤 사저(私邸)에 묵으면서 간병도 하고 위로도 하려고 작 정을 했으나 막상 와본즉 인정상 이틀쯤 있다가 돌아갈 수가 없었다. 그 리하여 그는 칠일이나 묵으면서 한씨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한씨는 뼈만 남은 몸에 정신이 좀 돌면 이성계를 찾으면서 "이렇게 오래 계실 수 있으세요? 첩은 얼마든지 계셔 주시면 좋지만 대감 의 처지가 그렇지 못하니 하루바삐 돌아가세요. 나라와 백성이 대감을 기 다리고 있을 텐데요." 이성계도 국사가 몹시 궁금하여 간병하는 사람들을 불러놓고 "나도 너희들과 한가지로 병석에서 떠나지 않고 싶으나 이 나라의 정사(政 事)가 그러하지 못하니 내일 아침엔 서울(당시의 서울은 개성)로 돌아가야 하겠다. 여전히 간병(看病)에 힘써 다오." 한씨를 부탁한 후 "부인, 항상 마음을 편안히 갖도록 하오. 천우(天佑)와 신조가 있어 부인 을 살게 하리다." 하고 부인을 위로하였다. 다음날 아침 이성계는 섭섭해 하는 부인에게 작별을 고하고 종자와 함께 말을 타고 함흥을 등졌다. 서울로 돌아온 이성계는 강씨의 마중을 받았다. 그날밤 강씨는 이성계에 게 한씨 부인의 병세여하(病勢如何)를 물었다. "대감! 부인의 병은 대체 무슨 병인가요?" "위장병인데 악성인 모양이야." "요즘의 증세는 어떠세요?" "요즘의 증세는 미음도 먹을 수 없는 형편이더군." "그러면 큰일났습니다. 먹는 병은 살 수 있지만 못 먹는 병은 죽게 되는데 참 큰일났소. 피골이 상접해 있던데." "말은 천하의 명약, 명의를 구해 보내겠다고 했지만..." 이때 강씨는 정색을 하고 "대감, 잘못하면 대감께서 홀아비가 되실테니 살릴 방법을 연구해 보십시 오.""내가 홀아비가 돼? 왜? 그대가 엄연히 내곁에 있는데 그건 농이겠지. 하여간 살려야 하겠는데, 걱정이야." 강씨는 이말을 듣고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있다가 "이젠 첩도 한 번 내려가 문병하여야 하겠는데 어찌 생각하시나요?" "문병하는 게 도의상 옳긴 옳지! 그런데 혼자서 갈 수 있겠어?" "왜 못가요?" "그러면 함흥길에 익숙한 가마잡이와 비복(婢僕)을 데리고 가도록 해보오. 언제쯤 갈 작정이요?" "아직 내려갈 날짜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러면 잘 됐소. 내가 오늘부터 열흘 안으로 명약을 구해 볼 테니까 그것 을 가지고 가오."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강씨는 이와같이 대답하고 이성계가 약을 구해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성계가 서울로 돌아온지 열흘이 채 안 돼서 한씨 부인 사망의 기 별이 왔다. 이성계는 서울집 사람들을 모아놓고 "한씨 부인은 오랫동안 숙환(宿患)으로 고생하다가 공양왕(恭讓王) 삼년 신미(辛未=西紀 1391) 구월 이십삼일에 오십오세를 일기로 사저에서 사망 하였다." 고 알려 준 후 분상(奔喪)할 준비를 분부했다. 분상 준비가 대강 끝나자 이성계는 시각을 다투어 강씨와 같이 종자를 데 리고 함흥으로 내려가서 장례(葬禮)를 치르고 돌아왔다. 이때부터 강씨는 이성계의 부실(副室)로 만족하러 들지 않았다. 어느날 강씨는 이성계의 기색을 유심히 살피면서 "이젠 또 장가를 가셔야 하겠죠? 사대부집 규수에게..." "뭐라구? 그대가 있지 않소? "저 같은게 어떻게 정실이 될 수 있어요? 다시 장가를 가셔야 합니다." "왜 그런 말을 하는 것이요. 무슨 생각으로... " "생각은 무슨 별 생각일라구요. 순서가 그래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그러나 나는 여생을 그대와 살다 죽을 테니까 더 말할 것 없소. 그만하 면 내 속을 알겠지?" 강씨는 그 말을 듣고 싶어서 한 말이었으므로 성계의 말이 이렇게 나오자 더 말을 걸지 않았다. 이때부터는 강씨는 정말 정실부인으로, 이성계의 본부인으로 행세하게 되 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