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백(白/0) 머리 두(頁/7) 메 산(山/0) 돌 석(石/0) 갈 마(石/11) 칼 도(刀/0) 다할 진(皿/9)]
만주와 함경도 사이의 산 白頭山(백두산)은 우리나라 제일의 산일뿐 아니라 민족의 靈山(영산)이다. 檀君(단군)신화에 등장할 때는 太白山(태백산)으로 그 정기를 타고난 朱蒙(주몽)과 大祚榮(대조영), 李成桂(이성계) 등은 새 나라를 세웠다. 2744m 높이의 宗山(종산)이 不咸山(불함산)이나 長白山(장백산) 등으로 불리며 智異山(지리산)까지 白頭大幹(백두대간)으로 뻗어 내렸다. 이처럼 신성시된 백두산이 그 이름대로 등장한 것은 高麗史(고려사) 이후부터라 한다. 여기에 백두산을 더욱 널리 알리게 된 것은 그곳의 돌을 칼 가는 데에 다 닳게 한다는 南怡(남이, 1441~1468) 장군의 ‘北征詩(북정시)’에 의해서가 아닐까 한다.
모두들 명시로 외우거나 읊은 적이 있을 것이지만 전문을 다시 보자. ‘백두산의 돌은 모두 칼을 갈아 없애고(白頭山石 磨刀盡/ 백두산석 마도진), 두만강의 물은 모두 말을 먹여 없애네(豆滿江水 飮馬無/ 두만강수 음마무), 사나이 스물에 나라를 태평스럽게 못하면(男兒二十 未平國/ 남아이십 미평국), 후세에 어느 누가 대장부라고 일컬으리(後世誰稱 大丈夫/ 후세수칭 대장부).’ 산에 있는 돌을 칼 가는 데에 다 써 버리겠다는 과장이 있는 한편 사내대장부다운 호기와 큰 포부, 그리고 패기가 잘 드러나 있어 더욱 애송됐을 듯하다.
오늘날 북한강의 남이섬으로 영원히 남아 있어도 남이 장군의 일생은 굵고도 짧았다. 太宗(태종)의 딸 貞善(정선)공주의 손자로 태어나 일찍 무관으로 급제하고 변방의 여진족을 정벌하여 병조판서에 오르는 등 초기에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世祖(세조) 말년 남이가 혜성을 보고 묵은 것이 가고 새 것이 온다고 말한 것이 권신들에 의해 역모로 몰려 28세에 죽음을 당했다. 이보다 남이 장군의 세 번째 시구 男兒二十 未平國(남아이십 미평국)을 男兒二十 未得國(남아이십 미득국)으로 고친 柳子光(유자광)의 음모라고 더 잘 알려져 있다. 실제 이 구절은 후세에 男兒二十 未平賊(남아이십 미평적)으로 인용된 문집이 많아 억울함을 더한다.
백두산은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이 평양에서 정상회담을 한 후 항공편으로 오른 적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우리 국민들은 민족의 영산을 탐방하려면 중국을 거쳐 올라야 한다. 그래도 天池(천지)의 일부분만 접한다. 좀 더 자유롭게 북이 개방되어 육로로 관광하는 길이 열려야 그 옛날 남이 장군이 호기롭게 외쳤던 백두산 돌과 두만강 물을 만져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