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남아공월드컵에서 16강, 아니 8강에 올라갈 뻔했던 한국 대표팀이 유일하게 승점 3점을 챙긴 첫 시합 결과다. 16강 토너먼트 결과까지 포함해서 1승 1무 2패(6득점 8실점)의 외형적인 기록을 남겼다. 한국 국가대표 축구팀의 월드컵 도전 역사상 처음으로 나라밖에서 16강 토너먼트에 올랐다는 사실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 의미 자체를 높게 평가해야 한다. 축구팬들로부터 양 극단의 평가를 줄곧 받아왔던 허정무 감독의 공로를 분명히 인정해야 할 부분이다. 비교적 화기애애하게 선수단 분위기를 끌어올렸고 선수들에게 자신감을 많이 불어넣어주었고 즐기는 축구를 추구했다는 점을 높게 평가하고 싶다.
하지만, 실제 경기 양상에 감독의 의중이 얼마나 깊게 영향을 미쳤는가를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사실, 이 부분은 그들로부터 일정 부분 차단되어 있는 제도권 밖 우리들에게 분명히 한계가 있는 부분이다. 그저 추측할 뿐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사실과 상당히 다른 부분을 우리 일반 팬들이 바라보고 있는 점도 인정해야 한다.
곰곰 생각해 보니, 세트 피스 득점(이정수의 두 골, 박주영의 직접 프리킥 골) 말고는 뭐 그리 내세울 것도 없다. 캡틴 박의 훌륭한 드리블과 완벽한 마무리 골(vs 그리스)도 그리스 수비수 빈트라의 결정적인 실수로 시작되었고, 우루과이와의 16강 토너먼트에서 이청용이 머리로 만든 동점골도 일종의 세트 피스 득점으로 봐야 한다. 아르헨티나의 경기에서 나온 이청용의 만회골도 상대 수비의 실수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조직적인 공격 전술이 제대로 빛난 골은 사실상 없다고 봐야 한다.
그동안 우리 태표팀이 국제 대회에 나가서 세트 피스에서 위력을 드러내지 못했던 것을 감안하면 고무적인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추가골이 안 나온 것이 이상할 정도로 그리스와 우루과이 선수들의 다리를 후들거리게 만들었던 공격력을 감안하면 보통 이상의 점수를 줄 정도로 우리 대표팀은 이번 대회 네 경기를 통해 잘 한 편이다. 나이지리아,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서 수준 미달의 수비력을 드러낸 것이 마음에 걸리지만 말이다.
이처럼 득점이나 실점 결과만 놓고 한 팀을 평가하는 것은 정말 우스운 일이기 때문에 일정한 시간대별로 변화하는 포메이션을 펼쳐 놓으면 조금 달라 보이지 않을까?
이번 대회 유일하게 승리를 거둔 그리스와의 맞대결을 다시 곱씹어 본다.
그리스와의 첫 경기 한국 대표팀은 4-4-2 포메이션으로 시작한다. 염기훈이 박주영과 투톱을 이루기 보다는 조금 뒤로 처지거나 왼쪽 측면으로 빠지면서 '4-2-3-1'에 가까운 변화도 자주 눈에 띄었다. 하지만 문제는 수비형 미드필더 중 하나인 기성용의 패스 감각이 이 대회가 끝날 때까지 제대로 올라오지 못한 점이었다. 놓고 차는 킥 하나는 세계적인 수준에 올라 있다는 것을 이정수의 두 골로 분명히 입증했지만 움직이며 찔러주는 기술적인 부분은 몹시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 덕분에 김정우에게 더 주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다.
시작 후 15분까지의 한국 포메이션 변화.
그리스 선수들을 지우고 우리 선수들만 늘어놓고 보면 에스파냐 선수들의 공격적 흐름을 잘 흉내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비형 미드필더 둘(16번 기성용, 8번 김정우)이 중심을 잡고 그 앞에 있는 세 명의 공격적 미드필더(7번 박지성, 19번 염기훈, 17번 이청용)가 중원을 장악하고 있는 그림이 한 눈에 들어온다. 에스파냐의 무한 질주 '라모스'에 못지 않는 차두리의 22번이 눈에 띈다. 그러고보면 노련한 이영표가 뛴 왼쪽을 생각하면 우리는 에스파냐보다 좌우 균형이 더 안정된 팀으로까지 여겨진다. 에스파냐는 캅데빌라의 약간 부실한(반대편 라모스가 뛰고 있기에 상대적으로 더 그렇게 보임) 공격 가담을 짧고 날카로운 찔러주기를 바탕으로 페드로나 이니에스타가 메워주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더 그렇다.
1-0으로 앞서고 있는 상황에서 전반전 중반(16~30분)에 접어든 우리 선수들은 미드필더들의 간격을 조금 더 넓히며 비교적 여유있고 안정된 경기 운영 모드로 접어든다. 여기서 조금 아쉬운 부분은 차두리의 왕성한 움직임을 감안하여 이청용에게 좀 더 공격적인 주문을 걸어도 될만한 경기였다는 점이다. 물론, 사마라스나 세이타리디스가 그곳에서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조심스러운 판단이었겠지만 이 경기에서 사마라스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는 것(차두리 덕분이지만)을 생각하면 지나고 나서 전술면에서 아쉬움으로 남는다.
전반전 후반부(31~45분)의 양상은 그 이전 화면에 비해 박지성과 염기훈의 자리만 바뀌었을 뿐 선수들의 간격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옛 허정무 감독 시절이 떠오를 정도로 공격적 모험을 크게 걸지 않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스 선수들까지 포함된 후반전 초반(46~60분)의 양상. 이것만 놓고 보면 우리 선수 셋(박주영, 염기훈, 이청용)은 모두 오프 사이드 포지션이다. 그만큼 그리스 수비 라인이 밀고 올라와 동점골을 노리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이 시간대에 바로 박지성의 기막힌 추가골이 나왔다. 드물게 11번이라는 멋진 등번호를 달고도 가운데 수비를 맡은 빈트라의 떨어뜨린 고개가 다시 생각난다. 어설프게 수비라인만 끌어올린다고 동점골이 나오는 것이 아닌 것, 상대의 전반적인 전술 변화를 알고 이에 대응하는 역습 전술을 펼치는 것, 이것이 바로 축구라는 것을 잘 말해준 경기였다.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경우의 수를 조금 덜 따지며 편안하게 볼 수 있도록 추가골이 두 개 이상 필요했던 경기였지만 우리 코칭 스태프에서는 2-0으로 만족했나보다.
후반전 중반으로 접어들어서 61분부터 75분으로 이어지는 대목이 참 재미있게 그려져 있다. 박지성과 이영표가 버틴 오른쪽은 거의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6번 치올리스의 유니폼에 차두리의 유니폼이 가려져 있지만 그를 뭘로 보고 그 쪽만 고집했던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좌경화된 그리스는 비교적 좌우 균형이 잘 맞았던 우리를 이기기에는 모자라보였다.
그나마 그리스의 반격이 인상적으로 펼쳐진 후반전 중반 이후의 시간대(76~90분) 그림이다. 우리 선수들은 김남일까지 들어와 다시 중원을 든든하게 만들었고 그리스 선수들은 여전히 차두리 쪽만 고집하며 공격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결정력이 우리보다 모자랐기 때문에, 패스의 수준이 우리보다 역시 모자랐기 때문에 뜻을 이룰 수 없었던 것이다.
최근에 아시안컵 트로피를 만져본 적도 없는 한국이 유로 2004 우승 팀을 이겼다는 것만으로도 큰 사건이었던 이 경기는 포메이션 변화만 봐도 그 과정이나 결과가 어느 정도 드러났다고 할 것이다. 사실, 더 중요한 것은 흐름의 스포츠인 축구 경기에서 결정적인 순간에 팀 밸런스를 얼마나 힘있게, 또 전술적으로 유지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완승을 거둔 경기에서는 그런 것이 별로 눈에 띄지 않을 뿐이다.
... 다른 경기 자료는 다음 기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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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 감사합니다..^^...히딩크가 지적하였듯이 그리스전에서 우리가 공간활용을 잘 못했다고 비판을 하였죠...그리고 말씀하였듯이 그리스전에서는 상대가 쉽게 나왔기 때문에 우리가 쉽게 응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2-0이라는 상황이 그냥 그렇게 흘러갔다고 보입니다. 필드골이 없다고 해서 크게 잘못되었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골과 다름없는 찬스를 많았다는 것은 공격이 잘 이루어졌다고 보입니다. 다르게 생각하면, 공격찬스에 비해 득점이 유난히 세트피스에서 양산되었다고 봅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박주영 선수의 결정력이 조금 아쉽긴 했었고 전반전 중반에 페널티 박스 안에서 뒤에서 이청용 선수가 걷어채였는데도 심판은 PK 불지 않았던것도 많이 아쉬웠습니다. 운이 좀더 따라주었으면 대승도 가능했을텐데 하는 생각이 아직도 머릿속에 남네요.
좋은 글이네요 ^^ 잘 봤습니다.^^
좋은 글 잘읽었습니다^^
좋은 분석이네요. 저 역시 허감독께서 좀 더 적극적 운용을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