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밤입니다. 소생이 내달 펴내려는 책 <어머니>에 어찌어찌 선배와 친구에게 추천사를 부탁했지요. 그런데, 세상에나, 만상에나, 아래와 같이 추천사를 보내왔습니다. 두 분은 가히 대한민국의 문사文士입니다. 미리 공개해도 상관없을 듯하고 재미가 있어 전재합니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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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국밥 한 그릇
김택근(시인·언론인·<김대중 평전-새벽> 저자)
따뜻한 사람이다. 눈 오는 날 국밥집에서 만나고 싶은 사람이다. 그는 얘기를 돌려서 하거나 상대를 의식해서 복선을 깔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푸짐하게 털어놓는다. 겉멋이라고는 어디에도 붙어 있지 않다. 작가 최영록과 있으면 걱정이 없다. “거 아무 것도 아녀요” “별 거 아니랑개요”하면 그뿐이다. 막막한 일도 없어지고, 잘난 것들도 우리 발 밑에 깔렸다. 독재정권의 살기殺氣가 작은 일상에까지 스며 있을 때 그를 만났다. 신문기자, 그것도 뉴스의 무게를 달고 제목을 붙이는 편집기자로 만났다. 속이 훤히 보이는 관급 기사에도 제목만은 ‘다르게’ 달아보려고 애쓰던 시절이었다. 반듯한 기사에 정갈하고 우아한 옷을 입히고 싶었다. 편집기자가 자신의 제목에 자부심을 지니면 언로가 트인 괜찮은 세상이 아니던가. 소속사는 달랐지만 우리는 고민을 섞으며 절망을 덜어냈다. 최영록은 언론이 권력과 자본에 휘둘리는 현실을 아파했다. 처음 만나 대뜸 낮술로 거래를 텄고, 그 후 술집과 배드민턴장을 오가며 함께 30여년을 흘러왔다.
스무 해 전쯤인가 <백수의 월요병>이라는 책을 보내 왔다. 그가 글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 글들이 예사롭지 않음이 놀라웠다. 책을 받고 앉은 자리에서 독파했던 것 같다. 우선 재미가 있었다. 꾸밈이 없는데도 깊이가 있었다. 한겨울에 먹는 싱건지 맛이라고나 할까. 그의 글쓰기 출발은 호기심이다. 궁금한 것은 절대 묻어두지 않는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풍경이든 어디든지 찾아가 확인한다. 그는 사람 됨됨이를 제대로 판독하는 안목을 지녔다. 학식보다는 인품을 중시하며 좋은 사람을 만나면 존경심을 숨기지 않는다. 예를 갖춰서 감격한다. 인간을 감별하는 일은 어렵고 어찌 보면 무서울 텐데 그저 태연하다. 그는 고수이다.
임실 고향에 내려가 아버님을 모시고 산 지 4년이 넘는다. 늙으신 아버지와 등 굽은 고향을 바라보는 것은 쓸쓸했다. 하지만 그 속에서 ‘흰머리 소년’이 될 수 있었다. 낮에는 밭에서 농사를 배우고 새벽녘에는 흙 묻은 손으로 붓을 세웠다. 초보 농부의 밭작물은 신통치 않았지만 새벽 글밭에서는 무수한 영감이 솟아났다. 감수성에 흙이 묻으니 글이 실했다. 까치밥, 홍시, 절구통, 마루, 빗자루, 옥수수발톱…… 그리고 사람들. 그렇게 익숙해서 새로운 것들이 글로 여물었다. 최영록의 글은 쉽고 명료하다. 독자들을 편하게 인도한다.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목적지에 이른다. 그의 글은 담백하다. 특별한 향료를 첨가하지 않았고, 남들이 다반사로 뿌리는 조미료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가 비유로 든 일화들은 정사正史와 고전에서 퍼온 것들이다. 박람강기博覽强記의 실력을 지녔음에도 드러내지 않는다.
그는 생활글 작가, 생활칼럼리스트를 자처한다. 그저 살아가는 이야기를 쓸 뿐이라며 ‘시인도 소설가도 수필가도 되지 못함을 자책’하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문학은 살아가는 이야기가 아니던가. 그는 ‘생활문학’이라는 장르를 만들어 도식적인 장르에서 해방되었다. 덧붙여 그를 ‘사랑방 작가’라고 칭하고 싶다. 사랑방에 모인 사람들에게는 높낮이가 없다. 사랑방에서 피어나는 이야기꽃은 시들지 않는다. 그의 글에서 ‘인간 최영록’을 본다. 참으로 따스하다. 글을 읽으니 국밥 한 그릇 잘 얻어먹은 기분이다. 뱃속이 따뜻해진다. 맞다 그의 글을 읽으면 배가 든든해진다. 따뜻한 사람의 따뜻한 글을 권할 수 있어서 마냥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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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쩨쟁이’의 생활글
유영봉(전 전주대학교 교수. 한문학자)
“대개 멋을 뜻하는 ‘쩨’라는 단어는 아마도 전북지방의 독특한 방언일 듯하다. 어찌된 일인지 국어대사전이나 방언사전에도 보이지 않는다. ‘째’라고 실린 임실의 사투리사전을 봤지만, 언중言衆은 ‘쩨’를 훨씬 더 많이 쓰는 것같다. (중략) "그 친구, 쩨가 뭔지 아네" "진짜 쩨쟁이야"라고 할 때의 쩨는 어쩌면 ‘실속’이나 ‘풍류’라고 말할 수 있을 것같다. 내공이 깊거나 마음 깊숙이 인격이 숙성된 ‘된사람’을 진정한 쩨쟁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인용한 글은 저자 최영록 형의 쓴 <쩨 좀 그만 부려>의 한 대목이다. 이른바 그의 ‘쩨론’이다. 최형은 어느날 막걸리 한 잔을 나누는 자리에서 이 글을 쓴 동기를 술회했다. 충남 부여에 태를 묻은 내가 전주에 살면서 쩨라는 말을 ‘하도 자주, 더구나 자연스럽게 쓰길래’ 생각이 나 글을 썼다고 한다. 그후 나는 왜 ‘하도 자주, 자연스럽게’ 이 말을 썼을까, 곰곰이 생각해 봤다. 그 이유는 최형이 ‘진정한 쩨쟁이’이므로 나도 모르게 그 앞에서 쩨라는 단어를 자주, 아주 자연스레 구사했던 것이다.
최형이 진정한 쩨쟁이라는 사실은 그의 이력만 간단히 살펴봐도 단박에 드러난다. 최형은 본래 동아일보 기자였다. 당시 서슬 푸른 필봉을 기치로 삼던 신문사에 자랑스럽게 취직했건만, 세월의 흐름과 함께 언론이 본연의 임무와 소명을 잃어가는 기미를 드러내자 망설임없이 사표를 던졌다. 그의 부인이 “당신 일생에서 가장 잘한 결단”이라며 편을 들어줬다고 한다. 그후 최형은 우리의 모교인 성균관대에서 홍보일을 했고,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직장생활을 마무리했다. 이 과정에서도 그는 기름진 인문학적인 삶의 끈을 놓치지 않고, 언제나 ‘글 목걸리’와 ‘말 팔찌’를 차고 다녔다. 곳곳의 지면에 글을 싣고, 기회가 닿을 적마다 여기저기 인문학특강에 열을 올렸다. 2004년부터는 아예 ‘생활글 작가’를 자처했다. 그러던 중, 그의 생활글은 좋은 인연을 만나 부모님을 <인간극장> 5부작 주인공으로 모실 수 있었으니, 2017년 11월 방영된 <총생들아, 잘 살거라>가 그것이다.
백수가 내일모레인 노부께서 몇 년 전 부인을 잃고 홀로 고향집에 계신 게 안타깝고 안쓰러워 후다닥 서울생활을 접고 몇 해 전 고향으로 돌아와 농투산이로 변신했다. 그러나 펜을 잡던 손에 호미를 들었지만, 여전히 그의 인문학적인 윤택한 삶은 이어지고 있다. 아직도 눈이 밝은 그가 아호 우천愚泉를 보듬고 틈틈이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있다. 어디 그뿐만이랴? 보고 싶은 사람이 생기면 얼른 찾아가고, 보고 싶은 게 있으면 후딱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게다가 새롭게 손을 본 고향집에 당호 애일당愛日堂과 구경재久敬齋 편액을 턱허니 내걸었으니, 그의 효심과 우정론은 숫제 말할 것도 없다. 참말로 쩨를 부려도 지나치게 부린다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제 사람 좋아하고 술 좋아하는 이 쩨쟁이가 책을 낸다고 한다. 그를 위해 선뜻 붓을 들었지만, 그의 쩨를 결코 쫓아가지 못한다는 사실이 유감이다. 그러나 아무튼, 여하튼, 단언컨대, 그가 내 친구이자 진정한 쩨쟁이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친구 축하하네! 오래오래 얼굴 봄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