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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제환의 ‘르네상스 예술 여행[ 1회~13회]
1. 르네상스 예술은 교회 장식에서 탄생
1200년대 초반 이탈리아반도 북서부에 위치한 조그마한 도시 피렌체에는 양모와 직물 제조업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당시 피렌체 인구는 3000명이 채 안 됐다. 피렌체 외곽에서 농사를 짓던 농민들은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들었다. 금세 3만명이 넘었다. 도시 상인들은 이들에게 일자리를 줬고, 일자리를 찾지 못한 사람에게 무료로 빵도 나눠줬다. 피렌체 시민들은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주인이 과거처럼 교회가 아니라, 조그마한 상점이나 공장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침 ‘카타리파(Cathari)’라는 이단종교가 피렌체에서 급속하게 확산되기 시작한다. 카타리파는 지나치게 부를 축적한 당시 교회를 부정하고, 타락한 성직자를 조롱거리로 만들었다. 가난한 피렌체 시민들뿐 아니라 부자들도 카타리파를 열렬하게 지지했다.
이는 교회 수장이었던 교황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십자군 전쟁으로 교황청 금고도 텅텅 비어 있던 차였다. 교황은 카타리파를 종교재판으로 단죄하고, 부패한 피렌체 교회와 성직자들을 개혁하기로 마음먹었다. 교황은 우선 교황에게 충성을 맹세한 프란체스코 수도회와 도미니크 수도회의 정관을 부랴부랴 인정하고 이 수도사들을 피렌체에 파견했다.
<figcaption> 그림①. 화가 시모네타가 금박을 사용해 화려하게 그린 ‘수태고지’. 천사가 성모마리아에게 잉태 소식을 전하는 내용이다.</figcaption>
문예부흥의 시대로 알려진 ‘르네상스(Renai ssance)’시대가 꽃을 피우기 약 100여년 전쯤 피렌체의 모습은 이랬다.
무작정 파견돼 도시로 들어간 수도사들은 먹고살기가 막막했다. 거리에서 설교를 하고 장례식에 가 기도도 해주면서 하루하루 살아갔다. 그야말로 구걸이었다. 그래서 탁발 수도사(Mendicant Orders)라 불렀다. 어려움은 그뿐 아니었다. 교황이 이들 수도사에게 거처라며 정해준 수도원은 허름하고 도시의 성 밖 상습 침수구역에 위치해 있었다. 병들고 죽어가는 수도사가 늘기 시작했다.
교황으로서 무슨 대책이 있어야 했다. 그 대책이 바로 성직자가 아니더라도 신심이 두터운 평신도들을 수도원 지하에 묻힐 수 있도록 허가해준 것이다. 이때가 1244년이다.
신심이야 어찌 됐든 부유한 상인들은 수도원에 기부를 하고 사후 자신의 시신을 수도원 지하에 안장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상인들이 몰리자 수도원에 또 하나의 고민이 생겼다. 이리되면 수도원은 시신만으로 가득 찬 황량한 공동묘지로 변할 것이 아닌가. 수도원도 묘수가 필요했다. 그 묘수는 바로 ‘교회 후원권(Jus Patronatus)’을 판매하는 것이었다.
중세시대부터 자신의 토지에 교회를 세우면 그 교회에서 나오는 수입의 일정 부분은 설립자 몫으로 돌아갔다. 그 수익권은 자손에게 세습이 가능했다. 이런 권한을 교회 후원권이라 한다. 피렌체의 탁발 수도사들은 이 교회 후원권을 활용했다. 우선 교회에 시신을 안장하기로 결정한 가문에 중앙제단(High Altar)의 옆면을 확장하고 소규모의 공간으로 분할해서, 선조들 영혼을 기리는 예배당으로 분양해주기 시작했다. 부유한 상인들은 앞다퉈 이 예배당을 예약했다. 몇 개 안 됐기 때문에 경쟁도 치열했다.
수도원은 예배당을 소유한 가문에 또 하나의 임무를 부여했다. 예배당 내부를 장식해야 하는 의무다. 만약 이 의무가 지켜지지 않으면 예배당 소유권은 다른 가문으로 넘어갔다. 예배당 장식 의무는 르네상스시대 예술이 탄생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그림②. 아기 예수가 오른손에 검은 방울새를 쥐고 있다. 앞으로 닥칠 예수의 수난을 의미한다
일반 신도들이 볼 수 있는 성당 내부에 예배당을 소유한 가문들은 예배당을 장식하기 시작했다. 이들에게 예배당은 자신의 사회적 위상을 드러내는 매개체가 됐다. 가능하면 화려하게 장식하려 했고, 당연히 유명한 화가에게 주문이 몰렸다.
마침 아시시(Assisi)에 있는 프란체스코 수도원에서 명성을 떨쳤던 ‘조토(Giotto, 1267~1337년)’와 그의 제자들에게 재능을 발휘할 기회가 찾아왔다.
카타리파가 부정한 것은 교회 재산뿐이 아니다. 이들은 인간의 원죄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수난을 당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부정하고 나섰다. 낯선 도시에 복음을 전하러 온 탁발 수도사들에게 그것은 커다란 위협이었다.
평신도에게 예수의 신성을 전달해주는 신앙적 과업이 시급했다. 수도사들은 상인의 후원으로 예배당을 장식하면서, 그림으로 성경의 내용을 전달하기 시작한다. 당시만 해도 라틴어로 된 성경 내용을 평신도들이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에 가장 흔히 등장하는 작품의 주제는 ‘성모와 아기 예수’다. ‘성모자’라고도 불린다. 이 작품은 곧잘 천상에 계신 예수의 어머니로서 인간 편에 서서 자비를 구하는 장면으로 해석된다. 그래서 그런지 작품마다 아기 예수보다 인자한 성모마리아의 표정과 구도에 더 주안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그림②에서는 아기 예수의 형상에 더 주목해야 한다. 아기 예수의 오른손을 보면 자그마한 새를 쥐고 있다. 이 새는 검은 방울새로 성경에서는 수난을 의미한다.
지금은 인성을 갖고 태어났지만, 성인이 되면 인간의 원죄를 구원하기 위해 수난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당시 수도사들은 ‘성모와 아기 예수’라는 작품을 통해 아기 예수가 태어나면서부터 신성을 지녔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다.
이 시기에 자주 등장하는 또 하나의 작품은 ‘수태고지’다. ‘수태고지’는 마리아가 인간의 성적 교합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아기 예수를 임신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화가 ‘시모네타’가 금박을 사용해 화려하게 그린 ‘수태고지’라는 작품에 이 메시지가 잘 드러나 있다(그림①).
작품 왼편을 보면, 하느님의 은총을 전하러 지상에 내려온 ‘세라핌’이라는 천사가 순결을 상징하는 백합을 들고, 성모에게 아기 예수의 잉태 소식을 전달하는 형상으로 묘사돼 있다. 성모는 ‘성모와 아기 예수’에 등장하는 인자한 성모마리아 모습과는 달리, 갑작스러운 잉태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는 듯한 모습으로 그려졌다.
수도사들은 이제 막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해오면서 성경의 내용을 모르고 지내던 시민들에게 복음을 전달하기 위해 이처럼 예술작품을 활용했다. 이렇게 르네상스시대의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르네상스라는 시대가 탄생하는 종교와 세속의 역사적 과정을 읽어내야 한다. 그래야 온전한 감상이 가능하다.
다음에는 미켈란젤로 광장으로 올라가 보려고 한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청동상과 중세의 비밀을 아무도 손대지 않고 그대로 간직한 ‘산 미니아토 알 몬테(San Miniato al Monte)’ 수도원이 있는 곳이다.
[출처] : 성제환 원광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성제환의 르네상스 예술여행> / 매경이코노미
2. '산 미니아토 알 몬테(San Miniato Monte)수도원
- 피렌체의 가장 높은 수도원, 그 숨겨진 비밀
피렌체에 도착해 제일 먼저 가보고 싶었던 곳이 ‘산 미니아토 알 몬테(San Miniato al Monte)’ 수도원이다. 이 수도원에는 피렌체에서 가장 부유했고, 막강한 권력을 지녔던 피렌체 주교의 영욕의 세월이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 르네상스라는 새로운 시대가 탄생하기 직전의 시대적 배경이기도 하다.
수도원 깊숙한 책장에서 공개되지 않은 기록들을 볼 수 있을까 아니면 수도사들 사이에서 은밀히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지 않을까 해서, 한국에서 출발하기 전 수도사와 미리 면담 약속을 잡았고 다행히 만나 뵐 수 있었다.
산 미니아토 알 몬테 수도원 전경. 대리석으로 장식된 수도원 성당 입구와 사암으로 지어진 3층 건물인 주교의 여름 별장이 오른쪽에 보인다
필자 : 이 수도원은 언제 지어졌고, 왜 이름이 산 미니아토 알 몬테인가요?
Padre Tolomei 수도사 : 당시 피렌체 주교였던 ‘힐데브란트’의 후원으로 1018년에 착공해 1200년대 후반 거의 완공됐습니다. 당시 주교는 피렌체 최초의 순교자인 ‘성 미니아토’를 봉헌하기 위해, 이 순교자의 유골이 안장돼 있던 언덕 위에 지었습니다(성당 안에 들어가면 유골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이후부터 성 미니아토는 주교의 수호성인이 됩니다.
필자 : 수도원 전면 옆쪽에 다른 수도원에서 보기 힘든 요새같이 지어진 3층 건물이 있는데, 이 건물은 무엇인가요?
수도사 : 그 건물은 요새가 아니고, 피렌체 대주교의 여름 별장이었습니다. 1200년대 후반 부유한 가문 출신이었던 주교가 지은 여름 별장입니다.
필자 : 당시 대주교의 집무실과 저택은 현재 세례당과 두오모(Domus Dei·신전) 성당이 위치한 두오모 광장에 있지 않았나요?
수도사 : 이 여름 별장이 지어지던 1200년대 후반, 세례당과 두오모 성당은 양모무역으로 부자가 된 상인들의 영향 아래 있게 됩니다. 상대적으로 주교의 영향력이 점차 약해져 갔습니다. 주교는 좀 더 안전한 이 언덕 위에 저택을 신축했죠. 피렌체의 여름이 워낙 덥기도 해서 더위를 피할 목적도 있었고요.
필자 : 이 수도원은 미켈란젤로와도 깊은 연관이 있다고 하던데요?
수도사 : 네. 1530년 피렌체가 독일 황제 군대에 의해 포위당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미켈란젤로가 저기 뒤에 보이는 종탑을 보호하기 위해, 종탑을 매트리스로 쌓았습니다. 당시 미켈란젤로가 피렌체 성벽을 관리하는 책임자였으니까요.
주교는 왜 수도원과 요새 같은 별장을 이 높은 언덕에 지었을까?
이 수도원이 지어지던 1000년대 초반, 피렌체에서는 주교가 가장 부자였다. 십일조, 피렌체 도심의 상점 임대료, 농촌의 농지 임대료, 그리고 상품 거래에 부과하는 세금 등을 바탕으로 부를 키웠다. 이뿐 아니다.
주교는 피렌체 시민들의 영혼과 사지를 꽁꽁 묶어두는 종교축제를 주관했고, 수호성인을 봉헌하는 사제들의 임명 권한을 가졌다.
또한 교회법으로 재판권을 소유하고 있었다. 돈과 영혼의 구원, 그리고 사법권력으로부터 나오는 주교의 카리스마는 대단했다. 유력 가문과의 결혼은 성직에 해가 되지 않고, 오히려 득이 됐다. 그래서 귀족의 자제들은 누구나 고위 성직자가 되고 싶어 했다.
마침 피렌체 이웃 볼테라의 유력 가문 출신이었던 힐데브란트는 당시 이탈리아의 왕이기도 했던 독일 황제에게 뇌물을 주고 피렌체 주교의 모자를 샀다. 이 주교는 부인과 4명의 아들과 함께 현재 두오모 광장에 위치한 주교 관저에서 같이 지냈다. 사제직도 돈을 받고 팔았다.
주교의 부패한 모습을 보고, 신심이 두터운 수도사들이 주교에게 불복종을 선언했다. 주교에게 더 위협이 됐던 사건은 피렌체 외곽에 대토지를 소유하고 있던 토착 귀족들이 주교에게 반대하는 수도사 편에 섰다는 점이다. 주교 자리를 내려놓든지 자신의 위상을 더 강화하든지, 양단간에 결정을 해야만 했다. 주교는 후자를 택했다.
산 미니아토 알 몬테 수도원 내부
주교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수도사들에 대항할 만한 수도원을 하나 지을 수 있도록 독일 황제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마침 피렌체의 대토지를 소유한 귀족들이 황제의 권력에 반기를 들고 있는 상황이었다. 독일 황제로서는 이참에 주교를 후원해서 피렌체에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당연히 독일 황제는 주교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이제부터 주교는 교황이 아닌 독일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주교는 새로운 수도원을 피렌체 최초의 순교자 성 미니아토를 봉헌하는 장소로 결정했다. 성 미니아토는 250년경 피렌체가 로마 황제 지배를 받던 시절, 기독교도라는 이유로 목이 잘리는 순교를 당했다.
이 순교자는 자신의 잘린 목을 붙들고 현재 수도원이 있는 언덕까지 올라와 숨을 거뒀다고 전해진다. 주교는 로마제국 시대 순교자를 봉헌하는 수도원을 세움으로써, 수도원의 위상을 예수의 12제자들 시대로까지 연결시킬 수 있었다. 이제 산 미니아토 수도원은 당시 어느 수도원보다도 격이 높아졌다.
주교는 건물이 완성되기 전, 수도원장부터 임명했다. 주교는 수도원장에게 흩어져 있던 성 미니아토의 유골을 찾도록 했다. 나아가 구두로 전해져오던 순교 장면을 책으로 기록하도록 명령했다. 이제 유골을 찾았으니, 유골을 모시는 성소를 지을 수 있었다.
이런 역사적 사건을 바탕으로 이 수도원에 성 미니아토의 성소가 마련된다. 10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성소에 유골함이 보관돼 있고, 수도사들은 빠짐없이 기도를 드리고 있다.
이어 주교는 자신의 재산을 이 수도원에 기부해, 수도회 자산으로 등록시켰다. 다른 종교단체가 관여할 수 없게 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수도원의 재산 관리인으로 자신의 아들들을 임명했다. 후손들은 대를 이어 주교가 남겨놓은 토지에서 나오는 수익을 챙겼다. 주교가 수도원을 세우고, 재산을 기부하는 행위는 이렇게 후손들에게 재산을 상속하는 수단이 됐다.
그럭저럭 주교들의 권한은 유지되는 듯싶었다. 하지만 양모무역과 은행업으로 돈을 벌기 시작한 상인들이 등장하면서 사정은 달라지기 시작한다. 상인들은 길드를 조직하고, 이 조직된 힘으로 자치정부도 구성했다. 이들은 주교권력으로부터 소외됐던 교황과 힘을 모아, 주교의 관저가 위치해 있는 두오모 광장을 접수하기 시작했다. 이때가 1200년대 후반쯤이다.
두오모 광장은 피렌체의 수호성인을 봉헌하는 세례당과 주교가 주관하는 두오모 성당이 위치해 있는 성지이자, 권력의 신앙적 지지 기반이었다. 양모무역 상인들의 길드(Arte di Calimala)가 중심이 돼, 상인들은 두오모 광장에서 세례자 요한 축제를 주관하기 시작했다. 더 나아가 마침내 세례당과 두오모 성당으로 들어오는 십일조도 관리하기에 이른다.
상인들의 이런 행위는 주교들에게 위협이 됐다. 마침 부유한 가문 출신으로 주교가 된 ‘모찌(Andrea de'Mozzi)’는 피렌체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위치한 산 미니아토 알 몬테 수도원에 새로운 거처를 지었다. 후에 여름 별장이라고 불렸지만 실제로는 피신처였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주교는 신변의 위협까지 느꼈다고 한다. 창문의 높이가 지상에서 3m 높이에 있고, 창문 크기도 작은 이유다. 건물이 요새처럼 건축된 연유도 마찬가지다.
르네상스 시대가 시작되기 전에 미켈란젤로 언덕(500피트가 넘는다)에 수도원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두오모 성당이 도시의 중심이라면, 산 미니아토 수도원은 피렌체에 또 다른 지평을 잡아 준다. 이곳 수도원은 높은 곳에 계신 예수께서 시민들의 고단한 하루하루의 일과를 축복하고, 시민들은 고개를 들어 예수를 우러러보는 곳이다. 산 미니아토 수도원은 이런 의미에서 건축 상으로 천상의 예루살렘, 즉 신의 왕국을 재현한 것이다.”
필자가 만난 수도사의 해석이다.
[출처] : 성제환 원광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성제환의 르네상스 예술여행> / 매경이코노미
3. ‘산 미니아토 수도원’의 ‘성구실’ 장식 - 교황과 상인의 동상이몽으로 탄생한 걸작
‘산 미니아토 수도원’의 ‘성구실’ 장식…교황과 상인의 동상이몽으로 탄생한 걸작
한때 피렌체 최고의 종교 지도자이자, 최대 부자였던 주교는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교황이 주도한 십자군전쟁 비용을 지원하느라, 상인들한테 빌린 돈을 갚지 못하는 처지가 됐기 때문이다. 주교 관할하에 있던 ‘산 미니아토(San Miniato) 수도원’의 재정도 어려워져 갔고, 가난한 수도사들은 황금을 손에 든 상인들의 유혹에 쉽게 부패해져 갔다. 천상의 예루살렘을 상징하던 수도원의 위상이 말이 아니게 됐다.
그러자 교황(그레고리 11세)이 나서 개혁을 주도했다. 교황은 자신이 신임하던 올리베탄(olivetan) 수도사들에게 산 미니아토 수도원의 개혁을 맡겼다. 이 수도원을 황폐하게 만든 베네딕트 수도사들은 피렌체 외곽으로 모두 쫓겨났다. 수도원의 주인이 주교에서 교황으로, 부패한 베네딕트 수도사에서 개혁적인 올리베탄 수도사로 바뀌었다.
교황에겐 오래된 염원이 또 하나 있었다. 십자군전쟁에서 패하고 난 후, 교황의 위상은 끝없이 추락했다. 한때 서방세계의 영적 지도자이자, 최고의 세속 권력까지 지녔던 교황이 프랑스의 아비뇽에 유배당하고 있을 정도였다(아비뇽의 유수, 1309~1377년). 어떻게 해서든지, 잃어버린 성지 예루살렘을 되찾아 추락한 교황의 신성을 회복해야만 했다.
교황은 피렌체에서 가장 부자였던 상인 알베르티(Benedetto Alberti)의 후원으로 제2의 십자군전쟁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이 상인은 오랫동안 교황청의 금고 관리를 해오고 있었고, 교황과도 친분도 깊었다. 교황은 성지 회복을, 상인은 십자군전쟁으로 황금을 벌어들일 꿈을 꾸고 있었다. 동상이몽이다.
상인 알베르티는 27년간 교황청의 금고를 관리했던 은행가 출신이다. 또한 알베르티는 동방의 국가들로부터 고급 비단과 양탄자를 수입해 판매하는 무역도 했다. 당연히 상품을 실어 나를 선박도 보유하고 있었고, 동방 상인들과의 네트워크도 탄탄했다.
당시 이 가문이 소유하고 있던 재산만 해도 30만플로린(피렌체 금화, 2400억원 정도)이 넘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정치가 불안정했던 시대에 부자들한테 항상 행운만이 따르진 않았다. 상인 알베르티도 정적들에 의해 제노바로 추방당했다. 추방당하기 전 피렌체에 남아 있는 두 아들에게 산 미니아토 수도원에 200플로린을 후원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떠난다.
당시 알베르티가 운영하던 회사(Alberti Antichi Co)는 교황청 금고뿐 아니라, 예루살렘을 수호하려고 결성된 기사단의 자금도 관리하고 있었다. 교황은 상인 알베르티가 머무르고 있는 제노바로 기사단을 불렀다. 교황은 기사단 책임자, 그리고 상인 알베르티와 함께 예루살렘 성지를 회복하는 십자군전쟁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교황 입장에서 동방의 유력 상인들과 네트워크도 있고, 군사를 실어 나를 선박도 소유하고 있는 알베르티가 전쟁 준비를 맡기기에 딱 안성맞춤인 인물이었다. 돈도 빌릴 수 있었다. 알베르티만 찬성해주면 십자군전쟁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반면 알베르티는 교황을 도와주면 막대한 황금을 손에 넣을 수 있고, 추방당한 피렌체로 쉽게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교황은 산 미니아토 수도원을 후원해 달라는 부탁도 잊지 않았다. 알베르티는 유언장을 다시 작성하는 것으로 교황에게 화답했다. 피렌체에 남아 있는 두 아들에게 “산 미니아토 수도원에 200플로린이 아니라, 수도원의 성구실 장식에 필요한 모든 자금을 지원하라”라는 유언장을 보냈다.
기록에 의하면 2000플로린(16억원 상당)이 넘게 소요됐다고 한다. 당초 후원하려고 했던 금액의 10배가 넘는 거액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알베르티는 십자군전쟁 준비를 위해 동방으로 가던 길에 열사병으로 사망하고 만다. 상인의 급작스러운 죽음으로 십자군전쟁은 중단됐지만, 그가 후원한 작품은 아직 산 미니아토 수도원 성구실에 그대로 보존돼 있다.
이 성구실 장식은 이야기를 회화로 표현하는 데 최고의 명성을 지닌 화가 ‘스피넬로(Spinello Aretino)’에게 맡겨졌다. 그리고 수도원장은 성구실을 장식하는 주제로 성 베네딕트(St. Benedict)의 일대기를 선정했다.
이 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2가지 의문이 든다.
‘왜 올리베탄 수도회에 베네딕트 수도회의 창시자인 성 베네딕트 일대기가 장식의 주제로 선정됐는가?’, 다른 하나는 ‘성직자가 아닌 왕의 형상을 한 세속인이 왜 성인의 일대기에 등장하는가?’다.
의문을 풀어보자. 먼저 왜 다른 수도회의 창시자인 성 베네딕트의 일대기인가? 원래 산 미니아토 수도원에서는 설립 초기부터 베네딕트 수도사들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성 베네딕트가 수도회를 세우기 시작하던 500년대 중반 이후, 이 수도회는 유럽의 왕이나 교황보다 토지를 많이 소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세속적인 부는 욕망을 품게 하고, 욕망은 필연적으로 갈등과 부패를 낳기 마련이다. 부패한 종교단체는 결국 개혁의 대상이 된다. 한때 서방에서 가장 강력하고 부유했던 베네딕트 수도원 역시 결국 부패해 개혁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교황은 부패한 베네딕트 수도사들이 머무르던 산 미니아토 수도원을 개혁하기 위해, 금욕적인 고행을 추종하는 올리베탄 수도사들을 불러들였다. 하지만 올리베탄 수도회가 창설될 당시, 이 수도회에는 정관도 없었다. 종교개혁이 급했던 교황은 베네딕트 수도원의 규칙을 따른다는 조건부로 올리베탄 수도회를 승인했다.
그래서 성당에서 가장 성스러운 성구실을 장식하는 회화의 주제로 대신 성 베네딕트 일대기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성구실은 수도사들이 미사를 드리기 전에, 서로 손을 잡고 기도하는 성스러운 곳이다. 성 베네딕트 일대기로 장식된 성구실에서 올리베탄 수도사들은 화가의 섬세한 붓을 빌려, 아직 정식 인가를 받지 못하고 있던 자신들의 수도회 정체성을 깊이 새기고 있었다.
이 연작의 왼편 하단에 무릎을 꿇고 성 베네딕트를 경배하는 형상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성 베네딕트 전기에 따르면, 당시 고트족의 왕 토틸라(Totila)는 성 베네딕트의 신성과 기적을 시험하기 위해 자신의 호위병사에게 왕의 복장을 하게 하고 알현시켰다.
성 베네딕트가 멀리서 그가 가짜 왕인 것을 알아보고, “그 옷들을 벗어라! 그것들은 네 것이 아니다!”라고 하자 가짜 왕은 그 자리에서 숨이 끊어졌다고 전해진다. 이 작품이 그려질 당시는 상인들로 구성된 피렌체 자치정부가 종교의 신성한 영역을 슬금슬금 넘보고 있던 시점이다.
산 미니아토 수도원을 세속 권력으로부터 보호하려 했던 수도사들은 성직자의 신성한 권력이 세속 권력보다 우월하다는 경고의 메시지를 그림에 담아 피렌체 정부에 전달한 것이다. 이렇게 작품 하나하나에 수도사들의 정체성과 영적 신성함이 세속 권력에 우선한다는 메시지가 숨겨져 있다.
본당 정면 장식한 벽화는 예수를 천국의 기독교 왕국 왕으로 묘사
‘우주의 지배자, 예수’, 수도원 본당, 1260년대로 추정, 가도 가디
수도원 성당 본당의 전면을 장식하고 있는 이 작품은 르네상스의 탄생지인 피렌체를 장식하던 작품들과는 달리, 동방의 정취가 물씬 풍긴다. 피렌체가 아니라 동방의 이스탄불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멀리서 보면 프레스코 벽화처럼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색을 입혀 그 위에 에나멜 칠을 한 조그만 타일 하나하나를 정성스럽게 붙인 모자이크 작품이다.
작품에 동물, 식물과 같은 여러 상징물들이 그려져 있어 방문자들은 힐끔 보고 지나치곤 한다. 그러나 이 그림에 숨겨진 알레고리를 하나하나 풀어보면, 이보다 성스러운 작품을 감상하기 쉽지 않다. 작품 전면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옥좌에 앉아 있고, 왼편에는 성모, 오른편에는 이 수도원의 수호성인인 성 미니아토가 자리 잡고 있다.
예수의 형상 위쪽에 그려진 하얀 비둘기는 성령을 상징한다. 또 독수리(요한), 사자(마가), 황소(누가), 그리고 성 미니아토 형상 앞에서 성경책을 들고 있는 성인(마테)은, 각각 4대 복음서 저자다.
왼편에 그려진 시리아 팜 나무와 공작새는 예수의 부활을, 오른편에 그려진 불사조와 펠리컨 새는 예수의 희생으로 인간의 영혼을 구할 수 있다는 알레고리다. 마지막으로 그림 상단 대리석 양면에 상감 형태로 묘사된 촛대는 기독교 왕국의 신성함을 표현하는 상징물이다.
예수를 천국에 있는 기독교 왕국의 왕으로 묘사한 완벽한 작품이다. 그래서 이 작품에는 ‘우주의 지배자, 예수(Christ the Pantocrator)’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산 미니아토 수도원은 노동으로 지친 피렌체 시민들이 해질 무렵 집으로 돌아가면서, 이 수도원이 있는 높은 언덕을 우러러보는 천상의 예수가 계신, 천상의 예루살렘이었다”는 전설이 명불허전이다.
[출처] : 성제환 원광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성제환의 르네상스 예술여행> / 매경이코노미
4.피렌체 ‘산타 크로체 수도원’(Santa Croce)-약점 많은 바르디가문의 ‘위상 세우기’
그림①. 산타 크로체 수도원 성당. 중앙 제단 오른쪽에 붙어 있는 예배당이 바르디 가문 소유다. 정치적 위상이 추락한 바르디 가문은 종교 후원을 매개로 가문의 존재감을 찾으려 했다
1200년대 초반,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피렌체 도심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당시 피렌체 도심에는 ‘카타리파’라는 이단 세력들이 채찍으로 자신의 몸을 때리는 등, 이단 종교 행렬이 끊이질 않았다. 교황은 어떻게 해서든지 피렌체를 이단으로부터 구해야만 했다.
교황은 청빈한 삶으로 무소유의 가치를 실천하고 있는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도사들을 피렌체로 보냈다. 수도사들 손에는 그토록 무섭다던 이단 종교 재판권도 같이 쥐어줬다. 이들 수도사는 피렌체 동쪽 성 밖에 버려져 있던 ‘산타 크로체(Santa Croce·성십자가)’라는 허름한 교회에 자리 잡았다.
당시 이곳에는 냄새나는 양털을 가공하는 가난한 노동자와 매춘부들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허름한 목조건물에서 살고 있었다. 고위 성직자들은 이 지역에 관심조차 갖지 않았다.
보잘것없던 조그마한 교회가 어떻게 오늘날 피렌체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수도원으로 거듭날 수 있었을까(그림①).
필자 : 수도원 명칭을 설립자이신 성 프란체스코의 이름을 기려 ‘프란체스코’ 수도원이라 하지 않고, 왜 ‘산타 크로체’라 했나?
파드레 로베르토 수도원장 : 우리 수도회의 설립자인 성 프란체스코는 동방 순례 길에 술탄과 비잔틴 제국 황제들을 방문했다. 이들은 우정의 표시로 예수께서 수난을 당하신 십자가의 나무 조각을 선물로 줬다. 같이 동행했던 수도사 엘리아(Elia)가 이 성물을 우리 수도원에 봉헌했다. 아직도 우리 수도원은 그 십자가 조각을 소장하고 있다.
필자 : 수도원 내부에 개인 가문이 소유한 예배당(Cappella)이 처음 생긴 곳이 이곳 산타 크로체 수도원이라고 알고 있는데?
수도원장 : 모든 프란체스코회 교회는 안뜰에 작은 공간을 만들어 오직 수도사들의 시신만을 묻었다. 하지만 성 프란체스코를 사랑해 섬기는 사람들과 그 가족들이 성인을 기리기 위해 무언가(?) 하고자 했기 때문에, 수도원 내부에 예배당을 짓거나 묘를 썼다. 사실 프란체스코회 교회들은 거의 이런 방식으로 시작됐다.
필자 : 이곳 수도원을 둘러보면, 바르디(Bardi) 가문이 소유한 예배당이 3개나 되는데 이 가문과 각별했는지?
수도원장 : 바르디 가문은 예배당에 관심이 많았고, 예배당을 활용하고 유지하는 데 매우 신경을 썼던 가문이기 때문이다. 교회 내 자기 가문의 예배당에서 축하 행사 같은 것도 많이 했다. 그리고 귀족들이 중심이 된 평신도 조직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었다.
그림②. ‘재물의 포기’, 바르디 예배당, 1300년대 초반, 지오토. 바르디 가문은 최고 부자답게 당대 제일의 화가였던 지오토에게 예배당 장식을 주문했다
왜 청빈한 삶을 살아가던 수도사들이 당시 평판이 좋지 않던 바르디 가문의 후원을 받게 됐을까? 하루 일과가 끝나면 가난한 노동자들은 프란체스코 수도사들이 머무르던 조그마한 수도원에 모여 기도를 했다. 피렌체 각지에서 점점 더 많은 노동자가 이곳 수도원으로 모여들자, 이웃 교회를 빌려 설교를 시작했다.
이들 수도사를 시기한 신부들은 교회 빌려주기를 꺼렸다. 급기야 두오모 성당 신부들은 수도사들이 다른 교회에서 설교하는 행위를 모두 금지시켰다(1240년). 수도사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들만의 수도원을 확충해야 했다. 교황에게 청원하자 교황은 새로운 수도원을 짓는 데 후원하는 신도들에게 100일 동안의 면죄부를 준다는 칙령도 내렸다(1252년). 하지만 허사였다.
고민 끝에 수도사들은 평신도의 시신을 안장할 수 있도록 허가하고, 망자(亡者)의 영혼을 기리는 예배당까지 내주기로 했다. 당시 10개의 예배당을 공모했는데 당대 최고의 부자들이던 가문들이 선금을 내고 모두 소유하게 됐다.
그중에서도 바르디 가문은 3개나 되는 예배당을 소유했다. 예배당을 소유한 가문은 내부 장식을 해야 했고 예배당에서 미사를 드리는 수도사에게 평생 월급을 기부해야 할 정도로 유지비가 많이 들었다. 예배당을 구입한 게 단순히 신앙심이 깊어서만은 아닌 듯하다.
바르디 가문은 교황청의 자금 관리를 맡아 프랑스, 영국, 스페인뿐 아니라 나폴리 왕국에도 은행 지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교황을 대신해 십일조를 징수하고 그 재원으로 왕들과 귀족들에게 전쟁 자금을 빌려줬다. 일종의 고리대금업을 한 셈이다.
피렌체 내부에서도 평판이 좋지 않았다. 원래 군인 출신이었던 이 가문은 높은 탑을 짓고, 많은 사병도 거느리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벌어지는 모든 분쟁을 바르디 가문은 폭력으로 해결하려 들었다. 이 가문 때문에 피렌체 도심은 항상 패거리 싸움이 잦아들지 않았다. 그래서 자치정부는 이 가문을 토착귀족(Magnate)으로 낙인찍어, 모든 공직에서 추방시켰다(1293년 정의의 법률).
추락한 정치적 위상, 부당한 방법으로 축적한 부, 이런 정치·경제적 약점 때문에 바르디 가문은 피렌체 사회에서 존경받지 못했다. 공적 영역에서 배제된 바르디 가문은 자신들의 약점을 또 다른 공적 영역이었던 종교의 장(場)에서 만회하려고 했다.
그래서 피렌체 정부의 세속 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산타 크로체 수도원’에서 자신들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수도원장 이야기처럼, 바르디 가문이 이 수도원에서 평신도 모임(Compagnia di Disciplinati)을 주도하게 된 것도 이런 사회적 배경 때문이다. 게다가 선조들 시신을 신성한 곳에 안장하고 영혼을 구원한다면 일석이조인 셈이다. 이렇게 바르디 가문은 세속과 종교라는 상반된 영역에서 후원을 매개로 가문의 존재감을 찾으려 했다.
바르디 가문은 최고 부자답게 당대 제일의 화가였던 지오토(Giotto di Bondone, 1267~1337년)에게 예배당 장식을 주문했다. 지오토는 중세 화가들의 딱딱한 선을 부드럽게 해 영혼에 살을 붙였으며, 살에 색을 입혀 온기를 줬다.
그러자 신과 성인들에게 인간의 감정이 배어나게 됐다. 신과 성인들의 형상에 전에 보지 못한 빛과 생명이 드러나 보였다. 그래서 후대 사가들은 지오토를 르네상스 예술의 창시자로 칭송해왔다. 지오토는 바르디 예배당을 ‘성 프란체스코 일대기’ 일곱 장면으로 장식하면서, 자신의 원숙한 붓질을 마음껏 드러냈다(그림②).
다른 작품들은 주로 성 프란체스코가 생전에 행한 기적적인 장면이다. 유일하게 ‘재물의 포기’라는 작품만이 성인이 행한 기적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화가들은 곧잘 이런 장면에 자신을 고용한 주문자의 의도를 그려넣는다. 성 프란체스코는 부유한 상인의 외동아들로 태어나 부러울 것 없이 자랐다.
어느 날 기도하던 중 예수가 나타나 “프란체스코야! 내가 지은 교회가 다 무너져가고 있구나!”라는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프란체스코는 아버지가 안 계신 틈을 타 비단과 말을 모두 팔아 가난한 교회에 나눠줬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화를 냈고, 아들 프란체스코는 입고 있는 모든 옷을 아버지에게 주고 교회 품에 안겼다.
그래서 이 작품 한가운데 옷을 받아든 아버지가 화난 표정을 하고, 옆에 서 있는 친구들은 성난 프란체스코의 아버지를 말리는 형상으로 묘사돼 있다.
그림 아래편 양쪽에는 어린아이들이 앞자락에 무엇인가를 잔뜩 담고 있는 형상이 그려져 있다. 당시 비단상인 외아들이 그 호화스러운 세속적 부를 포기하고, 신부도 아니고 수도사가 된다는 행위는 미친 짓이었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은 프란체스코에게 돌을 던졌다고 전해진다.
이 작품 왼편에 모자를 쓴 두 사람을 주목해 보자. 다른 형상(Assisi지역 상인)들이 쓰고 있는 모자와 다르게 그려져 있다. 이들 두 사람이 쓰고 있는 모자는 피렌체 상인이 주로 사용하던 스타일이다. 화가는 피렌체 상인이었던 작품 주문자(Ridolfo de' Bardi)와 아들을 구분하기 위해 서로 다른 모자를 쓰고 있는 형상으로 그려 넣었다. 당시 예배당을 장식할 때 예배당의 주인이라는 표식이다.
[출처] : 성제환 원광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성제환의 르네상스 예술여행> / 매경이코노미
5. 인간 중심 르네상스 문화 태동…흑사병 고난 겪으며 ‘인간존중’ 사상 싹터
리누치니 예배당에 걸린 ‘막달레나 마리아 일대기’ 일부다. 막달레나 마리아는 속죄의 상징. 흑사병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그림에 담겨 있다
1300년대 중반 피렌체는 큰 혼란에 빠지게 된다.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벌어진 백년전쟁에서 패배한 영국 왕이 피렌체 상인들한테 빌린 돈을 못 갚겠다고 선언하자, 피렌체 토착귀족들이 운영하는 은행들이 줄줄이 파산했다(1343년). 이보다 더 큰 재앙은 흑사병이었다(1348년). 9만명이 넘던 피렌체 인구가 절반으로 감소하더니, 결국 3만명까지 줄었다.
피렌체 전체가 공포에 휩싸였다. 이런 혼란기에 피렌체 사회는 두 가지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된다. 우선 토착귀족들이 운영해오던 사업을 대신하게 된 신흥 상인 계층(Gente Nuova)이 등장했다. 그리고 흑사병으로 공포에 떨던 피렌체 시민들은 구원과 속죄를 위해, 한편으로 망자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수도원으로 몰려들었다. 아이러니하게 수도원이 호황(?)을 맞이한 형국이 됐다.
새롭게 부자가 된 신흥 상인들은 흑사병으로 사망한 선조들의 영혼을 기릴 예배당을 찾아 나섰다. 당시 예배당 수요가 너무 많아, 예배당을 중개하는 평신도회(Orsanmichele)가 생겨날 정도였다. 수도원 측은 이참에 예배당 관리를 소홀히 해온 가문으로부터 예배당 소유권을 회수하고, 예배당을 애타게 찾고 있던 신흥 상인들에게 소유권을 넘겨주기 시작했다.
1300년대 중후반 피렌체의 이런 격동의 찰나가 그대로 보존된 장소가 유일하게 남아 있는데, 그곳이 ‘산타 크로체’ 수도원의 성구실(聖具室)이다. 이 성구실은 산타 크로체 수도회의 설립자인 성 프란체스코의 속옷을 간직해온, 아주 성스러운 장소다. 이 성스러운 공간에 새롭게 부상한 신흥 상인 ‘리누치니(Rinuccini)’ 가문이 예배당을 소유하는 행운을 누리게 된다.
리누치니 가문은 피렌체 토착귀족들이 운영하던 은행이 파산하자, 이들을 대신해 프랑스 아비뇽에 있던 교황청 금고 관리를 맡아 부자가 된 대표적인 신흥 상인이다. 이 신흥 상인은 피렌체 정부의 행정 수반을 여덟 번이나 역임했고, 피렌체 정부가 발행하는 공채를 가장 많이 소유하기도 했다(2만플로린이 넘었으니, 이자만 해도 연 100억원 정도의 수익이다). 명실상부 돈과 정치 권력을 한꺼번에 쥔 가문이 된 셈이다.
그러나 이 가문도 흑사병은 피해 갈 수가 없었다. 부친도 사망하고 어린 아들을 두고 부인마저 죽자, 영혼을 기릴 예배당 얻기를 간절히 원했다. 마침 다른 가문(Guidalotti)이 오래전에 소유해왔지만, 흑사병으로 이 가문의 후계자가 끊기자 장식이 중단되고 흉물스럽게 방치돼 있던 예배당이 하나 있었다.
그곳을 이 신흥 상인 가문이 소유하게 된다(1371년). 아마 피렌체 정부에 기여한 공이 크고, 산타 크로체 지역에 오랫동안 거주해온 인연 덕택이었으리라. 700플로린을 수도원에 후원하고, 성모축일 때마다 24플로린씩 후원하는 조건이었다. 물론 예배당을 장식하는 화가에게 지불하는 비용은 별도였다.
예배당 장식은 당시 흑사병으로 피렌체 출신 화가들이 대부분 사망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맡기지 못했다(로마제국의 후손이라는 자긍심이 많았던 피렌체 시민들은 타 지역 예술가들에게 피렌체시 단장하는 일을 맡기지 않았다).
대신 밀라노 출신 화가로 피렌체에서 활동하던 조반니(Giovanni da Milano)가 장식을 맡았다. 그러자 반세기 전에 새로운 예술영역을 창조했다고 칭송받았던 지오토 제자들을 중심으로 한 피렌체 예술, 특히 회화의 영역에서 양식의 변화가 일어나게 됐다. 색채와 선도 이전보다 강해지고 소묘도 섬세해졌으며 등장인물도 많아졌다.
수도원 측은 이 화가에게 ‘성모마리아의 탄생’과 ‘막달레나 마리아 일대기’로 예배당을 장식해줄 것을 주문했다. 오래전부터 성모마리아는 자비로움과 구원의 상징이고, 한때 죄인이었다가 구원받은 막달레나 마리아는 속죄의 상징이다.
당시 의학이 발달되지 않은 상태에서 수도사들은 흑사병으로 고통받던 피렌체 시민들에게 속죄를 통해 구원의 희망을 줄 수밖에 없었다. ‘막달레나 마리아 일대기’ 다섯 장면 중 ‘마르세유의 기적’과 ‘예수의 막달레나 마리아 방문’이란 두 작품을 선정해, 화가는 자신의 후원자를 어떻게 예우했는지와 흑사병 이후 수도사들의 변화된 삶을 들여다보자.
리누치니 예배당 전경. 리누치니는 피렌체 토착귀족이 운영하던 은행이 파산하자 새롭게 떠오른 신흥 상인 가문이다
‘마르세유의 기적’이란 장면은 이 예배당을 장식하고 있는 장면 중 유일하게 성인들이 그려져 있지 않은 작품이다. 르네상스 시대 화가들은 이런 장면에 후원자의 형상을 묘사해놨는데, 이 작품도 예외는 아니다.
이야기는 대략 이렇다. 프랑스 지방의 한 영주가 아기를 갖지 못하자 막달레나 마리아에게 아이를 갖게 해달라는 기도를 했다. 사실 이 영주는 당시 막달레나 마리아의 신성을 시험해 볼 참이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부인이 아이를 갖게 되자, 부인은 감사의 표시로 로마 성지순례 길에 올랐다.
순례 도중 배에서 아이를 낳게 됐는데, 그만 풍랑을 만나 어머니는 아이와 함께 바다에 빠지고 만다. 절망에 빠진 남편이 배를 타고 찾아 나서던 도중, 어느 해안에 정박했다. 뜻밖에도 해변에서 어린아이가 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자신의 아들이었다. 부인은 안타깝게도 사망했다. 이 그림에서 배가 그려지고 해변에서 어린아이가 뛰노는 장면으로 묘사되는 것은 모두 이런 막달레나 마리아가 행한 기적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 장면 중,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회색 수염을 하고 서 있는 사람이 바로 예배당의 주인인 리누치니 가문의 수장(Francesco Rinuccini)이다.
‘예수의 막달레나 마리아 방문’ 장면은 예수께서 막달레나 마리아의 집을 방문했을 때, 붉은 옷을 걸친 막달레나 마리아가 예수의 발을 향유로 씻기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붉은 옷은 쾌락을 추구한 인간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고, 예수의 발에 향유를 바르는 장면은 속죄를 위해 예수께 복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구원을 위해 신앙적 믿음이 우선한다는 의미다. 왼편에는 막달레나의 자매 ‘마르다’가 자신의 집을 방문한 예수께 드릴 음식을 바쁘게 준비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세속 세계의 중요성도 같이 강조한 것이다. 그래서 이 장면에는 막달레나 마리아처럼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고, 세속 세계에서는 ‘마르다’처럼 예수를 섬기라는 메시지가 담겨져 있다.
이 작품이 그려질 당시 피렌체 주교를 비롯한 고위 성직자들은 일반 신도들과 함께 섞여 지내는 탁발 수도사를 시기하며 귀찮은 존재로 인식했다. 교황에게 불만도 토로했지만, 교황의 메시지는 명료했다.
“형제들아. 세속 세계에서 활동적인 삶을 통해 세상의 진리를 깨우치고, 관상적인 수도의 삶을 통해 신의 축복을 깨달아야 한다. 이 두 가지 삶을 조화롭게 해, 제3의 길인 신과 인간을 아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 혼합된 삶(Vita Mixta)이 성직자의 길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성직자들은 은둔하면서 경건한 신앙적인 삶만 살아가면 된다고 여겼다. 하지만 흑사병을 겪는 과정에서 탁발 수도사들은 일반 신도들과 하나가 돼 어려움을 극복했다. 이 과정에서 수도사들은 세속 세계와 신앙의 영역을 함께 아우르는 ‘혼합된 삶’의 중요성을 깨닫기 시작했다.
이 혼합된 삶 속에서 ‘인간 존중’ 사상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고, 이런 고난의 시기를 겪은 피렌체는 인간의 가치를 중히 여기는 르네상스 시대라는 새로운 시대를 창조해낸 것이다. 사상적으로 르네상스가 탄생하는 중요한 순간이다.
[출처] : 성제환 원광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성제환의 르네상스 예술여행> / 매경이코노미
6.두오모 광장 앞 세례당 청동조각…전쟁 승리 기원하며 아브라함 상 만들어
피렌체 조각가 기베르티(좌)와 브루넬레스키가 출품한 작품이다. 브루넬레스키 작품이 더 뛰어난 듯 보이나 양모와 직물 상인조합은 청동이 적게 들어가 비용을 줄일 수 있는 기베르티 작품을 선택했다
조각가 공모전
·주제 :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
·규격 : 네잎클로버를 둘러싼 정방형의 청동판 43x33㎝, 무게 34㎏
·주문자 : 양모와 직물 상인조합(Arte di Calimala)
·제출기한 : 발표일로부터 1년
·심사방식 : 심사위원 34명의 공개심사
1401년 새해 벽두, 피렌체시 정부는 두오모(Duomo) 성당 맞은편에 위치한 세례당 문을 장식할 조각가를 공모한다고 발표했다. 모두 7명의 조각가가 지원했는데 최종적으로 피렌체 출신 조각가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 1377~1446년)’와 ‘기베르티(Lorenzo Ghiberti, 1378~1455년)’가 결승에 올랐다. 만약 독자들이 심사위원이었다면, 이 두 조각가 작품 중 누구의 작품을 선택했을까. 엄정한 심사를 위해 작품 주제를 간략히 소개한다.
100세에 늦둥이 아들 이삭을 얻은 아브라함은 하느님 명령에 따라 아들을 제물로 바치기로 결심한다. 산에 올라 제단에서 아들의 옷을 벗긴 뒤 목을 치려는 순간, 갑자기 아브라함을 만류하는 천사가 나타난다. 천사는 아브라함의 팔목을 잡고, “네가 하느님을 경외하는 줄 이제 알았다!”라는 하느님의 계시를 전한다. 이어 제단에 바칠 제물인 양 한 마리를 보내준다.
심사위원들은 기베르티의 손을 들어줬다. 미학자들은 기베르티 작품이 더 사실적이고, 자연스럽게 묘사돼 그를 선정했다고 했다. 독자들이 보기에도 그런지. 필자가 학생들에게 물어보면 브루넬레스키가 항상 승리한다. 기베르티의 작품을 선정하는 데, 미학적 기준 외에 또 다른 기준이 있었을 것이다.
이 작품을 주문한 단체는 양모와 의류무역에 종사하는 상인들의 조합이었다. 이 상인조합은 조각가를 선정하고 완성하기까지, 제작 전 과정에 소요되는 비용을 모두 조달해야 되는 책임을 졌다. 브루넬레스키는 공모전에서 요구한 대로 34㎏의 청동을 모두 사용해 만들었고, 기베르티는 27㎏만 사용했다.
기베르티는 양각의 뒷부분을 밀랍으로 채워, 청동 사용량을 7㎏이나 줄였다(이를 ‘유실왁스기법’이라 한다). 비용을 후원해야 하는 상인조합 입장에서 청동이 적게 들어가는 기베르티에게 표가 많이 몰리는 것은 당연했다. 공개경쟁 방식을 선택한 것도 상인들이 비용을 아끼기 위한 전략이었다.
이렇게 비용을 절약하면서도 청동 8000㎏을 포함해 총 2만2000플로린(한화 약 176억원)이나 들었다. 이 작품을 주문하던 1400년대 초반, 피렌체는 이웃 밀라노의 침공을 받아 수년째 전쟁을 치르는 중이었다. 전쟁 비용을 조달하느라 피렌체 정부 재정은 매우 어려웠다. 피렌체 정부 재정은 주요 상인들 조합인 대-길드(Arti maggiori) 회원들이 부담해야 했다. 피렌체 상인 입장에선 미적 감각보다 비용 절감이 더 절실했다.
이렇게 재정이 어려운 상황에서 피렌체 정부는 왜 큰돈이 들어가는 청동 조각품을 주문했을까? 피렌체 정부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몇몇 길드 대표들은 밀라노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신의 은총과 시민의 애국심이 절실했다.
피렌체 정부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상인들은 이 두 가지 은총을 모두 만족시켜줄 만한 상징물로 세례당을 선택했다. 피렌체 정부가 수호성인인 세례자 요한을 봉헌하는 세례당을 장식하는 것은 신의 은총을 기원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또한 당시 부유한 가문들은 두오모 성당에서, 일반 시민들은 세례당에서 미사를 드렸다. 두오모 성당은 상류층 교회, 세례당은 평범한 시민들의 교회가 됐다. 당시 권력자들은 시민 공간인 세례당을 돋보이게 해줘, 시민들의 자긍심을 높이고자 했다.
이런 연유로 위기에 빠진 피렌체 정부는 마침 목재로 제작돼 볼품이 없었던 세례당 문을 청동으로 제작하기로 결정했다. 신의 은총이었을까. 밀라노 총독이 갑자기 사망하자, 피렌체는 위기에서 벗어났다(1402년).
기베르티의 재능에 만족한 피렌체 정부는 이 조각가에게 세례당의 또 다른 청동문을 주문했다(1425년). 형상들의 선이 섬세할 뿐 아니라, 금으로 도금돼 지금 봐도 정말 화려하다(진품은 두오모 박물관에 보존돼 있다).
당시 그 앞을 지나던 미켈란젤로는 이 작품을 보고, “너무 아름다워 천국의 입구에 세워지기 충분하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이후부터 이 청동문은 ‘천국의 문’이라 불린다.
비용은 무려 8만플로린, 우리 돈으로 640억원에 상당하는 거액이 들었다(앞서 제작한 청동문의 3배가 넘는다). 기간도 27년이 소요됐다. 피렌체 정부가 이렇게 막대한 금액을 들여 ‘천국의 문’을 제작한 연유가 있었으리라.
기베르티가 만든 작품 ‘천국의 문’을 두고 미켈란젤로는 “너무 아름다워 천국의 입구에 세워지기 충분하다”고 극찬했다
이 작품이 주문되던 1420년대 즈음, 피렌체는 밀라노와의 전쟁에서 벗어나 모처럼 풍요를 누리고 있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사건은 한때 프랑스 아비뇽에 갇혀 지내던 교황들이 이탈리아로 돌아왔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교황은 로마의 토착귀족들이 장악한 교항청을 떠나 안전한 피렌체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 작품은 교황의 이런 처지를 활용하려는 피렌체 정부의 야망과 무관하지 않다.
‘천국의 문’을 장식하는 작품 주제는 천국에서 추방당한 아담과 이브에서 시작해 솔로몬 성전에서 솔로몬과 시바 여왕의 만남으로 끝을 맺는 10개의 패널로 구성됐다. 원래 피렌체 정부는 인문학자들(대표적으로 ‘레오나르도 브루니’)의 자문을 받아, 구약성서 내용을 28개 패널로 구성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패널이 10개로 줄었다.
후대 미술사가들은 조각가 기베르티가 인문학자 조언을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변경했다고 믿었다. 그래서인지 한때 대장장이와 같은 하층 신분이었던 금은 세공사들이, 예술가로 신분이 발돋움하는 중요한 시기로 방점을 찍기도 한다.
하지만 당시 피렌체 정부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상인들 야망은 세례당의 아름다움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작품 감상을 위해, 르네상스 시대에 피렌체에서 행해지던 세례자 요한 종교 축제 행렬의 모습을 잠깐 들여다보자. 피렌체 정부 각료들은 지금 피렌체시 청사가 위치한 시뇨리아 광장에 모여, 백합 문양이 새겨진 하얀 깃발을 들고 세례당으로 행진했다.
세례당에서 간단한 의식이 진행된 후 세례당의 ‘천국의 문’을 통해 두오모 성당으로 들어서고, 성당에서 주교의 미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 축제 행렬에서 피렌체 각료들이 세례당의 ‘천국의 문’을 나서는 순간이 바로 천국에서 아담과 이브가 추방되는 그 시점을 상징한다.
그래서 작품 구성이 아담과 이브가 천국에서 추방당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축제 행렬이 두오모 성당으로 들어가는 종교적 의미는, 원죄를 지은 인간들이 구원을 위해 교회로 들어감을 상징한다. 그래서 ‘천국의 문’ 10개 패널 중, 마지막 장면에서 교회를 상징하는 솔로몬 성전이 등장한다.
피렌체 정부는 피렌체의 두오모 성당을 예루살렘 솔로몬 성전으로 등치시켜 지상 천국 예루살렘이 피렌체에 펼쳐지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이어 교황이 지상의 천국이 된 피렌체에 계속 머물러줬으면 했다. 교황이 머무르는 곳에는 항상 황금이 흘러들었기 때문이다.
상인들의 국가인 피렌체가 부유해질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그래서 피렌체 정부는 교황이 머무르던 저택을 증축하고, ‘천국의 문’ 제작에 거액을 투자했다. 피렌체가 독립적인 국가의 형태를 갖추게 되면서,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헌에 해박한 지식을 갖춘 인문학자들이 피렌체 사회 전면에 등장한다.
이들은 피렌체 정부의 이상적인 모습을 그리스 아테네나 로마제국의 공화정 역사를 기록한 양피지에서 찾았다. 이에 따라 예술의 주제도 고대 영웅 모습을 재현하는 양태로 바뀐다. 이제 회화보다는 대리석으로 만든 동상이나 건축물을 활용해 영웅들의 위대함을 표현하는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출처] : 성제환 원광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성제환의 르네상스 예술여행> / 매경이코노미
7, 도나텔로의 다비드 상 - 피렌체에 스며든 그리스문화 결정체
도나텔로가 제작한 대리석(좌)과 청동 다비드 조각상. 두오모 성당에 설치된 대리석 조각상은 시청사로 옮겨지면서 영웅의 모습으로 변모했다. 청동 조각상은 제우스의 전령인 머큐리의 날개가 발목에 조각됐다. 시민들에게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연인 베아트리체를 그토록 사랑했던 단테는 피렌체 법원으로부터 추방명령을 받고(1302년), 타국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단테에게 비극적인 판결을 내렸던 법정은 도나텔로의 조각 작품들로 가득 채워져 있으니, 오늘날 피렌체에서 가장 품격 있는 명소가 됐다(바르젤로 박물관 2층). 예술의 힘인 모양이다.
오늘은 단테의 법정에 전시된 도나텔로의 ‘다비드 상’ 두 작품을 감상하려고 한다. 하나는 대리석으로, 다른 하나는 청동으로 제작됐다.
성경에서 양치는 목동이었던 다비드는 돌팔매로 이스라엘을 침공한 거인 골리앗을 물리쳐 이스라엘을 위험에서 구한 영웅으로 묘사됐다. 그래서 다비드는 신의 축복을 받은 전사로 부각되거나 국가가 위기에 처한 상황을 묘사할 때, 예술 작품의 주제로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똑같은 ‘다비드’를 조각했는데, 언뜻 봐도 많이 다르다. 특히 두 작품에서 다비드가 골리앗을 물리칠 때 사용한 돌팔매가 보이지 않는다(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에는 왼쪽 어깨에 선명히 조각돼 있다). 조각가가 아무리 상상력이 뛰어나다 해도, 도나텔로 혼자만의 결정은 아닌 듯하다. 다르게 조각된 깊은 뜻이 있을 것이다.
도나텔로의 대리석 조각상은 피렌체가 위기에 처했을 때 지도자들이 시민의 이상적인 역할을 찾아가던 역사가 담겨 있는 예술 작품이다. 1400년대 초반 피렌체는 나폴리 왕국으로부터 침입을 받고 위험에 처해 있었다. 피렌체 시민은 모두 겁쟁이가 돼 어느 누구도 적과 근접해 싸우려 하지 않았다.
나폴리 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위기에서 벗어나는 행운(?)을 맞이했지만 후유증은 컸다. 간신히 위기에서 벗어난 피렌체 지도자들은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 없이 국가가 강해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이에 지도자들은 피렌체 시민의 이상적인 역할을 고대 그리스 영웅의 모습에서 찾기 시작했다.
대리석 조각상은 1400년대 초반 두오모 성당 내부에 설치돼 있었다. 위기를 겪은 피렌체시 정부는 다비드 조각상을 시민들과 관료들이 자주 드나들던 시청사로 옮겨 시민들의 이상적인 역할을 전시하기로 결정했다.
(1416년). 대리석 조각상에 대대적인 수정이 가해져야만 했다. 두오모 성당에 있었던 다비드는 골리앗을 물리친 영웅의 모습이라기보다 기독교의 예언자, 선지자로서의 모습이라 시청사에 장식하기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먼저 다비드 상 오른손의 예언 내용이 새겨진 두루마리를 떼어내고 그 자리에 구멍을 뚫었다. 골리앗을 물리친 돌팔매를 엮을 수 있는 끈을 그 구멍에 설치하기 위해서다. 자세히 보면 다비드의 오른손 엄지와 검지 사이에 조그만 구멍이 새겨진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다비드를 기독교 예언자에서 전쟁의 영웅으로 바꿔놓은 셈이다.
또 다비드 조각상의 머리를 자세히 보면 ‘아마란스(amaranth)’라는 생소한 꽃으로 장식해놨다. 이 꽃은 영원히 시들지 않는 꽃으로, 그리스 시대부터 시민들이 영구히 기억해야 할 영웅들의 화관을 장식하던 꽃이다.
그리스인으로서 트로이전쟁의 영웅이었던 ‘아킬레우스’가 사망했을 때, 그리스 시민들은 그의 머리에 이 꽃으로 장식된 화관을 씌워줬다. 피렌체 지도자들이 그리스 영웅의 모습에서 피렌체 시민의 역할을 제시하려고 했음을 바로 알 수 있다.
이제 피렌체 시민의 이상적인 역할은 ‘기독교의 영웅+그리스 영웅’이라는 혼합된 모습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이제 국가는 더 이상 성직자의 주기도문만으로 통치되지 않는다. 도나텔로가 작품을 수정한 대가로 수고비를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런 위기를 겪는 과정에서 피렌체에는 그리스 문화가 유입되기 시작한다. 후에 메디치 가문의 수장이 되는 ‘코시모 데 메디치’의 선견지명도 한몫했다. 코시모는 당시 최고의 인문학자인 레오나르도 브루니의 학문 활동을 적극 후원했다. 이 인문학자에 의해 아리스토텔레스 서적들과 ‘플루타르크 영웅전’ 등 다양한 그리스 책이 라틴어로 번역됐다.
그러자 로마인에 의해 세워졌다고 자부하던 피렌체 지도자들은 ‘새로운 아테네(New Athen)’를 구상하기 시작한다. 이런 구상에 맞춰 시민들도 군인 모습에서 한 단계 성숙된 문명인이 돼야 했다. 새로운 문명의 발화점은 시청사가 위치한 시뇨리아 광장에서 밀라노와의 오랜 전쟁이 끝난 것을 기념하는 행사에서 촉발됐다(1428년 4월).
정부 관료로서 존경받던 인문학자인 레오나르도 브루니는 밀라노와의 전쟁에서 사망한 군인들에 대한 추도사를 읽은 다음 이어서 조그만 두루마리를 꺼내 큰 목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피렌체에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 찾아오기에 부족한 장식품 하나가 있다. 그것은 바로 피렌체 시민들을 위한 최상의 지식을 연구하는 기관이다. 지식 속에서 시민의 삶이 완전해지고, 인간과 신의 광휘(光輝)가 자리 잡는다. 고대 어떤 도시들도 학문에 헌신하지 않은 국가가 번성한 사례가 없다.”
피렌체에 시민들이 갖춰야 될 덕목을 가르치는 학문(‘시민적 인문주의’라 한다)의 부활을 선언한 역사적 장면이다. 이웃 국가들과의 오랜 전쟁을 지켜본 인문학자는 성직자 기도문도, 영웅의 무용담도 한계가 있다고 봤다.
먼저 시민들이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국가가 부강해져야 했고, 국가가 부강하기 위해서는 시민들이 깨어나야만 했다. 즉 시민들을 위한 예술과 학문의 융성 → 시민의 자긍심과 참여 유도 → 국가 부강 → 시민 자유 → 문화 융성이라는 순환고리가 연속돼야 했다.
하지만 당시 피렌체는 밀라노와 15년 동안 전쟁을 치르며 예술과 학문에 대한 국가 지원이 소홀해졌다. 한때 3000플로린이었던 지원 금액이 200플로린으로 대폭 줄었다.
도나텔로의 청동상은 이런 시기에 조각됐다. 이 작품의 감상 포인트는 발목에 조각돼 있는 날개다. 이 날개는 제우스의 전령인 머큐리의 날개를 상징한다. 당시 인문학자들은 신 제우스의 전령 머큐리를 모든 예술과 재능을 낳은 수호신으로 받들었다.
그래서 자신들의 모임을 ‘머큐리의 회원(Mercuriales Viri)’이라고 불렀다. 다비드 상 발목 뒤쪽에 머큐리 날개를 조각해놓은 것도, 당시 시민들에게 필요한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수사’다.
르네상스 시대 조각가의 아버지로 불리던 도나텔로는 청동상에 골리앗의 목을 칼로 베는 장면을 대리석 조각상보다 더 극적으로 묘사하는 재치를 보였다. 이런 극적인 표현으로 당시 이교도 신으로 자칫 오해받을 수 있는 머큐리 날개를 조각하는 상징물을 용인받으려는 것일 수도 있다.
수호성인들을 나신으로 묘사했다는 이유로 비판받았던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도 도나텔로의 재치를 그대로 빼닮았다. 작품을 통해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더 중요했다.
도나텔로의 ‘다비드 상’은 이렇게 피렌체가 처한 위기 상황을 극복하는 피렌체 시민들의 변화되는 위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피렌체 시민들의 이상적인 모델은 그리스 영웅의 특성을 지닌 시민에서,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위해 능동적 역할을 해낼 수 있는 시민이라는 모습으로 한 단계 격상된다.
예술과 인문학으로 시민들에게 자긍심과 애국심을 갖추게 하고 시민들이 국가가 위기에 처할 때 스스로 참여하는 선순환의 고리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게 르네상스 시대 문화 융성의 본래 목적이었다.
약 30년의 차이가 있지만, 언뜻 필자의 뇌리에 고려 말 정도전의 민본(民本)주의 전략이 떠오른다. 정도전은 국가를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부패했던 불교를 대신해 성리학을 신사상(新思想)으로 퍼트리고자 했다. 하지만 정도전은 백성을 사대부가 돌봐야 될 대상으로 인식했다. 그래서 성리학은 유교 사대부의 지배 논리로 변질되고, 백성은 수동적인 계층으로 머무르고 만다.
하지만 서양은 달랐다. 르네상스 인문학자들은 시민들을 교육시켰고 사회는 시민을 주인으로 격상시키는 문명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지도자들은 공동체를 위한 시민들의 능동적인 역할을 중요하게 여겼다. 이런 생각의 변화가 600년 전 서양 문화의 근간인 르네상스 문화 융성을 낳았다. ‘다비드 상’이 우리들에게 전해주는 교훈이다.
[출처] : 성제환 원광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성제환의 르네상스 예술여행> / 매경이코노미
8.은총의 성모마리아…르네상스시대 가장 화려한 명작
오르산미켈레 성소에 걸려 있는 ‘은총의 성모마리아’ 그림이다. 이 그림을 보호하기 위한 대리석 조각 장식에 690억원 가치에 해당하는 자금이 들었다. 이 작품은 르네상스시대 가장 화려한 명작으로 꼽힌다
흑사병이 급격히 퍼지던 1348년 여름, 죽음의 원인조차 알 수 없어 공포에 휩싸인 피렌체 시민들은 신비로운 기적을 행하는 성상이나 성소에서 구원의 기도를 드리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당연히 액막이를 잘해준다는 성소에 헌금이 쌓이기 시작했다. 당시 피렌체 시민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었던 성소는 ‘오르산미켈레(Orsanmichele)’라 불리던 건물 1층에 성모마리아를 봉헌하던 자그마한 예배당이었다.
어찌나 효험이 있었던지 헌금이 무려 35만피렌체 금화가 쌓였다.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2800억원이 넘는 큰돈이다. 이 성소는 이후에 ‘은총의 성모마리아’라는 별칭이 붙은 그림과 이 그림을 보호하기 위한 대리석 조각으로 정교하게 장식됐다.
제작 비용만도 무려 8만6000피렌체 금화(약 690억원)가 소요됐다. 100년 후에, 금으로 도금된 세례당의 ‘천국의 문’보다 무려 50억원이 더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예술가들에게 르네상스시대에 가장 화려한 예술 작품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이 작품을 추천한다.
그런데 이 작품이 제작되던 1300년대 중반, 피렌체는 은행의 파산과 이웃 국가 밀라노의 침입, 거기에 흉작으로 기근까지 겹쳐 정치적으로 혼란스럽고 경제적으로도 어렵던 상황이었다. 이런 시기에 피렌체 정부가 거액을 들여 이 성소를 장식하게 되는 데는, 단순한 액막이를 넘어 또 다른 중요한 사연이 있지 않았을까?
그렇다. 당시 피렌체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계층은 이제 겨우 양모 제조와 무역으로 돈을 벌기 시작한 신흥 상인계층이었다. 이들 신흥 상인은 상인의 연합체인 길드를 조직해 장사하는 것처럼 국가를 운영했다. 하지만 정권 초반 이들의 권력은 뿌리내리지 못했다. 이제 신흥 상인들이 기적을 행한다고 믿어지던 성모마리아 그림 한 점으로, 정권의 지지 기반을 획득해가는 정치 마케팅 전략을 살펴보자.
상인 국가가 탄생하는 배경을 보기 위해, 흑사병이 일어나기 100여년 전으로 시계를 되돌려보자. 1200년대 중반 이 성소가 있었던 오르산미켈레라는 건물은 피렌체 곡물시장이 있었던 곳이다. 지금이야 대리석으로 지어진 멋진 3층 건물로 보이지만, 당시만 해도 벽돌 기둥 위에 나무로 천정을 얼기설기 얹어놓은, 사방이 트인 전통시장 건물이었다. 이 곡물시장에는 나폴리에서 수입해 오는 곡물과 피렌체 외곽 농촌에서 들어오는 곡물을 보관하고 판매하는 상인들로 붐볐다.
곡물시장 상인들은 기득권을 주장하는 주교나 토착귀족들로부터 상권을 보호하기 위해 평신도회를 조직했다(1291년). 이 평신도회는 힘든 하루 일과를 끝낸 상인들이 곡물시장 기둥에 그려진 성모상 앞에 모여 기도하는 일을 주관하기 시작했다. 이듬해 곡물시장 상인들이 봉헌하는 성모가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고 정신 이상자를 치료한다는, 즉 기적을 행한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1292년 7월).
그러자 이 평신도회에 가입하고자 하는 신도들 수가 급격히 증가했고 이탈리아 전역에서 순례자들이 몰려들었다. 헌금도 1년 만에 20배가 넘게 모였다. 평신도회는 당시 일자리를 찾아 피렌체로 몰려든 가난한 이민자들에게 무료로 빵을 나눠주기도 했다(많을 때는 하루 8000명이 넘었다).
이제 평신도회는 기적을 행하는 은총의 성모를 앞세워 피렌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구호기관이 됐다. 이런 과정에서 순수 민간단체였던 평신도회는 권력기관으로 급부상했다. 곡물시장 상인들은 평신도회를 앞세워 당시 피렌체 권력자로 새롭게 부상하기 시작한 신흥 상인들과 한편이 됐다. 이제 피렌체 권력은 ‘주교+토착귀족’ vs ‘신흥 상인+평신도회’라는 양강 구도로 나뉘었다.
하지만 주교를 등에 업은 토착귀족들도 가만있지 않았다. 1304년 여름, 토착귀족들은 곡물시장에 방화를 저질렀다. 저장된 곡물뿐 아니라 주변 1700여채의 작은 가옥이 모두 불에 탔다. 신흥 상인들로 구성된 피렌체 정부는 곡물시장을 새롭게 건축하고 불에 탄 성모의 그림을 복원하기로 결정했다. 재원은 피렌체 정부의 주선으로 간접세로 충당할 수 있도록 해줬다. 평신도회 지지를 받기 위해 시민의 세금으로 이 평신도회에 특혜를 준 셈이다.
성모의 그림은 지오토의 제자(Bernardo Daddi)에게 맡겼다. 8명의 악기를 든 천사가 성모의 은총에 감사하는 형상으로 그려져, 후에 은총의 성모마리아라는 이름이 붙었다. 하지만 그림이 완성될 당시만 해도 먼지로 가득 찬 곡물시장 내부에 있었기 때문에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먼지가 앉았다. 그래서 평신도회는 이 그림을 보존하기 위해, 금으로 장식된 천으로 항상 덮어뒀다. 외국 순례자들이 보기를 원하면 평신도회 회장의 승인이 있어야만 가능했다.
흑사병이 돌던 시절 이 성모의 기적은 또 한 차례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 구원을 기원하기 위해 피렌체 시민들뿐 아니라 순례자들까지 성소를 찾았다. 헌금만 무려 35만피렌체 금화라는 거액이 모였다. 뜻하지 않게 황금이 쌓이자 조직은 부패해갔다. 신흥 상인 길드와 곡물시장 상인들 사이의 밀월 관계도 오래가지 못했다.
평신도회 간부가 회계 부정에 연루되자, 피렌체 정부는 자신들의 정치적 지지자였던 곡물시장 상인들로부터 평신도회 운영권을 빼앗아 버렸다. 그리고 곡물시장을 다른 장소에 지어주고 기적을 행하는 성소를 새롭게 개축하는 결정을 내린다. 그렇게 곡물시장은 오르산미켈레 교회로 재탄생하고 교회 운영권은 정부로 넘어갔다.
먼지가 쉽게 앉았던 그림을 보호하고 성소를 더욱 신성하게 꾸미기 위해, 피렌체 정부는 성소를 대리석으로 장식하기로 결정했다. 조각은 당시 최고의 명성을 지닌 조각가 ‘오르카냐(Andrea Orcagna)’가 맡았다
(1352~1357년). 이 조각은 언뜻 보면 하나의 대리석으로 조각된 작품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117개의 정교한 대리석 조각품을 하나하나 이어 만든 작품이다. 대리석 이음 장식도 당시에 흔히 쓰이던 모르타르가 아니라, 쉬 변질되지 않는 주석을 사용해 75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뒤틀림 하나 없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미학적인 관점뿐 아니라, 기술적인 면에서도 당대 최고의 예술 작품이다. 정교한 부조 형태로 구약성서 이야기부터 성모의 일대기에 이르기까지 성모를 봉헌하는 성소답게 주제를 묘사해놨다.
이 작품을 감상할 때 당시 다른 종교 작품에 등장하지 않던 신중함, 신뢰, 용기 등과 같이 열다섯 가지 덕목을 상징하는 부조(浮彫) 장면에 주목해야 한다. 성소의 아랫면을 삥 둘러 조각된 이 덕목을 상징하는 부조들은 세속 권력의 리더가 갖춰야 될 도덕적 기준이다. 교회가 기적의 성모를 봉헌하는 종교적 기능을 넘어, 피렌체 정부가 직접 운영하는 교회가 됐다는 표식인 셈이다.
성구용품과 재정 담당자는 정부가 직접 임명했다. 그래서 당시 이 교회는 피렌체에서 유일하게 어느 수도회나 교회에 소속되지 않았다. 피렌체 정부는 이렇게 주교의 영향력이 미치는 피렌체 교회들과 거리를 뒀다.
상인들이 만든 길드 대표로 구성된 피렌체 세속 권력을 두오모 성당을 중심으로 주교가 관할하는 신앙 권력과 대립시키겠다는 의도였다. 이렇게 오르산미켈레 교회의 성소를 장식하고 있는 은총의 성모마리아와 대리석 장식은 성스러움과 세속, 상인들의 정부와 평신도회라는 영적 가치와 세속적 가치가 서로 융합돼 녹아 있는 작품이다.
오르산미켈레 교회는 이민자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구호단체, 피렌체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평신도회를 운영하는 종교단체가 됐다. 이런 종교단체를 신흥 상인들 이익단체인 길드가 장악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시켜 나갈 수 있었다.
이어 길드라는 단체의 단합된 힘으로 굳건하게 권력을 장악한 신흥 상인들은 오르산미켈레 교회 벽면에 자신들의 수호성인을 조각해놓음으로써 자신들의 신앙 기관이라는 표식을 확실히 해둔다. 기적과 은총을 행하는 성모를 활용해 정치 마케팅에 성공한 셈이다.
도나텔로, 기베르티 등 당대 최고의 조각가들이 경쟁하는 수호성인 조각상 이야기는 다음 호에 이어진다.
[출처] : 성제환 원광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성제환의 르네상스 예술여행> / 매경이코노미
9.길드들의 청동상 조각 경쟁…새로운 권력층 된 상인의 ‘자랑질’
사진①. 기베르티는 1422년 은행가 길드의 수호성인으로서 성 마태의 청동상을 제작했다. 사진②. 베로키오가 조각한 청동상 ‘의심 많은 도마’다. 메디치 가문은 사실관계를 파악하지 않고 법전만으로 판결을 내리던 사법부를 개혁하면서 이 동상을 세웠다. 창에 찔린 가슴 부위 상처를 손으로 확인하는 형상을 만든 데는 이런 배경이 깔려 있다
1400년대 초반 8명의 피렌체 은행장이 한자리에 모였다. 한때 고리대금업자로 천대받았지만, 이제는 어엿하게 피렌체에서 가장 부자가 된 인물들이다. 후에 메디치 가문의 수장이 되는 ‘코시모’도 아버지를 대신해 참석했다.
오늘날 시중은행들이 은행연합회를 조직해 자신의 이익을 대변해오듯, 당시 은행가들도 길드(Arte dei Cambio)라는 연합체를 조직해 운영했다. 회의 목적은 은행가 길드의 위상을 드러내기 위해, 자신들의 수호성인 상을 청동으로 장식하는 안건을 결정하는 것. 조각상이 건립될 위치는 흑사병이 발생했을 때, 기적을 행해 위력을 떨치던 ‘은총의 성모’ 성소가 있는 ‘오르산미켈레’라는 교회 외벽이다.
흰콩과 검은콩으로 찬반 투표를 한 결과 당시 세례당 청동문 조각에 열중이던 ‘기베르티’가 뽑혔다(1418년 8월 26일). 그리고 몇 가지 조건이 덧붙었다.
첫째, 자신들의 수호성인인 성 마태(St. Matte)를 청동상으로 조각해줄 것. 성 마태는 예수의 12제자 중 한 명으로, 원래 세금을 징수하던 세리 출신이라 은행가들의 수호성인으로 안성맞춤이었다. 둘째, 총 예산은 1100피렌체금화(약 9억원)를 넘어서는 안 된다는 조항도 잊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조각가에게 특별한 부탁을 했다.
이 교회의 다른 벽면에 조각된 세례자 요한의 청동상보다 더 크고 화려하게 조각돼야 된다는 단서를 달았다. 이 세례자 요한 청동상은 기베르티가 2년 전에 ‘무역상인 길드(Arte dei Calimala)’를 위해 제작한 조각상이다.
주문서에서 알 수 있듯 무역상인들보다 뒤늦게 돈을 벌게 된 은행가들은 자신들의 위상을 드러내려고 예술 작품 하나도 경쟁관계에 있는 다른 길드들에게 뒤지지 않으려 했다. 이렇게 해서 오르산미켈레 교회의 벽감에 세례자 요한 청동상보다 겨우 2㎝ 높은 성 마태의 조각상이 탄생한다.
이어 한때 피렌체에서 가장 부유했던 양모 제조업 길드(Arte della Lana) 대표 8명 중 6명이 회의에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다른 길드에 비해 추락한 자신들의 위상을 놓고 대표들 사이에 울분이 터졌던 모양이다. 양피지에 기록된 당시 회의록을 잠깐 옮겨보자(1427년 4월 11일).
“무역상인 길드나 은행가 길드는 자신들의 수호성인 조각상을 아름답고 크게, 그것도 청동으로 조각해놔 우리 길드보다 더 훌륭한 명예를 얻었다. 그래서 대리석으로 수호성인을 조각한 우리 길드 회원들은 다른 길드 대표들로부터 조롱을 받았다.”
이날 회의에서 조롱의 대상이 된 대리석 조각상은 두오모 성당에 175피렌체금화(약 1억4000만원)를 받고 넘긴 후(이 대리석 조각상은 지금도 두오모 성당 박물관에 보존돼 있다), 다시 청동상으로 조각하기로 결정했다.
조각은 앞서 다른 길드들의 수호성인을 제작한 경험이 있는 기베르티에게 맡겼다. 물론 자신들과 경쟁관계에 있었던 무역상인과 은행가 길드가 제작한 청동상보다 더 크게 제작해줄 것을 부탁했다. 총 예산은 1000피렌체금화(약 8억원)를 책정했다.
양모 제조업 길드의 수호성인은 초기 교회의 집사로서, 행정관리 능력이 뛰어 났던 성 스테판(St. Stephen)으로 선정됐다. 성 스테판 청동상은 이렇게 길드들 사이에 자신들의 위상을 드러내고자 하는 경쟁에서 탄생했다.
이처럼 주문자들 사이에 경쟁이 붙으면서 당대 최고의 청동 주물 기술을 자랑하던 기베르티의 공방은 매우 바빴다. 후에 도나텔로와 미켈로초 같은 조각가들이 메디치 가문으로부터 많은 주문을 받게 되는 이유도, 기베르티의 조수로서 청동 주물 기술을 배울 수 있었던 덕분이다.
상인들의 연합체인 길드는 오르산미켈레 교회 벽면을 장식하는 청동 조각상을 놓고, 왜 이렇게 경쟁을 했을까?
이 작품이 주문될 당시 피렌체는 모처럼 평화의 시기를 맞았다. 오래전부터 위기가 닥칠 때마다 피렌체 시민들은 하나가 됐지만, 평화가 오면 파벌이 생기고 분열이 일어났다.
단테도 자신의 역작 ‘신곡’에서 변덕이 심한 피렌체 시민들을 개탄스러워 했다. 이 시기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이해관계가 첨예한 상인들은 길드를 앞에 내세워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길드들 사이에 권력다툼이 자주 일어났다.
피렌체 정부는 힘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피렌체 상인을 대표하는 12개의 길드에 자신들의 수호성인으로 상인의 교회인 오르산미켈레 건물 벽면을 장식하도록 의뢰한다. 무역상인 길드, 양모 제조업 길드, 은행가 길드가 참여해 청동 조각상을 만들었다.
여유가 없었던 대장장이나 모피상인 같은 소규모 길드들은 비싼 청동 대신 대리석으로 자신들의 수호성인 상을 조각한다. 그러나 교회 외벽 장식의 통일성을 위해 소규모 길드들의 대리석 조각상을 청동으로 조각된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표면에 청동색 칠을 해놨다.
그래서 지금도 진품이 전시된 교회 2층에 가면 대리석 상에 푸른색이 짙게 남아 있다. 이와 같이 오르산미켈레 교회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조각상들은 당시 길드들의 위상과 정치적 파노라마가 그대로 기록된 역사적인 유산이다.
메디치 가문이 등장하긴 이른 시기지만, 이 교회에 메디치 가문의 정치적 욕망이 여지없이 드러난 작품이 하나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메디치 가문의 측근 5명이 피렌체 상업 재판소 행정을 관할하는 사무실에서 회의를 열었다(1466년 3월 26일). 회의 내용은 오르산미켈레 교회의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청동 조각상(툴루즈의 성 루이)을 산타 크로체 성당으로 이전하고, 그 자리에 피렌체 상업 재판소의 수호성인 조각상을 제작하는 내용. 우선 상업 재판소가 150피렌체금화(약 1억원)를 오르산미켈레 교회에 지불하고 수호성인의 후원 권리를 사는 결정을 내렸다.
조각가로 회화와 조각 분야에서 명성을 떨치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스승인, 베로키오(1435~1488년)가 작품을 맡았다. 작품의 주제는 ‘예수와 성 도마(Christ and St. Thomas)’로 선정됐다.
예수의 12제자 중 한 사람인 ‘성 도마(St. Thomas)’는 의심이 많아, 예수가 실제 부활하는 장면을 보고서야 부활을 믿었던 사도다. 그래서 성경에서 ‘의심 많은 도마’로 불린다. 그런데 재판소의 수호성인에 왜 의심 많은 도마가 등장할까?
메디치 가문이 권력을 장악하고 가장 먼저 시도한 정치적 개혁은 사법부 개혁이다. 당시 재판관들은 사실관계도 파악하지 않고 법전만 보고 판결을 내렸다. 그래서 선의의 피해자도 많았다. 메디치 가문 측근들도 피해가 적지 않았다. 메디치 가문은 중대한 결단을 내렸다.
전문 법률가 출신 재판관을 해임하고, 사실관계와 상식에 의해 판단할 수 있는 존경받는 시민들을 재판관으로 임명했다. 법전보다 진실 규명과 관용이 더욱 중요하다고 여긴 것이다. 베로키오가 조각한 청동상에서 의심 많은 도마가 예수가 수난을 당할 때 창에 찔린 가슴 부위 상처를 손으로 확인하는 형상으로 묘사된 것도 이런 정치적 배경 때문이다(사진②).
단테가 태어난 집과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던 오르산미켈레 교회는 당시에 길드를 조직해 단합된 힘으로 정부 권력을 장악하던 피렌체 신흥 상인들의 성지였다.
하지만 두오모 성당을 중심으로 주교와 주교에 의존해 권력을 행사하는 토착귀족 영향력은 여전했다. 그래서 길드 대표들은 오르산미켈레 교회를 자신들의 수호성인을 모시는 신전으로 만들고, 두오모 성당과 대립각을 세우는 전략을 세웠다. 결국 경제력에서 뒤진 주교는 신흥 상인 길드에 자리를 내어주고 만다. 황금의 위력이다.
이제 상인들의 돈이 문명의 뿌리가 되고, 시간이 지나면서 문명의 꽃은 불멸의 아름다움을 지닌 예술 작품으로 피어난다. 이게 르네상스 문명의 실체다.
[출처] : 성제환 원광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성제환의 르네상스 예술여행> / 매경이코노미
10.브란카치 예배당의 ‘성전세’ 의문의 죽음 당한 마사초에 올리는 경배
사진①. 카르미네 수도원의 브란카치 예배당 앞에서 화가 지망생들이 그림을 그리고 있다
사후에 가장 많은 제자를 둔 르네상스 시대 예술가를 꼽으라면 주저 없이 화가 마사초(Masaccio, 1401~1428년)를 꼽는다. 후대 르네상스 화가들이 이 화가의 작품을 베끼기 위해 카르미네(Santa Maria del Carmine) 수도원의 조그마한 예배당으로 몰려들었다. 미켈란젤로도 수시로 이곳 예배당을 방문했다고 한다.
후원자를 내세우기 좋아하는 이탈리아 사람들은 이 예배당을 후원자의 이름을 빌려 ‘브란카치 예배당(Cappella di Brancacci)’이라 부르지만, 당시에는 ‘시민을 위한 성모 마리아 예배당’으로 불렸다(사진①). 선조들이 영혼을 기리는 개인 소유 예배당이라기보다, 시민 공동체를 위한 신앙적 공간이란 느낌이 든다. 이렇게 작품이 남겨진 공간이 기존에 사용해오던 것처럼 망자(亡子)들의 영혼을 기리는 예배당이 아닐 경우, 먼저 예배당의 용도부터 정확히 해두는 것이 또 다른 작품 감상법이다.
카르미네 수도원이 세워진 아르노강 남쪽 지역은 당시에 대장장이, 목공 등과 같이 가난한 서민들이 살고 있었다. 당연히 신도들도 그리 부유하지 않았다. 다른 수도원처럼 부유한 상인들로부터 후원을 받지도 못했다. 또한 이곳 수도사들은 가난과 노동이라는 원칙을 고수하며 장례나 치러주고 겨우 은화 몇 닢을 받는 정도였다. 정 어려울 때는 미사에 사용하는 십자가를 저당 잡혀 사용하기도 했다(실제로 은십자가를 18피렌체금화에 저당 잡힌 적도 있다).
수도사들이 장례미사를 드려주고 곡물과 사용하다 남은 양초를 탁발로 가져오면 신도들은 곡물로 빵을 굽고, 몽당 양초를 모아 새로운 양초를 만들어 판매했다. 다른 수도원들이 부자들의 시신을 수도원 지하에 안장하고 이들에게 예배당을 분양해 수익을 얻는 경제구조와는 사뭇 달랐던 셈이다. 그러나 가난했던 수도원은 이 같은 방식을 통해 점차 자립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런 과정에서 신도들 중 성공한 중소상인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두각을 나타낸 상인이 ‘펠리체 브란카치(Felice Brancacci)’다. 이 상인은 1200년대 후반 펜을 만드는 조그만 수공업자에서 출발하여 비단 장사로 부자가 된 가문 출신이다.
브란카치는 첫 번째 부인과 사별한 후 당대 피렌체 최고의 명문 가문(Palla Strozzi)의 딸과 결혼하는 행운(?)을 얻는다. 이 부인이 갖고 온 막대한 지참금 덕택에 한때 피렌체에서 516번째 부자 반열에 오르기도 했다.
이 행운아에게 겹행운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피렌체가 마침 밀라노와 전쟁 중에 있었는데, 전쟁에 필요한 재원을 조달하는 책임자로 임명됐다. 가난한 수공업자 출신이 정부 고위직까지 오른 셈이다. 이어 이 수도원의 평신도회(Compania di Disciplina) 회장으로 임명됐는데, 그러자 이 평신도회는 수도원과 정계를 연결하는 주요 통로로 자리매김한다.
당연히 그 핵심에 브란카치 가문이 있었다. 이 상인이 정계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오던 평신도회에 자신의 예배당까지 모임 장소로 내어주면서 이 예배당은 공적인 공간으로 바뀌게 된다. 그래서 ‘브란카치 예배당’이라 부르지 않고, ‘시민을 위한 성모 마리아 예배당’으로 불렸던 것이다.
이제 작품 감상으로 들어가보도록 하자.
사진②. 마사초가 브란카치 예배당에 그린 ‘성전세’다. 신성과 관계없는 장면이지만 교황에게 불만을 표시하는 차원에서 포함됐다
화가 마사초가 브란카치 예배당을 장식하는 주문을 맡게 되는 시기는 서로들 교황이라고 우기는 3명의 교황이 혼재하던 시기를 막 지나, 새로운 교황(마르티누스 5세)이 선출된 시점이었다. 하지만 로마 교황청은 로마의 토착귀족들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황은 로마로 곧바로 돌아갈 수 없었다. 교황은 피렌체에 2년 동안이나 머물게 된다.
교황의 권위가 말이 아니었다. 제2의 교황청이 됐다고 여긴 피렌체 정부는 교황을 위해 교황권의 신성(교황 무류성)과 위엄을 다시 세우는 과업을 급선무로 여겼다. 정부는 정부 요직에 있던 브란카치 가문 소유의 예배당을 초대 교황이었던 사도 베드로가 행한 기적적인 장면들로 장식하기로 결정한다.
위상이 추락한 교황권의 신성을 회복하는 작품의 주제로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다. 후에 로마로 돌아간 교황은 브란카치 가문의 예배당을 후원한 신도들에게 40일간의 면죄부를 줄 정도로 감사의 표시를 했다.
화가가 예수가 베드로를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는 장면에서 시작해,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치료하고, 그림자로 환자를 치료하는 장면들로 예배당의 벽면을 장식하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그런데 이 작품을 자세히 보면, 사도 베드로가 행한 기적과 관계없는 장면이 묘사돼 있다. 그 장면이 바로 예수도 로마의 세리(稅吏)들에게 세금을 냈다는 ‘성전세·Tribute Money’라는 작품이다. 아마 교황과 피렌체 정부 사이에 불편한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 작품이 그려질 당시 피렌체는 밀라노와의 전쟁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전쟁 비용 조달의 책임을 맡았던 책임자가 예배당의 소유자인 브란카치였는데 시민들로부터 원성을 샀다.
교황에게 밀라노와의 전쟁에 대한 중재를 요청했지만, 교황은 “평화를 유지하시오!”라는 단 한마디를 할 뿐이었다. 한때 극진하게 모셨던 교황에게 피렌체 정부는 배신감을 느꼈다. 피렌체 정부는 또 한 번 다짐했다. “국가는 교회의 종소리나, 성직자의 주기도문으로 통치되지 않는다”는 현실을. 그래서 피렌체 정부는 당시 가장 재산이 많았던 교회에 세금을 부과하기로 결정했다.
목표 모금액이 무려 12만5000플로린, 우리 돈으로 1000억원이나 되는 거금이다. 현금이 없는 교회는 성구용품이나 토지를 저당 잡히기도 하고, 세금을 내지 못하는 성직자를 감옥에 가두기도 했다.
당연히 교황은 반발했다. 이런 시대적 배경 아래 초대 교황인 사도 베드로의 기적적인 장면에 ‘성전세’라는 한 장면이 끼워 넣어지게 됐다(사진②). 이 그림의 정중앙을 보면, 예수가 12제자들과 함께 사도 베드로의 고향(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성문에서 로마의 세리가 통행세를 내라고 길을 막아선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러자 예수께서 제자들 중 으뜸인 사도 베드로에게 “저기 연못으로 가 고기의 입을 벌려보면, 입 속에 은화 한 닢이 있을 것이니 그걸 세리에게 주라”고 신호한다.
이 그림 왼쪽을 보면, 회색 옷을 입고 흰 곱슬머리를 한 베드로가 고기의 입을 벌리고 있는 형상으로 그려져 있다. 쭈그리고 앉아 있는 베드로가 힘겹게 보였는지, 화가는 사도 베드로의 얼굴을 불그스레 홍조를 띤 모습으로 표현해놨다. 이런 섬세함으로 화가 마사초는 후대 예술가들로부터 “인간과 자연에 생명을 불어넣는 위대한 예술가”로 칭송받게 된다.
이후 마사초는 갑자기 예술에 대한 열정과 충동에 못 이겨 로마로 떠나지만, 곧바로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만다. 그의 나이 겨우 28세였다. 후에 마사초가 끝내지 못한 예배당을 다시 장식하게 된 화가 필리포 리피(Filippo Lippi)는 ‘죽은 어린아이를 살리는 베드로’라는 장면에 검은 모자를 쓰고 발이 없는 한 사람을 그려놨다. 그 자가 바로 화가 마사초를 살해한 범인으로 지목받는 인물이다.
마지막으로 이 예배당을 장식한 작품에는 단테, 미켈란젤로, 그리고 예배당을 장식한 화가 마사초 등 8명의 예술가들 초상이 그려져 있다. 혹 여행 가시면, 재미 삼아 숨은 그림 찾기 한번 해보시길!
[출처] : 성제환 원광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성제환의 르네상스 예술여행> / 매경이코노미
11. 메디치 가문이 탐냈던 ‘산 로마노 전투’ 원근법 정수 보여준 우첼로의 대작
산 로마노 전투’의 2가지 장면이다. 위는 용병 토렌티노의 진군 장면(영국 국립미술관 소장)이고 아래는 밀라노 연합군과의 전투 장면이다. 두 작품 모두 1440년대 제작됐다.
화가 우첼로(Paolo Uccello)가 어느 날 부인과 잠자리에 누워 자신도 모르게 “아! 원근법아, 얼마나 사랑스러운가!”라는 말을 내 뱉자, 부인이 ‘원근법’이라는 여자가 화가의 애인인 줄 착각하고 부부싸움을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아마 후대 미술사가들이 원근법에 광신적으로 몰두한 화가를 칭송하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일 것이다.
지금이야 재능 있는 초등학생들도 먼저 소실점을 정해놓고 3차원의 입체적 장면을 2차원 화폭에 담아내는 원근법에 익숙하지만, 당시에는 어려운 작업이었다. 원근법을 완성시키기 위해 우첼로는 예술가들보다 기하학에 능한 수학자들(특히 조반니 마네티)과 가깝게 지냈다.
그래서 이 화가의 작품은 기하학적 도형들로 가득 찬 딱딱하고 건조한 화풍이지, 우아함과는 거리가 멀다. 1901년이 돼서야 예술 애호가들이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이런 화풍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1400년대 초반 이 화가가 그린 ‘산 로마노 전투’라는 작품은 메디치(Medici) 가문이 강탈해 올 정도로 가장 소장하고 싶어 했던 작품 중 하나다.
이 작품의 어떤 점이 메디치 가문을 이렇게 부도덕한 행위로 몰아넣을 만큼 매력적이었을까? ‘산 로마노 전투’는 피렌체와 항상 적대적이었던 밀라노가 이웃 도시 루카의 군대를 앞세워 피렌체를 침공하자 용병을 앞세운 피렌체가 ‘산 로마노’ 계곡에서 적군을 물리친 장면을 묘사한 작품이다.
화가는 하루 동안에 일어난 전투 장면을 아침, 점심, 그리고 저녁 3부작으로 나눠 그렸다. 1432년 6월 1일,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한여름에 습하기로 소문난 계곡에서 전투의 제1막은 시작된다(그림①).
성질 급하고 충동적인 피렌체 용병대장(니콜로 다 토렌티노)은 지원군을 기다리지 않고, 나팔수들에게 진군의 나팔을 불게 했다(중앙에 보이는 용병대장 옆에 나팔수들이 볼을 부풀려 힘껏 나팔을 불고 있는 형상으로 묘사됐다).
하지만 곧바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후방에 진을 치고 있던 다른 용병대장(미켈레토)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전령을 급하게 보낸다. 이 작품의 오른쪽 상단에 피렌체 깃발을 든 전령이 말을 타고 달리는 형상으로 묘사된 것은 당시 전투의 절박함을 묘사한 장면이다.
용병대장은 헬멧이 아니고 둥근 도넛처럼 생긴, 천으로 만든 모자를 쓰고 있다. 이 모자는 ‘마조치오(mazzochio)’라고 불리는 모자로 피렌체 귀족이 자주 쓰던 모자다. 원근법에 심취해 있던 화가는 이 모자를 그리면서도 원근법을 적용하느라 무진 애를 썼다. 그래서 당시 이 모자는 ‘원근법 모자’로도 불렸다.
두 번째 그림은 피렌체 군과 적군과의 치열한 싸움이 전개되는 장면을 그려냈다(그림②). 당시 상세히 기록된 전투 연대기에 의하면, 치열한 전투가 한창이던 이 시간은 한여름 중에도 햇볕이 강렬히 내리쬐는 한낮이어서, 갑옷을 입은 군인의 몸은 땀으로 흠뻑 젖었고 목이 말라 그 고통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작품의 왼쪽 상단에 병사들을 위해 시종들이 바삐 물을 길러 나르는 모습을 그려놨다(어두워서 잘 안 보이지만, 긴 창 3번째와 4번째 사이에 3명의 시종들이 물을 퍼 올리고 있다). 치열한 전투가 지속되자, 결국 하얀 말을 탄 적군의 장수(베르나르디노)가 말에서 떨어졌다.
피렌체 군대는 승기를 잡았다. 얼마나 전투가 치열했던지 바닥을 보면 부러진 창, 이리저리 뒹구는 헬멧이 그려져 있는데, 그 와중에 화가는 당시 원근법을 표현하는 도구로 흔히 사용하던 바둑무늬 모양을 한 ‘원근법 모자’를 그려 넣는 것을 빠뜨리지 않았다. 우첼로의 원근법에 대한 집착이 참으로 대단하다.
마지막으로 저녁 무렵이 돼 용병대장 미켈레토가 이끄는 지원병이 도착하자, 피렌체 군대의 2배가 넘는 적군이 퇴각하며 전쟁은 피렌체의 승리로 끝난다. 현재 루브르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산 로마노 전투’의 3번째 작품은 이렇게 해서 마무리된다.
전투의 승리를 계기로 피렌체 시민들 자긍심을 높여주는 과업은 화가의 붓을 떠나, 이제 인문학자의 글로 옮겨진다. 피렌체 수호성인의 축일(6월 24일)에 피렌체시 청사의 광장에 용병을 칭송하는 글이 나붙었다.
“당신은 적군이 수적으로 우세함에도 불구하고, 가장 고귀한 승리를 이뤄냈다. 그날 피렌체는 오랜 고통 속에서 회생하며 새로운 삶을 찾았다. 당신은 피렌체에 활력, 광명, 지식, 그리고 희망을 갖다준 영웅이다!”
용맹스러운 기마상 그림과 함께, 용병들의 시신은 피렌체에서 가장 성스럽고 영광스러운 피렌체 대성당 지하에 안장됐다.
이 작품은 당시 이 전쟁의 책임을 맡았던 ‘살림베니’ 가문의 수장이 자신의 책임으로 시작된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광적인 순간을 후손들에게 기리기 위해 주문한 작품이다. 가문의 영광이었을 것이다.
살림베니 후손들은 이 작품을 저택에서 가장 안전한 침실 벽면에 장식해놨다. 어찌 보면 메디치 가문과 이 작품은 아무런 연관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왜 메디치 가문은 이 작품을 강제로 빼앗았을까? 그것도 목수를 앞세워 야밤에 벽에 붙어 있는 작품을 떼어갔다.
사실 메디치 가문과 반대편에 섰던 세력들은 루카와의 전쟁을 피하고 싶어 했다. 용병을 고용하는 데 필요한 전쟁 비용 때문이다. 반면 당시 최고 부자였던 메디치 가문은 이 전쟁을 적극 지원하고 나섰다. 특히 메디치 가문에 반대하는 귀족들을 독재자라고 공공연히 떠드는 용병대장 토렌티노에게 메디치 가문이 거액의 돈을 빌려줬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메디치 반대파가 생각하기에 용병대장 토렌티노는 메디치 가문의 사병이나 다름없었다. 메디치가의 군사력에 위협을 느낀 반대파들은 선수를 쳐서 메디치 가문의 수장과 친척들을 옥에 가두고 사형시킬 계획을 세웠다.
잡혀간 메디치 가문 사람들은 이 사실을 용병대장에게 알렸고, 용병대장은 군대를 이끌고 피렌체시 청사 앞에 집결해 메디치 가문 사람들을 놔주라고 시위했다.
위협을 느낀 메디치 가문 반대파들은 하는 수 없이 메디치 가문을 10년 동안 추방하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한다. 메디치 가문에게 이 용병대장은 생명의 은인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메디치 가문 사람들은 이 용병대장을 ‘메디치 가문의 순교자’라고 불렀다.
산 로마노 전투가 끝나고 40여년이 지난 후, 메디치 가문 후손들이 토렌티노 용병대장이 전쟁에서 승리한 장면을 묘사한 ‘산 로마노 전투’를 보관해오던 살림베니 가문에 작품을 건네줄 것을 끈질기게 요구한 배경이다.
교황을 비롯해 유럽의 왕과 귀족들이 방문하는 메디치 저택 응접실 벽을 장식할 요량이었다. 하지만 이 가문의 후손들도 아버지의 계획으로 전쟁에서 승리한 역사가 기록된 작품을 순순히 넘겨주려 하지 않았다. 결국 메디치가 사람들은 목수(Francione)를 앞세워 그림을 떼어갔다.
목수가 떼어온 그림은 반원 모양이었는데, 메디치 저택의 응접실 벽면은 직사각형 모양이었다. 목수는 아무런 생각 없이 반원 모양의 그림 윗부분을 톱질했다. 그래서 ‘산 로마노 전투’의 세 작품은 모두 하늘이 없이 그려진 것처럼 보인다. 병사들이 들고 있는 창끝이 잘려 나간 형태로 돼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최근 들어 호기심 많은 이탈리아인들이 이 작품을 X-Ray로 투시해 보니, 작품(그림②)의 오른쪽 끝부분에 나무를 새로이 덧대고, 그 부분을 검은색으로 색칠해놓은 흠집이 발견됐다. 메디치 저택 응접실의 직사각형 벽면에 맞춰 장식하기 위해 예술 감각이 없던 목수가 반원 모양 윗부분을 자르는 와중에 무지하게 처리한 모양이다.
화가 우첼로가 전 생애에 걸쳐 몰두한 새로운 시도, 즉 원근법이 완벽하게 시현된 ‘산 로마노 전투’ 세 작품은 후대 예술 애호가들의 무관심 속에 하나는 영국 국립미술관에, 다른 하나는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에,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피렌체 우피치미술관 지하에 갇혀 있다가 20세기 초에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출처] : 성제환 원광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성제환의 르네상스 예술여행> / 매경이코노미
12. 귀족 후손으로 미화된 메디치 가문…신화 만들어 족보 위조하고 교황과 결탁
① 거인이 휘두르는 철퇴를 방패로 막아 물리쳤다는 의미로, 메디치 가문의 문장은 노란색 방패에 여러 개의 붉은색 원 모양으로 돼 있다. ② 피렌체 은행가 길드 규약집 3권 표지다. 피렌체 고문서 박물관에 전시됐다. ③ 교황의 신세를 크게 진 메디치 가문은 교황을 기린 영묘를 세우도록 했다
메디치 가문의 딸 카트린(Catherine de' Medici)은 프랑스 왕세자와 결혼하기 위해, 프랑스 마르세유에 도착했다. 당시 프랑스 귀족들은 메디치 가문과의 결혼을 반대했다. “어떻게 프랑스 왕족이 천한 상인 가문 출신과 결혼을 할 수 있느냐”고. 메디치 가문은 부자긴 했지만, 귀족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렇게 유럽 귀족들로부터 멸시를 받았다.
이 사건이 있은 후 메디치 가문 사람들은 자신들이 귀족의 후손이라는 점을 증명하려는 듯, 메디치 가문의 문장과 결부시켜 신화를 지어내기 시작했다. 노란색 바탕에 여러 개의 붉은색 원으로 새겨진 가문의 문장을 앞세웠다. 시각적인 효과에 신화라는 상상력이 결합하자, 신화가 사실인 양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화는 허구고, 역사는 사실이지 않은가! 메디치 가문에 씌워진 신화의 허구를 한 꺼풀씩 벗겨보자. 그래야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를 지배하고 있던 60년 동안(1434~1494년)에 제작된 예술 작품들을 신화적 언어가 아닌 인간의 언어로 감상할 수 있다.
메디치 가문에 대한 신화는 8세기경, 그들의 고향인 ‘무젤로(Mugello)’라는 지역에서 시작된다. 어느 날 메디치 가문이 모여 살던 고향에 철퇴를 든 거인들이 침입했다. 그러자 기사로서 그 지역 방위를 책임지고 있던 메디치 가문 선조가 거인이 휘두르는 철퇴를 방패로 막아 그 거인을 물리쳤다고 한다.
방패에 여기저기 피 묻은 철퇴 자국이 남았는데, 그 형태를 기려 오늘날 메디치 가문 문장이 노란색 방패에 여러 개의 붉은색 원(Palle라고 한다) 모양으로 그려졌다고 한다(사진①).
메디치 가문은 선조를 기사(騎射) 출신으로 묘사함으로써 자신들이 귀족 출신이었다는 신화를 만들어냈다. 메디치가 사람들은 이것만으로 안심이 안 됐는지, ‘Medici’라는 성(姓)씨가 유래한 배경에 대해 또 한 꺼풀의 신화를 덧씌웠다.
이탈리아가 야만인의 침입을 받았던 8세기경, 이탈리아는 프랑스 황제(샤를마뉴 대제)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전쟁 도중 프랑스 황제가 부상을 당했는데, 메디치 사람 중 외과 수술에 능한 의사가 황제를 살렸다고 전해진다. 당시 의사를 부르는 단어는 ‘medico=doctor’였다. 그래서 ‘Medici’라는 성을 갖게 됐다나.
하지만 메디치 가문이 돈을 번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치장된 신화의 민낯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메디치 가문은 고향에서 부동산 매매와 대부업(당시 고리대금업)으로 부를 축적하게 되자, 1100년대 초반 농촌에서 피렌체 도시로 이주해왔다. 피렌체에서 대부업을 하려면 의무적으로 은행가 길드(Arte del Cambio)에 가입해야 했으므로 이 가문도 은행가 길드에 가입했다.
이번에 필자가 피렌체 여행을 하며 피렌체 고문서 박물관(Archivio di Stato)에서 메디치 가문 문장과 관련된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귀중한 문서 하나를 발견했다. 1200년대 초 나무로 만들어진 은행가 길드 규약집 표지다(사진②).
이 표지를 보면, 메디치 가문의 문장과 비슷한 문장이 한가운데에 새겨져 있다. 이 문양은 당시 은행가 길드가 사용하던 문장이다. 11개의 노란색 원은 비잔틴 제국에서 사용하던 ‘베잔트’라는 금화를 상징한다.
은행가 길드의 문장에서 붉은 바탕색을 노란색으로, 노란색 원을 붉은색 원으로 바꾸기만 하면 메디치 가문의 문장이 된다. 메디치 가문의 문장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 붉은색 원이 11개였다고 한다. 은행가 길드 문장에 새겨진 노란색 원도 11개다.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는 어렵다.
존경받지 못하던 대부업자에서 어떻게 서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이 됐을까?
메디치 가문 하면, 1400년대 중반 메디치 가문의 수장이 되는 코시모(Cosimo de' Medici, 1389~1464년)를 먼저 연상하게 되지만, 사실 코시모의 아버지(Giovanni di Bicci de' Medici, 1360~1429년)가 가문의 부를 일으켰다.
코시모의 아버지는 사촌이 운영하던 로마은행의 평사원으로 직장 생활을 시작했지만, 성실하고 관리 능력이 뛰어나 곧바로 지점장으로 승진했다. 그리고 무려 1500피렌체금화, 지금 돈으로 12억원이나 되는 거액을 갖고 온 지주의 딸과 결혼하는 행운(?)을 얻는다.
코시모의 아버지는 이 지참금으로 피렌체에 메디치 은행을 세운다. 코시모 아버지의 나이 겨우 37살 때의 일이다. 이 은행은 후에 전 유럽에 8개 지점과 20개 넘는 사무실을 운영하는 메디치 은행의 지주회사가 된다.
예나 지금이나, 돈을 버는 기회는 혼란과 위기에서 온다. 코시모 아버지가 사업 기반을 세우는 1400년대 초반은 교황 3명이 서로 교황이라고 우기던 ‘교황의 대분열’ 시기다.
이 혼란의 시기에 코시모 아버지는 교황이 되기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할 것 같았던 ‘발다사레(Baldassare Cossa)’ 주교의 후원자가 됐다. 코시모 아버지는 먼저 추기경 자리를 그토록 탐냈던 이 주교에게 값비싼 보석으로 치장된 주교 모자를 담보로 1만피렌체금화(약 80억원)를 빌려줬다. 메디치 은행의 황금 덕에 이 추기경이 요한 23세라는 교황으로 선출된다.
그러자 교황 요한 23세는 감사의 대가로 메디치 은행에 교황청의 모든 자금 운영권을 쥐어줬다. 이제 메디치 은행은 서유럽 22개 기독교 국가로부터 교황청으로 흘러들어오는 막대한 황금을 관리하는 총책임을 맡게 된다.
과거 교황이 성직자 중 재무관을 임명해 자금 관리를 맡겨왔던 관행과 비교해보면, 메디치 은행에 엄청난 특혜를 준 셈이다. 메디치 은행은 교황청 자금을 운용하며 두 가지 방법으로 막대한 돈을 벌 수 있었다.
우선 당시에 서로 다른 화폐 형태로 교황청으로 들어오는 헌금을 교황청 기준화폐(camerio)로 바꿔주는 환전 과정에서 수수료를 챙길 수 있었다. 환전 수수료는 한 건당 3~5%에 달했다. 무엇보다도 큰 특혜는 메디치 은행이 사업을 위해 투자 재원을 별도로 마련할 필요가 없게 됐다는 점이다.
교황청으로 쏟아지는 황금만으로도 투자를 할 사업 기회가 넘쳐났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에서 메디치 은행 수익률은 30%가 넘었고, 수익금 대부분은 부동산에 투자했다. 메디치 은행은 교황청에 약간의 이익금만 넘겨주면 그뿐이었다.
하지만 교황과 코시모 아버지 사이의 밀월 관계는 오래가지 않았다. 교황의 추문이 확산되자,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는 종교회의가 소집됐다. 교황 23세는 그 자리에서 체포됐다. 코시모 아버지가 몸값(7500피렌체금화)을 지불하고 교황은 풀려났지만, 교황은 곧바로 사망한다.
후에 피렌체 권력을 장악한 코시모는 이 교황을 기리기 위해 당대 최고 조각가인 도나텔로와 미켈로초에게 피렌체 세례당 내 교황 영묘를 세우도록 했다(사진③). 다른 사람들에게 요한 23세는 교황이 아니었겠지만, 메디치 사람들에게는 순교자나 다름없는 은인이었다. 그래서 후임 교황의 끈질긴 반대에도 불구하고, 영묘 하단에 아래에 ‘한때(quondam) 교황 요한 23세’라는 명문을 새겨 넣었다.
코시모의 아버지는 이런 과정을 거쳐 메디치 가문의 부를 일으켰고, 아들 코시모에게 고향의 농지, 피렌체 시내의 과수원이 딸린 대저택, 임대수익이 나오는 7채의 집과 2개의 상가, 그리고 무려 17만8000피렌체금화(약 1400억원)를 유산으로 남겨줬다. 아들 코시모는 이런 부를 바탕으로 피렌체를 꽃으로 장식하기 시작한다.
로마제국 시대에 모든 길은 로마로 통했지만, 이제 르네상스 시대에 모든 길은 피렌체로 통하게 된다.
[출처] : 성제환 원광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성제환의 르네상스 예술여행> / 매경이코노미
13. ‘동방박사의 경배’에 숨겨진 비화…메디치에 밀려난 스트로치 가문의 영광
그림 열을 내리는 효험이 있다고 믿었던 성수를 담아두던 우물. 이 성소에 스트로치 가문이 선조의 영묘를 조각하고 예배당을 신축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지동설을 주장해 이단자로 몰리게 되자, 피렌체 아르노 강변에 위치한 산타 트리니타(Santa Trinita)라 불리는 작은 교회로 몸을 숨겼다. 프랑스에서 추방당한 나폴레옹의 어머니도 이곳으로 피신한 적이 있다. 산타 트리니타는 오래전부터 이렇게 곤경에 처한 신도의 피신처 역할을 자주 했다.
원래 이 교회가 있던 자리에는 ‘고통을 함께하는 성모 마리아’라 불리던 자그마한 교회가 있었다. 아르노 강변에서 고된 세탁일로 생활을 이어가던 가난한 여인들은 빨래를 마치면 시간이 너무 늦어 도심에 있는 교회에 갈 수 없었다. 이들이 신심을 달래던 교회가 바로 여기였다.
교회 내부 한쪽에 위치한 임신한 성모 마리아의 상. 이들 세탁부 여인들은 임신을 하면 그 앞에서 순산을 기원하며 기도를 드렸다. 임신한 성모 마리아의 상 밑에는 항상 물이 흘렀고, 그 물을 받아두는 조그만 우물이 있었다. 이 물이 열병을 치료하는 데 효험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피렌체 사람들은 이를 성수로 여겼다(그림).
우물이 있던 장소는 성소가 됐다. 메디치 가문이 권력을 장악하기 이전 최고의 부자였던 스트로치(Strozzi) 가문은 이곳에 선조의 영묘를 제작하고 영혼을 기리는 예배당을 지었다. 그리고 금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동방박사의 경배’라는 제단화로 장식해놨다.
지금 이 작품은 피렌체 회화를 모아놓은 우피치미술관에 있지만, 당시 ‘동방박사의 경배’는 어두운 예배당을 한껏 밝혀줄 만큼 아름다움을 뽐냈다. 후대 한 미술사가는 ‘아무리 파헤쳐도 보물이 고갈되지 않는 작품’이라며 극찬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정치·권력 투쟁 끝에 메디치 가문으로부터 추방당하게 되는 스트로치 가문의 비애도 살짝 들여다볼 수 있다.
메디치 가문이 등장하기 이전, 스트로치 가문의 재산은 어마어마했다. 농촌에 54개의 농장, 피렌체 도심에 30여개가 넘는 임대 상점과 주택, 그리고 피렌체에서 가장 많은 공채(12만7000피렌체금화, 약 1000억원)를 소유한 유럽 최대 부자였다. 연간 공채의 이자 수익만 해도 80억원이 넘는 큰돈이었다.
하지만 스트로치 가문은 피렌체 시민에게 높은 이자로 대부업을 했기 때문에 평판이 좋지 않았다. 이 가문의 이름을 빌려 ‘서민의 목을 죄는 고리대금업자’라는 의미를 지닌 ‘스트로치노(strozzino)’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아버지가 사망하자 아들 팔라 스트로치(Palla Strozzi)는 장례식을 치르고 아버지의 시신을 교회 지하에 안장했다. 예배당 장식은 당시 유럽 귀족풍의 회화(국제 고딕 양식) 분야에서 가장 명성을 지녔던 화가 젠틸레 다 파브리아노(Gentile da Fabriano)에게 맡겼다.
작품 주제는 ‘동방박사의 경배’. 멀리 동방에서 밤하늘에 유난히 밝게 빛나는 별을 본 세 명의 현자가 아기 예수의 탄생을 알게 되자, 이를 축하하기 위해 많은 수행원과 함께 아기 예수가 탄생한 마구간에 도착한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그런데 세 명 현자의 사치스러운 옷차림이나 말 장신구가 황금으로 장식된 것을 보면, 종교적 목적의 순수한 성화는 아닌 듯하다. 당시 다른 작품에는 자주 묘사되지 않았던 도마뱀, 독수리, 말, 개 등과 같은 동물이 그려져 있는 점도 감상자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화가에게 지불된 비용도 180피렌체금화로 상당히 비싼 편이다. 아마 주문자(팔라 스트로치)가 이렇게 많은 비용을 들여 작품을 주문한 데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이 그림이 그려질 1420년대는 세 사람의 교황이 서로 자기가 교황이라고 우기던 시절이 지나고, 오랜만에 한 사람의 교황(마르티누스 5세)이 서방 교회 주인으로 선출된 시기였다. 하지만 교황은 로마 토착귀족의 반대로 로마 교황청에 머무르지 못하고 피렌체로 피신했다. 피렌체 정부를 대표하는 귀족 무리는 시청사 광장에서 교황을 영접했는데, 사절단 대표가 바로 예배당 주인이었던 팔라 스트로치였다.
그림 스트로치 예배당에 놓였던 제단화, 지금은 우피치 미술관에 전시. 1420년대 초반 사본, 젠틸레 다 파브리아노
당시 기록에 의하면 팔라 스트로치는 올리브 나무로 만든 왕관을 쓰고, 진주로 장식된 튜닉을 걸친 채, 금으로 만든 칼집을 허리춤에 차고 시종이 끄는 말에 올랐다고 한다. 그는 한때 나폴리 왕으로부터 ‘황금 박차 기사단(Order of Golden Spur)’으로 임명돼 이미 기사, 즉 귀족 신분으로 승격된 상태였다.
화가는 이 작품을 주문한 스트로치 가문을 부각시키기 위해 작품 정중앙에 발에 황금 박차를 차고 있는 형상을 그려 넣었다. 그 뒤편에 황금으로 장식된 터번을 쓰고 아기 예수의 탄생 장면을 보고 있는 이가 교회 지하에 영혼이 안장된 팔라의 아버지 ‘노프리 디 스트로치(Nofri di Strozzi)’다. 그 옆에 푸른색 비단옷을 입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이는 팔라 스트로치.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자신이 피렌체에서 가장 역량 있는 주인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나 보다.
교황도 피렌체에 안전하게 머무르기 위해선 신심이 깊고 부자인 스트로치 가문이 필요했다. 종교와 돈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당시 피렌체 상황을 잘 묘사한 성직자의 설교를 하나 소개한다.
“신은 인간의 영혼을 가난보다는 부를 통해서 더 잘 구원할 수 있다. 가난한 자나 부자 모두 한 몸이지만, 부자는 국가를 위해 필요한 존재다.”
또 팔라 스트로치는 추락한 교황의 위상을 세우려는 형상을 이 작품 곳곳에 묘사해놨다. 먼저 성모 마리아 뒤쪽 돌로 지은 문에 벽을 타고 올라가는 도마뱀을 그려 넣었다. 당시엔 시각을 잃은 도마뱀은 햇살이 드는 빛을 찾아 동쪽에 오르면 시각을 회복한다고 한다고 믿었다. 이 형상은 도마뱀이 빛을 찾아 떠나듯 원죄를 지은 인간도 예수의 구원의 빛을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 상징물이다.
예전부터 독수리는 악덕의 상징인 어치새를 잡고 다시 주인에게 돌아온다고 전해졌다. 그래서 독수리는 악을 물리치고 주인, 즉 서방 교회의 주인인 교황에게 돌아와야 된다는 알레고리로 사용돼왔다. 또한 개와 말은 충성스러운 동물로, 이런 동물을 그려 넣음으로써 교황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동방박사의 경배’라는 작품 속에는 이렇게 주문자가 자신의 위상을 대외적으로 드러내고, 교황의 후원자 역할을 강조하고 싶은 다양한 사회·심리학적 요소들이 녹아 있는 것이다.
팔라 스트로치가 자신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 작품에 자신을 중세시대 귀족처럼 묘사한 특별한 이유가 있다. 다른 유럽 국가와 달리 피렌체는 귀족과 상인 계층, 즉 부르주아 계층과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았다. 부유했던 상인은 중세시대 귀족처럼 행동하려고 했다. 팔라 스트로치가 황금 박차를 단 기사 작위를 받았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역사는 절대 거꾸로 가는 법이 없다. 중세시대 귀족처럼 행동하려고 했던 이들의 반대편에는 평민 지지를 받는 대표적인 부르주아 계층, 메디치 가문이 서서히 등장하고 있었다. 귀족 흉내를 내던 상인 계층은 메디치 가문을 추종하는 중산층 세력과 끝내 충돌하고 만다.
당시 귀족처럼 행동했던 스트로치 가문은 메디치 가문과 서로 돈을 빌려주기도 하는 친한 사이였지만, 정치적 입장에서는 어정쩡한 입장을 보였다. 결국 스트로치 가문은 메디치 당파에 의해 피렌체에서 영구 추방당하고 만다.
팔라 스트로치가 후원한 예배당은 귀족의 몰락과 피렌체 중산층의 등장이라는 당시 역사를 그대로 전해준다. 피렌체에서는 이렇듯 예술 작품을 통해 역사를 배울 수 있다. 르네상스 시대 문화유산을 소중히 간직해온 피렌체 시민의 문화적 소양이 존경스럽다. 아울러 시멘트와 철골로 귀중한 역사를 송두리째 지워버린 우리의 현대화 모습이 새삼 안타깝게 여겨진다.
[출처] : 성제환 원광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성제환의 르네상스 예술여행> / 매경이코노미
[출처] 성제환의 ‘르네상스 예술 여행[ 1회~13회]|작성자 ohyh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