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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기도)
주님,
어제 소공원 전도 연주를 잘 하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기대했던 것보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놀랐고, 또 반응도 좋았습니다.
공원에 쉬러 온 사람들과는 익숙한 관계가 되어
이제 복음을 말하기가 쉬워진다 싶으니 날이 점점 추워집니다.
마음이 조급해지지만 모든 일에 주님의 뜻을 생각하며 기다립니다.
길을 열어 주옵소서.
9일차 다니엘기도회 시간에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성도가 결혼하는 것과 자녀를 낳아야 하는 분명한 이유,
또 자녀들의 영적 교육을 위해 부모로서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가야 하는지도 다시 한번 확인하였습니다.
저의 믿음 없음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십자가 보혈을 의지합니다.
정결한 마음을 주시옵소서.
반복되는 진리의 말씀에 한결같이 기뻐하며 나아가게 하옵소서.
성령님,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7. 노하기를 속히 하는 자는 어리석은 일을 행하고 악한 계교를 꾀하는 자는 미움을 받느니라
18.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음으로 기업을 삼아도 슬기로운 자는 지식으로 면류관을 삼느니라
19. 악인은 선인 앞에 엎드리고 불의한 자는 의인의 문에 엎드리느니라
20. 가난한 자는 이웃에게도 미움을 받게 되나 부요한 자는 친구가 많으니라
21. 이웃을 업신여기는 자는 죄를 범하는 자요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는 자니라
22. 악을 도모하는 자는 잘못 가는 것이 아니냐 선을 도모하는 자에게는 인자와 진리가 있으리라
23. 모든 수고에는 이익이 있어도 입술의 말은 궁핍을 이룰 뿐이니라
24. 지혜로운 자의 재물은 그의 면류관이요 미련한 자의 소유는 다만 미련한 것이니라
25. 진실한 증인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여도 거짓말을 뱉는 사람은 속이느니라
26.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나니 그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있으리라
2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이니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
28. 백성이 많은 것은 왕의 영광이요 백성이 적은 것은 주권자의 패망이니라
29.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
30. 평온한 마음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를 썩게 하느니라
31.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공경하는 자니라
32. 악인은 그의 환난에 엎드러져도 의인은 그의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
33. 지혜는 명철한 자의 마음에 머물거니와 미련한 자의 속에 있는 것은 나타나느니라
34. 공의는 나라를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
35. 슬기롭게 행하는 신하는 왕에게 은총을 입고 욕을 끼치는 신하는 그의 진노를 당하느니라
(본문 주해)
17절 : “성을 잘 내는 사람은 어리석은 일을 하고, 음모를 꾸미는 사람은 미움을 받는다.”(새번역)
속히 분노하는 것은 기질과 성격의 문제만이 아니라 자기 의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또 악한 계교를 꾀하는 자들도 있다. 이들은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속에서 더 교묘하게 계획을 세우는 자들도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겉으로 속히 분노하는 자나 교묘하게 악을 꾀하는 자나 간에 미움을 받는 것이다. 이때 미움이란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죽어도 끝이 나지 않는 미움 즉 하나님의 미움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잠언서가 세상의 처세술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게 하는 말씀, 성령의 감동으로 된 거룩한 말씀인 것이다.
18절 : “어수룩한 사람은 어수룩함을 유산으로 삼지만, 슬기로운 사람은 지식을 면류관으로 삼는다.”(새번역)
‘지식’은 세상의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말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망하였다(호4:6).
그들은 하나님께 율법을 받았지만 그 율법의 뜻을 몰랐던 것이다.
그러므로 슬기로운 자가 지식을 면류관으로 삼는다는 말은 그가 여호와를 알고 경외하는 참된 지식을 가진 것을 가리킨다.
19절 : “악인은 선한 사람 앞에 엎드리고, 불의한 사람은 의인의 문 앞에 엎드린다.”(새번역)
‘악인과 불의한 자’는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이다.
‘선인과 의인’은 자신의 죄인됨을 알기에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만을 신뢰하는 자이다.
현실에서는 부조리함이 일어나지만, 종말에 악인이 심판을 받고, 의인이 신원함을 받을 것을 말씀한다.
20절 : “가난한 사람은 이웃에게도 미움을 받지만, 부자에게는 많은 친구가 따른다.”(새번역)
예수님께서 세상에 속한 부를 준다고 하셨다면 많은 사람들이 따라갔을 것이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을 말씀하시자 많은 사람들이 떠나갔다.
죄악 된 인간은 애초에 진리나 생명에 관심이 있는 자들이 아니라, 땅에 속한 것을 구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21~22절 : “이웃을 멸시하는 사람은 죄를 짓는 사람이지만, 가난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이다.
악을 꾀하는 사람은 길을 잘못 가는 것이나, 선을 계획하는 사람은 인자와 진리를 얻는다.”(새번역)
이웃을 멸시하는 자가 악을 꾀하는 자요, 가난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는 자가 선을 계획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이웃을 멸시하는 것이 잘못 된 길을 가는 것이요, 가난한 자에게 은혜를 베부는 자는 주님으로부터 인자와 진리를 얻게 된다.
23절 : “모든 수고에는 이득이 있는 법이지만, 말이 많으면 가난해질 뿐이다.”(새번역)
세상에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말로만이 아니다.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라는 것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가 있어야 한다(살전1:3).
이러한 믿음의 내용이 없이 그저 말로만 하는 것은 믿음의 궁핍함에 이르는 것이다.
24절 : “지혜는 지혜 있는 사람의 면류관이지만 어리석음은 미련한 사람의 화환이다.”(새번역)
지혜로운 자의 지혜가 그의 면류관이 되듯이 미련한 자는 그의 미련함이 그의 면류관이 되는 것이다. 잠언의 지혜라는 것은 곧 여호와 경외이며 생명으로 연결이 된다.
그러므로 참된 지혜자의 면류관은 생명이지만, 어리석은 자의 면류관이란 멸망이 된다.
25절 : “증인이 진실을 말하면 남의 생명을 건지지만, 증인이 위증을 하면 배신자가 된다.”(새번역)
성경에서 참되고 진실한 증인들은 한결같이 고난을 받았다. 그러나 속이는 거짓 증인들은 환영을 받고 대접을 받았다.
진실한 증인이 고난 가운데 증거 하는 내용이 생명의 증거가 되지만 사람들은 이미 이 세상의 신에 속아 있기에 그 증거를 받는 자가 없다. 그 길로 가면 죽을 것 같기에 가지 않는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만 진실한 증언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자들은 오늘도 거짓으로 속이는 증거에 몰려가게 되어 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의 안에 있는 탐심으로 인함이다.
26~27절 : “주님을 경외하면 강한 믿음이 생기고, 그 자식들에게도 피난처가 생긴다.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생명의 샘이니, 죽음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한다.”(새번역)
두 절이 다 여호와 경외를 말씀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견고하고 영원한 피난처가 있으며 그 후손도 그로 인해 피난처를 얻는다. 이들에게는 사망에서 벗어나 생명의 샘에서 살게 된다는 것을 말씀한다. 이것은 죽고 나서 경험하는 내용이 아니라 바로 이 곳에서 그 생명을 맛보며 누리며 살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미 영원한 피난처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며 생명의 샘을 마시며 살아가는 자들이다.
28절 : “백성이 많은 것은 왕의 영광이지만, 백성이 적은 것은 통치자의 몰락이다.”(새번역)
“백성이 많은 것은 왕의 영광이지만, 백성이 없는 왕은 망한다.”(쉬운 성경)
하나님 앞에 중요한 것은 백성의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라, 그 왕이나 백성의 의로움이 중요하다.
29~30절 : “좀처럼 성을 내지 않는 사람은 매우 명철한 사람이지만, 성미가 급한 사람은 어리석음만을 드러낸다.
마음이 평안하면 몸에 생기가 도나, 질투를 하면 뼈까지 썩는다.”(새번역)
평온한 마음이란 노하기를 급히 하는 것과 반대되는 개념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신약의 서신들도 인사말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은혜와 평강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자라면 그 마음에도 평강이 있는 것이다.
이런 은혜를 받은 자는 자신이 어떠한 죄인인지도 안다. 나 같은 죄인에게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된 것을 아는 자들이 믿음의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런 평강이 없으면 분노가 급하게 하게 되며 시기심도 많이 일어난다. 그것은 자기 뼈를 썩게 할 만큼 치명적인 것이다.
31절 : “가난한 사람을 억압하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모욕하는 것이지만, 궁핍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공경하는 것이다.”(새번역)
29절 말씀과 같은 내용이다.
“이웃을 업신여기는 자는 죄를 범하는 자요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는 자니라”(29절)
32절 : “악한 사람은 자기의 악행 때문에 넘어지지만, 의로운 사람은 죽음이 닥쳐도 피할 길이 있다.”(새번역)
악인의 결국은 영멸이지만, 의인은 영원한 피난처이신 예수님께로 간다.
33~35절 : “지혜는 명철한 사람의 마음에 머물고, 미련한 사람 마음에는 알려지지 않는다.
정의는 나라를 높이지만, 죄는 민족을 욕되게 한다.
슬기로운 신하는 왕의 총애를 받지만, 수치스러운 일을 하는 신하는 왕의 분노를 산다.”(새번역)
세상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세상의 나라는 보이는 힘으로 다스리는 나라이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공의의 나라일 뿐 아니라 사랑과 섬김의 나라이다.
그러므로 단지 백성이 많은 것이 아니라, 지혜롭고 슬기로운 백성이 많은 것이 진짜 왕의 영광이 되는 것이다.
(나의 묵상)
오늘도 귀한 생명의 말씀이 쏟아진다.
그중에 한 가지를 묵상해 본다.
바로 26절 말씀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나니 그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있으리라”
다른 묵직한 말씀이 많아 스쳐 지나갈 수도 있는 말씀인데, 내 마음이 여기에 머문 것은 두 가지 이유이다.
하나는 어제 다니엘기도회 강사의 말씀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오래전에 ‘트레스디아스’라는 신앙프로그램에 참여하였을 때 내가 받은 말씀이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이런 식의 ‘말씀 받기’에 별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런데 그때는 특별한(?) 곳에서 이 말씀을 받았으니 참으로 의미를 두었다.
말하자면 ‘나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서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는 자이니(그래서 이런 신앙 훈련 프로그램에도 참여했으니) 나의 자녀들에게도 그분의 보호하심과 도우심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으로 감격했던 것이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는 복음에 눈을 떴고, 매일 주님과 교제하며 살아가고 있다.
현재 자녀들 신앙 상태가 너무 걱정되지만 기도하면서, 본을 보이면서, 주님께 맡기기로 생각했다.
그런데 어제 강사(열 명의 자녀를 둔 엄마)이신 선교사님의 자녀를 갖는 것에 대한 기본 태도와 그들을 신앙으로 키우고자 하는 그 마음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나와는 이미 그 출발선이 달랐다.
그의 결혼의 목적은 경건한 후손에 대한 열망이 있어서였다.
나는 결혼하고 나서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으니 이미 쨉이 안 된다.
그는 그 많은 아이들을 낳으며 키울 때, 가정 예배와 한 치도 양보없는 부모의 치열한 영적 삶을 모습을 보임으로 자녀들의 신앙교육을 했던 것이다. 그것도 열 명이나!
나는 어쩌다가(?) 아이들을 낳았고, 내가 이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그대로 아이들에게 보여주며 그들을 키웠다. 물론 주님께서 나를 영적으로 성숙시켜주시니 아이들에 대한 신앙교육도 조금씩 달라진 것을 사실이다. 그래서 나름대로 한다고 했다.
그때쯤 트레스디아스에 가서 이 26절 말씀을 받았다.
나는 스스로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고 굳게 착각했으니, 주님께서 내 자녀들의 피난처가 되어 주실 것을 굳게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였다.
도무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도 없는, 텅 빈 자이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아 말씀에 순종함이 없는 부모를 둔 자식의 앞날에 마음이 무너져 내린다.
아이들의 신앙이 시원찮은 것이 다 나 때문인 것 같다.
믿지 않는 사위와 딸은 출산과 양육 핑계, 코로나 핑계로 교회와 멀어졌고, 아들은 교회만 꼬박꼬박 출석하는 것이 고마울 지경이다.
세상적으로 출세하고 성공한 대단한 자녀들은 하나도 부럽지 않지만, 자녀들이 믿음 안에서 반듯하게 자라는 것은 너무도 부럽다.
어제 그 강사분과 나는 이미 출발선이 다르다는 변명도 할 수 있겠다.
내가 복음을 알고 생명으로 살게 되었을 때는 이미 아이들의 머리가 다 굵어졌다고도 변명할 수 있겠다.
하지만 주님 앞에 할 말이 없다.
출발선은 그렇다 치고, ‘부모로서 영적 치열한 삶을 살았던가?’에는 유구무언이다.
그렇지만 나는 또다시 십자가 앞으로 달려간다.
사실 나의 힘으로 아이들을 믿음의 사람으로 키울 수는 없다. 오직 주님만 의지하는 것이다.단, 내가 진실로 주님을 경외하는 자로 서야 하는 것이다.
이제까지 부실한 내 삶을 주님 앞에 회개하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도하듯이, 아이들에게도 주님의 말씀을 증거 해야 하리라.
주님께서 내게 하셨듯이, 세상에 붙은 완고한 그 마음들을 떼어내 주시고 주님께로 돌이키게 해 주실 것을 기도한다.
(묵상 기도)
주님,
눈물이 쏟아집니다.
‘이 일을 어찌할꼬’ 합니다.
은혜받은 자는 생명의 말씀을 잡고 그에 순종하며 치열한 삶을 살아갈 때
저는 무엇을 했나 싶습니다.
‘너무 늦은 것은 아닌가?’ 가슴이 철렁합니다.
‘주님께서 알아서 해 주시겠지’ 생각하고 말했던 것이 얼마나 교활한 것이었나....
허둥대는 저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남은 세월 동안 더욱 주님을 경외하며 살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는 삶,
주님을 사랑하는 그 치열한 삶을 자녀들이 보게 하옵소서.
성령님, 의지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