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낯선 세상 속으로 / 추창호
깎아 세운 차운 빌딩 그 수척한 키만큼
불 밝히던 그리움 층층이 꺼져 있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 번화가를 질주한다
빙그르르 돌아가는 판에 박힌 원형 무대
떨이 못한 좌판 같은 시간들이 멈춰 서고
한 순간 탈 벗은 얼굴 신발 끈을 고쳐 맨다
걸쭉한 목청들이 남도 땅을 넘어선다
굿거리 장단에 맞춰 어깨춤도 얼쑤얼쑤
떠나는 슬픔을 딛고 새 길 환히 밝아온다
<부산일보 신춘문예 등단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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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공구를 위하여.1
크고 작은 톱니바퀴 맞물려 굴러가는
숨가쁜 세상 속의 이름 없는 악사들
가 닿을 무대를 향해 소리들을 물고 있다
녹슨 생각 하나 벌어진 틈새만큼
몽키의 믿음으로 조이고 풀어 가면
서릿발 돋은 가슴은 물소리로 흐른다
생살이 문드러진 피멍의 나날들
혼신의 힘을 다해 자르고 깎아 내면
무늬木 선명한 결이 햇살로 반짝인다
탄탄한 근육질이 불끈 솟는 삶의 현장
돌짬 속 대들보가 흐린 세상 받쳐주듯
하모니 고운 선율로 새 악장을 열고 있다
시조집 <낯선 세상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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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공구를 위하여.2 - 펜치
힘 벅찬 삶의 질량
꺾이고 휘인 날들
등허리 한 번쯤은 펴고도 살아야지
꽉 다문
어금니 소리
녹슨 과거 절단한다
시조집 <낯선 세상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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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공구를 위하여.3 - 못과 망치
때리고 맞는 것도 희한한 인연이다
아프게 달려들고 시리게 견뎌내며
이 세상 틈새부리를 잇고 있는 가시버시
남남이 얼굴 맞대어 한 이불에 살다 보면
궂은 날 빗장 질러 헤어짐도 잦은데
손에 쥔 사랑의 무게 裸木의 뼈로 선다
더러는 힘에 부쳐 허리가 휘청대도
상심한 꿈을 불러 지반을 다져가듯
휘모리 굿 장단으로 새 지평을 열고 있다
시조집 <낯선 세상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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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성
고향은 피돌기 멈춘 길에서도 아름답다
서걱대는 갈대 숲이 저녁 노을 불러오면 바람처럼 보낸 날이 슬그머니 돌아와서 조그만 초가 한 채 다사롭게 앉힌다 찌든 때 묵은 날로 썩어가던 초가지붕 겨울이 오기 전에 서릿발이 돋기 전에 텁텁한 막걸리로 목젖을 축여가며 인정을 엮어 가듯 이엉을 엮어가던 아, 유년의 앞마당에 아낙들이 새참을 내면 부르튼 손바닥에 다시 한 번 침을 뱉아 용마루 삼아 가던 바지런한 일손들 어스름한 어둠들이 저벅저벅 걸어와서 어깨 툭 밀치면서 눈들을 부라릴 때 비로소 용마루는 용의 울음 토해냈다
*리비도 용솟음치며
막힌 길을 뚫고 있다
*리비도 : 프로이드의 본능적인 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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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을 가다가
비포장 길을 걷다 동전 하나 주웠다 가볍게 들어올린 조그마한 몸체에서 지하철 몸을 녹이던 야윈 어깨 겹쳐온다
잘 나가던 시절이 누군들 없으랴만 은빛으로 반짝이던 찰나같은 섬광을 긴 세월 회귀를 꿈꾼 기다림이 무겁다
녹 슨 아픔을 불러 새 봄빛을 얹어본다 잊혀진 제가락 찾아 일어서는 은빛 광채 쉰 목청 갈앉은 길도 가슴 환히 트인다.
<월간문학2004년2월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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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다림을 위하여 1
안녕이란 인사말은 여전히 생경하다
그대 뒷모습을 어둠이 지우는 동안
적막은 까치발로 와 들뜬 시간 눌러댄다
지상의 모든 길이 그대 향해 놓여 있지만
기다림의 질량만큼 내 사랑은 무겁고
詩처럼 남긴 네 눈물 얄밉게도 아프다
낮은 음계마다 돌아보는 사람아
봄비처럼 적셔오는 이 그리움 따라가면
모여서 강물이 되는 우리 사랑 반짝일까
<월간문학 2002.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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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정(剪定)
6층 석탑처럼 다듬어온 비단삼나무
잠깐 눈 돌린 사이 곁가지 뻗어있다
나사못 풀린 내 일상의 뒤틀린 모습 같은.
허욕 서너 개와 아집(我執) 몇 킬로그램
둔탁한 소리를 내며 몸체에서 분리된다
쇠가위 옹 다문 입술에 피 냄새가 배인다
자르다 지친 손바닥 물집이 부풀어오른다
날카로운 비명으로 절단 된 가지 끝
상처를 확인한다는 거 쉬운 일은 아니다
뒹구는 허물 거두며 내 삶을 가늠해보지만
정제된 소금이 못된 아픔은 남아있어
가슴 속 무딘 칼날 하나 숫돌 위에 놓인다
<개화' 2002.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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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날
긴 시간 짧은 궤적
꼬불꼬불 고물고물
풀쐐기 가는 양을
한동안 보았습니다
불현듯
돌아 보이는
나,
살아온 모습 같아.
<울산문학31집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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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新도시
녹색의 허리춤을 난타하는 포크레인
피멍든 살점들이 갈기갈기 찢겨지고
실세의 아파트 군단 수면 위로 부상한다
죽지 꺾인 풀잎들이 암장된 환부마다
승리의 축배처럼 놓여지는 보도블록
갖가지 바람몰이로 마당극을 펼쳐낸다
거세된 야성만큼 옹벽 더욱 높아 가는
햇살도 숨이 가쁜 그 견고한 절망 앞에
담쟁이 여윈 넝쿨이 낮은 포복 중이다
시조집 <낯선 세상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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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남이란 걸
때때로 잊어버리고
내가 중년이란 걸
더러 잊어버리는
고샅길
달려나가는
아이처럼 사랑한 일
< 울산문학 2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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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풍
잡초로 산 한 생애를
무담보로 잡혀 놓고
허드레 일감을 찾아
해종일을 헤맨 김씨
그 섧은
가슴을 밝혀
꽃불 켜든 연등 행렬.
< 2002울산시조 제7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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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린 음악회
빗장 건 가슴들이
스르르 열리는가
나 아닌 우리 되어
퍼져 가는 풀빛가락
봄 열 듯
환한 웃음이
구름으로 피어난다
시조집 <낯선 세상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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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2
40대 그 모습으로 차례상 받고 계신다
몇 가닥 향불이 먼 기억처럼 풀리는
술잔을 올리는 자식들 머리가 희끈하다
이 사람, 이제 겨우 살만한데 왜 가노...
아버님 푸념이 처마끝을 흔들 때
소매 품 넓은 그 자리 명치끝을 눌러왔다
아직 삼삼히 밟히는 그 생애 펼쳐들면
당찬 걸음으로 헤쳐오신 현대사
마음도 짓눌린 그런 날이면 그 속 품 열어 보이신다
그 때의 나만한 손자의 절을 받으며
함박 함박웃음 터뜨리실 것 같아
괜스레 붉힌 눈시울 빈 뜨락을 서성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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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기論
한 순간 가슴을 친 패착을 두기까지
성실한 行馬로 걸어온 守城의 길
풍문은 먼 길 휘돌아와 성채 먼저 흔든다
象 떼고 車包마저 떨어진 형국이니
제 철만난 훈수꾼의 형형색색 비책에도
結果論 헤어날 묘수 끝내 찾지 못한다
반평생 쌓은 功德 破紙로 흩날린다
馬卒을 잘못 쓴 죄 칼침으로 꽂혀오는
傷心한 마음자리로 햇살 비껴 지난다
하이에나 울음으로 촘촘 엮인 먹이사슬
供託이란 배수진도 힘에 밀려 허방치면
뿌리 채 뽑힌 버팀목 軍費 없는 시름 길
힘의 역학만 퍼렇게 살아 꿈틀대는
돈 놓고 돈 먹는 한 판의 博譜將棋
퇴로가 끊긴 후에야 새 길 여는 이치 알겠네
*<시조21.2005.상반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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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소야곡(小夜曲) - 배밭에서
1
화려한 치장이 필요 없다 사랑은
달빛처럼 은은하게
옷고름 풀던 밤은
어스름
산천도 환히
숨죽이지 않더냐
2
흰나비 날개짓에 달려가던 바람들
동양화 여백으로
남겨진 순수 앞에
어쩌랴,
느낌표 하나
눈물처럼 찍는다
시조집 <낯선 세상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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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아리랑 산조
눈물의 황토 고개
운명처럼 오르는 건
시처럼 바람처럼
웃고 있을 그대 향한
환장할 내 그리움을
어찌할 수 없었던 탓.
아리고 쓰려오는
발길마다 마음마다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절며절며 넘던 길은
먼 훗날 그대 앞에 내보일
행복 빛깔 같은 거.
*<시조21.2005.상반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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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풍경 3
속살 섞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더니만
개망초 쑥부쟁이
잊혀진 이름끼리
일궈낸 화음의 세계
폐가
환히 밝혀드네
<사이버문학《작은별》창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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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진정한 행복과 삶의 진지성
임 종 찬(부산대 교수. 시조 시인)
Ⅰ
책을 읽는다는 것, 특히 그 중에서 시를 읽고 분석한다는 작업은 시인의 정신적 세계를 자신의 의식과 하나로 만드는 데에 있다. 보통 이상의 감수성과 의식의 수준 없이는 이에 도달하는 것은 매우 힘드는 일이다. 그럼에도 이 단계가 분석의 최종적인 지점이 아니라 단지 시작이라는 것에 문제의 어려움이 있다.
그런 능력에 대한 회의 속에서도 이 시집의 서평을 적을 수 있게 된 것은 시인이 아주 친절하면서도 쉽게 자신의 서정 세계 속으로 독자들을 이끌어 가는 흡인력을 크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추창호 시인의 시 세계는 너무 깊이 내려가지도 너무 높이 올라가지도 않은 곳에 자신의 시적 세계를 만들어 놓고 있다. 이는 시가 가진 가장 적당한 위치를 의미한다. 시는 철학도 신학도 자기 비탄도 아니다. 시는 형이상학도 형이하학도 아닌 그 중간에 위치한 장르라는 점을 이 시집은 일깨워준다. 다시 말해 추창호 시 인은 『낯선 세상 속으로』에서 현실에 함몰되어 자기 비탄에 빠지지도 않고, 현실에서 벗어나 낭만적 이상에 빠지지도 않는다. 그는 현실과 이상 사이의 적당한 거리에서 그의 시적 세계를 펼쳐 보여준다.
Ⅱ
이 시집은 인간 현실보다는 좀더 자연 쪽으로 그 방향을 잡고 있는 듯하다. 이는 표면적으로 좀 이상한 듯한 일이다.
그러나 한 인간이 인간이기 이전에 하나의 자연이라는 사실에서 의문은 그 방향을 잡아간다. 그러면 인간이 자연이라면 그 자연이 만든 산물로서의 인간 현실도 또한 자연이 아닌가.
어느 비평가는 이런 인간 현실의 자연을 원초적 자연으로부터 분리하기 위해 ‘제2의 자연’이라는 말로 부른다. 이 ‘제2의 자연’은 제도와 규범에 의해 지배되는 ‘멀어진 자연’이라고 할 수 있다. ‘멀어진 자연’으로서의 인간 현실을 가장 단적으로 드러내는 이미지는 콘크리트의 메마름과 딱딱함이다.
녹색의 허리춤을 난타하는 포크레인
피멍든 살점들이 갈기갈기 찢겨지고
실세의 아파트 군단 수면 위로 부상한다
죽지 꺾인 풀잎들이 암장된 환부마다
승리의 축배처럼 놓여지는 보도블록
갖가지 바람몰이로 마당극을 펼쳐낸다
-<新도시> 중에서
야성은 거세되고 옹벽은 더욱 높아 가는(<新도시>) 문명의 세계는 기계적 폭력이 난무하는 곳이다.
포크래인 거친 날에 풀꽃이 잠을 깬다
와그르 무너지는 어머니 가슴 같은 산
부러진
날개 저 죽지
떨어진다 살점이...
-<宅地 개발> 중에서
기계의 폭력으로 상징되는 문명의 파괴에 소박한 大地母로서의 자연은 사라지고, 인간 현실은 메마르고 삭막해진다. 자연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가득 채운 문명들은 인간에게 풍요함과 행복의 기호로서 자신들을 표상하고 있다. 그러나 시인은 도시가 문명의 기호들로 가득 찰수록 더 깊은 절망과 공허에 빠진다.
깎아 세운 차운 빌딩 그 수척한 키만큼
불 밝히던 그리움 층층이 꺼져 있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 번화가를 질주한다
-<낯선 세상 속으로> 중에서
콘크리트의 그 견고한 두께는 절망과 소외도 그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인간에게 선물한다. 이상스럽게도 인간은 자신이 만든 사물들에 친숙해지지 못하고 점점 낯설어지면서 그 사물들에 억눌리는 이상한 풍경이 만들어진다.
바로 여기서 시에 내재된 시선의 이동 - 자연에의 동화가 생기는 것이다. 왜 인간은 자신이 만든 사물에서는 낯설어지면서, 자신이 만들지 않은 자연에로 기울 어 가는가. 이는 시인에게 있어 자연, 혹은 자연과의 동화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라는 물음으로 대신할 수 있다.
세상사 비껴 앉은 조그만 야산 하나
오고 간 많은 사연 숲길에 갈무리고
푸른 품
가만히 젖혀
바람소리 듣고 있다
-<야산>
현실의 일상사에서 한 발짝 비껴 나 있는, 아니 비껴나게 하는 그것이 바로 자연이다. 그럼 시인이 자연을 발견하는 것은 다만 현실에서 한 발 비껴 삶의 여유를 가지기 위함일까. 그렇다면 시란 너무 안이한 것이 아닐까.
시인에게 자연과 그 속의 사물들은 인간의 순박한 본성에 대한 하나의 代喩다. 아니 그보다는 인간의 소박한 삶과 그 진실의 거처일 것이다. 인간이 소박한 자연 속에서 벗어나 제 2의 자연인 사회 속으로 편입 되자 인간의 원초적 삶의 소박함은 사라지고, 시인의 탐색은 시작된다. 시는 바로 이 잃어버린 자연에 대한 탐색의 산물인 것이다.
담쟁이 넝쿨 사이
얼굴 내민 팔방미인
흰 구름 받쳐놓고
하늘 한 폭 동여놓고
진초록
그물을 짜는
저 직녀의 환한 웃음
-<나팔꽃>
Ⅲ
시인은 그 자연 속에서도 아주 작은 사물들을 선택하여 그 속에서 순수한 삶의 원형을 발견하고 있다. 이 작은 사물들은 주로 꽃들이다. ‘나팔꽃’, ‘호박꽃’, ‘파초’, ‘감’, ‘풀’ 등 아주 작은 사물들이 시인의 자연이다.
이들은 세계의 진실을 열어주는 문이자 그 진실이 인간을 바라보는 눈이다. 인간이 잃어버린 ‘환한 웃음’을 알려주는 ‘나팔꽃’, ‘둥그런 정을 건네며 둥글둥글 살라’ 하는 ‘호박꽃’, 인간의 가슴 밑바닥에 숨은 넉넉함을 일깨워 주는 감나무의 ‘까치밥’ 등, 시인은 바로 이런 자연의 자그마한 사물들 속에서 인간의 본연적 삶의 모습을 발견한다.
작다는 것은 연약하고 왜소한 것이 아니다. 그 작은 사물들은 세상의 거대한 벽을 뚫고 자신의 생명을 요구하고 만들어 낸다.
돌담가 외진 자리 버려진 호박씨 하나
질박한 자궁에서 끈질기게 살아남아
태극선 푸른 잎새로 조선 하늘 열고 있다.
-<호박꽃 산조> 중에서
시인에게 삶의 현실은 생명을 잉태할 수 없는 ‘자궁’에 비유된다. 현실은 스스로 더 이상 생명을 피워낼 수 없다. 오히려 현실은 살아있는 모든 것을 파멸시키는 죽음의 힘이다. 그러나 아주 작은 호박씨 하나는 그 현실의 무자비한 힘을 이기고 자신과 우주를 연다.
그렇다고 해서 시인이 현실의 삶을 버리고 자연 속으로 자신을 숨기는 것은 아니다. 그가 자연 속으로 나아가는 것은 다시 삶의 현실로 돌아가기 위함이다. 갈기갈기 찢겨진 삶의 절망을 이기기 위해, 그리고 그 속에서 삶을 포용하고 치유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시인은 절망 앞에서 항상 새로운 생명의 기운을 발견하는 것이다.
거세된 야성만큼 옹벽 더욱 높아 가는
햇살도 숨이 가쁜 그 견고한 절망 앞에
담쟁이 여윈 넝쿨이 낮은 포복 중이다
-<新도시> 중에서
바로 여기가 시인의 시조가 지닌 전반적 특징이 드러나는 곳이다. 절망에서 희망으로의 전환, 이 책에 인쇄된 대부분 시조들이 가진 형식적이고 내용적인 구조가 바로 이것이다. 태풍이 지나간 폐허는 다시 삶이 시작 되는 장소라는 역설적인 삶의 인식이 시인의 깨달음이다.
믿음은 저항 앞에서 너무 쉽게 무너졌다
폐차장 풍경처럼 짓이겨진 길을 따라
허구로 다져온 실체 그 상처를 확인한다
휩쓸려 떠난 것은 집뿐이 아니었다
든든한 대들보가 사체로 누워 있는
움푹 팬 뻘 구덩이가 殺意로 번득인다
뻥 뚫린 가슴팍에 젖먹이는 칭얼댔다
황톳물 설움으로 긴장 다시 곧추세운
폐기된 삶을 일구는 저 무한한 삽질 소리.
-<우기를 지나며>
Ⅳ
시는 문명과 자연 사이의 대립을 지칭하는 언어가아니라, 문명과 자연 사이 그리고 삶의 현실과 희망 사이에 벌어진 간격을 기워내는 진지한 몸짓이다.
시인이 자신의 시에서 이러한 간격을 메워내는 작업으로 선택한 것이 바로 ‘공구적 상상력’이다. ‘工具’라는 것이 암시하고 있듯, 이는 시인이 얼마나 현실적인 삶에 밀착하여 있는 지를 잘 보여준다.
힘 벅찬 삶의 질량
꺾이고 휘인 날들
등허리 한 번쯤은 펴고도 살아야지
꽉 다문
어금니 소리
녹슨 과거 절단한다
-<아름다운 공구를 위하여.2-펜치>
‘펜치’, ‘몽키’, ‘스페너’, ‘톱’, ‘대패’ 등은 그냥 인공물들을 만드는 수단이 아니라 삶을 수선하고 치유하는 것들이다. 아픈 과거, 삶의 상처, 좁힐 수 없는 인간들의 관계들을 바로 이런 공구적인 것들이 가진 힘을 통해 치유해 내고자 하는 것이 시인의 의지다.
녹슨 생각 하나 벌어진 틈새만큼
몽키의 믿음으로 조이고 풀어 가면
서릿발 돋은 가슴은 물소리로 흐른다
생살이 문드러진 피멍의 나날들
혼신의 힘을 다해 자르고 깎아 내면
무늬木 선명한 결이 햇살로 반짝인다
-<아름다운 공구를 위하여.1>
이 삶을 치유하는 공구가 바로 자연(혹은 그 속의 사물들)이다. 자연은 인간을 삶의 절망과 상처 속에서 더욱 강하게 만든다. 인간을 담금질하여 강하게 하는 것은 시련이 아니라(시련일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그보다는) 행복이다.
자연 속의 사물들 하나하나는 시인을 행복의 정점으로 데려간다. 시 속에서 그 행복의 다른 이름이 바로 행복한 유년의 추억이다. 이 유년은 시인의 존재를 깊이 있게 만들고 또 그만큼 그의 존재를 강화시켜 준다. 시인은 작은 자연 속의 사물 하나 하나에서 그의 유년을 발견한다. 그 사물들 속에서 시인의 유년은 아련하게 ‘실루엣처럼 흔들린다’(<감>).
소슬바람 불어오는 도심의 텅 빈 하늘
가슴 속 향수마저 회색빛에 물드는데
담벼락 외진 자락에 활짝 웃는 맨드라미
과일마다 가을빛이 소담스레 스밀 때쯤
어머니 주름치마 그 한 끝을 잡아 끌면
속정도 어우러지게 올망졸망 살라던
잊혀진 얼굴들이 언 듯 설핏 다가선다
신명난 굿 장단에 어깨춤도 흥에 겨운
노랗게 물든 얘기가 지천으로 피고 있다
-<맨드라미>
Ⅴ
삶은 진정으로 살아가는 자에게만 자신의 속내를 드 러내 보이는 것일까. 시인들은 우리가 바라보는 삶의 현상에 감추어진 속내를 언뜻언뜻 드러내 보인다. 추창호 시인의 시조들도 바로 그런 작품들이다. 웅변이 아니라 가만가만한 속삭임으로 독자들에게 들려주는 목소리는 가히 아름답고 진지하다. 그것은 그저 현상적인 아름다움이나 비참함에 취해 감정의 토로에 그치는 감상이 아니라 인간의 진정한 행복과 삶의 태도를 진실한 어조로 전달하고 있기 때문에 감동적이라 하겠다. 삶을 진실하게 살아가는 시인의 어조이자 『낯선 세상 속으로』라는 시조집 전체의 주제를 아래의 시는 잘 드러내 준다.
녹색의 바람들이 두런두런 먼길을 떠난다
할퀸 상처가 깊을수록
따뜻한
산의 속삭임
동화처럼 오리라
-<宅地 개발> 중에서
이 짧은 서평을 통해 시인의 정신적 내면의 지도를 다 그릴 수는 없다. 다만 시인의 정신을 살짝 훔쳐 본 정도일 뿐이다. 시인이 무엇을 말하고자 했고, 이 시조집의 대략적인 내용이 어떠한 지를 어설프게 헤아려 본 정도다. 여기서 언급한 시들 말고도 가족에 대한 시들, 가벼운 일상들을 통해 삶의 진실을 전달하고 있는 시들, 사랑에 대한 시들 등 많은 다른 작품들은 독자들이 직접 접해 보길 바란다.
끝으로 어느 것이나 시를 향한 진지성과 시의 밀도를 위한 각고가 잘 드러나는 그의 작품 세계는 독자들에게 많은 호응을 얻기에 충분하다라는 말을 남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