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2편 1장 : 두번째 기적
우리부부가 옆 이종사촌 누나의 방으로 들어가자
할머니가 된 난숙이 누나가 깜짝 놀랍니다.
넓은 거실 바닥에는 매형이 누워 있는데 눈이 쑥 들어갔고
볼도 푹 꺼지고 입은 반쯤 벌려져 있는데 숨을 쉬는지 안쉬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다가가서 내려다 보며
"매형 ! 저는 누나의 이종사촌 동생입니다.
저를 알아보시겠습니까?"라고 바라보자 미동도 하지 않습니다.
나는 주머니에서 기적 성수병을(신부님이 성수로 만듬)꺼내어
매형에게 뿌리고 방에도 뿌리고 매형의 입에 넣어주었습니다.
그러자 물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소리가 들립니다.
`아 의식이 있구나 !`
나는 눈에도 넣어드리고 이마와 얼굴을 닦아 드리며
`자비로우신 하느님 ! 매형이 평생 지은 죄들을
모두 용서해 주시고 매형을 치유해 주소서,
또한 누나의 죄악도 다 깨끗이 용서하여 주시고
두분의 영혼이 깨끗하게 하여 주소서`
손과 발도 씻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매형의 한 손을 잡고,
한 손은 아내의 손을 잡은채 묵주기도를 합니다.
우리의 묵주기도가 다 끝날때 까지
큰 누나는 서서 계속 울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마치고 다시 작은 영숙이 누나의 방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작은 누나의 차를 따라 용인으로 갔습니다.
용인에는 매형의 최고급 아파트가 있고
거기에 나에게 줄 TV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형의 고급 아파트를 보고
마치 왕이 사는 궁전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어마어마 합니다.
"두분이 사는데 이 50평이 되는 방을 어떻게 관리하세요?"라고
내가 놀라워 하자 매형이
"이게 뭐가 크다고 그래? 다른이들은 100평이 넘어"라고 합니다.
정말로 50평의 아파트가 삐까번쩍 하여 한참 돌아다니게 됩니다.
그리고 살림도구들이 우리가 흔히 보는 그런 도구가 아니고
처음보는 귀한 것들입니다.
우리부부가 사는 강원도 덕풍계곡의 우리집은
다 쓰러져가는 굴피집을 개량한 집입니다.
그래도 우리집이 최고 입니다.
현대와는 거리가 먼 산골 집이지만
아내와 자식이 있는 우리집 보다 더 좋은 곳은 없습니다.
우리는 대우의 아날로그의 엄청 크고 무거운 TV를
차에 싣고 강원도 우리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후 금방 돌아가실 것 같았던 큰 매형이 다시 살아났고
누나와 용서와 화해를 하였고, 1년 6개월을 더 살다가
선종하셨습니다.
자칫 두분이 죽어 지옥에 갈 영혼이 다시 살아난 것이
두번째의 기적입니다.
제12편 1장 끝
제12편 2장:세번째 기적
우리 농장은 잡초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이미 가을 걷이는 거의 다 끝이 났습니다. 그래도 할 일은 많습니다 밭 정리를 해야 하고 고추밭 정리도 해야 하고 옥수수밭도 정리해야 하고 고구마도 아직 땅속에 그냥 있습니다. 더덕밭에서 씨를 채취해야 합니다. 내가 지게로 끝마무리의 농작물들을 집으로 져 나릅니다. 그런데 그렇게 아프던 다리가 하나도 아프지 않다는것에 놀랍니다. "어? 다리가 아프지 않잖아?" 지금까지 나는 다리가 아파서 앉았다 일어날때면 의레히 "아이구 다리야 아이구 다리야 !" 이 소리를 매일 수십번을 해왔는데 요즈음 한 번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자기야 자기야, 나 다리 치유받았나봐 하나도 안 아파 !" 그러자 아내도 놀라며 "어머나 ! 그러고 보니 자기 요새 앉았다 일어날때면 `아이구 다리야 아이구 다리야 `이 소리를 하루에도 볓번씩 했는데 요즘 한번도 하지 않았어" "그렇지? 자기도 그 소리 못 들었지?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그걸 여태 모르고 있엇다니 !" 내가 3살때 다친 다리로 평생 아픔 속에 지냈는데 이제 68세가 되어 치유를 받다니 ! 그것 뿐만이 아니고 내가 6.25 전쟁 후 1951년 4월에 말 더듬이가 되어 평생 말을 더듬어 오다가 점점 좋아지더니 이제는 완전히 그것도 치유가 된 것입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2019년 6월 9일 까지 단 한 번도 다시 아파 본 적이 없고 말을 더듬거린 적이 없습니다. 이거야 말로 하느님께 영광 !입니다, 하느님 영원히 기리 찬미 찬송 받으시고 흠숭 받으소서 +아멘! |
제12편 2장 끝
제12편 3장:귀순용사 리영광이 나를 위해 나무를 해 주러 온다는 날 내가 죽는데
내가 처음으로 나주에서 철야기도회를 한날이 2004년 10월 19일이었고
그날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3가지의 큰 기적을 일으켜 주셨습니다.
그 기적은 아주 놀랍고 아름답기 그지없는 기적이지
내가 이단에 빠져 일어난 기적은 아닙니다.
참으로 놀라운것은 내가 이단에 빠져 있다하여도 내가 가지고 있는 신앙은
조상때부터 이어져 오는 신앙이고, 나는 평생을 살아오면서 매우 힘들게
살아오면서도 그 신앙을 보존해 왔고,신앙의 정신으로 살아온 것에 대하여
하느님과 성모님이 저를 무척 사랑하신다는 사실 입니다.
그것이 가장 잘 드러나는 때가 곧 바로 일어나게 됩니다.
내가 서울에서 살다가 강원도 덕풍계곡으로 들어가던 날이
1988년 1월 9일이었습니다.
그해 여름에 우리집에는 어떤 산악회원들 30여명이 우리집에 왔었는데
대부분이 20대의 발랄한 청년들이었고 간혹 30대도 있는데
그중에 내 눈에 띄인 것은 40대 후반의 영감탱이가 한사람이
끼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등산객들은 간편하고 보기 좋은 등산복 차림이었는데
그 영감탱이만은 1960년 전의 시골 사람들이 입는 바지저고리를
그대로 입고 온 것입니다.
8월초이기에 더워서 윗 저고리는 벗었지만 바지를 입은 꼴은
차마 보기조차 민망할 정도 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옛날 바지저고리 입는 방법은 목화에서 실을 뽑아
광목을 짜고 그 옷으로 통이 넓은 바지를 만드는데,
두 사람이 들어갈 만큼 통이 넓습니다.
그것은 일 하기에 편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먼저 바지를 입으면 바지춤을 왼쪽으로 한 번 접고 ,
다시 오른쪽으로 한 번 접고, 그리고 광목의 긴 허리 띠로 바지를 점매고
위로 잡아당긴 다음에 바지를 맡으로 내려 뜨리는 것이 바지 입는 방법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촌스럽고 보기싫은지 모릅니다만 그러나 전 국민이
다 그런식으로 바지를 입기에 그것이 흉이 되지 않았습니다.
나도 어렸을적에 그런식의 바지저고리를 입고 살았던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이상한 것은 우리국민들이 수천년간 그런 식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는데, 농촌에서는 소를 키우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왜 가죽 문화가 형성되지 않았는가 입니다.
가죽으로 구두를 만들 수 있고 바지에 고리를 만들어 가죽 혁띠를
착용할 수도 있는데 일본 문화가 들어오면서 바지에 혁띠가
들어갈 고리를 그제서야 만들었던 것입니다.
나도 어렸을 적에는 짚신을 신고 다녔는데
우리나라 모든 국민들이 거의 다 짚신을 신었습니다.
우리집에 온 그 영감탱이는 짚신이 아니고 운동화를 신었는데
바지 끝에는 바지를 접어 댄님이라는 끈으로 묵습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는 북한 개마고원에서 살다가
남하한 귀순용사였습니다.북한 사람들은 영양이 부족하여 키가 작고
특히 그 영감탱이는 얼굴도 마치 미안하지만 메주를 주물럭 주물럭 거려서
만든것 같은 못생긴 모습이었고, 턱에는 몇가닥의 수염이 길게 나 있는데
꼴불견입니다.
그러나 그는 북한에서 한학을 공부했는지 유식하며 예의가 바르고 겸손합니다.
그도 나와 같이 강원도 정선군 단림골에 살고 있습니다.
그가 사는 개마고원에는 가장 추운 지역이기에 과일나무가 전혀 없다고 합니다.
그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은 `감`입니다.
그 감나무가 우리집에는 고목이 된 감나무만 해도 10그루가 넘는 것을 보고
그는 무척 부러워 하기에
"가을에 언제든지 오셔서 감을 따 가세요"라고 말 해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때부터 그와 친구가 됩니다.
그는 가난하여 차가 없지만 그의 집에 오는 손님들의 차를 빌려
함께 타고 우리집에 옵니다.
나중에는 그가 KBS의 `인간극장`에 출연함으로써 유명인이 됩니다.
그는 귀순용사 '리영광'씨 입니다.
그가 2004년 11월 18일에 나를 위해 나무를 해 주러 온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나는 고맙긴 하지만 나무 보다도 그를 만나는 것이 더 기쁩니다.
내가 나주의 기도회 10월 19일을 지낸후 꼭 한달 후에 그가 나를 위해
나무를 해 주러 온다는 날에 내가 죽는 일이 벌어집니다.
제12편 3장 끝
제12편 4장:내가 죽다.
2004년 11월 18일
정선군 단림골에 사는 리영광씨가 나를 위해 나무를 해 주러 온다고 하여
내 아내는 반가워 하며 그를 위해 맛있는 점심준비를 하고 나는 언덕에 서서
그가 오기를 기다립니다.
이윽고 차 소리가 들리며 승용차 한대가 우리집 언덕위로 올라옵니다.
그런데 차에서 내린 사람은 리영광이 아니고 그의 부인입니다.
그리고 낯모르는 운전사가 나옵니다.
"안녕하세요? 우리 그이는 갑자가 무슨 일이 생겨 오지 못하고
우리집에 잠시 머물고 있는 이분이 대신 나무 해 주러 왔어요"라고 합니다.
그는 제주도에 사는 분인데 전국 여행중에 리영광씨집에 와서
잠시 머무는 중이었다고 하며,그는 성능좋은 기계톱을 하나 가지고 왔습니다.
강원도의 산들은 거의 악산들인데 너무 가파르고 서 있기조차
힘든 경사가져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나는 생각하기를 저 성능좋은 기계톱으로 나무를 자르다가
혹시 발이라도 미끌어진다면, 그 톱은 흉기로 변할 수도 있기에,
나를 도와주려 왔다가 그런일이 생기면 안된다고 생각하며
"산에 올라가서 나무 하지 마시고, 저쪽 산밑의 우리밭 가장가리에 있는
오래된 참나무 3그루만 베어주세요"라고 말하였습니다.
(나중에 자른 후 나이테를 세어보니 66년생입니다)
그 고목이 된 참나무는 하늘을 찌를 듯이 서 있고
덕풍계곡의 강풍을 막아주는 방풍림입니다.
그리고 도토리를 딸 수 있는 내가 아끼는 나무이지만 ,
그 옆에는 다시 자라는 작은 나무들이 있습니다.
나와 아내와 리영광씨부인이 그가 성능좋은 기계톱으로 나무를 자르는 동안
그의 뒤에서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뒤에 사람들이 있기에 아마 나무가 그의 앞으로 쓰러지기를 바라고
나무를 자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그 아름드리 큰 나무를 밀고 당기는 톱으로 자른다면
30분 내지 40분이 걸릴것이지만 성능좋은 기계톱으로는 순식간입니다.
이제 1초나 2초만 있으면 나무가 그의 앞으로 쓰러지리라 생각하고
나는 안심하며 뒤돌아앉아 아까 잘라놓은 나무의 잔 가지를
작은 손도끼로 자르려하는데 나의 사고는 거기에서 멈추어 버렸습니다.
다음은 후에 아내의 증언입니다.
"나무가 그의 앞으로 쓰러지리라 생각하였는데, 갑자기 빙그르르 돌더니
뒤로 쓰러지면서 자기의 머리위로 떨어졌어요.
너무 순간적인 일이어서 `어서비켜요!` 라고 소리 칠 수도 없었어요.
자기가 의식을 잃었고 머리에서 피가 흘러내렸어요.
나는 집으로 달려가서 119에 신고를 하자 가까운 가곡면 소방서에서
구급차가 달려왔고, 그들은 자기를 구급차에 싣고 1시간 거리인
태백시의 장성 종합병원으로 달려가는데자기는 계속 토했어요.
병원에서는 의사가 CT. MRI 검사를 하는데 머리가 깨어졌고
머리속에 핏줄이 하나가 아니고 모두 터져버리는 `다발성뇌출혈`을 일으켜,
살아나기는 불가능 하다고 했어요.
불과 1시간 전만해도 팔팔하던 자기가 죽는다는게 믿어지질 않았어요
"다른 큰 병원이 또 있나요?"라고 묻자 의사는
"빨라야 3시간 거리인 '원주기독병원이 있다'라고 하여
우리는 다시 병원의 앰블런스 차에 자기를 태우고 전속력으로 싸이렌 울리며
원주기독병원에 도착을 했어요
그러나 여기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의사가
"살아날 확률은 1%도 안되니 이제 장례준비하세요"라고 했어요.
제12편 4장 끝
제12편 5장:내가 살아나다.
그제서야 아내는 나의 죽음을 인식하게 됩니다.
두군데의 큰 병원에서 사형선고를 내렸는데 그것을 어찌 부정할 수가 있는가?
아내는 나를 중환자실에 내버려 두고, 버스를 타고 태백으로 와서
다시 호산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풍곡에서 내려 6km의 덕풍계곡을 걸어오며
좌절을 합니다.
집에 오니 차가 집에 그냥 있고 외딴 집은 텅 비어
누구하나 반겨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내는 그동안 내가 항상 집에 있었기에 밤중에 덕풍계곡을 왔다갔다 하여도
조금도 무서운 줄을 몰랐는데 이제는 무섭습니다.
그야말로 완전한 무인고도에 혼자 남겨진 것입니다.
아내는 내일 나를 장례 지낼 물품들을 몇가지 가방에 넣고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웁니다.
아내는 이제 자기는 '과부'라는것에 충격을 받습니다.
아침에 아내는 차를 몰고 은행에 가서 얼마되지도 않는
나머지 돈을 모두 찾고 원주 기독병원으로 달려 갑니다.
아내는 중환자실로 달려가 봅니다. 혹시 내가 살아나지나 않았을까?
원주기독병원에서는 중환자실이 크고 모든 위험한 환자들이 그 안에 다 있습니다.
아내는 내가 살아 숨을 쉬는지 안 쉬는 지 살펴봅니다.
그때 내가 깨어 납니다.
내가 죽은지 44시간이 지난 뒤였습니다.
나는 그때의 일을 아주 자세히 기억을 합니다.
내가 눈을 떴는데 방안이 환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빛으로 꽉 차 있습니다.
`내가 왜 이러고 있지?`
내가 누워 있는 곳이 덕풍 우리집이 아니란 걸 압니다.
내가 움직이려하자 몸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중환자실은 그렇게 밝지 않습니다.
그런데 눈이 부실만큼 밝아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때 어느 커다란 물체가 내 얼굴로 떨어지듯이 다가오다가
내 얼굴 바로 앞에서 멈춥니다.
"자기야?"
"응"
"내가 왜 이러고 있어?"
"응 여기는 원주기독병원이야"
"원주?"
"나무가 자기 머리위로 떨어져 머리가 깨어졌고 머리속의 핏줄이 다 터져
다발성 뇌출혈이 된겨"
"다발 뭐야?"
"응 머리속에 핏줄이 하나도 아니고 다 터진 것을 다발성뇌출혈이라고 해"
"나 위험해?"
"응"
"나 죽는거야?"
"........................."
병원에서는 난리가 났는지 의사들이 나를 침대체 끌고가서 CT. MRI검사를 하고
내 몸에 각종 호스와 전깃줄을 연결하고 입에도 무엇을 씌우고 나의 성기에도
고무 호스를 끼워 오줌통을 침대 다리에 잡아매고 정말 난리입니다.
제12편 5장 끝
제12편 6장:나의 24시간의 참회
나는 머리가 무척 아프고 또 다른 머리가 하나 더 붙어 있는것 같습니다.
나는 생각하기를 `내가 죽으면 내 영혼이 어찌 될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의 삶은 고작 100년 미만인데 100년이란 저 우주의 시간에 비하면
돌과 돌이 부딛칠 때 나는 불꽃과 같이 찰라적이 아닌가?
더구나 육신은 썩어 없어지지만 영혼은 불사불멸하는 영적인 것 이기에
내가 과연 천국에 갈 수 있을까?에 대하여 생각해 보니,
각종 죄로 가득히 덮혀 있어 나는 갈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납니다.
그것은 내가 살아오며 지은 죄들을 모두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제 곧 죽을 텐데 이 얼마나 절박한 순간인가?라고
생각하니 참회를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아 하느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내가 지은 죄들을 하나하나 찾아내어 참회를 하기 시작합니다.
`주님 제가 지은죄를 찾아내어 참회하기 전에는
제 영혼을 데려가지 마소서 `라고 하며 죄를 하나하나 찾아내어
눈물로 잘못 했으니 용서해 달라고 간절히 청합니다.
내 두 눈에는 어디에 얼마나 눈물이 많이 저장되어 있기에 그런지
하루 종일 눈물이 펑펑 솟아오르니 내 베개가 흥건이 젖어,
아내가 수시로 갈아줍니다.
이상하게도 내가 살아오며 지은 죄들이 모두 영화의 스크린 처럼
내 눈앞에 전개 되는데, 내가 몰랐던 죄까지도 다 살아나
내 앞에 나타나서 나는 깜짝 깜짝 놀랍니다.
내가 고해성사를 수도 없이 봤는데 그 죄가 다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이
아주 또렸하게 나타납니다.
나는 낮이나 밤이나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졸립지도 않고 잠이 오지도 않습니다.
나이 든 수 간호사가 나를 책임지고 있는지,
낮에 두번씩 찾아와서 나의 혈압을 재고 나의 상태를 체크합니다.
그리고 밤에도 꼭 두번씩 찾아와서 나의 상태를 살펴보고
혈압을 재고 기록을 합니다.
그는 내가 잠든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잠이 안와요?"라고 합니다.
"예"
"잠오는 약을 드릴까요?"
"아녜요."
아내는 나의 입에 음식을 떠 넣어주지만 나는 모두 토해 버립니다.
제12편 6장 끝
제12편7장:4명의 의사가 와서 나의 가슴을 들여다 보다.
다음날 흰까운을 입은 남자의사 4명이 중환자실의 2개의 문을 활짝 밀어저치고
성급히 들어오는데, 나는 `오늘 또 어느 누가 돌아가시나보구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의사들은 나에게로 오는게 아닌가?
한 의사가 나의 환자복을 벗기려고 하는데 단추가 쉽게 풀리지 않자
짜증을 부리며 마귀 쥐어 뜻듯이 서두릅니다.
그럴께 아니라 옷을 배꼽에서부터 위로 들어올리면 간단한데 왜 저러나?
의사들이 내 가슴을 들여다 보며 뭐라고 지껄이는데 하나도 못알아듣겠습니다.
내가 다친 곳은 머리인데 왜 가슴을 보고 저러시나?
의사가 옷을 슬쩍 여며주고 가 버립니다.
아내도 내가 이제 곧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그동안 우리가 잘 아는
박 신부님 위 신부님 수녀님들에게 전화로 나의 위험을 알려 주어서 그런지,
모두 병원에 오셔서 의사의 주의사항을 들으며 손을 씻고
병원에서 주는 까운을 입고 잠시 나를 면회하도록 하는데
신부님들은 나의 몰골을 보며 비통해 하시고 기도를 해 주시고 나가시는데
내가 이제 곧 죽을 것으로 아셨나 봅니다.
아내는 또 내가 원주 기독병원에 실려왔을때, 율리아님에게도 전화를 하여
나의 상태를 알리자 율리아님은 대성 통곡을 하시며 나를 위해 기도하며
고통을 받으신다고 선전하여, 모든이들이 나 때문에 율리아님이
고통을 받았다고 후에 말을 합니다.
그리고 율리아님이 병원으로 기적수를 보내주었다고 하며
그것 때문에 내가 살아났다고 선전합니다.
후에 나는 나주 사이트에서 내가 살아난 것은 율리아님이 보내주신 기적수를
먹고 살아났다고 나도 잘 알지도 못하고 나주와 율리아를 들어 높이느라고
호들갑을 떨었지만 나중에 내가 나주는 이단이란 것을 알고 율리아를 떠날 때
나는 정밀한 조사를 하며 아내에게 이렇게 질문을 했습니다.
"내가 깨어나기 전에 나에게 기적수를 먹였어?"라고 하자 아내는
"아니, 자기가 깨어난 후 나중에 자기에게 물을 먹이려고 기적수를 먹였어"
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살아난 것은 기적수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 후 나주에서는 율리아와 다른 사람들이 내가 살아난 것은 기적수 때문이고
율리아님이 나를 위해 기도하며 대속고통을 당하신 때문이라고 극구 선전을
하며 모두 내가 살아난것이 바로 기적수라고 믿게 되지만
나주에서 기적수로 살아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많은 나주를 다니는 순레자들이 나에게 면회를 왔고 그들은 기다렸다가
주의 사항을 듣고 손을 씻고 옷을 입고 나를 만나게 하며 이야기는 되도록
시키지 말라고 주의를 듣습니다.
그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나를 위해 기도해 주고 가지만
그들도 내가 오래살지 못할 것을 예감했다고 합니다.
나의 기도는 그치지 않습니다.
하루 종일 주님께 애원하며 내가 살아오며 지은 죄들을
계속 주님께 고백하고 잘못했다고 빌며 용서해 달라고 애원합니다.
제12편7장 끝
제12편8장:내 가슴의 성체와 하트
다음날 아내가 수건에 물을 적셔 내 얼굴과 손과 발과 목과 가슴을 닦아 주다가
"어머나 자기 가슴에 성체가 생겼네 !"라고 합니다.
`뭐라고? 성체라니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생각했지만,
아내는 한번도 허튼 소리를 한적도 없고 허튼 소리를 할 여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뭔가가 잘 못 보였겠지`라고 하며
나는 그말을 다시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다음날 아내가 또 내 가슴을 닦아주려다가
"어머나 ! 오늘은 더욱 선명하네! 마치 콤파스로 그린것 같이
완전한 동그라미 성체야"라고 하는게 아닌가?
"심장부위에는 하트도 있네"
갈수록 태산입니다.
"자기야, 시장에 가서 손잡이 달린 거울 좀 사다줘봐"
그러자 아내가 시장에 가서 아기얼굴만한 손거울을 하나 사왔습니다.
나는 거울을 나의 가슴을 비추어 봤습니다.
그러자 거기에 신부님이 미사때 사용하는 큰 성체가
가슴 한 복판에 박혀 있는게 아닌가?
"헉 ! 성체잖아?"
그런데 성체가 희고 붉고 파랗고 주황색과 노란색등
여러빛깔로 되어 있는것입니다.
그리고 심장쪽에는 완전한 푸른색의 하트가 아주 정교하게 붙어 있습니다.
마치 부드러운 섬유의 비로도가 바람에 움직이듯이 붙어 있습니다.
`오 하느님 왜 이러십니까?
이런 현상은 성인성녀들에게만 있는 법인데 제가 성인이나 됩니까?
저는 보잘것 없는 죄인 아닙니까?`
그날 나는 하루종일 성체와 하트에 관하여 생각하며
`왜 내 가슴에 이런것이 생겼을까?`를 생각하다가
`이것은 하느님이 내가 평생 고통중에 사니까 불쌍하여
나를 사랑한다는 은밀한 주님과 성모님의 사랑의 징표로구나 !`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나를 들어내려는 것이 아니고
그냥 내 개인에게만 주는 은밀한 사랑의 징표입니다.
주님이 생각하기에도 내가 3살때 내 뜻이 아닌 다른 일로 병신이 되었고
부모형제 다 죽고 나혼자만이 내 굴리듯 살아오는것이
불쌍하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나는 어제 아내에게 성체가 고파
"자기야 원주에는 성당이 많으니 아무 성당에나 가서 봉성체를 해 달라고 해봐"
그러자 아내가 시내에 나갔다가 그냥 돌아오며 하는 말이
"자기야 여기서는 한달에 한번씩 정해진 날자에
신부님이 성체를 모시고 오신대"라고 합니다.
옛날에는 신자가 성체를 원하면 집이 멀고 가깝고 관계없이 낮이나 밤이나
무조건 달려 갔는데 이게 뭔가? 나는 너무 실망스럽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성체를 보내주지 않았던가?
그리고 1990년 6월 24일에 결혼 한 후에 아기를 달라고 100일 기도를 할 때
마지막 날 기도는 호산 공소의 감실 앞에서 마지막 100일 기도를 마칠때
나는 감실에 손을 얹고 하지 않았던가
그때 성령께서 나에게 오시어 가슴을 뜨겁게 해 주지 않았던가?
그런 일이 있어도 나는 계속 죽음을 준비하는 기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내가 병원에 온지 7일이 되던 날 아내가 "자기야 의사가 그러시는데
내일 8일째 되는 날에는 자기를 일반병실로 옮겨 주신대"라고 합니다.
`뭐야? 나는 지금 죽을 준비를 하는 중인데 내가 살아날꺼란 말이야?`
나는 내가 조금이라도 더 나아졌다는 느낌이 하나도 들지 않았고,
계속 아픔속에서 나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는데 일반 병실이라니 !
제12편8장 끝
제12편 9장:8일만에 일반병실로
다음날 의사가 와서 나를 일반병실로 옮겨 주었습니다.
거기에는 나까지 6명의 환자가 누워 있는데
모두 일어나지도 못하는 중환자같아 보입니다.
이곳 원주가독병원은 개신교 연세대 부속 병원이라서 그런지 환자들이
거의 개신교 신자들이고 매일 목사님과 집사님들이 와서 기도를 해 주십니다.
간혹 나에게도 와서 목사님이 기도를 해 주시는데 팔을 벌리고 연설하듯이
큰 목소리로 기도를 하여 나는 좀 맘에 들지 않습니다.
무슨 기도를 그런식으로 하는가?
예배당에서 신자들에게 한다면 모르지만 여기는 병원이 아닌가?
나의 참회의 기도는 여기에 와서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내 생각과 전문가인 의사의 생각은 다를 수 있기에
내가 혹시 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아내가 먹여주는 밥을 처음으로 삼키기 시작하였는데
처음에는 모두 토합니다.
그러면 좀 쉬었다가 입을 헹구고 다시 조금씩 먹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나는 발가락을 꼼지락 거리며 운동을 시작하였고
나중에는 다리를 굽히거나 들어 올리는데 까지 성공합니다.
그리고 손가락 운동도 하고 팔을 벌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소변이 마려우면 아내가 소변기를 대주어 오줌을 눕니다.
나는 상반신을 일으키는 연습을 하였고 마침내 일어나 앉게 되면서
아내가 밥을 먹여주다가 이제는 내가 밥을 먹습니다.
며칠 지나자 똥이 마려운게 아닌가?
아내가 나를 침대체 복도로 끌고 가서 간이천막을 두르고
납작한 대변기를 엉덩이에 넣어 주어 나는 11일만에 처음으로 대변을 봅니다.
"자기의 변 색깔이 황금색이고 냄새가 안나"라고 아내가 말 합니다.
그리고 아내가 나를 목욕시켜 주는데 내 몸구석구석을 깨끗이 닦어 줍니다.
나는 아내의 헌신적인 수고에 늘 감사하지만 감사하다는 말을 잘 못합니다.
아내는 그동안 귀찮아 하거나 상을 찡그리는 일이 단 한 번도 없이
모든일을 기쁘게 다 하였습니다.
얼마나 고마운 아내인가?
아내가 다시 침대를 밀고 병실로 들어옵니다.
아내는 보호자 부인들과도 사이좋게 잘 지내고
아내는 내 옆에서 바닥에 무릎을 꿇고 묵주기도를 하는 것을
개신교 신자들이 모두 바라보지만, 그들은 아내에게 친절하게
잘 해 주며 먹을 것도 나누어 주기도 합니다.
그날 우리병실의 환자하나가 다른 곳으로 옮겨졌고,
그 자리에는 새 환자가 들어왔는데, 50대의 뇌경색 남자 환자입니다.
그는 체격도 좋은 듬직하게 생기신 분인데 성격이 매우 난폭하여
의사와 간호사들을 마구 때립니다.
그리고 손에 잡히는 것은 다 집어 내 던집니다.
그의 부인은 40대로 보이는 매우 뚱뚱한 부인인데 옷을 야하게 입었고
귀거리, 목거리, 팔찌들이 몸에 치렁치렁하고 마치 무당같아 천박해 보이고
화장도 매우 짙습니다.
그 부인은 여자 간병인을 남편에게 붙여주고 돌아간 후,
내가 퇴원할때까지 한번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제12편9장 끝
제12편 10장:퇴원신청을 하다
내가 매일 밥을 먹고 운동을 하자 내 몸이 많이 좋아졌고,
다리의 종아리와 엉덩이의 살이 붙기 시작합니다.
내가 일어나 침대 모서리에 발을 내리고 발 운동을 하는데
파란 젊은 간호사가 보더니
"안돼요. 아직은 꼼짝 말고 가만히 누워 있어야 해요,
그러다가 머리의 핏줄이 다시 터지면 평생 병원에 있어야 할꺼예요"라고
야단치기에 깜짝 놀라 나는 얼른 침대속으로 들어가 담요를 얼굴까지 끌어서
덮고 눈만 깜빡 거립니다.
간호사가 나가자 나는 다시 일어나 운동을 계속합니다.
그동안 내 가슴과 심장에 생겼던 하트와 성체는 12일째 되던날 사라졌습니다.
후에 나주 사람들이 "왜 사진을 찍어두지 않았어요?"라고 하기에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어요, 카메라가 있었지만 , 만일 주님께서
나를 들어내시기를 원하셨다면 어떤일이 있더라도 사진을 찍도록
하셨을 것이지만, 우리는 아예 생각도 못했어요"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어느날 우리병실 맨 끝에 있는 분의 부호자 부인이
"전화받으세요"라고 합니다.
"저요?"
"네"
내가 일어나 내려서 가려는데 다리가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자 한 부인이 와서 나를 부축하여 전화있는곳까지 데려다 줍니다.
아내는 어디 나갔나 봅니다.
"여보세요?"라고 내가 정확한 발음으로 아직 말을 못합니다.
내가 한 말은 "여오에요"입니다.
그러자 상대방이 깜짝 놀라며
"아 죄송해요 아직 다 낫지 않으셨군요 저는 인천에 사는 '도로테아'에요,
나중에 다시 할께요"하며 전화를 끊었습니다.
내 말을 알아듣는 사람은 아내뿐입니다.
그 '도로테아'라는 여자는 젊은 과부인데 남편이 병이들어 일찍 죽었던 것입니다.
'도로테아'님은 그 후 나주에 봉사자로 와서 지금까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수간호사는 아직도 나에게 하루에 낮에 두번 밤에 두번을 찾아와서
혈압을 재고 상태를 체크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잠든것을 보기도 하고
자는데도 혈압을 재기에 나는 잠을 깹니다.
어느날 내 아내에게
"이 원주가독병원은 어디를 가도 맨 약냄새가 진동을 하는데
여기만 오면 약냄새가 다 사라지고 어떤 좋은 향기가 나요"라고 하자
아내는 빙긋이 웃기만 하는데 아내는 알고 있는듯 합니다.
"자기야 나 집에 가고 싶다, 집에 가서 요양하는 편이 더 나을꺼야 ,
의사에게 퇴원신청을 해 봐 !"
그러자 아내가 퇴원신청을 합니다
그러자 의사가 나를 다시 침대 채 끌고가서 CT. MRI 검사를 합니다.
항상 나를 살펴보던 의사가
"선생님께서는 뭔가 특별한데가 있어요"라고 하십니다.
"...................."
나는 그 의미를 알고 있습니다.
주님과 성모님께서 항상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나는 압니다.
그리고 내일 퇴원해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집니다.
내가 병원에 온지 22일때 되던 날입니다
제12편10장 끝
제12편 11장:죽어서 왔다가 퇴원하다.
내가 2004년 11월 18일에 아름드리 큰 나무가 내 머리위로 떨어져
머리가 깨어지고 머리속의 핏줄이 다 터지는 `다발성뇌출혈`로
두군데의 큰 병원에서 사형선고를 내렸는데
12월 10일에 퇴원을 합니다.
나는 일어나 5명의 환자들을 하나하나 찾아가서 작별 인사를 하고
맨 마지막으로 뇌경색 환자의 거치른 50대의 남자에게 가서
"안녕하세요?"라고 하자 그가 의외로 얌전하게
"예"라고 합니다.
"선생님도 어서 완쾌 되시어 가정으로 돌아가셔야지요"라고 하자 또
"예"라고 합니다.
"저 오늘 퇴원합니다."
"예"
"안녕히 계세요"
"예"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보다가 안심한 표정을 짓습니다.
보호자 부인들이 나를 휠체어에 태우고 8층에서 아래층까지 데려다 줍니다.
아내는 차를 정문 앞에 세워두고 뒷좌석에 이불을 깔아 줍니다.
내가 작별을 하고 차를 타고 떠나자 그들은 우리가 보이지 않을때까지
손을 흔듭니다.
우리가 병원 밖으로 나오자 나는 문득 깜짝 놀랍니다.
"자기야 우리가 정작 인사를 드렸어야 할 의사와 간호사에게는
인사도 못드리고 나왔네"
"아 이런 나도 미처 그 생각을 못했어"
"우리 다시 들어가야지?"
"에이 어떻게 다시 들어가? 그냥 가면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지 뭐"
나는 속상하지만 그냥 가면서 기도하기로 합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 죄송합니다. 제가 이렇게 성의 가 부족합니다.
하느님깨서는 이 병원의 모든 의사와 간호사들에게 자비를 배푸시어
더 많은 환자들이 치유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며
그들을 위해 묵주기도를 합니다.
우리가 영월에 이르자
"자기야 태백으로 가는길이 여기에서 두 갈래가 되는데
이쪽 `상동` 쪽으로 가줘 "
그것은 탄광촌인 상동에 살다가 미국으로 이민가신
`상아탑`님 (마리아의 구원방주)에서 내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나를 위해 기도를 많이 해준 고마운 분이기에
우리가 그가 살던 상동을 지나며 그를 기리고 그를 위해 기도하고 싶은 것입니다.
상동에는 나도 여러번 가 본 곳입니다.
석탄과 아연광산이 성업중일때는 도시가 번창했지만 점점 폐광이 늘어나면서
이제는 점점 유령도시로 변해가고 있는 중입니다.
우리가 상동에 이르니 썰렁합니다.
아파트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창문이 떨어지고 시내의 가게는
거의 다 문이 닫히고 한 두군데의 가게만이 문을 열고 있습니다.
"하느님 상아탑님이 미국생활에 잘 적응하게 하여 주시고
그의 가족에게 많은 은총 베풀어 쥬소서"라고 기도하며
태백에 이르기까지 그들을 위하여 묵주기도를 하였습니다.
태백에 이르니 모든 것이 새롭습니다.
아내는 이곳 시장을 자주 이용하였고, 우리도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미사를 보았고 성당의 신부님과 수녀님과 회장님들과 친하였던 것입니다.
특히 석회장님은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셨는데 매미태풍이 불던 날 밤중에
차를 몰고 차를 산중에 세워두고 쌀과 먹거리를 매고 우리집을 찾아주신
고마운 회장님이십니다.
우리는 감사하며 풍곡으로 왔습니다.
풍곡에는 1989년 6월 24일에 밤중에 두명의 청년들이 나를 찾아와
죽음에 이르는 폭행을 한 녀석들이 사는 곳입니다.
그러나 또한 우리와 친한 분들도 많은 곳입니다.
우리는 내가 그렇게 아끼고 사랑하는 6km의 덕풍계곡을 지나며
나는 눈물을 흘립니다.
`고맙구나 내가 죽어서 나갔다가 살아서 지금 들어가는 중인데 흑흑`
드디어 우리집의 언덕으로 올라갑니다.
아내가 차를 세우고 먼저 집으로 들어가는데 그날이 12월 10일
엄동설한이라서 나를 위해 방에 불을 먼저 때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12편 11장 끝
제12편 12장:드디어 집으로 돌아오다.
나는 천천히 밖으로 나와 사방을 둘러봅니다.
지난 11월 18일에 죽어서 나갔다가 22일만에 살아서 돌아왔으니
울음이 북바쳐 올라 마구 흐느낍니다.
내가 이곳을 얼마나 사랑했던가?
내 발길과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는 곳입니다.
그동안 돌풍이 불어서 그런지 닭장의 양철지붕이 다 날라갔고
날라가면서 전깃줄을 끊어 놨습니다.
닭장 안에는 닭이 한마리도 없습니다.
나는 집으로 들어가려는데 문 앞에는 각종 우편물들과
지인과 등산객들이 놓고 간 물건들이 잔뜩 쌓여 있는게 아닌가?
내가 방으로 들어가자 아내가 요를 두 장을 깔아주며 누으라고 합니다.
내가 눕자 이불을 또 두장 덮어주는데 나는 너무 추워 몸이 덜덜 떨리고
이가 딱딱 마주칩니다.
아내는 부엌으로 가서 불을 때고 나는 누워서 방안을 살펴 봅니다.
내가 16년을 살던 곳입니다.
처음에 왔을때 우리집은 굴피집이었습니다.
참나무 껍질로 지은 집입니다.
나는 가장 원시적인 굴피집이 좋았는데 지붕에서 돌이 굴러
내 얼굴을 치는 바람에 지붕을 양철지붕으로 바꿨던 것입니다.
그때도 15kg되는 돌이 만일 내 머리의 정수리에 맞았다면
나는 찍소리도 못하고 죽었을 것입니다.
벽에는 십자가가 걸려 있고 피아노 위에는 요셉이 예수아기를 안고 있는
동상이 있고 아내의 경대에는 성모님상이 있습니다.
책장에는 각종 귀한 책들과 음악 책들이 가득합니다.
외국 음악에 Sweet home이란 노래가 있지요
`즐거운 곳에서 날 오라하여도 내 쉴곳은 내 작은집뿐이리`
집에 오니 너무 좋고 마음이 편합니다.
내가 잠이 막 들려고 하는데
"따르릉"전화소리가 납니다.
그러자 아내가 달려옵니다.
"여보세요? 네 네 아 율리아님이세요?
네 바꿔드릴께요, 자기야 율리아님이셔"
내가 누운채 전화를 받습니다,
"율리아님?"
"네 저 율리아예요"
"아! 율리아님 그동안 여러가지로 감사했습니다."라고 하자
율리아님이 "아네요 감사는 주님께 하세요,
제가 낮에 원주기독병원으로 전화를 하였더니 방금 퇴원했다고 하네요,
그래서 지금쯤은 돌아오셨겠구나 하고 전화 했어요"
"왜 병원으로 전화를 하셨어요?"
"알비노씨를 보내어 주님함께님을 나주로 데려오려고 했어요"라고
하시는게 아닌가?
"아 그러시군요, 이제 다 나았으니 염려 마세요"
"네 그러면 몸조리 잘 하시고 하느님의 기쁨과 평화와 사랑 가득히 받으세요"
"예 감사합니다"
그러자 전화기를 통해 율리아님이 영가를 불러 주십니다.
나는 율리아님의 영가소리를 마리아의 구원방주 사이트에서 들어서
알고 있지만 무슨뜻인지 아직 잘 모릅니다.
아내가 호산 한전에 전화를 걸어 전기가 고장이 났다고 하자
한전에서는 지금 밤이니 내일 가서 고쳐주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아내가
"제 남편이 그동안 병원에 있다가 방금 퇴원했어요"라고 하자
"아 그러세요? 당장 가서 고쳐 드릴께요"라고 합니다.
나는 깊은 잠속으로 떨어집니다.
---제12편 끝 ---
(계속해서 제13편1장이 연재되오니 많은 구독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19년6월19일(수) 형광등등 씀
캐나다 몬트리올 累家에서
2022년4월27일(수요일)에
청송(靑松) 카페지기 베드로 문 다시 옮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