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꺼내보는 명품시조 74,「연필」외
신웅순(시인․평론가․중부대명예교수)
살이 깎이고 뼈가 닿는 고행의 삶입니다
가도 가도 끝없이 펼쳐지는 설원의 길
몽당이
되도록 지나온
어제가 다 경전입니다
-이기라의「연필」
나무는 살로, 연필심은 뼈로 비유했고, 백지는 설원으로, 지나온 길은 경전으로 비유했다.
연필을 살이 깎이고 뼈가 닿아 없어지는 고행의 삶이라했다. 몽당이 다 되도록 시어 하나 하나가 고행이라는 것이다. 아무도 밟지 않은 가도가도 끝없는 설원. 거기에 남겨놓은 첫 발자국. 이것이 시이다.
발자국을 바라보니 삐뚤빼뚤이다. 다 닳도록 몽당이 되어 걸어온 길이다. 지나온 어제가 다 경전이다. 논어ㆍ맹자만이 경전이 아니다. 아무리 읽어봐라 내 것이 되는가. 경전은 살아오지 않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살아온 사람의 것이다.
가을이 아름답다
말하지 말아야지
한생을 마무리며
꺼져가는 목숨 앞에
경건히
묵도를 하며
붉다고만 해야지.
-이기라의「가을 앞에서」
가을이 아름답다고 말하지 말라. 한 인생을 마무리하고 있는 중이다. 경건히 묵도하며 붉다고만 말을 해야하지 않느냐. 경건하고도 지엄한 명령이다.
단풍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한다. 노년의 삶이 젊음의 삶보다 더 의미가 있다는 얘기이다. 묵도를 하며 붉다고만 말해야한다는 것. 한 인생이 완성되어 가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이를 에둘러 말한 것은 아닐까.
같은 말이라도 서로 뜻이 다르며 다른 말이라도 서로 뜻이 같은 것. 이현령비현령의 모호성 ambiguity, 이것이 없다면 이미 시가 아니다. 시는 순전 작가의 몫이 아니라 독자의 몫이다.
- 주간한국문학신문,2023.3.1.(수)
첫댓글 오랜만에 들렸는데
좋은 글 읽고갑니다.
들려주심만도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