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강론 요약) 언약대로 오신 예수(7) (마4:12~25)
☞마태복음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택한 백성에게 계시하시려고 예언대로 오신 것과 그리스도의 선지직과 왕직과 제사직을 이루심을 증거하신 내용이다.
12 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 가셨다가 13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14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15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 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18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20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21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그 부친 세베대와 한가지로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22 저희가 곧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24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 25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편에서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1.12~16절 예수께서 시험을 받으시는 장면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예수님이 가버나움으로 이사 가는 내용이 나와서 앞뒤 연결이 안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12 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 가셨다가 13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14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15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
4장의 시험받으시고, 가버나움으로 이사 가고, 복음이 전파되는 내용들은 하나의 주제를 증거하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그렇게 보려 하지 않고, 성경말씀 각각을 분리해서 인간의 행동을 촉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주제를 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4장까지 공부해 오면서 그 중심 내용이 “구약의 예언(언약)대로 이루려 하심이라!” 즉 구약의 예언(언약)대로 예수가 그리스도로 오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호와가 틀림없기에 그분의 영광만을 찬양하며 경외함이 마땅하지 않느냐! 를 증거하는 내용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마태복음 전체의 주제이고, 성경 전체도 그 내용을 증거합니다.
그렇기에 4장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증거하고자 하는 그 주제, 즉“예수가 그리스도이시기에 하나님은 여호와가 되신다!”는 결론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했으니까, 성경에서 이렇게 말씀했으니까 우리도 이렇게해야 되고, 저렇게 하면 안된다는식의 도덕 윤리를 가르치는쪽으로 끌고 간다면 성경에서 증거하려는 복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게됩니다. 우상숭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2. 그렇다면 예수님이 가버나움으로 이사 가는 내용 역시도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을 증거하려는 내용인가요?
세례요한이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에게 독사의 지식이라고 했으니 얼마나 열을 받았겠습니까? 세례요한이 그들에게 잡혀가고, 그 소식을 들은 예수님은 갈릴리를 거쳐서 가버나움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그 이유를 14절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14절“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명확하게 결론을 증거하고 있지요? 예수님은 구약의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이루셔야 그리스도가 되시는데, 지금 그 예언대로 이루심으로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이 틀림이 없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예수께서 이사를 가시는 것까지도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을 증거하려는 것임을 확인합니다. 즉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에 대한 증거는 단순히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사실임을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3. 당시 역사적 상황을 좀더 자세하게 설명한다면?
사9:1~2절“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여기 이사야의 예언은 언제 어떻게 이루어졌을까요? “스불론, 납달리, 요단 강 저편 해변의 길 그리고 이방의 갈릴리”라는 지명이 등장을 합니다. 그 땅은 야곱의 12 아들 가운데 스불론과 납달리에게 배정하신 땅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있던 종교 지도자들을 비롯한 유대인들은 그들을 선민이라 하지 않고 이방인으로 불렀습니다.
그 이유는 BC 732년경 갈릴리 북쪽은 앗수르에 의해서 점령을 당했습니다. 남쪽 유다는 아하스 왕이 통치 했고, 북이스라엘은 베가 왕이 통치를 했습니다. 서로가 적대관계였던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약소국가들은 강대국들과 동맹관계를 맺어 나라를 통치해 갔습니다. 북이스라엘도 수리아(암몬)와 동맹관계를 맺고 앗수르에 반기를 들게 됩니다. 그러면서 남유다 아하스 왕에게 동맹을 맺어 함께 앗수르에 대항을 하자고 제안 합니다. 그러나 거절 당하자 남 유다를 블레셋과 함께 공격하게 됩니다.
남유다는 사면초가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요! 한번만 하나님 살려주세요! 하면서 무릎을 꿇었을까요? 아하스 왕은 우선은 살고보자! 고 앗수르 왕에게 조공을 바치면서 도움을 청합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북이스라엘은 BC 722년경에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고 대부분이 포로로 끌려갑니다. 여러 혼혈족들이 그 지역에서 살게 되었는데 남 유다는 자연스럽게 앗수르 지배를 받는 나라가 되고 말지요. 남 유다도 바벨론에 의해 멸망 당한 후 70년만에 귀환하지만 나라가 다시 세워지지는 않고, 다만 제사를 회복시켜 주심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떠나지 않았음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무렵 북쪽에 위치한 갈릴리 지역이 홀연히 빛이 임하여서 영광의 갈릴리로 회복될 것을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을 한 내용이 사9:1~2절입니다. 그 예언대로 빛 되신 그리스도가 갈릴리에 나타나셔서 복음의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으니, 가장 험악한 상태까지 내려간 갈릴리로서는 가장 영광스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난날 파란만장한 우여곡절의 시련들 하나하나가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을 증거하기 위한 섭리였고, 하나님의 영광의 도구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 하나님 아버지!ㅡ옮긴이 속엣말)
인간적인 입장에서만 보면, 예수님의 복음사역 시작은 화려한 예루살렘은 고사하고 자신이 태어난 베들레헴도 아니고, 자라난 나사렛도 아니고, 세례요한 죽음 때문에 도망을 가게 된 이방인들이라고 취급을 받던 갈릴리에서 복음사역을 시작 했으니 얼마나 초라했겠는가? 그러나 다시금 자세하게 보면, 너희들이 그토록 멸시 천대하던 그 예수가 다름 아닌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이루어진 그 메시아가 틀림이 없지 않느냐! 그래서 의심의 자리에 머물지 말고 이제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으라는 것입니다.(아멘!)
4. 17절 예수님께서 첫 일성으로“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하셨는데, 그 의미는?
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공생애 시작을 갈릴리와 가버나움에서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참 선지자로서 선포하신 복음의 내용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입니다. 회개란 돌이킨다는 뜻으로 한마디로 개종하라는 것입니다. 개종해야 하는 이유는 천국이 임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고 했는데, 왜 마태는 “천국이 가까이 왔다” 고 했을까요?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으로 오해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 엘로힘이라는 이름조차 부르지 못하고 “음” 하고 말았습니다.
구약에서는 기회만 되면 “나는 여호와로라” 반복하셨는데, 신약에서 “여호와”란 단어가 사라진 이유는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리지 않는 유대교 전통에 의해 여호와 대신에 “주”라고 부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이고 어떤 분인가를 알게 하시려는 계시의 목적이 성경이고, 하나님을 계시하심에 있어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가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이 어떤 원리에 의해서 모슨 목적으로 기록되어졌는가를 찾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성경 전체를 한 권으로 보는 일과 하나의 중심주제로 정리하기란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유대인들의 전통에 의해 사라졌다고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인간들의 눈을 더욱 흐리게 하여 깨달을 자만 깨닫고, 믿게 할 자만 믿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중심주제가 성경의 뼈대며, 대로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인간 구원은 가지에 해당하는 것이고, 작은 골목길에 불과할 뿐입니다. 혈관에 비유하면 성경의 중심주제는 대동맥이고, 인간 구원은 작은 혈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속담에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경이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을 증거한다고 해서 억지로 꿰어 맞추다 보니 피차 어려워져 본인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마치 골목길에서 미로 찾기 게임을 하는 것과 같이 헤메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의 중심주제를 하나의 뼈대로, 부분에 해당하는 가지들이 뻗어가는 형식으로 해석해야 시원하게 뚫리는 것입니다. 성경의 중심주제를 모르고 뼈대를 모르면 성경을 강론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제목 설교는 어떤 주제를 강조하기 위한 목적으로 합니다. 제목 설교를 아무리 들어도 성도 스스로 성경을 읽으면서 정말 그러한가 증명하려고 할지라도 단 한 구절을 읽어갈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의 의미처럼, 구약은 언약이고, 신약은 성취라는 구도 아래에서 신약성경을 해석하지 않으면 성경 전체가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고, 하나의 사건이 어떤 맥락에서 왜 주어졌는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부분만을 보면서 미로게임만 하고 있을 뿐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왜 세례를 받으셔야 했는지, 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셔야 했는지, 왜 나사렛에서 베들레헴으로 와서 출생하셔야 했는지, 왜 애굽으로 피난을 가야 했는지, 왜 가버나움에서 복음을 전했는지, 성경 전체의 중심주제를 모르고, 언약과 성취의 구도를 모르면, 세례라는 주제를 설교하는데나 적용하고 시험이라는 주제를 설교하는데 적용하게 됩니다. 실제로 증거하려는 목적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식으로 “무조건 예수 믿고 구원 받아서 천국만 가면 된다!”는 식의 현대신학은 성경의 기록 목적을 전하지 않고 왜곡현상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하고, 교회가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근원, 기원, 출발, 원인을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데 부분적인 현상만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니 세상 학문과 전혀 다를 바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의 철학적 접근방식입니다. 인간이 중심이 된, 철학적 접근방식으로는 영원한 하나님을 찾을 수도 없고, 최종적인 해답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모든 만물과 만사를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성경이 풀리지 않는 것입니다. 근거와 원인이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고, 그 근거대로 성취해 가시는 계시입니다. 심지어 사단이나 죄 문제까지라도 말입니다.
신약의 모든 사건의 근거는 구약의 언약에서 비롯합니다. 즉 신약의 모든 내용은 구약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함이라는 뜻입니다. 역사를 통해서, 사건을 통해서, 인물을 통해서 언약한대로 성취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족보도, 잉태도, 출생도, 세례도, 광야시험도, 피난가고 이사가는 것까지도 언약대로 성취하기 위함입니다. 오직 하나의 이유, 하나님은 여호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택한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그분만을 믿고 경외하며 찬양하게 하시려는 것이 목적입니다. 오늘 우리는 세상 모든 만물과 만사를 주권적으로 다스리시며,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전능하신 그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 이보다 더 성경 계시의 목적에 정확하고, 논리적이고, 체계적이고, 과학적일 수 있겠습니까.
5.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회개하라"를 일성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셨을까요?
구약의 말라기 선지자의 예언대로 성취하기 위해서 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하는 일은 하나님의 뜻을 선포함으로 백성들에게 죄에서 돌이킬 것을 촉구하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요 실체로 오셨기에, 그림자 종교생활에서 돌이키라는 것이 예수님의 공생의 시작이 "회개하라"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첫 일성으로 복음을 전하실 때 다른 말을 하면 안되는 이유는 구약의 언약대로 성취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직접 목적은 당신이 그리스도 되심을 증거하시기 위함이고, 근본목적은 하나님이 여호와 되심을 증거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택한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능력의 영광을 바라보고 그분만을 믿고 경외하며 찬양하게 하려는것입다. 예수님의 첫 일성, 하나님 나라의 실체가 오셨기에 이제는 더 이상 그림자를 붙잡고 있지 말고, 돌이키라는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처음 지으신 후에 언약하신 내용이 나라를 세워주시겠다는 언약입니다(창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그 나라는 이미 창세전부터 하나님의 뜻(말씀/로고스)이 있었는데, 그 뜻을 계시하는 방법이 언약과 성취입니다. 아담에게 언약하신 내용이 세상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원형이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그 말씀을 언약으로 보지 않고 문화명령으로 해석을 합니다. 그래서 자식 낳아 잘 키우고, 땅 많이 챙기려고 투기하고, 똑똑한 한 사람이 십만명 먹여 살리면 된다고 줄을 세우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에게 세우신 나라가 세상 나라가 아님을 알게 하시려고 아브라함을 불러내어서 언약을 하셨는데, 그것이 이스라엘 나라를 세워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나라가 세워지려면 백성과 국토와 국권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까지 이스라엘 나라는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아담에게 언약하신 대로 성취하시려고 오신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선포하실 내용이 <<언약대로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다>>(성취)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나라는 모형이고 육체적이며 현세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1)아브라함의 혈통으로 생육번성, (2)가나안 땅을 정복, (3)다윗에 의해서 나라가 세워짐으로서 다스리는 권세가 주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신약에서 예수가 그리스도로 오셔서 아담의 언약을 이루실 실체는 “교회”입니다. (1)하나님의 택한 자들을 다 불러 모으시고, (2)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함으로 정복하게 하시고, (3)그리스도께서 만왕의 왕이 되셔서 통치하심으로 “교회의 기초”가 되어 구약의 언약을 예수님께서 완벽하게 성취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언약을 성취해 나가신 것입니다. 신약성경은 신령한 교회, 보이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내용입니다. 성령의 사역으로 “교회 설립”이 이루어지고 성령의 교훈으로 교회를 양육하고, 무장하고, 투쟁하게 해서 승리하게 하시는 내용이 신약성경을 해석하는 기본 뼈대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동안에 전파하실 복음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의미는 첫 아담에게 하신 언약대로 둘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나라가 성취되었다는 뜻입니다. 즉 당신 자신이 영원한 천국의 왕권을 지닌 그리스도 되심을 말씀으로 증거하셨습니다.
“회개하라!”고 명령했다고해서 자기 의지대로 회개 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어두운 죄악 가운데 있는 택하신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천국을 선포해주시고, 그 나라를 이루어 주시겠다는 약속의 내용입니다. 의와 희락과 평강이 충만한 그 나라는 인간의 노력으로 불가능하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이루어 주시겠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의 핍박에서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게될 천국을 학수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천국은 복음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아 천국의 주로 오셨기에 다른 메시아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마태복음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6.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모습이나 제자들이 부모나 과업을 일시에 버리고 예수님을 좇는 일이 쉽게 이해가 되나요?
18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20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21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그 부친 세베대와 한가지로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22 저희가 곧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오늘 우리라면 어떠했을까요? 이런저런 사정이 있으니 한두 달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하지 않겠는지요? 지금은 그 명령대로 순종할 수가 없으니 이해해달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에게서는 그러한 머뭇거림을 볼 수 없습니다. 즉시 따라나섰다는 것을 어찌 정상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처럼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만으로도 <<예수님만 그리스도가 되시고,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요 왕>>이라는 사실이 틀림없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나를 따라오너라!”고 명령했으니 내가 순종해야 한다고 대부분 가르치지만,“되게 하리라!”는 말씀으로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을 명확하게 나타내십니다. 이는“의지미래완료형”으로서“그렇게 되게 해 주겠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즉 “나를 따라오너라!” 명령하신 하나님께서 그 말씀에 순종해서 따라오도록 해 주시겠다는 의미의 하나님의 절대주권 아래서의 표현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복음인 것입니다. 만일에 명령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대로 순종하라고 했다면, 순종할 수 없는 우리에게는 저주와 사망만 남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나를 불러주시고, 하나님 앞으로 나오게 해 주시고, 말씀이 복음으로 들려지게 하시고, 믿어지게 하시니 어찌 감격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명령으로 주어집니다. 그 명령은 절대명령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자로서 상대자인 인간과 협력하실 필요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명령하신 하나님께서 그 명령하신대로 이루어가신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협력은 0%,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능력만이 100%입니다. 왜 이렇게 섭리해 가실까요? 인간은 죽기까지 자기 영광만을 자랑하며 죄짓는 일밖에 없기에, 그 자랑하는 입을 틀어막고, 오직“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다 하셨습니다!”라고 고백하게 하시며 하나님의 영광만을 찬양하게 하시며,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경외하게 하시려는 목적 때문입니다.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해 인간의 의지나 행동을 촉구하려는 것은 세상 종교에나 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도 아니고, 복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는“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다 하셨습니다!”를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을 통해서, 하나님은 여호와 되심을 통해서 택한 자들에게 깨달아 믿어지게 하시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찬양하며,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경외하게 하시려는 것이 목적입니다.
7. 23~25절에 예수님께서 천국을 증거하시는 방법은?
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24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 25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편에서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1)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셨고, (2)당신께서 친히 그리스도 되심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오시기 약5백여년전에 유다가 바벨론에 멸망해 포로로 끌려가기 전까지는 성전에서 제사의식으로 모였습니다. 그러나 바벨론 포로생활 이후에는 사방에 흩어져서 회당을 지어놓고 율법을 읽고 가르치게 됩니다. 즉 제사의식 중심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바뀌게 된 계기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후 약2C 까지 목사라는 칭호도 없었고, 회당장이라고 불렀습니다.
(3)표적을 행하셨습니다. 모든 병과 악한 것을 고치셨습니다. 사람들은 병 낫기 위해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병을 고치신 목적은 구약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그리스도 되심을 증거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당시 가버나움 도시에 인구가 약 1500여명 정도 되었고, 나사렛은 약350여명 정도였고, 예루살렘은 약3만여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 가는 곳마다 약3~4만여명이 따라다녔으니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예수님께 갈 수밖에 없는 것은 너무 당연합니다. 그래서 유대교에서 요시찰 인물로 감시하라고 명령이 떨어졌던 것입니다. 유대교를 완전히 무시해 버리고,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외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고, 천국이 임하였다고 하니, 당시 유대교에서는 예수가 이단 중에 괴수라고 할뿐만 아니라 죽이도록 밉지 않았겠습니까?
8. 그러면 오늘날에는 이러한 병 낫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인가요?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말씀을 가지고 기도하면 병이 낫는다고 하기도 하고, 심지어 병을 낫기 위해서 교회를 다니기도 하지 않는지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안수하면 병이 낫는다는 말에 유혹되어 안수 받으려는 분들이 많습니다. 하나 같이 인간들이 자기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자기에게 맞는 신을 의지하려는 종교생활이요 우상일 뿐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각색 병든 자를 고쳐주신 것은, 예수 믿으면 병이 낫는다는 것을 증거하려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천국의 주인이요 구약의 언약대로 오신 그리스도가 틀림없음을 1~4장까지 증거하면서 택하신 자들에게 깨달아 믿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병 고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그리스도 되심을 증거하려는 표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병든 자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어짐으로, 질병까지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나 되게 하시려고 적당하게 섭리하셨음을 알고 믿어지기에 마음에 평안을 얻게 되고, 그 믿음으로 인하여 점진적으로 나을 수도 있고, 죽을병이면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반드시 불러 가시는 것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믿음과 상관없이 각색 병을 즉각적으로 그 자리에서 낫게 하는 일은 나타나지도 않고, 행할 수 있는 자도 없습니다. 만일에 자신이 그러한 일을 행한다면 그가 곧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ㅋㅋㅋ)
오늘 성도의 소망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기에 병 낫는 것이 목적도 아니고, 부자 되는 것도 아니고, 어떠한 형편 가운데 있을지라도 나의 기쁨과 나의 소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임을 알게 하시려고 나에게 꼭 맞는 환경과 형편을 허락해 주셨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설령 지금은 자신이 겪는 이런 저런 우여곡절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없을지라도 언젠가 무릎을 치고 감동하게 하시려고 흥하거나 망하게도 하시고, 건강하거나 병들게도 하시고, 웃거나 울게도 하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ㅡ 아멘 ㅡ
말씀선포: 울산동은교회 정판옥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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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그루터기 원문보기 글쓴이: breathe
첫댓글 솔직히 다는 읽지 못했지만.. 맨마지막부분에 있어.. 질병을 치료하신 예수님의 이적과 표적에 대한.. 어떠한 해석과 분석에 대하여.. 참으로 옳으시고 바른 관점이라 생각되며... 깊이 동의드리는 바입니다.. 마지막때일수록 마귀는 수많은 미혹을 위하여.. 갖은 환상과 일명 은사를 가장한 기적과 능력들을 행하게 되리라 미루어 짐작합니다.. 오직 말씀외에 이런 이적과 기적들을 붙들려는 것은 참으로 조심해야 된다 생각됩니다..
주께서 질병을 낫게 하시고 문둥병자를 정결케 하시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것은.. 이 땅의 고통을 없애주기 위함이 목적이 아니며... 그분께서 그리스도시며 메시야셨음을 증거하기 위한 표적이였습니다.. 그리스도의 표적은 실상 그때로 이미 부족함없이 완결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현재를 사는 우리에겐 어떤 환상이나 계시나 영을 쫓으려 할 것이 아니라.. 말씀을 통한 믿음을 쫓아야 될 것입니다.. 마귀는 지금도 거짓 영과 거짓 환상과 거짓 계시를 곳곳에 뿌려놓고 다니고 있으면서..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로 가장하고 다닙니다.. 거짓에 붙들린 자들은.. 모두 미혹되어 넘어간다는게 우리 주님의 말씀이기도 하지요..
레마의 말씀 님, 어쩌다 우수회원 딱지를 뺏기셨습니까.^^ 잘하셨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진리를 동의하는 자, 그 눈은 주님께서 뜨게 하셨음을 의심치 않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아주 신비스런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곧 26절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이 말씀을 하시기 전날에.. 우리 주님은 그 유명한 오병이어의 기적을 배푸셨지요.. 그 말씀의 연장선이기도 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엄청난 미라클적인 기적과 이적이며.. 오늘날에도 이런 큰 기적과 이적은 아무도 할 수 없습니다.. 질량보존의 법칙도 무시되고 문제되지 않는... 창조주의 능력을 보이신 큰 이적이니 말이지요.. 그런데, 우리 주님의 말씀이 참으로 신기스럽고... 놀라운 비밀을 숨겨두고 계시더
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예수님을 쫓고 있는지 아닌지에 대한 관점보다는.. 그 이면적인 측면에서 진리를 가르치고 교훈하고 계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는 그를 쫓은 수많은 무리들이 곧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 소리친 그 자들이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때 "호산나 찬송을 불렀던" 그 자들이 곧 바나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 소리친 그 자들이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이러합니다.. "너희가 나를 쫓은 것이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는 것입니다.. 이 떡은 우리 주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수천명을 먹이신 그분의 능력에의해 창조된.. 사람이 만들지 않은 떡이였습니다.. 그들은 그 보리떡 다섯개로 수천명을 먹이신 그 기적을 먹고 배불렀던 것입니다.. 오늘날 이보다 더한 기적을 체험할 수 있을까요? 그들은 그 기적과 이적에 놀랐고.. 그를 쫓고 따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암묵적으로 그들을 책망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나를 쫓는 것이 생명을 쫓는 것이 아니라... 이적과 기적을 쫓는 육신에 있는 자들이라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이에 그들이 바라봐야 될 그 무엇
을 제시하여 줍니다.. "그것은 표적입니다"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과 이적을 행하신 것은 그분에 대한 표적을 위함이였지... 단순한 떡문제나 이적이나 행하는 신비감에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복음서에서 증거하시길... 인자는 "요나의 표적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하셨습니다.. 요나의 표적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한 우리의 구원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복음을 목적으로 오신분이셨고.. 이 복음을 표적으로 우리에게 오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육신적 이적과 기적 그리고 육신적 병고침과 물질축복 혹은 권세다툼... 땅에 속한 것에 배부르기 위해 쫓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언제쯤 마태복음23장을 강론하실것인지요,,,
마태복음 23장 기다리십니까? 제가 마태복음강론 책을 보내드릴까요? 책값은 2만원이지만 제가 몇 권 사서 이웃들에게 선물하고 남은 책이 한 권 있는데 무료로...^^ 원하시면 쪽지로 주소와 전화번호를 주십시오. 싫으시면 제가 23장을 미리서 요약해서 올려드려도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