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 11일(토)
* 시작 기도
주님...
히브리 성도들은 도의 초보 즉 초보적인 말씀만 끊임없이 받아먹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 도의 초보 곧 젖이나 부드러운 음식만을 추구하는 그런 신앙을 넘어서 단단한 음식을 먹고 하나님 나라 자녀들로 자라갈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히 6장).
나는 목사요 선교사로서 아직도 말씀의 초보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저 유약한 자로서 젖만 바라는 자임을 고백합니다.
이런 나에게 말씀을 받아먹는 성도들이 그저 불쌍할 따름입니다.
주의 긍휼을 베푸사 하늘의 은혜를 더하여 주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나의 의를 드러내고자 하는 자기주장의지는 십자가에 못 박고 오직 예수로 부요한 자 되기를 원합니다.
티끌이요 없음인 나는 십자가 뒤로 감추어주시고 예수만 드러나는 삶으로 인도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잠 15:1-15
제목 : 하나님 앞에서는 스올과 무저갱조차 숨길 수 없습니다.
1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2 지혜 있는 자의 혀는 지식을 선히 베풀고 미련한 자의 입은 미련한 것을 쏟느니라.
3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
4 온순한 혀는 곧 생명나무이지만 패역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
5 아비의 훈계를 업신여기는 자는 미련한 자요 경계를 받는 자는 슬기를 얻을 자니라.
6 의인의 집에는 많은 보물이 있어도 악인의 소득은 고통이 되느니라.
7 지혜로운 자의 입술은 지식을 전파하여도 미련한 자의 마음은 정함이 없느니라.
8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9 악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공의를 따라가는 자는 그가 사랑하시느니라.
10 도를 배반하는 자는 엄한 징계를 받을 것이요 견책을 싫어하는 자는 죽을 것이니라.
11 스올과 아바돈도 여호와의 앞에 드러나거든 하물며 사람의 마음이리요?
12 거만한 자는 견책 받기를 좋아하지 아니하며 지혜 있는 자에게로 가지도 아니하느니라.
13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
14 명철한 자의 마음은 지식을 요구하고 미련한 자의 입은 미련한 것을 즐기느니라.
15 고난 받는 자는 그 날이 다 험악하나 마음이 즐거운 자는 항상 잔치하느니라.
* 나의 묵상
(대하 16:9)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어 행하였은즉 이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
역대하 16:9절의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유다 왕 아사에게 선견자 하나니를 보내서 당신의 말씀을 전한 내용이다.
유다 왕 아사는 처음에 왕의 자리에 올랐을 때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는 자였다.
유다 땅에서 남색하는 자를 쫓아내고 조상들이 만든 우상을 없앴으며 그의 할머니 마나가가 만든 아세라상을 찍어 기드온 시내에 불사른 후에 할머니 마아가의 태후의 위를 폐하였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성결한 삶을 살고자 하였으나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이 계속되자 아사는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아람 왕 벤하닷을 의지하여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는 성전 곳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금을 모두 아람 왕 벤하닷에게 주면서 부디 이스라엘 왕 바아사와 맺은 약조를 깨트려서 바아사가 우리를 떠나게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이에 벤하닷은 아사 왕의 말대로 이스라엘을 치자 그들이 유다를 떠났다.
유다 왕 아사는 북이스라엘이 유다 땅 라마에서 구축하던 진이 중단되자 사람들에게 그 돌과 재목들을 가져오게 하여 베냐민의 게바와 미스바를 건축하였다.
아사는 이렇게 유다의 왕으로 41년간을 치리하였다.
그의 통치 말년에 발에 병이 들었다고 성경은 기록한다(왕상 15:23).
그런데 이 일을 병행본문인 역대하 16장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대하 16:12) 아사가 왕이 된 지 39년에 그의 발이 병들어 매우 위독했으나 병이 있을 때에 그가 여호와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원들에게 구하였더라.
이뿐 아니라 유다 왕 아사가 북이스라엘 왕 바아사와 싸울 때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아람 왕 벤하닷을 의지한 것으로 인하여 선견자 하나니가 충고를 하였다.
그것으로 그는 분이 가득하여 하나니를 옥에 가두고 백성들을 학대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사람은 하나님께 칭찬을 들을 정도로 시작은 좋았으나 그의 위세가 높아지자 곧 하나님보다 사람을 의지하는 자로 돌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 교회 장로님의 말을 빌리자면 한국에서 사업을 할 때 베트남에 함께 가면 온전히 도움을 주겠다고 확약을 했던 사람들이 정작 베트남에 왔을 때는 아무도 도움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베트남에서 사업을 시작할 때 정말 많이 힘들었노라고 하셨다.
그 사람들만 믿었다면 도중에 사업을 접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사 왕과 같은 이들은 자기들이 잘 나갈 때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좋고 견고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기들의 입지나 위상이 단단해지고 높아지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 자기를 믿는 믿음과 하나님보다 주변의 사람을 믿는 경향이 농후해진다.
그 때 하나님은 그런 자를 심판하신다.
여기서 심판이란 그를 진멸하는 것이 아니라 징계하시는 것이다.
그를 잠깐 환난과 곤고를 주신다.
다시 말하면 아사 왕에게 발병을 주신 것처럼 말이다.
그런 환난과 곤고를 통하여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되는데 아사는 끝까지 하나님을 찾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그를 악인이라고 설명한다.
물론 아사가 구원을 받았는지 못 받았는지는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실 우리가 판단할 영역이 아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일은 오늘 우리 교회에 하시는 하나님의 선언적 가르침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말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이 가신 그 길을 따라가면 된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창세전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아버지의 생명을 받아 나셨다.
(요 5: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신 그리스도는 말씀으로 나셨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그렇게 태어나신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라고 선언한다.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말씀이 온 세상을 창조하셨다.
그에 의하여 창조된 피조물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
(요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이렇게 온 세상을 지으신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자기 땅 곧 세상에 오셨다.
하지만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였고 백성들은 그를 영접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런 자들 중에 그를 영접한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창세전에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들이다.
그래서 어둠에 속한 자들 중에 빛에 속한 자들이 있는 것이다.
그들이 바로 아들을 영접한 자들이다.
이들은 자기들의 의지나 결단으로 예수를 주로 영접한 자들이 아니다.
온전히 창세전에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하다.
따라서 예수를 주로 믿는 믿음은 어떠한 경우도 나를 자랑할 수 없다.
내가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를 택하신 하나님은 나를 선악 간에 분별하신다.
원래 사람은 선악을 분별할 줄 아는 자가 아니었다.
그저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감사함으로 받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뱀으로 위장된 마귀의 꼬임에 빠진 하와와 아담이 하나님처럼 되어 선악을 분별할 줄 알 것이라는 말에 홀딱 넘어가버리고 만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처럼’이라는 말은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하며 선악을 분별할 줄 아는 것이 위대한 일인 양 우리의 마음까지도 빼앗아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아담 이후 모든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들이 되어 끊임없이 이 땅에서 선악을 분별하고 있는 것이다.
선과 악,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역이다.
그런데 젊은 율법사를 비롯하여 유대인들이 계속해서 예수님께 나와서 어떤 선한 일을 하여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묻는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선한 일을 왜 내게 묻느냐고 하시면서 선한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시라고 대답하신다(마 19:16-17).
서두에서 논했던 유다 왕 아사는 자신이 선한 일의 판단자가 되어 이 정도면 나도 괜찮은 사람이며 선한 자라고 판단한 것 같다.
어느 정도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을 무렵 그에게는 자기도 모르게 교만함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보다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니라 아람 왕 벤하닷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것이 하나님께는 심판을 자초하는 꼴이 되고 만 것이다.
그리하여 늘그막에 발에 병이 나고 이 또한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의사들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었다.
물론 하나님은 이런 사건화되고 목록적인 일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지만 성경에 기록하여 우리에게 가르침이 되도록 하기 위하여 목록적이며 사건화 된 일들을 기록하신다.
그것은 오늘날 교회를 위하여 주시는 말씀임을 기억할 것이다.
오늘 본문 3절과 11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3, 11 쉬운성경) 여호와의 눈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어, 악인이나 선인 모두를 보고 계신다. 무덤과 사망도 여호와 앞에는 환히 드러난다. 하물며 여호와께서 사람의 마음을 모르시겠는가?
마치 유다 왕 아사를 향하여 말씀하시는 것 같다.
하지만 아사를 넘어 오늘 교회를 향한 주님의 말씀이며 또한 나를 향한 불꽃같은 말씀이다.
11절의 스올과 아바돈은 한글개역성경에서는 음부와 유명(幽冥)으로 번역하고 있다.
음부는 죽은 자의 영혼이 가는 곳으로 여겨지는 지하 세계를 가리킨다.
그리고 유명(幽冥)은 음부보다 더 낮은 곳, 곧 무저갱을 가리킨다.
따라서 음부와 아바돈 곧 무저갱은 살아 있는 사람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으며 볼 수도 없는 가장 은밀한 장소를 상징한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는 이런 음부와 아바돈인 무저갱이라도 숨길 수 없고 드러날 수밖에 없음을 강조한다.
그런데 나는 어떠한가?
하나님 앞에서는 음부와 무저갱조차 숨길 수 없이 드러나고 말 것들인데 나는 그 불꽃같은 눈으로 보고 계시는 하나님을 마치 계시지 않는 것처럼 무시하고 외면하며 살아왔던 자임을 고백한다.
내가 지은 죄들을 낱낱이 드러내시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무에라서 이를 감추며 숨기려 했단 말인가?
이런 나는 죽기에만 합당한 자이다.
죄인 중에 괴수요, 지옥의 제일 아랫목만이 제격인 내가 아니던가?
이런 내가 무엇으로 주님 앞에 설 수 있는가?
나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 그저 두 손으로 입을 가릴 뿐이다.
오늘 욥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된다.
(욥 42:5-6)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힘입어 아버지 앞으로 담대하게 나아간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날 창세전에 택하여 주시고 아들을 통하여 새 생명을 주신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 드린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죄송하고 부끄러운 자입니다.
아사 왕이 나를 대변하는 자가 아니라 지옥의 가장 뜨거운 곳 곧 무저갱에 앉아 있는 마귀가 바로 나임을 고백합니다.
‘나’를 하나님 삼으려 했던 나야말로 죄인 중에 괴수요 마귀가 아니겠는지요?
지금 나를 지옥으로 던져 넣어도 아무런 할 말이 없는 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나를 창세전 언약으로 부르시고 주님과의 교제와 사귐의 자리로 이끌어주신 그 은혜 앞에 그저 할 말을 잃습니다.
나의 선악구조를 가지고 이 땅에서 선악을 분별하려 했던 나를 이제 선악의 판단자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선악의 객체가 되어 판단받기를 원합니다.
나의 행위나 의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 곧 아들의 의와 십자가의 공로로만 판단받기 원하오니 나를 주님 안에서 잘 죽게 하옵소서.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